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속의 미술관
쉬즈룽 지음 | 눈과마음
책장 속의 미술관
쉬즈룽 지음
눈과마음 / 2008년 2월 / 343쪽 / 16,800원
1. 이탈리아 르네상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을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은 후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양분되었고, 그 후 476년 서로마제국이 야만스러운 게르만족의 손에 멸망당함으로써 유럽에는 암흑기라 불리는 중세시대가 도래한다. 장장 천 년에 달하는 중세에는 문화와 예술이 크게 퇴보했다. 이에 비해 강력한 왕권으로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고 있던 동부의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며 천여 년 가까이 제국을 유지해냈다. 그들은 서유럽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제국의 군주인 모하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함에 따라 비잔틴 제국의 영화도 막을 내렸다.
비잔틴 제국의 몰락은 중세시대의 몰락을 가져왔다. 비록 제국은 몰락했지만 유럽의 고대 문화를 잘 보전해왔던 비잔틴제국은 이를 유럽에 전파했고, 유럽의 르네상스가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를 거치며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가 부활하자 교회는 그림을 통해 교리를 확대할 수 있다고 여겨 줄곧 그림을 중시해왔다. 교황 그레고리 1세의 "그림이란 문맹을 위한 책이다"라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명성을 얻은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볼록렌즈에 비춰진 것처럼 확대되고 과장되어 대중에게 알려지게 마련이듯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명성을 얻자 사람들은 그를 전지전능한 신이라고까지 일컬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전거, 비행기, 낙하산. 심지어 탱크까지 그가 만든 발명품이라고 주장했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후세에 남긴 것은 뒤죽박죽인 친필 원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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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치는 독창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림을 완성하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떤 때는 한 달이 넘도록 선 하나도 긋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다 빈치의 작품 중 완성된 작품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 성당 식당에 그려진 벽화 작품으로, 최고의 종교화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림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그림의 원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림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복합적인 원인으로 그림이 조각조각 벗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최후의 만찬>은 더욱 심하게 훼손되었다. 심지어 누군가는 벽의 중앙에 작은 문을 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다 빈치의 심오한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알려진 바대로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예언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에서 보듯 예수의 말을 듣고 놀람과 의혹을 나타내는 열두제자의 표정이 매우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손에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유다가 당혹스러움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는 표정이 눈에 띈다. 그림은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 구조가 그림에 생동감과 균형감을 준다. 예수 뒤쪽으로 보이는 창문은 예수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전체적으로 그림이 밝아보이게 하는 효과를 주고, 그림 속 테이블에 깔려 있는 리넨은 그 질감이 마치 진짜 같다.
2. 북유럽 르네상스
알프스 이북 지역인 북유럽은 예로부터 문화가 낙후된 지역이어서 그리스 로마 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다. 북유럽 사람들은 좋지 못한 기후나 자연환경 때문에 이탈리아나 스페인, 프랑스인들처럼 여유롭고 낙관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했으며, 장장 천여 년 동안 계속된 중세시기에도 이들의 가톨릭교는 오래되고 신비한 고딕 문화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고딕양식의 신비로움과 현실에 대한 높은 관심은 북유럽 르네상스의 특징으로, 회화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얀 반 에이크: 유화 작품은 9세기 말에 처음 나왔지만 유화 기법을 발전시킨 것은 플랑드르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이다. 그는 피마자유, 수지(樹脂) 등을 사용해서 색을 배합했고, 이 새로운 기법으로 화가들이 좀 더 손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고 얇게 여러 번 덧칠할 수도 있게 되면서 회화의 표현력이 한층 높아졌다. 또한 기름으로 색을 섞으면 빨리 건조되지 않아 여유롭게 작업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를 가리켜 '유화의 발명자'라고 부른다. 에이크의 영향을 받은 플랑드르 화가들은 색을 섞는 데 쓰는 기름의 성질에 주목하고 그 질감을 효과적으로 살리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 같은 전통은 네덜란드의 할스나 렘브란트에게까지 계승되었다.
3. 바로크 미술
바로크 미술의 탄생 배경에는 신교와 구교 간의 갈등이 있었다. 루터가 제창한 신교는 교리상으로 구교와 완전히 달랐다. 신교는 "인간은 오로지 성경에 입각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으므로 성직자가 중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고, 이는 로마교황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맞이한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이 직면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이라는 수단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즉 최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심과 하느님에 대한 경외감을 대중에게 환기시키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그림을 이용하고자 했고,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는 사실을 더욱 실감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등장한 것이 후세에 바로크 회화라고 불린 방대한 규모의 회화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의 5대 화가로 꼽히는 벨라스케스(Velazquez, Diego Rodriguez de Silva, 1599-1660)는 그 당시 '교양 있는 세비야 사람들의 아카데미'로 불리던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아틀리에에서 정식 회화 공부를 했다. 그곳에서 시인과 학자, 예술가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고, 이 모임은 벨라스케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시녀들>은 만년의 벨라스케스가 남긴 최고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 견줄 수 있을 만큼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림은 마르가리타 공주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캔버스에 옮긴 것으로, 장난꾸러기 공주를 따라 시녀와 시종, 어릿광대, 개 한 마리까지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방에 모조리 따라 들어왔다. 왼쪽에 붓을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벨라스케스인데 그는 펠리페 4세와 마리아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맨 뒤에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은 국왕과 왕비다. 한 시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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릎 을 굽히고 왕과 왕비에게 사죄하고 있고, 또 한 시녀는 공주에게 초상화 작업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방에서 나갈 것을 간청하고 있다. 하지만 어린 공주는 시녀의 말을 들은 체도 않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시녀들은 상황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지만 오른쪽에 있는 어릿광대와 개는 새로운 광경이 매우 마음에 든 듯 보인다. 한편 그 와중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 그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4. 로코코 미술과 신고전주의
바로크 양식은 이탈리아, 스페인, 플랑드르와 같은 가톨릭 국가로 퍼져 나갔지만 프랑스는 달랐다. 왕권을 강력하게 쥐고 있던 루이 14세가 푸생의 고전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17세기의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루이 14세의 사망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루이 14세의 뒤를 이어 5세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루이 15세는 당시 나이가 어리지만 섭정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친정 후에도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국사를 스승인 플뢰리에게 맡기고는 주색에 빠져 지냈다.
향락에 물든 국왕 때문에 정치 활동의 중심도 궁에서 살롱으로 옮겨졌고, 프랑스의 정치와 예술 등은 전반적으로 궁에서 살롱으로 옮겨졌다. 때문에 프랑스의 정치와 예술 등은 전반적으로 여성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에서 유행한 것이 바로 로코코 양식이다. 로코코 양식은 섬세하고 우아한 특성이 있다. '로카유(Rocaille)'라는 프랑스어에서 나온 '로코코'의 원뜻이 돌이나 조가비 따위로 만든 장식이라는 것을 보아도 그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섬세하고 우아한 특성은 회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양식의 회화는 다분히 여성적인 색채가 주류를 이루었고 정교하고 세밀한 표현이 중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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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 부셰: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는 로코코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다.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수년 동안 궁정 수석 화가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부셰는 주로 신화의 사랑 얘기를 모티브로 한 회화 작품을 많이 남겼다.
<목욕하고 나오는 다이애나> 역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
기'에서 소재를 따온 작품이다. (여기서 다이애나는 아트테미
스의 영어식 이름이다) 사냥꾼 악타이온은 숲에서 우연히 사
냥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사실
을 안 아르테미스는 분노에 휩싸여 악타이온을 사슴으로 만들
어버리고 사슴이 된 악타이온은 결국 자신이 기르던 사냥개들
에게 잡아먹힌다. 그러나 부셰의 그림에는 사냥꾼 악타이온도 사냥개들도 보이지 않고, 그저 젊은 여인들만 등장할 뿐이다. 여신은 유연한 모습의 젊은 여인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여체가 내뿜는 아름다운 매력에만 집중하게 된다. 부셰는 전체적인 조화보다 여인이 발을 내려다보는 모습과 같은 세부적인 묘사에 더욱 중점을 두었는데 이것은 로코코 회화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5.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1820년대에 들어서서 신고전주의 회화는 낭만주의 회화의 강한 도전을 받게 된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결은 사실 선과 색채, 이성과 감성, 안정성과 역동성의 대결이었는데, 이 대결은 결국 낭만주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1814년 부르봉 왕조가 다시 부활함에 따라 프랑스 혁명의 '자유 · 평등 · 박애' 정신은 소멸되었고 프랑스 지식 계층은 예술 창작을 통해 마음속의 울분을 털어버리고자 했다. 정적이고 사회 현실과 무관했던 신고전주의 회화는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으므로, 보다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들라크루아: 들라크루아(Delacroix, 1798-1863)는 화려하고 과감한 색으로 자유롭게 화가의 감정을 표현했고, 낭만주의를 정점으로 끌어올린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곧잘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와 비교되어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는 비교적 함축적인 색이 사용된 반면,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색채가 화려하고 강렬하다. 여인들의 풍만한 몸매는 루벤스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두 그림 모두 매우 극적인 순간을 담아냈지만,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 인물이 감정을 극대화하여 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데 비해 다비드가 그린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억제하고 있다. 다비드의 그러한 경향에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고대 로마인들의 이념이 깊이 배어 있다. 더욱 중요한 차이는 들라크루아가 평형을 파괴해 동적인 느낌을 살렸다면 다비드의 그림에는 비례와 구도가 평형을 이루어 전체 화면이 정지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 예전에는 고전주의든 낭만주의든 회화라면 반드시 현실 생활을 초월하는 정신적 이념을 표현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때문에 고전주의 회화는 '이념의 아름다움'을, 낭만주의 회화는 '현실의 정신적 가치'를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830년대에 들어서자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의 실증주의가 성행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객관적인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회화에서 사실주의적 목소리를 가장 처음 낸 것은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로, 그는 사실주의 회화의 창시자가 되었다.
프랑스 사실주의 회화에서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는 쿠르베보다 훨씬 대중적이고 지명도가 높은 화가다. 특히 그는 농민을 소재로 삼은 최초의 프랑스 화가로서, 브뤼겔과 자주 비교되고는 한다. 북유럽 르네상스시기에 브뤼겔이 현실 생활을 주제로 한 회화를 그렸다면 밀레는 프랑스의 사실주의 회화를 그렸다. 같은 농민을 그리면서도 농민에 대해 강한 우월감이 나타나 있는 브뤼겔과 비교해보면, 밀레는 농민을 희화화하거나 비웃지 않고 그들의 삶에 깊은 동정을 보내며 작업에 임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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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그림 <이삭줍기>를 본 프랑스 작가 롤랑은 이삭을 줍고 있는 세 여인을 프랑스의 '삼미신(三美神)'이라고 칭했는데, 이 말에서 우리는 회화의 거대한 변혁을 느낄 수 있다. 수확이 끝난 밀밭에서 세 명이 여인이 떨어진 보리이삭을 줍고 있는 이 그림에는 숲과 계곡에서 뛰어다니는 아름다운 여신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의 낯익은 광경과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깊은 감동을 준다. 그림 맨 왼쪽에 파란 머릿수건을 쓴 여인이 이삭을 주우며 허리가 아파 한 손을 허리에 올리고 있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보는 사람의 공감을 자아낸다. 그림은 모두 따뜻한 색으로 칠해져 강한 대비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