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통합의 리더 대통령 링컨

리처드 카워딘 지음 | 북스타
통합의 리더 대통령 링컨

리처드 카워딘 지음

북스타 / 2007년 9월 / 420쪽 / 20,000원


▣ 저자 리처드 카워딘

옥스퍼드대학교 역사학부 교수이자 영국 학술원 회원인 리처드 카워딘은 이 책의 발간으로 링컨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예인 '링컨상'을 수상한 최초의 영국인 학자이다. 그는 미국 초기 공화제와 남북전쟁 기간 중 미국의 정치, 종교, 사회 분야를 중점 연구하고 있으며, 19세기 미국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복음주의 신교의 역할과 링컨 대통령의 리더십에 관한 연구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전쟁 전 미국의 복음주의와 정치』, 『남북전쟁과 링컨의 대통령직 수행에 관한 탐구와 재인식』, 『영국과 미국의 대중복음주의, 1795~1865』, 『교회의 일치와 분열』『신교도, 자본 그리고 시장, 1790~1860』등이 있다.




▣ 감수 장성민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에서 북한 정치를 연구했으며, 동대학 경제학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 중에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이트존스대학 국제문제연구소에서 '현대 영국과 국제 문제' 과정을 이수했고, 미국 듀크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에서 한미 관계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연구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과 초대 국정상황실장을 역임했고, 16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비전과 정책을 제시해왔다. 현재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 및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로 북핵과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한 활발한 강연과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와 역서로는 『성공하는 대통령의 조건』, 『지도력의 원칙』, 『전환기 한반도의 딜레마와 선택』, 『미국 외교정책의 대반격』, 『9.11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리포트』, 『강대국의 유혹』등 다수가 있다.




Short Summary

이 책은 링컨의 정치권력에 대한 근원과 특성을 탐색하며, 그가 연방의 구원자이자 해방자로서 끝까지 통합을 이끌어낸 정치 여정을 학문적으로 고찰한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한 불우한 소년이 성장하여 세상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생각이 옳은 정치인이 갖는 열정과 의지, 그리고 신념과 비전은 세상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유용한 것은 미국이 남과 북으로 첨예하게 대립되고 국론이 분열된 위기 속에서 국가통합의 틀이라 할 수 있는 연방제를 깨지 않고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링컨의 탁월한 리더십을 한반도에 적용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리더십은 정당 정치가 미숙한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국론분열을 극복하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시켜 민주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답을 준다.



링컨의 리더십은 크게 자신이 속한 정당과의 관계, 언론과의 관계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국민(여론)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었다. 링컨은 정당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대의명분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당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항상 노력했다. 그는 각 파벌 간에 공평하게 관직이 배분되도록 오랜 시간을 할애했는데, 그럼에도 당원의 지지를 얻기 어려운 경우에는 대중연설을 통해서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당내의 지지를 확대해가는 전략을 선택했다. 링컨이 언론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했던 것도 그것을 여론 측정의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신문은 마치 신체의 '혈액'과 같은 기능을 했다고 하는데, 그는 신문을 통해 여론의 변화와 추이를 파악하고, 정책의 방향과 강도를 조절했다.



이렇듯 링컨은 항상 여론을 바탕으로 정책을 실행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민의에 영합하는 수동적인 입장만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국론 분열의 최대 이슈였던 연방의 통합과 노예해방이라는 문제에서 그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설득하였으며 여론이 성숙되기를 기다렸다. 그에게 노예해방은 흑인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감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평등한 조건에서 행동할 때 최대의 경제적 가치가 실현된다는 합리적인 사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링컨은 노예문제를 독립선언문에 담겨 있는 천부권리, 즉 자유와 평등이라는 원칙에 근거한 윤리관으로 호소했다. 이렇듯 역사적 의무를 담고 있는 노예해방은 국민의 애국심을 새롭게 고동치게 만들었으며 결국 연방의 통합을 이끌어 내게 하였다. 링컨의 정치적 신념이 지닌 힘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도덕적 권리를 가장 힘 있는 권리라 여겼기에 국가의 분열과 국론의 분열 속에서도 불굴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혼탁할수록 민주적 원칙이 정립되길 바라며, 국론 분열이 심할수록 화합과 통합을 바라는 국민들의 마음은 지금의 한국이나 과거 링컨 시대의 미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링컨 시대의 미국이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흑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과중한 국가적 의제가 있었다는 점도 통일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안고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민주적 제도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남북분단과 국론 분열을 극복하고 미국을 하나로 통합시켜 낸 링컨 정책의 모든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현실적 응용을 제공한다.




▣ 차례

책임감수의 길

서문



제1장 내적인 힘 [링컨의 야망과 정치적 비전]

링컨의 야망

정치적 비전

도덕성의 위기 : 1854

윤리적 힘의 종교적 뿌리



제2장 여론의 힘 [일리노이의 대중과 새로운 정치적 질서]

링컨과 민주 정치와 여론

일리노이의 여론과 반네브라스카 세력의 연합

1858년의 상원의원 선거 캠페인



제3장 정당의 힘 [대통령 선거의 승리]

대통령 후보를 향한 야망 : 링컨과 공화당, 그리고 데카투어

전당대회까지의 여정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1860년 대통령 선거 유세 : 정의로운 당의 힘



제4장 힘의 한계 [대통령 당선자에서 전시 대통령 되기까지]

대통령 취임식 전까지 : 당의 분열을 막으며

스프링필드에서 섬터까지 : 연합전선을 구축하며

'국민의 전쟁'을 위한 전략

"어찌할 것인가? 국민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면……."



제5장 힘의 목적 [목표를 수정하며]

민심을 읽으며

'불가피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 노예해방 선언을 하기까지

신앙과 목적

성실한 목표 추구 : 노예 해방, 연방 재건 그리고 흑인 시민권



제6장 힘의 도구 [강압과 자발적 동원]

강압과 억압, 그리고 행정부의 권력

대중 동원 : '정의로운 말의 힘'과 당의 역할

연방군의 도덕적 위력

1864년 선거 : '미국의 재탄생'



제7장 죽음의 위력



후기































통합의 리더 대통령 링컨

리처드 카워딘 지음

북스타 / 2007년 9월 / 420쪽 / 20,000원

Chapter 01 내적인 힘 [링컨의 야망과 정치적 비전]



링컨의 야망

정치적 성공을 향한 링컨의 내적 원동력은 발전을 원하던 그의 간절한 욕망과 관련이 있었다. 링컨은 유년 시절 극한의 물질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불운한 시절의 기억 속에는 링컨이 하루 동안 열심히 심어 놓은 호박씨가 비에 쓸려가 버린 일도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의 어머니는 독이 있는 뱀풀을 먹으며 방목된 야생소의 우유를 먹고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였다. 링컨은 야생동물의 위협 속에서 인디애나의 황무지를 개간하며 자라야 했다. 따라서 그가 밭일 외에 지적 성장을 이룰 기회는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겨울 동안 몇 번 학교에 다닐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 때문에 링컨이 농부 생활에 염증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가난, 외로움, 황량한 농촌 생활 같은 것들이 꼭 진취성과 야망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링컨의 성공에 대한 의지와 정신력은 링컨 자신도 말했듯이 그의 양어머니에게서 상당히 영향을 받은 듯하다. 1819년 그의 부친은 사라 부시 존스턴과 재혼했다. 양어머니 사라는 농장주의 외동딸로 인디애나의 통나무집에 정돈과 질서, 거기에 약간의 호사스러움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불편하고 적대적이기까지 한 링컨과 남편 사이의 반목을 조절하고, 링컨의 독서와 지적 열망에 대한 남편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어린 링컨은 분명히 여러 가지로 아버지와 정반대인 사라의 격려와 애정을 소중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링컨의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링컨은 제한된 학교생활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에세이를 썼을 뿐만 아니라 연설을 하거나 학우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즐겨했다고 한다.



링컨은 법적으로 21세가 되자 집을 나와 당시 상업의 중심지였던 뉴세일럼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사는 6년 동안 그는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상품을 배로 운반하는 일을 시작으로 상점 서기와 제분소 관리인, 그리고 잡화상점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말뚝을 쪼개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명석한 두뇌와 끈기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이로 인해 우체국장 일을 맡기도 했으며, 뉴세일럼에 도착한지 채 3년도 되지 않았을 때 일리노이주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이때 링컨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는데, 그의 성실성과 강한 정신력을 인정한 지역 유지들이 그에게 출마를 권유했던 것이다. 비록 선거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이 선거를 통해 존 토드 스튜어트를 비롯한 휘그당의 유력 인사들의 우정을 얻어 3년 후에는 마침내 주의원으로 당선된다. 더욱이 존 스튜어트의 권유와 지원에 힘입어 놀랍게도 단 2년 만에 일리노이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1837년, 링컨은 뉴세일럼을 떠나 그곳에서 멀지 않은 스프링필드에 자리를 잡는다. 이곳에서의 변호사 생활은 법안 작성에 필요한 기술 습득과 중요한 인맥 형성의 수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1838년과 1840년, 두 번 더 의원직을 수행하게 되고 이로 인해 링컨의 명성은 더욱 드높아진다. 이 시기에 링컨은 하원에서 휘그당을 이끌며 두 번 의장직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비록 성공하지 못했으나 '대통령 선거인'으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는다. 그리고 1842년, 메리 토드와 결혼함으로써 마침내 동부 켄터키의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 된다.



정치적 비전

1847년, 링컨은 연방의원이 되면서 드디어 워싱턴에 진출하게 된다. 이는 1841년 주의원 임기를 마치면서부터 품었던 야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링컨의 야망 뒤에는 단순한 개인적 욕망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진정한 국가의 모습에 대한 정치적 비전을 지니고 있었다. 그 핵심은 모든 개인이 근면성과 진취성, 그리고 자기 관리를 통해 점차 시장 중심으로 발전하는 사회에서 자립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가 노예제도를 잘못된 정책의 소산이라고 보았던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노예제도에 대한 링컨의 관점은 고전 경제학의 이론(노동가치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누구는 일만 하고 누구는 일하지도 않고 그 과실을 누리도록 맺어진 경제 계약은 잘못된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링컨은 의원직이 종료된 이후 한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변호사 업무에 열중한다. 하지만 1854년 민주당의 스테판 A. 더글러스가 제출한 네브래스카 법안이 통과되자 본격적으로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된다. 네브라스카 법안은 1820년 미주리 협약의 규제조항, 즉 '북서부의 구 영토에서 노예제도를 금지시킨다는 조항을 폐지하고, 루이지애나 영토의 북부 일부 지역에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여론은 미친 듯이 들끓었고 링컨은 반대운동에 앞장서면서 다시 휘그당에 합류한다. 링컨은 노예제도가 미국 연방의 절대적 목표, 즉 공화국 건국의 유산인 '자유와 평등권의 정치 체제'를 영속시키는데 고질적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수많은 연설을 통해 쏟아냈다. 그는 "더글러스와 그의 동료들이 토마스 제퍼슨의 신념에 따른 공화주의 원칙을 일격에 흔들어 놓았다."고 주장하면서, "백인이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도 지배한다면 이것은 자치가 아니라 압제임이 분명하다."고 단언하였다.



더글러스와 네브라스카 법안을 향한 링컨의 공격은 오랫동안 그의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종교적 관념의 표출이었다. 독실한 침례교도였던 부모님의 가르침과 독학을 통해 알게 된 성서는 그의 가공할 기억력과 합쳐져 공식적인 연설이든 사석에서든 청중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무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성서를 잘 안다는 것이 바로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링컨은 스프링필드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여러 학문적 이론을 접하면서 성서의 불합리성과 모순점을 찾아내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곤 하였다. 아무튼 합리주의, 보편주의, 공리주의, 그리고 칼뱅주의가 모두 섞여서 만들어진 링컨의 복합적 신앙체계는 링컨이 정치적 이슈로 노예제도를 바라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링컨은 노예제도를 독립선언의 천부인권과 결부시켰으며, 그 토대를 창세기에서 찾았다. 즉, 인류가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면 '창조자의 정의'는 '그의 모든 창조물'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했던 것이다.



Chapter 02 여론의 힘 [일리노이의 대중과 새로운 정치적 질서]



링컨과 민주정치와 여론

19세기 전반, 미국의 정치체제는 참여적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통치 체제를 통해 발전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백인 남성을 제외한 여성과 다른 인종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권력을 부유층과 지식인의 전유물로 여겼던 공화국 체제에서 보통 백인 남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새로운 혁명적 출발로 여겨졌다. 따라서 '주권을 가진 군중'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장치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대중을 기반으로 한 정당 체제이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들어서자 이미 연혁과 체계가 잡힌 현대적 의미의 정당들이 미연방의 각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당시 대세를 잡고 있는 것은 민주당과 휘그당이었다. 그러나 각 정당의 통제력은 대부분 빈약하고 불완전했다. 특히 1850년대는 이민자들의 대거유입으로 토착민들이 여러 요구 조건을 내세웠는데 양당 모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새로운 정당을 찾고 있었다.



이 무렵 링컨은 반네브래스카 여론과 노예제도 반대 여론의 연합을 주도해 새로운 공화당을 세우는데 상당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1853년 일리노이주에서는 노예소유주가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을 금지시키고, 해방 노예가 일리노이로 이주하는 것 또한 금지시켰다. 그런데 일리노이 주민 중에는 독일과 아일랜드 태생 이민자들이 수천 명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민 배척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