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이야기
아서 I. 밀러 지음 | 푸른숲
블랙홀 이야기
아서 I. 밀러 지음
푸른숲 / 2008년 3월 / 539쪽 / 25,000원
제1부 별의 죽음에 관한 논쟁
스물네 살 인도 과학자의 위험한 아이디어
1935년 1월 11일 금요일, 피카딜리 근처 벌링턴 하우스에서 영국천문학회의 기념비적인 모임이 있었다. 겨우 45분만에 끝난 이 모임에서 두 남자의 삶이 영원히 바뀌었고, 그 결과로 천체물리학은 30년 이상이나 후퇴하게 되었다. 100명이나 되는 유명한 회원들이 그 홀에 모여서 흥분한 상태로 떠들고 있었지만 누구도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저녁 6시 15분에 스물네 살의 앳되고 숫기 없는, 인도출신의 케임브리지 천체물리학자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가 등장하여 거의 5년 가까이 무시되어오던 자신의 극적인 발견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찬드라가 말한 내용은 완전히 새로웠고, 과학계에서 이미 받아들여진 온갖 학설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표가 눈살 찌푸림과 비판, 심지어는 공공연한 반대를 받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학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아주 많은 것이 여기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어떤 과학 토론에서도 자기 의견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그는 나이보다 성숙했고, 천체물리학을 아주 잘 알았다. 찬드라의 위대한 발견은 다름 아닌 우주의 최종 운명에 대한 것이었다. 별들은 그 연료를 다 태우고 나서 생애 마지막에는 무엇이 될까? 천체물리학자들은 별들이 쪼그라들어 하얀 난쟁이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작고 밀도가 높아서 질량은 태양과 비슷하지만 크기는 지구보다 작은 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찬드라는 몇 년 전에 이미, 그러니까 1931년과 1932년에 두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검토한 문제는, 아서 스탠리 에딩턴이 이미 1926년에 출판한 영향력 있는 논문「별들의 내부 성분(The Internal Constitution)」에서 제기한 것이다. 그렇지만 젊은 인도인의 연구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찬드라가 1931년 하얀 난쟁이별에 대해 처음으로 짧은 논문을 발표할 때는 스무 살이었다. 그것은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할 때 이미 완성되었지만 고치거나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두 번째 논문에서 그는 이것을 다듬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래도 과학계는 관심조차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격려해주지 않았다. 에딩턴은 물론 지도 교수인 랠프 파울러(R. H. Folwer)도, 새로 친구가 된 옥스퍼드의 라우즈 볼 수학 교수(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수학과의 수석 교수직 가운데 하나-옮긴이)이던 에드워드 아서 밀른도 그랬다. 그들은 젊고 순진한 사람이 어리석게 극단적인 견해를 출판하는 일을 막으려 했던 것일까? 학문적인 질투심 때문에 과학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보호하려했던 것일까? 아니면 찬드라의 피부색 및 출신 인종과 관련된 또 다른 재앙의 인자가 있었던 것일까? 오늘날 이런 종류의 생각은 금기지만, 당시는 아직 영국 식민지 정부가 인도를 통치하던 시절이고,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내적인 우월함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제국주의적인 생각에서 식민지 출신 젊은이에게 학문적으로 정복당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그래서 그가 자기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은 것일까?
천체물리학계에서 경쟁하는 거인들
아서 스탠리 에딩턴은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소네트의 제곱근을 낼 수 없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품성은 어떤 상징들로 측정해낼 수 없다." 에딩턴의 초상화는 그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드러내주지 않는다. 꼿꼿한 자세,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운 눈길, 둥글게 솟은 앞이마, 긴 코, 미소가 없는 입술은 그 옛날 케임브리지에 있던 남자, 곧 뉴턴 경의 분광기 같은 표정을 생각나게 한다. 찬드라는 에딩턴이 에드워드 시대 영국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느꼈다. 누구나 사물의 거대한 도식 안에서 자기들이 차지하는 위치를 잘 알고 있고, 또한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적인 삶의 권리를 완전히 확신하던 시대의 인물이라고 말이다. 에딩턴은 매우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쓴 책은 기술적인 것이든 대중적인 것이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문학을 원어로 인용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는 탁월한 체스 경기자였고 《타임스》의 낱말 풀이 퀴즈의 달인이었다. 모눈 사이로 펜을 슥 스치면서 문제를 모두 풀었다. 강의실에서는 매우 지루한 선생이었는데도 대중 연설가로 이름이 높았다. 미국의 물리학자 윌리엄스(W. H. Williams)는 1924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에딩턴과 두 달 동안 함께 썼던 인물인데, 자신은 "가장 심각한 형식의 영국식 비사교성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썼다. 하지만 그들은 둘 다 골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후로 일주일에 두 번씩 클레어몬트 클럽에서 골프를 쳤는데, "아마도 그 코스에서 이루어진 가장 형편없는 골프"였을 것이다. 그는 또한 에딩턴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팬이고, 사람을 즐겁게 하는 엉터리 시구를 만들어내곤 했다고 말한다.
에딩턴은 '정상을 꿈꾸는'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지던 세계에 살았다. 옥스브리지의 명사들은 거의 수도사 같은 단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어른이 된 이후 줄곧 대학에 살면서 오로지 연구에만 자신을 바쳤다. 에딩턴의 트리니티 동료인 하디와 존 리틀우드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20세기 수학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 그룹은 수이론(number theory)에 대한 탁월한 논문들을 내놓았다. 누군가 다른 동료에게 "방금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편지를 보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논문이 뒤따라오는 식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비밀을 깊이 간직했다. 중년의 나이에 리틀우드는 자주 자기보다 훨씬 젊은 매혹적인 여성을 동반하곤 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조카라고 소개했다. 약간 눈썹을 치켜뜨는 일은 있어도 케임브리지 전통에 따라 어느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0대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리틀우드는 컴비네이션 룸(트리니티 칼리지의 임원실)에서 마침내 그녀가 실은 어떤 유부녀와의 오랜 비밀 관계에서 얻은 딸이라고 고백했다. "다음 날 그는 아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에 깊이 마음 상했다!" 그가 마음이 상했을지는 몰라도 그런 냉정함이 케임브리지의 관습과 어울렸다. 에딩턴의 시대에 대학의 명사들은 대학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아직도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인 "순전히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낭만적인 우정"이 지켜지고 있었다. "단칼에 거부하는 판단을 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하는 것이 그 시대 내내 존경받은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었다." 한 남자가 자신과 다른 남자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 이상의 것이라는 고백을 하고도 아무 일이 없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수십 년이나 더 기다려야만 했다.
링 위의 과학자들
찬드라는 도취상태에서 인도를 떠났다. 뭄바이 시가 아득히 멀어져갈 때 그는 어쩌면 19년이라는 짧은 삶 동안에 자신이 성취한 것들을 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황금의 청년기였다. 대학 과정을 마친 것말고도 그는 이미 다섯 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고, 세계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인 하이젠베르크와 조머펠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인도의 대표적인 두 물리학자-라만과 사하-는 그에게 상당한 희망을 걸었다. 라만은 이렇게 선언했다. "이 젊은이는 천재의 온갖 표지들을 보인다. 그는 분명히 물리학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는 귀국 후 프레지던시 칼리지의 교수직을 이미 보장받은 상태였다. 여행 기간 동안에는 파울러의 하얀 난쟁이별 이론을 생각하고, 고향에 남겨두고 떠나는 젊은 여인 랄리사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가야할 길에 들어섰다. 물리학의 세계가 그의 발치에 있었다. 아무도 자신의 매력에 항거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자기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근거가 충분했다. 처음 며칠 동안 바다가 거칠어서 배는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했다. 라만 삼촌의 충고는 이랬다. "가능하면 명랑하게 지내고 갑판에 머물러라. 아덴 근처에 이르면 대단히 유쾌한 항해를 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그랬다. 날씨가 좋아지자마자 찬드라는 인도인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인도인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서양 세계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이점을 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그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찬드라는 갑판 의자에 자리를 잡은 뒤 앞에 있는 또 다른 의자에 책과 서류를 수북이 쌓아 놓았다. 파울러의 1926년 논문 「밀도가 높은 물질에 대해」(이 논문에서 파울러는 에딩턴의 패러독스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와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인 아서 홀리 컴프턴(Arthur Holly Compton)의 책 『엑스선과 상대성』, 에딩턴과 조머펠트의 책들 그리고 이미 출판된 자신의 논문을 가져왔다.
바다는 조용해서 잔물결도 없었다. 광대한 하늘은 아주 푸르고 공기에는 원기를 돋우는 소금기가 섞여 있었다. 정말로 목가적인 나날이었다. 찬드라는 지난 몇 주일 동안의 분주함을 뒤로하고 평화를 되찾았다. 생각하고 계산하는 일 외에는 따로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정확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몇 달 전에 미뤄 둘 수밖에 없었던 문제, 곧 "파울러의 결론을 더욱 정교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이 결론을, 천문학자들이 측정한 별의 표면온도와 질량과 반지름을 토대로 별 내부의 온도와 압력을 계산하는 방법에 대한 현재의 생각과 합치려고 했다. 에딩턴은 『별들의 내부 성분』에서 그렇게 하는데 필요한 공식을 내놓았다. 아직 누구도, 심지어 에딩턴 자신조차도 이 방법을 하얀 난쟁이별에 대한 파울러의 새로운 이론에 적용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어쩌면 에딩턴은 자기 자신에 관한 한 파울러가 자기를 위해 하늘에 이르는 길을 반듯하게 닦아놓은 것에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몇 년이 지난 후, 찬드라는 바로 다음 순간 "누구나 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고 기본적인" 일이 일어났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 재빨리 그는 파울러의 결과가 요청하는 대로, 별의 중심부 밀도를 계산했다. 그리고 하얀 난쟁이별 시리우스B는 1세제곱미터 당 100만 그램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물보다 100만 배나 밀도가 높은 것이었다. 찬드라는 자신의 발견을 깊이 생각했다. "재미있네" 하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주 재미있어"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토록 엄청난 숫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그의 마음이 눈앞에 있는 바다의 아름다움과 함께 떠가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미국이라는 모험
찬드라의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탁월함이 마침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1월 11일의 대단한 결전이 있기도 전에 벌써 하버드 천문대 대장인 할로 섀플리가 그를 주목하고 이듬해 여름을 하버드에서 보내라고 초청했다. 찬드라는 트리니티의 특별 연구원으로서 나머지 임기를 케임브리지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었지만 이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9월의 마지막 3주일을 스코틀랜드에서 보냈다. 퍼스셔에 있는 커크마이클의 한 농장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오랜 산책과 신선한 공기, 시원한 바람 그리고 탁 트인 공간을 즐겼다. 모든 것이 원기를 맹렬히(!)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토머스 하디, 발자크 등의 문학작품에 빠져들었다. "'종이와 연필'이 없는 탓에 나는 평소보다 별들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종이와 연필은 필연적으로 복잡한 계산이라는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각에 가득 차서 그는 갑자기 "케임브리지를 향한 향수"를 느꼈다. 세상은 훨씬 더 밝아 보였다. 그 후 10월에 섀플리는 다음 석 달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우주물리학에 대한 강의를 해달라고 그에게 제안했다. 그는 이 기회를 받아들이는 것이 염려스럽기는 했지만 친구들은 대단히 흥미로울 거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1935년 11월 29일, 찬드라는 기차를 타고 케임브리지에서 리버풀로 갔다. 이튿날 그는 화이트 스타브리태니커 호에 승선하여 대서양을 건너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가는 8일 동안의 항해를 시작했다. 그는 이 기간에 입센의 희곡에 빠져 지냈다. 별들의 생애에 쏠린 관심사에서 벗어나 유쾌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었다. 배는 증기를 내뿜으며 12월 8일 일요일 정오에 보스턴 항구로 들어섰다. 찬드라에게는 놀랍고도 즐거운 일이었는데, 섀플리가 손수 선착장으로 마중 나왔다.
그는 그날 저녁 자기 집으로 차를 마시러 오라고 찬드라를 초대했다. 그곳에서 찬드라는 몇몇 뛰어난 천문학자들을 소개받았다. 그중 한 사람이 제러드 카이퍼(Gerard P. Kuiper)였다. 카이퍼는 하얀 난쟁이별을 오랫동안 관찰해왔다. 그는 "매우 밀도가 높은 별들에 대한 찬드라의 작년도 논문들을 놀라울 정도로 확증해주는 결과를 얻었다"고 말해서 찬드라는 매우 흥분했다. 당시 서른세 살이었던 카이퍼는 쌍성계, 특히 하얀 난쟁이별을 포함하는 쌍성계에 대한 연구로 이미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명왕성의 두 번째 달인 네레이드도 찾아냈다. 1951년에는 태양계가 형성되면서 남은 얼음과 파편들로 이루어진 두툼한 벨트가 명왕성의 궤도 바깥에서 움직이고 있을 거라고 예견했다. 카이퍼 벨트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얼음 덩어리가 1992년에 실제로 발견되었다. 그것은 지름이 약 100마일 정도이다. 그 이후로 그런 것이 수백 개나 더 발견되었고, 천문학자들은 수십만 개가 더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아주 기쁘게도 찬드라는 처음으로 자신의 사무실을 얻었다. 그리고 천체물리학자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즐겼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것을 "총각 클럽(!)"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는 또한 과학자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잡담 장소에서 보낸다고 불평했다. 케임브리지에서는 그런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대체로 나는 케임브리지와 영국이 더 좋다…. 이곳 천문대 연구원들이 아주 친절한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방인이다"라고 썼다. 케임브리지나 코펜하겐에서도 그랬듯이 이곳에서도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그는 자주 네루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어디에도 고향은 없고 어디서나 나그네."
한 시대가 끝나다
이제 에딩턴, 진스, 밀른, 파울러는 찬드라의 삶에서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물론 초기에 당한 치욕의 여운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지만. 1950년까지 네 사람은 모두 죽었다. 하지만 죽고 나서도 여전히 논쟁의 연기는 피어올랐다. 진스는 1946년에 예순아홉 살의 나이로 죽었다. 밀른이 <영국학술원 부고>란에 사망 기사를 썼다. 그는 그들의 삶에 그토록 뚜렷한 흔적인 남긴 타는 듯한 대립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밀른은 에딩턴이 자신의 표준 모델에 대한 진스의 비판에-밀른 자신의 염려와도 비슷한-정말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썼다. "언제까지나 오만한 에딩턴은 논쟁적인 답변을 하고는 자신의 결과만 고집했다. 당시 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진스는 부분적으로 에딩턴 연구의 마법아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에딩턴이 갖는 힘의 비밀이었다. 바로 그의 순수한 카리스마 말이다. 진스에 대해 밀른은 "수학자가 세계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세계를 정리했다." 이것은 이들 세 사람 모두에게 어울리는 서술이었다.
찬드라도 《사이언스》에 실린, 자신이 쓴 진스의 사망 기사에서 이와 비슷한 언급을 했다. 그 또한 하디가 옛날에 자기에게 해준 이야기를 회고했다. 하디는 에딩턴에게 말에 돈을 걸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에딩턴은 조소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단 한번 진스라는 이름의 말에 걸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