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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

토니 그리피스 지음 | 미래의창
스칸디나비아

토니 그리피스 지음

미래의창 / 2006년 8월 / 239쪽 / 10,000원

1. 미운 오리새끼



스칸디나비아인의 기원은 항상 논쟁을 일으켜왔다. 언어학적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핀란드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핀란드인은 다른 성향, 가치관, 정책 등으로 스칸디나비아인과 구분되며 다른 북유럽 민족들과의 의사소통도 매우 힘들다. 스칸디나비아인은 인종에 있어서도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 영토는 광활했지만 살기 힘든 기후 조건과 지리적 고립 상태는 북으로의 이주를 어렵게 만들었고 이러한 이유로 스칸디나비아는 인종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스칸디나비아는 바이킹의 눈부신 활약으로 고립의 장벽을 허물기 전까지 유럽 다른 나라와 교역은 거의 없었다. 793년 잉글랜드를 약탈하면서 시작된 바이킹의 시대는 11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바이킹 시대는 다른 유럽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전 유럽으로 시야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동 지역은 덴마크가 주도하는 하나의 연합국가 체제로 응집력이 강화되었다가 1523년 덴마크-노르웨이, 스웨덴-핀란드의 두 왕국으로 분열하였다. 16~17세기 스칸디나비아를 지배했던 강력한 절대 왕정은 18세기 말 이후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유럽이 스칸디나비아로 눈을 돌린 것은 지리적 가치 때문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응하기 위해 대륙봉쇄에 나섰으나 영국은 나폴레옹이 함락하지 못한 항구들을 통해 교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항구들은 덴마크와 스웨덴에 있었다. 덴마크는 교역을 통해 많은 이득을 취했고, 자유주의 국가로 변모하면서 농민해방, 농지개혁 등의 발전을 이룩했다.



19세기 들어 영국이 발트 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덴마크의 해양시대는 막을 내렸다. 1801년 4월 영국 함대는 기습적으로 코펜하겐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덴마크의 군함은 코펜하겐 항구에 정박해 있었으나 선원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장비는 해체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국의 넬슨 제독은 덴마크 황태자의 항복을 받아냈다. 1807년 프랑스와 러시아가 손을 잡자 영국은 덴마크를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하고 코펜하겐을 다시 기습하여 폐허로 만들었다. 이 일을 계기로 덴마크는 프랑스 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1814년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도하고 영국에게 헬골란트 섬을 할양해야 했다.



당시 스웨덴은 영국과 손을 잡고 나폴레옹 편에 있었던 덴마크를 공격할 것을 계획하였다. 1813년 스웨덴의 칼 14세는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 공격의 선두에 섰고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노르웨이 양도를 요구하기 위해 덴마크를 침공하였다. 1814년 킬 조약이 체결되고 이에 따라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도했다. 그러나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러한 결정에 분개했고, 1814년 에이츠볼 의회를 구성하여 노르웨이가 자유 독립국가임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스웨덴은 노르웨이를 침략했고 전쟁은 1814년 모스협정으로 종식되었다. 이후 노르웨이 의회는 스웨덴과의 연정을 받아들였고 스웨덴 왕을 노르웨이 왕으로 선출했다.



2. 인형의 집



19세기 후반 스칸디나비아 각국은 각기 독특한 발전 경로를 밟아나갔다. 1948년 유럽 혁명부터 1890년대까지 스칸디나비아는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였다. 낭만적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스칸디나비아를 하나의 문화적 통일체로 만들었던 시대의 물결을 뒤로하고, 각국의 국민들은 이제 다양하면서도 고유한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덴마크의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영유권 상실은 1948년 독일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키일에서 친독일 성향의 슐레스비히-홀스타인주의자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자 독일 연방의회는 프로이센에 지원을 요청했고, 프로이센 군대는 빠른 속도로 슐레스비히를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영국, 러시아,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외교적 압력을 가했고, 1852년 정전협정이 런던에서 체결되었다. 협정에서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영유권이 인정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슐레스비히가 덴마크에 병합되는 것이 유럽의 세력균형 및 평화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강대국들의 기대가 깔려 있었다.



1852년 이후 10년간 독일 연방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독일 여론은 슐레스비히를 합병할 것을 요구했다. 1864년 2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은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진군했고 덴마크 군대는 퇴각했다. 슐레스비히 전쟁 중 범스칸디나비아주의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온 소수의 지원병들과 함께 덴마크는 외로운 전투를 해야 했다. 전쟁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독일이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전 지역의 통제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독일은 유럽의 중심 세력으로 급부상하였으며 영토의 상실은 덴마크의 민족주의자들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전쟁이 한창일 당시,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1848~1890년까지 입센은 유럽의 개혁과 노르웨이 국민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독특한 문화를 동시에 탐구했다. 그는 만약 혁명이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정신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설령 국가 개념을 훼손한다 하더라도 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그에게는 무정부주의적 분위기가 느껴졌다. 입센은 국가는 결국 그 뿌리를 드러내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도덕관념이나 예술 형식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이후 입센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깊이 몰두하여 현대사회의 허위와 부정을 파헤친 일련의 사회극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결실이 바로 1877년 발표한 <사회의 기둥>과 1879년 발표한 <인형의 집>이다. 입센이 <인형의 집>을 쓰는 동안 노르웨이 민족주의자들은 순수한 노르웨이 깃발 아래 조국을 위한 투쟁에 그가 힘을 실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입센은 이들의 요구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오히려 편견과 아집, 그리고 권위에 대한 근시안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이야말로 버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정작 모든 개인은 국가나 민족이 아닌, 자신의 깃발 아래에서 항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형의 집>은 입센의 이름을 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 속에서 여주인공 노라는 남성 우월적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정체성)'을 잃어 가는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품에 담긴 문제의식은 19세기 유럽 사회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1879년 12월 <인형의 집>이 코펜하겐에서 출판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기존의 사회 윤리에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가차없는 독설로 끝을 맺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비평가는 입센의 작품이 유럽에서 성공을 거둔 이유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체계적으로 응축하여 용기 있게 드러낸 데서 찾았다. 그의 작품에 담긴 비관주의, 무신론, 절망 이 모든 것들이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3. 뱀파이어의 시대



1890년대는 소위 뱀파이어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는 핀란드를, 스웨덴은 노르웨이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뱀파이어와 같은 존재였다. 덴마크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노동계급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라면 노르웨이와 스웨덴 노동계급의 피를 빨아먹는 가장 지독한 흡혈귀는 바로 스웨덴이었다.



1893년 스웨덴 국왕이 노르웨이의 외교부 설립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자 노르웨이 국민들은 조세를 거부하는 방법으로 스웨덴 국왕에 항의했다. 이것은 군주제와 양국 간 외교 문제에 대한 노르웨이 국민들의 항의이기도 하였다. 한편 1898년 노르웨이는 국기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고 노르웨이 국기에서 스웨덴과의 연방을 상징하는 표시를 삭제하였다. 노르웨이의 요구에 대한 스웨덴의 대응방식은 영국이 아일랜드에 대응한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스웨덴은 만약 노르웨이가 독립 요구를 중단하지 않으면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1890년대 노르웨이에 불어 닥친 뱀파이어 시대를 보여준 사람은 예술가였다. 1892년 가을, 29인의 노르웨이 예술가는 베를린 미술협회 제50회 기념 축전에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전시회 주최자는 노르웨이 예술가들을 '무정부주의적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그림을 모두 철수했다. 이 중 가장 눈에 띈 화가가 바로 뭉크였다. 생과 사,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 이 모든 것들을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그의 작품 세계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뭉크는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에 거부 반응을 보였고, 이것은 19세기 인상주의 회화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했다. 뭉크는 인상파 회화가 말하는 순간적 포착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사실 아무것도 없다고 비판하였다. 뭉크는 말보다도 그림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또한 진정한 예술가라면 자신이 보고 느낀 그대로를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당신이 술에 취한 채 사물을 바라보았다면 당신 눈에 보인 그대로 그려야만 예술가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893년 그려진 <절규>이다. 이 작품은 석양이 질 무렵 언덕을 배경으로 일순간 그를 짓눌렀던 불안과 공포, 끝없는 고독감 그리고 정신적 충격을 표현했다.



4. 트롤전쟁



스칸디나비아는 20세기 들어 새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이 시대 국제관계를 특징짓는 것은 핀란드와 노르웨이의 지속적인 독립운동이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핀란드가 민족적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최초의 기회였다. 이후 20년간 핀란드의 자치권 요구는 독립에 대한 요구로 발전해 갔다. 1901년 러시아는 위협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징집법(핀란드의 군대를 폐지하고 핀란드 청년을 러시아 군대에 편입시키는 법)을 공포하여 6천 명의 핀란드 군대를 해산시켰다. 징집법은 핀란드 의회를 무시한 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시벨리우스 같은 예술가를 비롯하여 많은 핀란드인들은 이 법안에 반대하는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핀란드는 온건파와 입헌주의파 두 파벌로 분열되었다. 온건파는 왕의 절대 권력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입헌주의파는 징집법에 대한 저항은 합법적이라고 주장했다. 두 파벌 간의 논쟁은 민족의 독립 문제를 어둡게 할 만큼 서로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다. 1903년 핀란드에서 일어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보브리코프 총독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가 파견되었다. 보브리코프는 일체의 조직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핀란드인들을 해외 추방하거나 러시아 제국 내 볼모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보브리코프는 1904년 6월 에우겐 쇼만에 의해 암살되었다. 암살 직후 쇼만은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고, 훗날 그는 핀란드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핀란드는 입헌주의 시대를 맞이하였으나 여전히 러시아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 무렵 유럽 국가들은 곧 닥쳐올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핀란드 상황을 방치하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핀란드 의회는 11월 15일 핀란드의 독립과 자치권을 결의했다. 비사회주의 계열이 중심이 된 내각이 구성되었고 12월 31일 레닌은 핀란드 첫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1920~1930년대 핀란드 정치에 있어서 근본적인 이슈는 내전이었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적위군과 독일의 지원을 받는 백위군의 싸움이었다. 그러다가 1918년 독일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는 적위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고, 백위군은 독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핀란드는 조심스럽게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핀란드 내전에서 적위군을 지원했던 러시아는 변해 있었다. 그들에게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1913년 3월 선거가 시행되고 민주적 절차가 진행되면서 계급투쟁의 열기는 수그러들었다. 1919년 7월 핀란드 의회는 공화주의적 헌법을 승인했다. 이로써 핀란드는 의회민주주의 절차에 관한 확고한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공화국으로 탄생하였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은 노르웨이 국민들을 극도의 긴장상태로 몰고 갔다. 20세기 들어오면서 노르웨이 국민들은 스웨덴과의 영사 업무 분리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노르웨이의 독립을 위한 정치 전략을 입안한 사람이 해운업자 출신의 크리스티안 미켈센이다. 그는 스톡홀름에 파견된 노르웨이 대표로 하여금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에게 노르웨이 영사업무 분리를 내용으로 하는 법안을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스카르 2세는 스웨덴 법률을 근거로 법안을 거부했다. 오스카르 2세의 결정에 따르지 않을 경우 노르웨이 내각은 사직을 감수해야 했다.



1905년 6월 미켈센은 노르웨이 정부의 공식입장(독자적 영사제도 확립을 결정하고 내각은 총 사퇴서 제출)을 발표했다. 미켈센은 오스카르 2세를 노르웨이의 입헌적 군주로서의 권능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함과 동시에 연방의 해체를 선포했다. 이로써 연방군주의 존속으로 지탱해오던 연방은 끝을 맺었다. 1905년 10월 노르웨이 왕위계승자로 덴마크의 왕자 칼이 노르웨이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칼은 왕명을 호콘 7세로 바꾸고 영국 에드워드 7세의 딸 모드와 결혼하였다. 이것은 노르웨이의 장래를 유리한 것으로 만들었다. 노르웨이는 왕의 이러한 선택이 안개 정국 속에 있던 노르웨이의 외교정책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확보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5. 간주곡



스웨덴 역사에 있어 1920~1930년대는 소위 발견의 시대였다. 20세기 스웨덴 정치제도의 기본 골격이 이 시기 동안 갖추어졌다. 경제면에서도 스웨덴은 수출증대와 더불어 기업가적 역량의 발휘로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발돋움했다. 문화면에서도 고유의 독특한 생명력을 회복했음은 물론 덴마크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분쟁과 노르웨이의 반스웨덴 자치운동, 그리고 핀란드의 반러시아 자치운동에서 나타났던 광신적 애국주의를 극복했다. 스웨덴 국민은 새로운 세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스웨덴 국민들은 적어도 외부인의 눈에는 지상낙원처럼 보이는 일련의 통치제도를 완성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소련의 비호 아래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이루었고, 이것은 사회민주주의가 앞으로는 더 이상 자본주의와 손을 잡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스웨덴의 경제기반과 사회제도는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차근차근 정비되었다. 그러나 대공황이 스웨덴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격렬한 계급투쟁이 발생했다. 1931년 5월 북부 지방의 파업 노동자들이 군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피의 사건'이 터지자 보수주의자들은 크게 긴장했다. 사회민주당은 그들의 정책방향과 정책수행능력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의심을 떨쳐버릴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1936년 스웨덴 경영자협회는 노동조합총연맹과 만나 산업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일련의 논의를 시작했다. 1938년 기본 협약이 체결되었으며 협약은 20세기 전 기간에 걸쳐 기본 골격을 유지했다. 이 협약은 정부기관인 노동시장위원회에 '제3자적 지위'를 부여하여 분쟁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상호협력이 이루어지면서 스웨덴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현격히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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