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1
이덕일 지음 | 고즈윈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이덕일 지음
고즈윈 / 2008년 2월 / 296쪽 / 12,800원설치(雪恥)
순조 즉위년(1800) 8월 15일 추석날 밤. 경상도 인동부(仁同府: 현 구미시). 대보름이었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 달은 보이지 않았다. 온 동네가 흥성거리는 이날. 단 한 집만이 적막에 싸여 있었다. 사대부 장시경·현경 부자의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 태반이 장시경의 땅을 부쳐먹는 전호(佃戶)들이어서 사실상 이 마을은 장씨 일가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을뿐만 아니라 장씨는 인동의 가장 큰 대성(大姓)이어서 세도가 당당했다. 그런데 가장 흥겨워야 마땅한 장시경의 집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음울한 분위기라기보다는 결전을 앞둔 군영(軍營) 같은 비상한 기운에 덮여 있었다.
장시경은 사노(私奴) 이영태를 찾았다. "가서 동네의 상한(常漢, 서민)들을 모두 불러오너라." 향리(鄕里)에서 장시경의 별명은 생불(生佛)이었다. 마을의 상한들은 물론 노비에게도 욕 한마디하는 법이 없었고 인심도 후해, 불러서 일이라도 시키면 꼭 그 이상의 대가를 지불하곤 했다. 자연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장시경·현경 부자의 일이라면 마을 사람들은 언제라도 달려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장시경이 한 말은 뜻밖이었다. "지금 국가에서 어약(御藥)을 과도하게 써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란 바로 선왕(先王) 정조의 죽음을 뜻했다. '약을 과도하게 써서 죽었다'는 말은 곧 독살 당했다는 말이었다. 시골 백성들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설사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해도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정치는 양반 사대부들이 하는 것이고 자신들은 농사나 열심히 지으면 되었다. 그러나 임금이 '어약을 과도하게 써서'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백성들의 가슴은 뛰었다. 그 임금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뭄이나 흉년이 들 때마다 국왕이 재산인 내탕금과 관곡을 풀어 구휼했기 때문에 굶어 죽는 백성이 거의 사라졌던 것이다.
장시경의 말이 이어졌다. "어린 세자가 뒤를 잇게 되자 노론(老論)이 득세했고, 남인(南人)은 남김없이 쫓겨났으며 민생(民生)은 날로 고달프게 되었으니, 이렇게 국세가 외로울 때 나와 너희들이 어떻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정조의 죽음에는 의관(醫官)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배후에 현직 정승이 있다고 의심할 정도로 정조독살설은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다. 장시경의 계획은 서울로 올라가서 정조를 독살한 역적들을 처단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정조를 독살한 역적을 치는 토역군(討逆軍)인 셈이었다.
장시경 형제와 장현경은 토역군과 함께 인동 관아를 향해 걸었다. 장시경 형제와 장현경 등 4인이 먼저 인동 관아의 관문을 두들겼다. 장현경은 마을 사람들에게 가져온 몽둥이로 문 곁의 담을 두들기게 했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두들기자 담의 기와와 흙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한쪽 구석이 무너져 갔다. 그러나 담장이 무너지는 소리에 더 놀란 것은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간 백성들에게 관아는 공포 그 자체였다. 관아 안에서 이방이 군졸 10여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군졸들이 나타나자 겁이 덜컥 난 마을 사람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한번 흩어지기 시작하자 급조된 토역군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사라져 버렸다. 장시경 형제와 장현경이 막았으나 토역군은 이내 겁에 질려 보통 백성으로 돌아와 있었다. 기세를 놓칠세라 이방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관문을 열고 나와 백성들을 체포하러 다녔다. 장시경 형제들과 장현경 등 주모자 4인도 도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시경 삼형제는 천생산성(天生山城)의 낙수암(落水巖)위로 올라갔다. 이들은 이렇게 무참하게 실패할 줄은 몰랐다. "장차 대사를 도모하려 했는데 일이 어긋나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찍이 자처(自處)하는 것이 낫다.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먼저 죽는 것이 억울하다." 장시경은 천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다. 동생 장시욱은 막내 장시호가 차고 있는 칼로 목을 두 번 찌르고 가슴을 한 번 찔렀다. 그래도 죽지 않자 그 역시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다. 장시경과 장시욱은 죽었지만 막내 장시호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어도 살아남았다. 정조가 사망한 해 추석에 벌어진 일이었다.
9월 23일, 현직 정승인 영의정 심환지는 사건 처리 방침을 섭정 중인 정순왕후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군사까지 일으킨 반란 사건의 처리치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관대했다. 독살설의 배후가 일파만파로 번져나갈 것이기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사건을 축소해 조용히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다른 역모 사건들과는 달리 조용히 처리되었고,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하룻밤 꿈처럼 그저 지나고 나니 끝이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에게 이 사건은 하룻밤 꿈일 수 없었다. 옥산 부근에서 부친 장시경과 떨어져 종적이 묘연해진 장현경의 집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장현경의 부인과 자식들이 체포되었고 연좌에 의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족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세상이 모두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왕세손 이산(李 )은 경희궁 숭정문(崇政門) 앞에 섰다. 감개무량했다. 그 길고도 험난했던 고개를 비로소 넘은 것이었다. 선왕(先王) 영조가 승하한 지 5일 만이었다. 선왕이 승하하면 당일로 보위를 물려받아야 하겠지만 세손은 굳게 거부했다. 영조를 잃은 세손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영조의 나이 여든셋, 왕위에 있는 기간만 52년이었다. 그 누구보다 눈물이 많았고, 그 누구보다 인자했으나 때로는 그 누구보다 냉혹했던 그런 임금이었다. 세손이 영조의 죽음을 이토록 슬퍼하는 것은 보통 조손지간(祖孫之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조가 없었다면 오늘의 정조는 없었다. 영조가 아니었다면 정조는 노론 벽파라는 철벽을 넘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아들을 버린 영조는 손자만은 끝내 보호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손의 감정은 복잡했다. 명실상부하게 영조의 후사가 되는 순간, 세손은 눈물을 흘리며 망설이다가 거듭된 재촉에 마지못한 듯 유교(遺敎)와 옥새를 받았다. 이제 비로소 대권을 손에 쥔 것이었다. 열한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그 소년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스물다섯의 나이였으나 25년 동안 그가 감내했던 고통과 사색과 번민의 무게는 동시대의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1776년 3월 10일! 즉위식을 마친 정조는 "어둑새벽 이전의 잡범 중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라"는 대사령을 내렸다. 국장과 겹쳐 있는 즉위 당일 대사령을 내리는 것으로 마감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빈전 밖으로 대신들을 부르라." 대신들을 부른 것은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빈전 밖에 도열한 대신들은 긴장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대신들은 신왕의 첫 육성을 기다렸다. 즉위 일성은 신왕 시대를 재는 척도가 될 것이었다. 빈전 밖에 대신들이 도열해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정조의 가슴은 뛰었다. 갑신년(영조 40년) 이후 고통 속에 간직해 왔던 말을 드디어 토로할 때였다. 장장 13년의 세월이었다. 정조는 빈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 일성이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대신들은 경악했다. 비록 국왕이 되었다지만 조정은 아직 그 아버지를 제거한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벽파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는 '팔자흉언(八字凶言, 여덟 자로 된 흉언)'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의 3년 상을 마친 재위 40년, 세손의 호적을 이복(異服) 백부(伯父)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켰다. '종통의 중요함을 위해서'였다. 영조는 세손을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준 것이었다. 세손의 법적인 어머니도 혜경궁 홍씨에서 효장세자의 부인 조씨로 바뀌었다. 오늘의 즉위도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아들로 한 것이었다. 그런 세손의 즉위 일성이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다. 노론은 경악했다. 15년 전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모습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외척 전쟁
1759년(영조 35년) 6월 22일 오시(午時: 11~1시). 예순여섯의 영조는 어의궁(於義宮)으로 향했다. 새로 신부를 맞이하는 친영례(親迎禮)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2년 전 사망한 정성왕후 서씨의 뒤를 이을 한 소녀가 어의궁에서 영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간택 끝에 뽑힌 김한구의 딸로 불과 열다섯 살짜리 소녀였다. 이 소녀가 정순왕후이다.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무려 열 살이나 어렸다. 영조는 어의궁에서 수줍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소녀가 훗날 이 나라에 가져올 파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손자를 죽이고, 손자며느리는 물론 증손며느리의 피까지 손에 묻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조선의 운명까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 줄은.
대혼날까지 이 소녀의 아버지 김한구는 벼슬하지 못한 유학(幼學) 신세였다. 그러나 이날부터 그는 또 한 명의 척신(戚臣)으로 등장했다.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사위를 둔 새로운 국구(國舅, 왕의 장인)의 등장이었다. 딸이 왕비가 되면서 김한구는 궁중의 실세가 되어 갔다. 소녀의 오라비 김귀주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딸과 여동생 덕분에 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김한구·귀주 부자는 권력욕이 많았다. 권력욕이 많았던 또 다른 외척은 홍봉한·인한 형제였다. 홍봉한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부친으로서 사도세자의 사건에 책임이 있었다.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은 노론의 영수로서 정조의 즉위를 영조에게 반박하며 기회를 보아 다른 인물을 추대할 속셈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기묘하게도 이 두 외척은 사도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 했다. 사도세자는 노론 중진들과 두 외척의 협공을 받아 영조 38년에 살해되고 말았다. 정조가 세손 시절, 할아버지 영조는 '나라의 중탁'을 손자인 정조에게 맡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아들 사도세자를 죽일 수 있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같은 이유로 남편을 버릴 수 있었다. 때문에 할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보지 못하며, 차마 말할 수 없다"는 삼불유훈을 내린 것이다. 이는 정조에게 뼈를 깎아도 지워질 수 없는 아픔이었다. 궁중의 두 여인,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는 모두 사도 세자의 죽음을 안에서 호응했다. 그런데 사도세자를 제거한 후에는 두 외척의 자세가 달라졌다. 공동의 적이었던 사도세자가 사라지자 외척 가문 사이에 노론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 같은 노론 내에서 파벌이 갈린 것이었다.
이런 두 외척 전쟁하의 조정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세손 시절부터 정조의 숙원사업은 외척 제거였다. 영조 때 성장한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들이 수많은 비극의 뿌리라고 정조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정조는 척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릇 척리에 관계되면 이 척리이건 저 척리이건 막론하고 꺾어 눌러야 한다는 것이 곧 나의 고심(苦心)이다"(『일득록』7). 영조 38년 사도세자를 살해한 후 극도로 비대해진 외척 세력이 이런 정조의 고심으로 즉위 반년만에 일단 정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선의 외척은 발본색원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 깊었다. 여전히 궁중 깊숙한 곳에 정순왕후와 혜경궁이라는 외척의 뿌리는 건재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틈을 엿보고 있었다. 한 예로 자객을 동원해 정조를 시해하려하는 등의 모역사건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 조선 왕실의 비극이었다.
재위 1년(1777) 7월 28일. 깊은 밤이었으나 정조는 경희궁 존현각(尊賢閣)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밤늦게 책을 보는 버릇은 세손 때부터 생긴 것이었다.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살기 위한 생존 본능 때문이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에 대해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때가 또한 몇 달인지 알 수 없었다"(『정조실록』즉위년 6월 23일)고 토로했을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대낮에 암살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암살 위협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밤중에 깨어 있는 것이었다.
밤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여름밤, 정조는 평소의 바람소리와 다른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그 시각에 보장문(寶章門) 동북 쪽 행랑채 지붕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그 물체는 정확하게 존현각 지붕 위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기왓장을 조심스레 뜯었다. 방안에는 정조 혼자뿐이었다. 호위 내관도 경호군사의 철야 근무 상태를 점검하러 나갔기 때문이었다. 인적이 분명하다고 느낀 정조는 방어 자세를 취하며 소리를 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정조의 고함소리에 내시들과 대궐문의 열쇠를 맡는 액정서(掖庭署)의 액예(掖隸)들이 몰려왔다. "지붕 위에 괴한이 있다." 내시와 액예들이 지붕으로 올라가니 괴한은 사라지고 기와 조각과 자갈, 모래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자객의 흔적이었다. 궁내에 내통자가 없으면 수많은 전각 중에 임금이 자는 방을 알 수가 없을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로 밝혀진 것은 국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호위청(扈衛廳) 소속 군관이 자객의 길 안내를 맡았다는 것이다. 이는 궁중 세력이 깊숙이 결탁되었음을 뜻했다.
흑두봉조하 홍국영
영조 48년(1772, 임진년) 9월 26일. 홍국영은 세자시강원으로 향했다. 그해 치러진 정시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한 홍국영은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設書)로 임명받았다. 빠른 승진이었다. 세자시강원에 도착한 홍국영은 세손에게 큰 절을 올렸다. 세손이 20세, 홍국영이 24세였다. 홍국영은 세손에게 깃들인 용봉(龍鳳)의 자태를 보았다. 고립무원의 처지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의연함이 세손에게 있었다. 조정 동태에 민감했던 홍국영은 세손과도 촌수를 따지면 12촌 형제가 되는 셈이었다. 홍국영은 세손에게 인생을 걸어 볼 만하다고 느꼈다. 정조는 상견례 때만 해도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이 미남자가 자신의 오른팔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조는 즉위 3일 만인 3월 13일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다.『정조실록』에 "특별히 발탁했다"고 적고 있듯이 이례적인 발탁이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영조 51년(1775년) 대리청정을 거처 정조가 즉위할 수 있었던 것도 홍국영의 역할이 컸었다. 홍국영은 국왕의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와 경호실장격인 금위대장을 한 손아귀에 장악한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조정의 실권은 홍국영의 손아귀에 있었다. 사실상 정조와 홍국영의 공동정권이었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 불과 서른이었다.
홍국영은 드디어 자신의 포부를 펼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정조 즉위 초 홍국영은 두 가지 목표를 세워 놓았다. 하나는 두 외척을 제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론·남인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정조가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소론과 남인은 고무되었다. 이제 사도세자의 원수를 갚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도세자 사건의 재조사를 주장하는 상소가 올려지고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한을 되새겨 노론 치죄에 나서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소론의 연속 상소에 대한 정조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격렬하게 화를 냈던 것이다. 정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