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그 사이의 한국
앙드레 슈미드 지음 | 휴머니스트
앙드레 슈미드 지음
휴머니스트 / 2007년 8월 / 755쪽 / 28,000원
1장 문명의 강풍이 불어오다
내우외환
조선왕조 말기의 위기는 국내적 · 국제적 정세의 반영이었다. 외부적으로는 서구의 신기술과 자본, 지식이 활발하게 유입되어 국제관계의 재인식을 촉발했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장기적인 사회 · 경제적 변화가 국가 통치권의 기반을 침식했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러한 위기감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농민 봉기의 급격한 확산은 향촌 사회에 만연한 경제적 곤란으로 인한 움직임이었으며, 유교적 통치이념에 도전한 자생적인 운동이기도 했다. 그런데 향촌에서 시작된 이 농민전쟁이 동북아 지역의 지정학적 형세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쟁을 초래하게 된다.
1894년 6월, 정부군은 농민들의 지도자로 급부상한 전봉준에게 패하자, 북경에 전보를 보내어 이 봉기를 진압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자 일본은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하고 조선의 궁궐을 점령한다. 정부를 장악한 일본은 개혁 지향적인 내각을 구성했고, 이러한 일본의 행보에 대항하기 위해 동학군이 재집결한다. 동학군의 공격이 외세의 침공에 대항하는 성격으로 전환된 것이다. 하지만 동학군은 일본군에 곧 패하고 말았고, 이듬해 봄까지 일본은 조선 각지를 장악한 데 이어 청나라 군대를 완전히 몰아낸다. 일본의 승리로 청일전쟁이 종결되면서 중국과 한국은 종속관계를 청산하게 된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은 중국에 대한 예속을 끝내기 위해 분투했던 많은 한국인들에게 환영받았다. 하지만 그 독립은 속이 텅 빈 주권일 뿐이었다.
사실상 이 시기는 동아시아에서의 이권 쟁탈 외교가 극에 달했을 때다. 미국이 철도 부설권이나 금광 채굴권을 원하든, 러시아가 삼림 채벌권을 요구하든, 그리고 일본이 어획권을 요구하든, 한국 정부는 규칙적으로 외세에 상업적인 이권을 넘겨주도록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내부에서는 동학농민운동 외에도 민간주도의 여러 민족주의 운동이 성장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의병이다. 의병의 정신적인 계보는 초기 위정척사파로 올라간다. 위정척사파는 일본에 강력하게 거부했던 세력으로, 이들은 왕에게 상소를 올리는 일 외에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군에게 무력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이들의 저항은 1911년 그 잔류세력이 만주로 쫓겨 갈 때까지도 계속되면서 일본군과 크고 작은 접전을 벌였다.
또 하나의 민족주의 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이다. 이 역시 청일전쟁 이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애국계몽운동은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을 비롯한 개화 인사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정부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그것이 쉽지 않자, 1884년 12월, 우정국 개국기념만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고종을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3일 동안 급진적인 개혁안을 선포한다. 그러나 조선정부에 의해 요청된 원세개(袁世凱)의 군대에 의해 3일 천하로 끝이 나고 만다. 주동자들은 일본으로 도망치거나 살해당했지만 일본으로 도망친 사람 가운데 몇몇은 후에 갑오개혁 기간 동안 내각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의 혼란스런 정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생각을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충격적인 사실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한국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이 한국의 주권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에 공통적인 위기감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이 러시아보다 더 큰 위험 세력이라거나 일본에게 점령당할 가능성에 대한 절박한 인식은 당시 한국의 공공 매체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때까지 신문들은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활동을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강도로, 일본으로 인해 독립국 지위를 얻을 수 있게 된 점에 대해서 감사하는 어조의 기사를 다루고 있었다.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환상적 결합
한국의 지식인들이 보기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문명의 승리였다. 즉 문명은 자강과 결부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문명개화'를 외치는 그룹들이 극적으로 증가한다. 지식인들은 다양한 글쓰기를 통해 '문명개화'를 외쳤는데, 이들이 이 새로운 메시지를 동포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장 많이 활용한 것이 신문이었다. 언론의 부흥은 <독립신문>(1896~1899)을 필두로 시작되었다. 이 신문은 미국 유학생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서재필)과 저명한 계몽가이자 기독교 신자인 윤치호에 의해 창간되었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한글신문으로 인습 타파에 가장 앞장섰으며 개혁에 대한 열망을 기독교적 메시지와 결부시켰다. 하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던 탓에 그 지지단체인 독립협회와 함께 3년 만에 문을 닫게 된다.
<독립신문>이 정간되기 1년 전에는 <황성신문>(1898~1910)과 <제국신문>(1898~1910)이 창간되었다. 그중 독립협회의 중도파들에 의해 창간된 <황성신문>은 유교 전통에 입각한 복합적인 개혁을 추구하였으며, 국한문 혼용체와 전형적인 비유를 통해 사회 개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제국신문>은 한글로 발행되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과 부녀자들에게 가장 널리 읽혔다. 가장 늦게 창간된 <대한매일신보> (1904~1910)는 어니스트 베델이라는 영국인이 사주로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신문보다도 일본의 행동에 대해 자유로운 논조를 실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베델은 2차례의 재판을 받게 되고, 결국 <대한매일신보>는 폐간되기에 이른다.
당시의 신문들은 충분한 재정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빚지지 않고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주의 운동과의 긴밀한 연대로 인한 것이었다. 신문사가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일부 독자들의 기부금 덕분이었는데, 고종 황제는 여러 번에 걸쳐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1903년 <황성신문>에는 500원을 후원했고, <제국신문>에는 2천원과 함께 신형 인쇄기를 기부하기도 했다.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던 <대한매일신보>조차 파산을 막기 위해 황제의 은밀한 보조금을 정기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신문의 재정이나 영향력은 발행부수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당시의 신문은 도시와 마을의 구술문화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신문의 논객이 묘사한 바에 의하면, '저잣거리에서는 언제나 젊은이나 백발성성한 노인이 신문을 큰 소리로 읽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신문을 돌려읽기도 했는데, 한 지방에서는 <독립신문> 한 부가 최소한 200명의 사람들에게 읽혀진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문의 역할로 인해 문명개화는 매우 친근한 메시지가 되었다. 국왕 역시 문명개화의 메시지를 넌지시 비친 바 있으며, 가장 케케묵은 유교 교육기관이던 성균관조차 교육과정의 변화를 반영하는 교칙에서 문명개화를 호소할 정도였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면, 광고주들조차 상품 선전에 '문명개화'를 이용했는데, 그것이 의약품이든 우유든 간에 그들은 '문명화된' 소비자들의 차별화된 기호를 충족시킨다는 명목으로 상품을 광고했다.
민족주의 지식인들
각 신문 필진들은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지만 민족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인식에는 항상 공감했다. 이러한 인식에 의해 '국민'이라 불리는 시민의식이 창출된다. 국민은 국력의 기초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민족 개조를 향한 연대에 참여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계급차별이 없어야 했다. 당시 대중적 명성을 얻은 백정 박성춘의 예는 이러한 의식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 독립협회 구성원들이 정부의 개혁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때 박성춘이란 자가 나서서 연설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백정출신임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계급차별이 허위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했다. 그리고 국가개혁을 위해서는 백성과 관료가 함께 뜻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비천한 계급으로 취급받은 백정들까지도 민족의 성원에 포함됨으로써 모든 백성이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계급에 대한 개방성은 성적 차별에도 적용되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한국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쟁점이었다. 따라서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성 교육이 급부상했으며, 명성을 얻은 여성들의 자기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인용되었다. 신문 필진들은 여성독자들의 편지를 환영했으며, 여성의 업적을 차곡차곡 기록해나감으로써 민족주의 운동의 포용적인 이미지를 선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포용성에 대한 요구는 개혁가들의 자칭 '지도자적 위치'에 의해 다소 절제되었다. 계몽에 관한 유길준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같은 개혁가들의 역할이 서구의 문명화된 지도자들의 역할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공식은 자칭 계몽의 수호자들 스스로를 보통 사람들과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을 위해 쓴 유길준의 교과서 《노동야학독본》의 표지 그림은 민족주의 개혁가들의 그러한 이중적 태도를 잘 포착하고 있다. 표지를 보면 유길준이 한 백성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길준은 문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프록코트에 콧수염을 기르고 모자를 벗어들고 있으며, 백성은 흰 무명옷에 고개를 약간 앞으로 구부린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꼿꼿한 직립자세로 신체의 정면을 보여주는 유길준의 모습과 대비된다. 이 책이 비록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초점은 지식인 유길준에게 맞춰져 있는 셈이다. 물론 많은 백성들이 지식인들의 계몽과 설득의 노력에 감화되고 고마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민족을 위한 '유일한 목소리'가 되기를 원했다.
2장 탈중화와 동양의 재편
중화주의의 탈피와 정체성
'문명'의 헤게모니가 중국에서 서양으로 넘어가면서, 한국에서 청산해야 할 문화적 잔재는 당장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권력이 아니라 오랜 이웃이던 중국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적'인 것으로 밝혀진 문화적 형태들이 대거 분리수거 되었고, 그 어떤 쟁점들보다 '글쓰기 방식의 전환'이 활발해졌다. 그 일환으로 한글을 국문으로 격상시키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드러났는데, 사실 한국의 엘리트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때부터 강한 거부감을 보여 왔다. 그들의 논리는 문자와 지식은 서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고전이야말로 모든 진리의 원천으로 간주되었고, 그러한 경전들은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자를 포기한다는 것은 지식을 향한 입구 자체를 막아버리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서구의 새로운 지식이 열강의 총과 자본과 함께 유입되면서 지식과 한문의 특권적 관계는 점차 도전받게 되었다. 이제 영어든, 일본어든, 한글이든 어떤 표기 체계라도 새로운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렇듯 문자와 지식의 상관관계가 새롭게 규정됨으로써 한글은 민족성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권리를 쥐게 되었다. 하지만 한문 역시 보수적인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민족주의적 논리에 의해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한글의 전파라는 거대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신문과 잡지들은 한글로만 표기되지 않았다. <황성신문>은 발간 후 13년 동안 글쓰기 개혁의 문제를 수없이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한글로 된 사설을 싣지 않았다. 이러한 모순에 대해 <황성신문>은 "좀 더 보수적인 지식인 계급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언어로 글을 써야 한다"고 변명했다. 사실 탈중화에 대한 모든 개혁이 깔끔하게 한국과 중국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는 다른 수많은 부문에서도 나타났다.
국왕에서 황제로
청일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일본인들이 민비를 시해하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왕실의 위엄이 심각하게 손상되자, 왕실의 위엄과 권력을 되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청나라의 연호가 폐지되고 한국의 연호로서 '건양'이 채택되었다. 또한 중국 사신을 환영하는 의미로 세워져 있었던 '영은문'과 같은 기념물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조공을 바치는 나라의 군주를 낮추어 부르는 의미였던 '왕'이라는 칭호도 제국의 '황제'로 바뀌었다.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제천의식을 치른 후에, 왕을 상징하는 붉은 예복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국왕이 황제로 격상되면서 조선의 명칭도 대한제국으로 격상되었다.
어떤 측면에서 왕이 황제로 격상된 이 왕좌의 재발명은 한국의 주권이 명백히 한반도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들을 둘러싸고 충돌이 일어났다. 민족주의 운동가들이 보기에 이러한 왕실의 개혁은 철 지난 제의와 상징들을 이용하여 군주의 권력을 재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누가 민족의 대의를 가장 적절하게 대표하는가의 문제를 둘러싼 경쟁적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1898년 11월,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항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내각 대신들이 보기에 이러한 저항은 감히 주제넘게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공화국 건설을 도모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보부상들의 연합인 황국협회의 불량배들로 하여금 독립협회 회원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독립협회는 철폐되고, <독립신문>도 폐간되기에 이른다.
사라져버린 한국과 동양의 문명
지식인들은 서양의 진보성을 도입하기 위해 '문명'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동양의 열등함'을 부각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며, 그 일환으로 '동양'이라는 새로운 지역공동체의 인식이 대두되었다. 그것은 어느 분야이건 서양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과거의 개화된 동양의 정신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장 분명한 입장을 내세운 주인공이 바로 <황성신문>이었다. <황성신문>은 유교윤리를 포함한 고전적인 용어 및 은유를 지속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동양에 대한 문화적 개념을 규정했다. 그들은 특히 유교경전의 오래된 표현인 '격물(格物)', 즉 '사물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동양의 문명을 설명하고자 했다. 서양은 부지런히 우주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여 증기선과 전신, 철도 등을 발명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지만, 한국은 사물에 대한 탐구를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바람에 국가의 자원을 적절하게 이용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황성신문은 '문명'이라는 개념을 동양의 기원에 적용함으로써 문명화라는 개념에 붙은 서양의 꼬리표를 떼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민족의 고유성마저 이웃 국가들과 공유하는 초월적인 정체성으로 수렴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황성신문>은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문명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문명화에 대한 기준이 과거에 던져졌을 때, 그것은 쓸모 있는 과거여야 했고, 또한 중국과 거리를 두면서 고전을 인용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 역시 한국과 동양의 역사를 완전히 재해석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을 초래했다. 게다가 동양에서 일본이 중국의 입지를 대신하게 되면서 고전 중심의 문화 개념은 점차 설득력을 잃어갔다. 이로 인해 <황성신문>에서 동양에 대한 논조는 점점 사라졌고 '동양론'은 다른 식으로 반영되게 되었다.
동양의 평화와 화합을 부르짖는 인종담론들
20세기에 접어들자 지식인들은 '인종(ethnic)'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세계의 인종'을 황색, 백색, 흑색, 갈색, 적색의 다섯 인종으로 분류했다. 그중 황인종이라는 개념이 동아시아를 둘러싼 몇몇 집단을 나누는 준거로 작용하면서 서양 백인들의 제국주의에 대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