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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열전- 황제

샹관핑 지음 | 달과소
중국사 열전- 황제

샹관핑 지음 / 차효진 옮김

달과소 / 2008년 1월/ 491쪽/ 20,000원

1. 선정을 베푼 제왕들



부모 형제라도 공정하게 법을 시행한 제왕

제왕의 친척과 외척은 종종 법률의 구속을 받지 않는 특수한 사람들이다. 우둔한 군주가 제위에 오를 때마다 이들은 항상 위를 기만하고 아래를 능멸하며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 결과 왕조에 끊임없는 분란과 화를 가져왔고, 제왕 본인에게도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현명한 제왕들은 황제 일가의 위법행위에 대해 차별을 두지 않고 엄중하게 처벌하였다.



명 태조 주원장의 친척들에 대한 결연한 자세는 유명하다. 그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민간이 차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때 주원장의 사위인 구양륜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차를 밀매하고 이를 조사하는 관리를 모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화가 난 주원장은 황후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양륜을 참수하였다. 이 사건은 조정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또한 주원장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친인척들은 이후로 행동을 극히 조심했으며, 차의 불법 매매는 막을 내렸다.



수의 문제 양견은 중원 통일에 큰 공을 세운 셋째 아들이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법을 어겨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키자 매우 화가 나서 모든 관직을 삭탈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신하들이 너무 가혹하다며 어명을 거둘 것을 주청했지만 그는 끝내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다섯 아들의 아버지로 만약 내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면 어느 아들이 법을 지키겠는가?" 양견은 법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이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시대의 제왕에게는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오대십국 시기 오월의 시조 무숙대왕 전류는 외척들을 매우 엄격하게 대했다. 그는 정비를 매우 총애하였는데 정비의 부친이 큰 죄를 저지른다. 전류는 엄중히 처벌하기로 마음먹지만 신하들은 그가 정비를 총애함을 알고 정비 부친의 허물을 덮어주는데 급급했다. 이에 화가 난 전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어찌 나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가!"라며, 좌우에 어명을 내려 정비의 부친을 곧바로 참수했다. 뿐만 아니라 정비도 같이 죽였다. 혼란스런 시기에 오월이라는 이 작고 작은 왕조는 70년이나 계속되었는데, 이는 그가 국법으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간언을 잘 받아들인 제왕

봉건왕조에서 성세를 연 제왕들은 간언을 중시하였고, 이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당 태종 이세민이다. "제왕은 천하를 지배하는 사람이나 결점 없는 존재가 아니기에 간언이 필요하다"는 그의 생각은 통치기간 내내 유지되었다. 서기 630년 이세민은 병사들을 징발하여 건원전을 짓도록 하였다. 대신들은 이를 국민을 혹사시키고 물자를 낭비하는 일로 여겼다. 이에 장현소가 상소를 올려 "후세에 커다란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다"라고 간언 하였다. 이세민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생각지 못한 것인데 이렇게 된 것이었구나"라며 건원전 공사를 중단시키고 비단 오백 필을 하사하여 그의 간언에 대한 표창을 하였다.

후당의 이존욱도 간언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찬양할 만하다. 그는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여 백성들의 밭을 짓밟는 일이 허다했다. 이는 모든 대신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어느 날 그가 사냥을 나갔을 때 하택이라는 신하가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이존욱의 앞을 막고서 간언을 올렸다. 하택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존욱은 화를 거두고 기쁘게 사냥을 중단하였다. 이존욱은 통치기간 중에 쓸데없이 공신들을 죽이거나 적합하지 않는 상벌을 하는 등 종종 실수를 저질렀으나, 동시에 신하들의 간언을 잘 받아들여 사냥으로 백성들의 밭을 망치는 것을 멈추었으니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간언에 대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제왕이다. 어느 날 그가 새를 잡고 있었는데 어떤 대신이 급한 일이라며 보고를 올렸다. 들어보니 별로 급한 일이 아니어서 따져 묻자 대신은 "새를 잡는 것보다 급한 일이라 생각됩니다"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격노한 조광윤은 도끼 손잡이로 대신의 입을 때려 치아 두 개가 부러져 버렸다. 대신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치아를 주웠다. 이를 보고 조광윤이 물었다. "부러진 치아로 나를 고발하려는 것이냐?" "소신이 폐하를 고발할 수 없으나 사관들은 당연히 사건을 사서에 기록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대신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조광윤은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에 유감의 뜻을 표하고 상금으로 비단을 하사하였다. 이 사건 뒤로 조광윤은 대신들의 건의와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였다.



사람을 잘 알아보고 쓰는 제왕

출신에 의해 사람을 선택하고 쓰는 것은 인재를 억눌러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왕조시대의 폐단이다. 이 때문에 우매한 제왕은 많은 인재를 잃었다. 그러나 현명한 제왕은 필요하다면 가문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대담하게 기용하여 역사에 미담을 남겼다. 한무제 유절은 재능 있는 인재를 출신가문에 상관없이 기꺼이 받아들여 임용하였다. 위청, 곽거병 등이 바로 그들이다.



노비 출신이었던 위청은 누나인 위자부가 유절의 후궁이 되면서 궁중에 들어가게 된다. 유심히 위청을 보아오던 유절은 그의 성품이 소박하고 성실하여 나중에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태중대부에 임명한다. 위청은 후에 전한왕조의 유명한 장군이 되었는데 흉노를 토벌하는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위청의 생질 곽거병도 노비였다.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익숙했던 그는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를 토벌하는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흉노의 주 세력을 격파하여 한군 최고의 통솔자가 되었다. 당시 계속되던 흉노의 침입으로 골치를 썩던 한 왕조는 위청과 곽거병 이 두 사람의 용기와 계략으로 위기를 넘기고 크게 발전하게 된다.



송 태조 조광윤 또한 인재의 발견과 사용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는 재능은 출중하나 이력이 낮은 사람을 선발해 중책을 맡겼고, 동시에 그들의 장점과 재능을 기억해 두었다가 관직에 공석이 생기면 기억해 두었던 관리들의 장단점에 의거해 알맞은 사람을 임명했다. 그는 중용한 인재를 매우 존중하였다. 특히 개국공신인 재상 조보를 매우 신임하여 큰일이 있으면 항상 조보와 상의하였고, 심지어 밤길에 조보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보는 집에서도 의관을 감히 벗지 못했다. 제왕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신임하는 사람 앞에서는 잘난 체 하지 않고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였다. 때문에 조광윤의 주위에는 인재가 수두룩했으며, 이들과 함께 중원을 통일하는 위업과 송 왕조를 건립할 수 있었고, 중국 역사상 손가락에 꼽는 현명한 제왕이 되었다.







2. 놀기에 바쁜 제왕들



술을 목숨처럼 여기는 제왕

술은 제왕에게 있어 어떤 음료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하나의 향락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일단 술에 빠져 자제가 안 되면 총명한 제왕도 이성을 잃고 방탕하게 변한다. 술로 인해 품었던 큰 뜻을 잃고 죽음에 이른 역사의 예가 적지 않다. 북제의 건립자 무선제 고양이 전형적인 예이다. 고양은 건립 초기에는 법을 정비하고 적극적인 치세를 펼쳤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되자 술에 빠져 제 멋대로 행동하고 난폭해졌다. 그는 술에 취하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혼자 춤추고 노래하며 온 밤을 지새웠다. 음탕한 여자를 모아놓고 구경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알몸을 드러내고 밖으로 걸어 다니기도 하였다.

이것뿐만 아니었다. 술에 취하면 황후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고 부녀자를 간음하였다. 일단 그의 눈에 띄면 친족이라 할지라도 모욕을 면치 못했다. 또한 술에 취해 사람 죽이는 것을 장난으로 여겼고, 죽은 자가 많으면 불로 태우고 물에 던지기도 하였다. 한번은 고양이 "온종일 술을 마시니 정말 즐겁구나"라고 말하자 한 신하가 "큰 즐거움 뒤에는 큰 고통이 있습니다"라고 한탄하였다. 고양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신하는 "음주로 나라가 망하고 스스로 죽은 것을 깨닫지 못하니 이것이 큰 고통입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지나친 음주로 인해 고양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고 나중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오직 술만 마시다가 죽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31세였다.



술을 탐하다 아예 조정대사를 내팽개친 제왕들은 나중에 사람들에게 폐위되어 죽기도 하였다. 전진의 역왕 부생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음주에 빠졌다. 태만하여 정사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온종일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또한 취중에 대사를 결정하고는 나중에 이를 시비 삼았으며, 한밤중에 술에 취해 시찰을 나가 살육을 저질렀다. 한번은 조정대신들과 연회를 베풀다가 상서령 신로가 권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그를 활로 쏴 죽였다. 이에 문무백관들은 두려움에 떨며 술을 따라 연거푸 마셔댔다.



또한 그는 시종의 얼굴 가죽을 벗겨내고는 그에게 노래하며 춤 출 것을 명령하기도 하였다. 대신들이 옆에서 재미있다고 말하면 아첨한다고 죽였고,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하면 불충하다고 죽였다. 부생의 이 같은 악행은 대신과 황실의 강력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결국 부생의 사촌 동생 부견이 병사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돌진하였다. 병사들이 부생의 침실에 들이닥쳤을 때도 그는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부견은 병사들에게 명하여 술고래를 끌어내 가둘 것을 명하고 폐위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부견은 제위에 오른 얼마 후 부생을 제거하였다, 죽기 직전에도 이 무뢰한은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2세였다.



천성이 잔인한 제왕

역대 제왕들 중에는 잔인한 폭군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승냥이처럼 잔인한 성격을 가졌으며 너무나도 악독했다. 인간성이 심각하게 비뚤어져 버린 이들은 늘 타인의 생명을 한낮 초목처럼 여겼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들이 사용했던 형벌의 가혹함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리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유송 왕조의 황제 유욱은 즉위할 때 만 10살이었지만 심성은 아주 잔인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신하는 무조건 때렸으며, 맨발 바람으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게 하였다. 또한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넘어가지 않았고, 늘 형벌 도구들이 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형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는데 집게나 망치, 송곳, 톱 등이 손에서 떨어질 날이 없어 머리를 깨거나, 몸을 뚫거나, 심장을 파내 죽인 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이나 되었고, 늘 질퍽한 피범벅 속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그가 외출을 할 때면 부하들이 창을 들고 따랐는데 행인과 남녀는 물론 개와 말, 소 등의 짐승들도 그와 마주치면 살아남지 못했다. 유욱은 포악무도한 성격으로 인해 5년 동안 황제자리에 있다가 결국 부하에 의해 침실에서 살해당했다.



후세에게 욕을 먹는 살인마들은 종종 호기심에서 살인의 동기를 찾는다. 상 왕조의 마지막 황제 주가 그러한 인간이다. 어느 겨울 주와 그가 총애하는 왕비 달기는 한 사람이 맨발로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살기가 발동한 주는 사람을 시켜 그를 잡아오게 한 다음 맨발로 얼음 위를 왜 그렇게 잘 걷는지 모르겠다며 발 뼈를 부수게 했다. 그는 태아가 뱃속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보기도 하고, 뼈의 골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위해 대신 조섭의 허벅지를 칼로 도려내기도 하였다.



주왕이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지만 달기는 더욱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그는 동으로 된 둥근 기둥에 기름을 바른 뒤 뜨거운 목탄 위에 눕혀놓고 죄가 있는 자들이 걷게 했다. 발이 미끄러워서 불속에 떨어지면 주와 달기는 서로를 쳐다보며 좋아했는데, 이를 포락지형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주왕은 미친 듯이 날뛰며 살인을 일삼았는데, 대신과 친척들도 그의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하루는 대신인 희창이 폭정에 불만을 보이자 옥에 가두고 희창의 아들 희고를 죽여 고기를 희창에게 먹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 뒤 희고의 동생 희발이 목야 전투에서 주의 군대를 대파하자 주는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희발은 그의 시체를 참수하여 백기에 걸어 놓았다. 달기 또한 같은 운명이었다.

궁녀가 많았던 제왕

역사를 살펴보면 대다수의 제왕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여색을 마음껏 탐하였다. 후궁에는 많은 미녀들이 있었고, 그 미녀들을 약탈하는 수단은 매우 잔혹했다. 제왕들은 허황되고 인성이 없었으니, 중국 역사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도 영원한 치욕으로 남았다. 오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손호는 후궁에 이미 5천명의 궁녀가 있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부하를 보내 여자들을 약탈했는데 2천 명의 조정대신 딸들을 조사해 나이가 15~16세가 되는 여자를 선발하게 하였다. 선발에서 탈락하면 비로소 시집을 갔다. 다시 말해 예쁘장한 소녀는 잡아가고 선택되지 않은 아이들만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자신의 음탕함을 채우기 위해 손호는 이렇게 잔혹하고 무정하였다.



서진의 무제 사마염도 탐욕스런 색마였는데 만여 명의 궁녀를 거느렸다고 한다. 너무 궁녀가 많아 매일 밤 어느 곳에 묵어야 할지 고민했고, 총애하는 여자가 많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매일 밤 궁녀들은 대나무 잎을 문에 끼우고 소금을 땅에 뿌려놓고 황제의 마차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사마염이 양이 끄는 마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궁녀의 거처에 멈춰서면 그곳에서 잠을 잤는데, 궁녀들은 총애를 얻기 위해 대나무 잎을 문에 끼우고 소금을 뿌려(양이 소금을 좋아함) 마차가 자신의 처소에 멈추도록 했다는 것이다. 지나친 여색으로 원대한 꿈을 잃어버린 사마염은 정사를 태만히 하고 연회에만 몰두하다 결국 황천길로 가고 만다.



당나라 현종 이융기는 4만 명의 궁녀를 거느렸다. 당시 궁녀를 뽑는 관리를 화조사라 불렀는데 이들은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이곳저곳에서 술을 마시고 여자를 겁탈했다. 이렇게 끌려온 부녀자는 극소수만이 황제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고, 나머지는 후궁에서 하녀나 노예가 되었다. 이융기는 엄청난 수의 궁녀를 끌어 모은 다음, 이번에는 매일 어디서 잠을 잘지를 근심하였다. 그는 매일 궁녀들을 소집하여 주사위를 던지게 하고 어떤 궁녀가 이겼는지에 따라 그날 밤의 처소를 결정했다. 당시 환관들은 이 주사위 놀이를 좌각매인이라고 불렀다. 매일 이렇게 놀아도 수많은 궁녀들은 황제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이융기는 한 번 잠자리를 한 궁녀의 팔뚝에 '풍월상신'이라는 흔적을 남겨, 매일 다른 궁녀와 음란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방탕한 생활이었다.



3. 제왕의 운명



재임이 짧은 제왕

중국 역사에서 재위기간이 짧은 제왕을 살펴보면, 왕조의 붕괴가 가까워질수록 정치는 부패해지고 내부는 동요되어 제위를 탈취하려는 투쟁이 점점 참담해진다. 이런 현상은 후한 막바지와 대분열시기인 남북조 시대에 특히 두드러졌다. 통치 집단과 백성들 간의 모순이 첨예해지고, 왕조내부의 권신들과 군벌이 패도를 일삼아 정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서기 349년 후조는 짧은 1년 동안 참담한 내부투쟁으로 네 번이나 왕이 바뀌었다. 망나니였던 3대 제왕 태조 석호가 병사하자 어린 아들 석세가 제위를 이었다. 그러나 33일 후 석세는 승상 석준에 의해 퇴위되어 살해되었고, 석준이 제위에 오른다. 그러나 좋은 날도 잠시, 183일이 지나 석준은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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