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우쓰미 아이코 지음 | 동아시아
우쓰미 아이코 지음
동아시아 / 2007년 8월 / 335쪽 / 15,000원제1장 포로수용소의 감시원
타이 포로수용소 - 죽음의 태면 철도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일하도록 모집된 조선인 청년 3,000명이 부산을 출발한 것은 1942년 8월 19일, 태풍과 적의 잠수함 공격으로 공포에 떨면서 사이공 항에 도착한 것은 출항 11일 후인 8월 30일이었다. 이학래 씨를 포함한 조선인 군속 800명은 사이공에서 1주일 정도 머무른 후 열차와 배를 타고 타이 포로수용소 제4분소가 위치한 왕야이에 도착했다. 이학래 씨는 이 제4분소 제3분견소라는 곳에 배속되었다. 조선인 군속의 일은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감시라고 해서 단지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태면 철도 건설 작업에 투입된 포로들의 의식주 등 모든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철도대의 작업 진척 상황에 맞추어 필요한 수의 포로를 필요한 때 제공하는 것이 포로 감시원의 임무였다.
태면 철도 기점에서 155Km 떨어진 힌똑(Hintok)은 열대 정글 한가운데 있었다. 이학래 씨 일행이 영국 · 네덜란드 · 오스트레일리아의 포로 500명을 데리고 힌똑으로 가도록 명령받은 것이 1943년 2월.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정글을 파헤치며 타이에서 미얀마로 철도를 놓으려고 계획했던 대본영 육군본부가, 계획을 결정할 즈음 열대의 가혹한 자연 조건을 어느 정도 계산했을까? 보급로도 없이 정글 속 깊숙한 곳에서 철로를 부설하는 공사가 지극히 힘든 공사가 될 것임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험난한 415Km에 이르는 구간을 곡괭이·정·삽 따위의 원시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인해전술로 공사를 마치려 했다. 1943년 10월까지는 완성해야 한다던 공사를 설상가상으로 2개월을 앞당겨 완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결국 그들은 1일 890m라는 철도 부설 사상 신기록을 세우며 1년 4개월만에 무턱대고 타이-미얀마간을 연결하는 철도를 완성해 내었다.
하지만 이 무리한 공사의 폐해는 전적으로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던 포로들과 아시아 현지 노동자들에게 돌아갔다. 말라리아·이질·콜레라 등과 같은 전염병과 온갖 풍토병이 바글거렸다. 건설 과정에서 포로와 노무자 4만 4,000명이 사망, 99.9%가 이런 영양실조와 콜레라, 이질 같은 전염병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태면 철도 건설 현장에는 병원은커녕 의약품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학래 씨가 근무했던 힌똑에서는 다행이 콜레라가 발생하지 않아 비교적 사망자가 적은 편이었지만, 만성적인 영양실조와 환자가 계속 늘어나는 수용소 측에서 철도대의 작업 인원 할당표를 맞춰 포로를 제공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쌍방이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이라도 병세가 약한 사람을 골라 현장에 보낼 수밖에 없었고, 이씨 역시 환자를 작업에 내몬 적이 있었다. 이 씨가 포로 관리에 아무리 힘을 들여도 포로들에게 노동은 강제적인 것일 뿐이었고, 가혹한 현실은 한낱 군속인 이학래 씨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일들이었다. 힌똑의 최대 난코스를 담당했던 철도대의 히로타 소위, 수용소의 우스키 중위, 분주소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이학래 씨 이 3명 모두 일본 패전 후 '포로 학대'를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감형이 되어 목숨을 건진 이학래 씨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싱가포르 창기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말레이 포로수용소 - 석유 기지 팔렘방
사이공을 출항한 조선인 군속의 수송선단이 싱가포르 항구에 정박한 것은 1942년 9월 10일. 싱가포르가 일본군 손안에 들어오고 나서 이미 반년 이상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말레이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할 조선인 군속 9개 소대 810명은 싱가포르에서 내렸다. 말레이 포로수용소에 배속된 유동조 씨는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이름 와타이 지로로 불렸다. 유동조 씨는 제5소대에 소속되어 팔렘방 제2분견소에 배속되어 6,000명 정도의 포로를 감시했다. 주된 포로들은 영국 해군이었다.
동남아시아 최대의 석유 기지 팔렘방은 1942년 2월 하늘에서 낙하산 부대가 내려와 일본군이 점령한 곳이다. 일본측으로 볼 때 팔렘방은 석유 공급 기지로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전황이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한 1943년 12월 28일, 팔렘방 방위를 위해 제9비행사단을 신설하고 팔렘방 시내에서 75Km와 50Km 지점에 비행장을 짓기로 했다. 물론 곡괭이·삼태기·삽만을 이용한 인해전술이었다. 비행장과 철도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정글을 뚫어 나가며 나무뿌리를 파내는 작업은 태면 철도 현장과 마찬가지로 포로에게는 괴로운 중노동이었다.
싱가포르의 제4분견소에서 근무하던 정은석(당시 창씨명 이시하라 다쓰오) 씨는 1943년 11월 팔렘방으로 전속 명령을 받았다. 정 씨는 포로 1,500명 정도를 데리고 탕카란바라 부락 근처로 이동했는데, 이곳이 50Km 지점에 세우는 비행장이다. 비행장을 건설할 무렵 중노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1일 쌀 400g, 경노동자에게는 300g, 입원환자에게는 180g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양은 아니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포로들은 볼품없이 변해갔고, 설령 병에 결려도 1일 180g의 배급으로는 체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포로들은 식량 배급을 조금 더 받기 위해 쓰러질지언정 작업장에 나오려 했다. 병든 몸으로 무리해서 작업을 계속하면 그 역시 죽음을 앞당기는 상황이었다. 영양실조와 과로 등으로 체력이 바닥난 포로들은 순식간에 죽어버렸지만, 군의 식량 지급 기준으로 판단하면 영양실조는 인정할 수 없었기에, 군의관들에게 제대로 병명을 밝히라는 군상부의 명령이 내려왔고, 어쩔 수 없이 이질· 말라리아 등의 그럴듯한 병명을 갖다 붙였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포로들이 체력을 잃어 가면서 얻은 대가인 비행장은 1944년 초에 완성되었다. 비행장이 완성되자 체력이 남아 보이는 1,500명이 다시 뽑혀 같은 해 3월 '중부수마트라횡단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중부 수마트라로 보내졌다. 식량 부족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진행한 공사 도중 1944년 11월경에는 1개월 동안 80명이 죽어 나가는 사태에 이르렀다. 한 장교 출신 포로의 증언에 따르면 1945년 6월 16일 즈음에 8월 15일까지 철도를 완성해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작업에 나가야 한다고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이 패망하는 날 중부수마트라횡단철도의 개통식이 열렸다. 이 횡단철도 역시 많은 희생자를 내고 건설하였지만, 결국 기차 한 번 내달려 보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수많은 포로들의 죽음에 대해 패망 후 현장에 있었던 일본인 장교와 하사관, 조선인 군속들이 그 책임을 져야 했다. 쓰지도 못할 비행장과 철도를 만들어서 많은 포로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대본영의 작전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군속들은 해방된 조국도 보지 못한 채 전범의 몸이 되어 스가모 프리즌에 구금되었다.
자바 포로수용소 - '지상천국' 속의 지옥도
부산에서 출발해 사이공과 싱가포르에 조선인 군속들을 내려놓은 수송 선단이 자바 자카르타 항구에 닻을 내린 것은 1942년 9월 14일, 부산을 떠난 지 25일 만이었다. 최선엽 씨는 반둥의 제1분소 제3분견소로 배속되었다. 반둥에서 최씨는 부산 노구치(野口) 부대에서 받았던 총기 취급법과 손질법, 사격, 총검술, 군인칙유 암송, 보초, 경계 등의 초년병 교육을 다시 받았다. 그 후 3개월 동안의 보조원 훈련이 끝나고 최선엽 씨는 중부 자바의 세마랑(해륙 교통의 요지-옮긴이)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최씨는 패전까지 2년 동안 세마랑에 있는 최대 억류소 '자바 억류소 제2분소 제4분견소'에서 근무해야 했다. 여자 5,000명만으로 구성된 캠프였다.
초대 소장 하세가와 대위는 엄격한 인물이었다. '명령에는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던 하세가와 대위는 억류된 사람에게 수용된 여자들은 군인이 아니었기에 '절대 복종'이라고 명령받아도 좀처럼 응하려 하지 않았다. 하세가와 대위와 조선인 군속들은 이러한 명령 위반자에게 자주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유교 영향이 강한 나라에서 성장한 조선의 자존심 강한 남자 최선엽 씨에게 네덜란드 여자들의 태도는 감정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주의를 주어도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기에 욱하는 성질에 때린 적도 있다고 최씨는 말한다. 의약품은 부족했지만 다른 캠프에 비해 영양실조도 없었고 사망자도 제로, 병사자도 제로였기에 특별히 문제는 없었다고 최씨는 말한다.
하지만 전후, 억류소에 근무한 조선인 군속들은 최씨같이 의약품 부족, 기아상태, 일상생활에서 빚은 마찰, 구타가 문제가 되어 전범으로 고발당했다. 전투가 거의 없었던 자바 억류소에서 많은 전범을 배출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식량 지급량을 결정하고 노역에 나가도록 강요한 것은 일본인 육군대신과 정보국장관이었다. 조선인 군속은 그 명령을 실행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항명권이 보장되지 않는 일본 군대에서는 어떤 불합리한 일이 있든 상관의 명령을 거스르는 일은 천황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반역죄로서 때로는 죽음을 의미했다. 조선인 군속이 명령을 위반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억류소 말단에서 근무한 최선엽 씨 일행이 억류소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패전 후 전범으로 고발되었다.
제2장 조선인 군속과 포로수용소
왜 조선인을 감시원으로 삼았는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강하다. 항상 마을과 가문의 체면을 생각하고 마침내 떨쳐 일어나 기대에 부응할지니. 살아서 포로의 수치를 받지 않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지 마라.' 이 훈령은 일본 육군과 해군에게는 철칙으로 머릿속 깊숙이 박혔다. 설령 최후의 한 사람이 될지라도 결코 포로로 남지 않을 것. 만일 포로가 되었을 경우에는 자결할 것. 그렇게 사병들을 가르쳤다. 남방 곳곳의 섬에서는 남은 병사들이 자폭을 하려고 수류탄을 건네 받았고, 병으로 움직일 수 없는 병사들을 독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포로가 된 뒤 살아서 돌아온 어떤 장교는 자결했으며, 어떤 하사관은 죽으러 다시 최전선으로 뛰어들었고,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포로가 되는 것. 그것은 목숨을 걸고 거부해야 했다. 일본 군대에는 포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병사는 포로가 되기 전에 자결해서 '명예스러운 전사'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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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본군에게 '제네바조약 같이 박애의 마음으로 포로를 대하는 것, 포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것'은 모순된 일이었다. 1941년 12월 미국의 제의를 시작으로 연합국에서 '제네바조약'에 따라 포로를 대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일본은 '제네바조약'을 '준용'한다고 회답했다. 비준은 하지 않지만 준용한다는 이 회답에 따라 일본 정부는 '제네바조약'에 구속받는 입장이 되었다. 허나 일본측은 '위험한 노동', '작전 행동'에 포로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공중의 호기심'에도 포로를 노출시키고 일본의 위력을 식민지 민중 앞에 과시했던 사실을 볼 때, 이 조약의 정신을 준수할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일본에게는 백인 포로만 의미가 있었다. 황인종이나 흑인은 도망가지 않도록 선서를 받은 뒤 가능하면 포획한 현지에서 활용하고, 일본·조선·대만에 이송하는 것은 백인에 한정하였다. 백인이 아니면 사상적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선과 대만에 백인 포로를 이송해서 사상적 효과를 노린 육군성은 동시에 포로 감시를 조선인과 대만인의 손에 맡김으로써 내선일체, 황민화의 효과를 거두려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942년 5월, 조선과 대만에서 포로수용소 감시원을 모집하기 시작하였고, 한달 동안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에서 청년 3,000명을 모집하였다.
지원인가? 징용인가?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을 결정하는 큰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학래 씨의 경우, 현금 서류 1통을 분실한 것이 인생을 바꾸는 큰 계기가 되었다. 군속을 모집하기 시작한 1942년 5월 중순, 우편국을 막 그만둔 이 씨는 직업도 없이 빈둥거렸다. 1년 동안 우편국에서 근무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인생의 진로가 현금 서류를 분실하면서 그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때 친구에게 감시원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42년 5월이면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사실을 발표한 시점이다. 이대로 빈둥거리다가는 군대에 끌려가든지 탄광에 끌려갈 판이다. 군대든 탄광이든 그 어느 쪽도 싫었던 이학래 씨에게 총을 잡지 않아도 되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군인이 되는 것도 아니며 게다가 2년만 근무하면 된다는 포로수용소 감시원 모집은 꽤나 매력적인 소식이었다. 하루 세 끼에 잠잘 곳도 마련해주고 피복도 주면서 전지(電池)에 근무할 경우 월급은 50엔, 계약 기간은 2년이라고 했다. 감시라는 어감에서 높은 곳에 서서 무언가 지시한다는 막연한 생각과 2년의 계약기간, 징병으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이씨의 아버지도 허락해 주었다.
당시 17세였던 이씨는 응모자 중 가장 어렸다. 다른 수험자들은 모두 훌륭하게 보였는데, 이씨는 지금도 왜 자신이 합격했는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괜찮은 사람들이 대거 응모했다고 한다.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그해 6월 이씨와 합격자 일행은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2년 작정이었건만 영원한 이별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은 부산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다', '당했다', '이야기가 다르다' 며 상황을 알아챘다. 1개월만에 300명이 그만두었다. 질병·정신 장해·도망 등의 이유였다. 결원이 생기자 모집하지 않았던 조선 북부 4개 도에서 급히 인원을 보충하여 훈련하였다.
그들이 받은 정신 교육은 군인과 마찬가지로 '군인칙유'와 '전진훈'이 중심이었다. '군인칙유'라는 것은 '우리나라 군대는 대대로 천황이 통치한다'로 시작하는 칙유다. '전진훈'은 '살아서 포로의 수치를 받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포로를 감시하는 데 투입할 사람에게 웬 '전진훈'인가? 전진훈은 '포로가 되는 놈은 나쁜 놈이다'는 포로 경시 사상을 심어 주는 게 아닌가? 그들이 받은 신병 교육을 흉내낸 군속 교육 과정 동안 포로를 감시하는 임무에 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포로 취급 규정에 대한 취지를 가르쳤다는 일본인 장교의 증언이 있지만, 배웠던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군인칙유'와 '전진훈' 엄청 두들겨 맞았다는 것뿐이다. 교육할 때는 때린다.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을 때려도 좋다. 군율을 위반했을 때는 군법 회의에 회부하는 따위의 귀찮은 절차 없이 때려서 끝내는 것이 위반자를 배려해 주는 것이다. 죽어서도 포로가 되지 말라. 포로가 되기 전에 자결하라. 포로가 되는 자는 비겁한 자……. 2개월의 훈련을 통해 조선인 군속들은 일본군의 군대 문화에 젖어 들었다.
이학래 씨는 나이가 어리다는 단점을 극복하면서 어떡하든 뒤처지지 않는 것만 생각하며 2개월을 버텨냈고, 훈련이 끝나갈 무렵 이씨는 건장한 체격의 당당한 군속으로 변신하였다.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고, 그 조건을 보고 스스로 응모했다고 해서 일본 정부는 지원한 사람들이 자진해서 왔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형식은 지원이었다. 시대는 완전히 폐쇄된 상황이었다. 스스로 인생을 선택할 수 없었던 조선 청년들이 다른 길보다 좀 낫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 감시원이었다. 이를 지원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시대가 너무나 험악했다. 물리적으로 강제되어 끌려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