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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전

김형광 지음 | 시아출판사
김형광 지음

시아출판사 / 2007년 10월 / 515쪽 / 12,000원





새 시대를 열어간 선도자 : 이성계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든 큰일이며 하나의 민족사에 있어서도 큰 획을 긋는 대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빼놓고 조선의 인물을 기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성계는 고려 27대 충숙왕 4년(1335년), 아버지 이자춘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성계의 선조는 원래 전주사람으로 고조부 이안사 대에 간도지방인 남경으로 들어가 원의 지방관 벼슬을 하였다. 이 시기에 고려 조정은 반원정책의 기조가 높았고, 급기야 공민왕 5년에 쌍성총관부를 공략하게 된다. 이때 쌍성의 천호로 있던 이자춘이 내응하여 함흥 이북 지역을 탈환하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우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성계 집안은 고려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어느 시기에나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질시하고 경계하는 무리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하찮은 지방 군벌세력 출신인 이성계는 고려 정계에서 큰 탄핵 없이 입지를 굳혀 나갔다. 그가 수많은 전란에서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인간적 처세 능력도 무예 못지않게 탁월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이성계는 같은 무인도 아니고 기득권 세력도 아닌 조준, 권근, 정도전 등의 신진 유학자들과의 교분을 쌓았고, 그가 일생 동안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불교에 대해 배타적인 사상을 지닌 인사들과의 결탁을 통하여 지지 세력을 넓혀나갔다. 이와 같은 면에서 그의 탁월한 시대정신이나 정치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데, 최영이나 정몽주 등과도 그가 권력을 잡는 시기에 정치적 입장 차이로 반대 세력이 되었을 뿐 그 이전에는 어떤 기록에도 서로 반목하였다는 내용을 발견할 수 없다.



어쨌든 이성계는 장외세력이었던 개혁적 인사들을 포용하여 결정적 시기에 대업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의 일생에 가장 큰 대업이라고 할 수 있었던 위화도 회군은 그가 미리 준비한 쿠데타였을까? 아니면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애초부터 이성계가 권력을 탈취할 목적으로 계획한 사건은 아닌 것 같다. 당시 고려는 강대국인 명과의 무력을 불사할 정도로 안정적이지 못했다. 누적된 말기적 증상이 민생을 괴롭히고 있는 가운데 남부 지역은 왜구가 창궐하고, 북쪽은 전쟁에 대비한 성을 수축하는 데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구나 왕의 개인적 향락으로 불만이 많았던 백성들은 농번기에 군사를 소집하기까지 하자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정벌 반대의 소리가 높아지자 우왕은 비밀리에 출병을 거행토록 하였다. 그런데 정벌 반대 세력의 중심인 이성계를 출병의 주요 지휘관으로 삼았던 것이 결국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1388년,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를 그리고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지명했다. 그런데 최영에게는 평양에 남아 자신의 주변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정벌군은 출병한 지 약 3주 만에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게 되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탈주병이 끊이지 않는 등, 정벌의지가 크게 저조했다고 한다. 게다가 압록강 부근에 큰 비가 내려 부교가 떠내려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까지 발생하자 이성계는 그 유명한 '4불가론'을 내세워 정벌의 무리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 의견을 묵살하고 진군을 재촉하기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이 위화도 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가 게재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의 출병은 강군과 정병으로 잘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출정군의 서열을 볼 때 이성계는 독단으로 주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큼의 위치가 아니었다. 애초에 출정을 반대했던 그는 진군 도중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자 4불가론의 상소를 올려 출정을 철회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가 회군을 미리부터 계획한 것이었다면 아예 출정에 동조하여 병력을 장악할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즉 본의 아닌 북정 길에서 압록강을 건널 수도 없고 철군의 간청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회군을 결정한 것으로 보여 진다. 여하튼 출병군의 사기가 더욱 떨어지자 좌군도통사 조민수마저 회군에 동조하고 이성계는 마침내 군사를 되돌려 역사적인 회군을 하게 된다. 회군 병력에 수적으로 열세한 최영의 군대는 성문을 열 수밖에 없었고, 얼마 후 우왕이 창왕과 함께 참수됨으로써 사실상 고려 왕조는 종언을 고하게 된다.



새 왕조를 열고 왕위에까지 오른 이성계였으나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 젊어서의 발군의 판단력도 나이가 들자 흐려졌는지, 아니면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앞선 것인지 그는 개국에 공이 컸던 전처소생의 왕자들을 제치고 후처에게서 얻은 어린 왕자를 세자로 책봉했다. 불합리한 세자 책봉은 당연히 왕자들의 불평을 불러왔고, 결국 자식들 간의 살육극을 자초하고 말았다. 인생을 안온히 정리해야 될 노년에 이러한 비극을 겪게 된 그는 고뇌와 허탈감에 염불 삼매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7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천하를 호령하던 이성계였지만 모든 것을 이루고 난 후 방심을 한 것인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처럼 오욕으로 고통 받다가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천민출신 천재 과학자 : 장영실



장영실은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적 업적 가운데 가장 큰 부문을 차지하였던 과학 분야에서 높은 기여를 한 인물이다. 민본 군주인 세종대에 살아서 천민 출신의 그가 자신의 능력을 살리고 입신도 할 수 있었지만 또한 역설적으로 그와 같은 인재로 인하여 그 시절이 찬란한 문화 융성기로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라가 튼튼하려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믿은 세종은 그 시절 생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농업 활동의 발전에 대해 가장 고심했다. 여기에 세종이 시계와 역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이유가 있는 것이고 장영실이 만들어낸 발명품들이 당대의 경제 발전과 민생 안정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게 된 것이다. 지뢰밭 같은 인생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지만, 그러나 그도 단 한 번의 엄청난 실수로 인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한편으로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하여 공직자는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차원에서 느껴지는 바가 크다.



여러 분야의 발명과 기여

장영실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소항주 출신의 중국인이고 어머니는 동래현 소속의 기생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장영실은 동래현에 소속된 관노로 성장했으나 태종 12년(1412년) 즈음에 이미 발탁되어 궁중에서 전문기술자로 활약했으며 세종대에 와서 한층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세종 3년(1421년)에 천문기구의 제작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에 국비유학생으로 보내졌으며, 돌아온 후에는 왕실 사용 물품을 공급하는 상의원 별좌라는 종5품 벼슬을 제수 받았다. 엄격한 신분제도가 국가 운영의 기초였던 당시에 천민 출신이 이러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특별히 빼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또한 당시만 해도 조선 후기 사회처럼 신분 의식이 극도로 경직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장영실은 세종 14년(1432년)부터 추진한 의표창제(儀表創製) 사업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7년여에 걸쳐 진행된 이 국책사업은 예문관 제학 정인지가 총지휘를 맡고 공조참판을 역임한 과학자 이천이 실무 책임을 맡았는데, 장영실의 중추적인 역할로 많은 결실을 낳았다. 천문시계 혼천의(渾天儀), 다목적 자동물시계인 옥루(玉漏), 천체 관측기구인 대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해시계인 정남일구, 최초의 공중(公衆)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모두 이 기간 동안 제작되었다. 장영실은 독자적으로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는데, 여기서 보내주는 시보에 의하여 일반 백성들이 시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장영실은 자격루 외에도 각종 실용적인 기구들을 제작해 내어 과학 기술 진보에 앞장섰다. 특히 세종 16년(1434년)에 이천의 감독 아래 김돈, 김빈, 장영실 등이 보좌하여 주조한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는 활자체의 선명도와 인쇄 능률을 향상시켜 수많은 서적들을 출간해 낼 수 있게 했으니, 세종대의 문화 진흥에 큰 몫을 하였던 것이다.



납득되지 않는 역사에서의 퇴장

장영실은 과학 발전에 기여한 여러 가지 공로로 인해 벼슬이 정3품인 상호군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세종 24년(1442년), 그가 제작한 어가(御駕)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나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당시 장영실은 장(杖) 100대의 형벌을 받고 파직 당하는데, 이제까지 그를 아꼈던 세종은 장 100대를 80대로 감해 주었을 뿐 더 이상 구해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장영실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의 돌연한 퇴장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먼저 그에게서 찾자면, 당시 그의 직위로 봐서 가마의 실제 제작은 그 분야 전문 기술자들이 했을 것이고 그는 이 작업을 감독만 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평소에 정교한 물품을 발명해온 그가 임금의 어가를 소홀히 감독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당시의 사건은 가마에 누군가 손을 대 고의로 유발시킨 사고가 아닌가 추측된다. 사실 당시의 신분제가 후기처럼 경직되지 않았다고는 하더라도 노비에서 정3품 관직까지의 신분 상승은 사대부 세력에게는 고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의문점은 이제까지 그를 아꼈던 세종이 왜 끝까지 그를 구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세종은 원래 건강하지 못하여 병치레가 잦았는데 사고가 난 그 해에는 세자에게 섭정을 하게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다. 이런 처지에서 사고까지 당하였으니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되어 건강에 더욱 나쁜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일 것이다. 더구나 그 시절에 군주에게 위해를 끼치는 경우에는 대역죄로 처벌되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그나마 곤장을 맞고 파직한 것은 세종의 변호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장영실의 말로가 허무하게 추락해 버렸다 해도, 끊임없이 노력하여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정점까지 치달아 올라간 치열한 성취 과정은 우리에게 전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하겠다.

장영실이 동래현 소속 관노로 있던 시절의 일화는 그의 사람됨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하루 일을 마친 후에도 틈틈이 병기 창고에 들어가서 녹슬고 망가진 병장기와 공구들을 말끔히 정비했다고 한다. 고달픈 노비 생활 중에 자기 일이 끝나면 편히 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도 그는 스스로 일을 만들어 그것도 완벽하게 수행해 냈던 것이다. 그 후에도 갖가지 부문에서 자신의 과학적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차츰 주변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고 어느 시점부터는 주위 모두가 그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는 후원자가 되었다. 이것은 강고한 신분의 벽이 가로막혀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 장래를 위해 취한 계산된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저 매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의 능력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의 밝은 장래도 찾아온 것이다.



신념을 의지로 실천한 참된 지식인 : 김시습



김시습은 유(儒)·불(佛)·선(仙)을 아우르는 사상가이자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기인이었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비판과 야유를 넘어 일종의 허무의식까지 드러내기도 했는데, 그러한 인생관은 자신의 초상화 밑에 써넣은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읽을 수 있다. "모습은 지극히 약하고 말 또한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으로 너를 버릴지어다." 이는 마치 세상 속에 참여하지 않는 자신을 비판한 말 같지만 차라리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인간 의지에 기초한 현실적 실천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사상 체계는 성리학적 관점에서는 주기(主氣)이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서경덕과 이율곡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조선 성리학의 당당한 한 줄기가 되었다.

분노와 회한의 방랑생활

김시습은 세종 17년(1453년)에 충순위 김일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배우면 곧 익힌다'는 뜻으로 '시습(習)'이라고 지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려서부터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천재였다.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알았고, 3살 때에는 이미 시를 짓고, 『소학』 등의 책도 읽어 그 뜻을 깨달았다. 5살 때에 수찬(修撰) 이계전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공부하면서 그의 천재성이 장안에 널리 알려졌는데, 소문을 들은 세종이 지신사 박이창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라고 지시하니 그 나이의 아이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막힘이 없었다. 이에 세종이 비단 50필을 상으로 주도록 지시하면서 그 비단을 혼자의 힘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분부했다. 그러자 어린 시습은 각 필의 끝을 서로 묶은 다음 그 한쪽 끝을 허리에 묶어서 끌고 나갔다고 한다.



이렇듯 총명한 김시습이었기에 그의 나이 10여 세에는 익히지 못한 책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 그에게 액운이 거듭 닥치기 시작했는데,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3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중병을 앓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혼인을 하게 되었지만 시습은 삼각산 중흥사로 수학의 길을 떠나버렸다. 그런데 얼마 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피바람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김시습은 자신의 책을 모두 불태우고 머리마저 자른 후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사이 효령대군의 천거로 잠시 조정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공신 일색이던 조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금오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칩거하는 6~7년 동안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다.



성종이 보위에 오른 후에도 김시습의 방랑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우롱하고 비판하면서 세상을 떠돌았는데 한번은 서강 강변 정자에 걸린 한명회의 시를 다음과 같이 우롱하기도 했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청춘부사직 백수와 강호)" '젊어서는 사직을 짊어지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는 뜻이다. 이를 본 김시습은 실소와 분통을 터뜨리고는 부(扶) 자를 망(亡) 자로, 와(臥) 자를 오(汚) 자로 고쳐 놓았다. 이렇게 두 글자를 고치니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는 뜻이 되었다. 이처럼 기인 같은 행동을 표출하며 유랑을 하던 김시습이었지만 한때는 세상 속에 안주하기도 했다.



47세가 되던 성종 12년(1481년), 김시습은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이 안씨 부인을 맞아 가정을 꾸몄다. 그러나 1년 만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더구나 그해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자 김시습은 다시 방랑의 길에 나섰다.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무량사라는 절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처럼 살다가 성종 24년(1493년) 59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시신을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3년 후 장사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안온하였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스님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의 시체를 화장한 후 사리를 보관하는 돌탑을 세워 그 뼈를 거두었다고 한다.



김시습의 사상적 근저

김시습은 어떤 사상을 지녔기에 평생을 사색과 수도에만 정진하였을까? 김시습은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음양에 의해 설명하는 태극설을 주장했다. 즉, 우주만물이 조화하는 근원을 '태극(太極)'이라 상정하고, 음양(陰陽)에 의해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음양'은 결국 하나의 본질을 양면으로 바라본 이원론(二元論)적인 관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태극'이라는 것은 그 존재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는 도가(道家)적인 사유가 게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에게 있어 '태극'은 만물의 근원적 이치로서 변할 수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태초부터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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