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이, 밀고 당기는 심리학
김경희 지음 | 웅진리빙하우스
Part 1 우리 아이들이 슬퍼하고 있다우리 아이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 : 10년 전 나는 「한국 아동의 정서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라는 논문을 위해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아이들 49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갖가지 정서들을 언제 느끼는지,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는지 연령별로 면접과 설문지를 통해 조사했는데, 그 결과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슬픔의 이유에 관한 반응 빈도가 기쁨보다 많았고, 공포와 불안감 역시 많이 느끼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질병이나 가난, 학대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아이들은 대부분 기쁘고 행복한 유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문 결과는 그런 나의 생각이 자만이자 착각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미국 아이들은 기쁨을, 우리 아이들은 슬픔을 더 많이 느낀다는 내 연구 결과에 한 동료는 "미국 아이들은 영어 과외를 받을 필요가 없잖아. 그러니까 안 슬프지"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지만, 단순히 농담으로 받아들일 말은 아니다. 미국의 초등학생들은 학업 부담이 거의 없다. 아이들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면 취미생활을 즐기거나 신나게 논다. 이에 비해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영어, 수학 등 각종 과외로 채워진 아이들의 스케줄은 오후 8~9시나 되어야 끝난다. 회사로 치면 거의 매일 야근인 셈이다. 아이들의 삶을 이렇게 꾸려주고는 "왜 안 기쁘냐", "왜 슬프냐" 하고 묻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학력 위주의 가치관,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아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기대감은 과도한 꾸중과 잔소리를 낳고, 이런 엄마의 꾸중과 잔소리가 아이들을 슬프게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엄마들은 아이를 위해 야단친다지만 아이의 마음에는 퍼렇게 멍이 든다. 부모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능력 있는 아이도 행복한 아이라야 가능한 말이다. 불행하고 슬픈 아이는 능력 있는 아이가 될 수 없다. 이제 정서 교육으로 눈을 돌릴 때다.
슬픈 아이 조승희와 우리 시대의 비극 : 근래 들어 가장 충격적인 일을 꼽으라면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뉴스를 통해 처음 조승희가 언급되었을 때, 나는 그가 매우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보도에 따르면 조승희의 부모는 미국에 이민 온 지 5년 만에 14만 달러가 넘는 타운 하우스를 구입할 만큼 근면하고 성실했으며, 그의 누나는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수재였다. 누가 봐도 성공적인 이민 신화를 이룬 가족이었지만, 조승희는 이 가족의 신화에서 멀찍이 비껴선 아이였다. 이웃이나 학교 친구들 모두에게 그는 '무존재'였다. 심지어 가족과도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부모와의 의사소통이 단절되거나 부모의 애정이 결핍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심한 욕구좌절을 겪는다. 욕구불만은 대개 분노나 공격성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이 상상과 공상 속에서 발전하여 현실과의 경계가 무너지면 끔찍한 범죄를 불러온다. 부모로부터 방임된, 외롭고 쓸쓸한 아이였던 조승희가 이런 비극적인 참사를 벌인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들은 아이가 공부만 잘하고 있다면 다른 건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고 보는데 이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조승희도 버지니아 공대에 재학 중이던, 지적으로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이제 아이의 성적표 숫자에만 연연할 게 아니라 정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웰빙 바람을 타고 신체 건강에 대한 관심은 높아진 반면, 정신 건강에 대한 경각심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넌 공부만 잘해라. 다른 건 엄마가 다 해줄게" 또는 "엄마 아빠는 너무 바빠서 너랑 이야기할 틈이 없다"라고 하는 부모라면 어떨까. 섬뜩한 이야기지만 이런 부모들이 바로 제2, 제3의 조승희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정서와 지능은 함께 걷는 길동무 : 정서가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정서와 지능이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과 관련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신체 반응까지 조절하는 뇌의 영역은 변연계, 즉 '감정의 뇌'이다. 그런데 이 변연계의 위치가 제법 의미심장하다. 이성을 관장하는 전두엽과 동기 유발의 뇌 바로 아래, 그리고 '기억의 뇌'로 불리는 해마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 네 개의 뇌는 서로 맞붙어 있으면서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갖고 있으면 학습의 동기가 유발되고 기억력도 좋아지며 전두엽 전체의 활동이 활발해지지만, 반대로 우울한 기분일 때는 동기 유발의 뇌와 해마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공부할 의욕이 없어지고 성과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아이의 정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학습만 시키려는 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비과학적인 일인가. 아이가 인생이라는 경주에서 좋은 결과를 내길 바란다면 성적이나 지능 개발에 쏟아 붓는 노력의 절반이라도 정서교육에 투자해야 한다. 열등생 에디슨을 지적인 발명가로 키운 힘, 그건 바로 에디슨을 끝까지 믿고 지지해준 엄마의 정서교육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Part 2 슬픈 아이들이 보내는 SOS문제 행동 뒤에 숨은 여린 속마음 : 툭하면 학교에 늦는 지각대장, 엄마가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하는 말썽쟁이, 남 앞에서 쇼를 하고 이목을 끌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지나치게 얌전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 왜 이 아이들은 이런 문제행동을 보이는 걸까. '아이의 A라는 문제행동은 B라는 이유 때문입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전문가는 없다. 그 아이가 지금껏 자라온 환경, 타고난 기질, 지각 능력의 차이, 자극에 반응하는 속도와 강도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야 비로소 아이의 행동과 그 뒤 숨은 심리적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
슬픔이라는 정서 역시 표현하는 방식이 모두 제각각이다. 같은 정서라도 다양하게 표현되니 엄마는 아이의 진짜 속마음을 좀처럼 들여다보지 못한다. 실제로는 '엄마, 나 슬퍼요. 나 좀 안아주세요' 하는 SOS 신호인데, 엄마의 레이더에는 이것이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아달라는 아이에게 오히려 야단을 치거나 매를 때리는 비극이 초래된다. 현명한 엄마라면 문제행동 자체가 아닐, 그 뒤에 숨어 있는 원인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무조건 아이가 못됐다고, 괘씸하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를 먼저 생각하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면 아이에게 즉각적으로 화를 내는 일도 줄일 수 있고 아이의 진짜 속마음도 엿볼 수 있다.
가면을 쓴 말썽쟁이 : '가면우울증'이라는 게 있다. 내면은 우울한데도 우울하다고 느끼거나 우울함을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보면 된다. 가면우울증은 아이들에게도 많이 나타난다. 우울하고 슬픈 아이는 무조건 무기력하거나 의기소침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아이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아이들은 떠들썩한 말썽이나 친구를 때리는 등의 공격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우울함과 슬픔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슬픈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말썽쟁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셈이다.
아이의 문제행동에는 반드시 목적과 의도가 있게 마련이다. 문제행동을 멈추게 하려면 아이의 목적과 의도를 간파하고 그것과 반대되는 반응을 보여주어야 한다. 말썽쟁이에게는 부모의 관심을 끌거나 부모를 슬프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 따라서 아이의 말썽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말썽꾸러기 아이에게는 꾸중이나 야단보다는 차라리 무관심이 특효약이다. 아이가 못된 짓을 할 때마다 야단치고 소리를 지르면 나쁜 행동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만일 그냥 보고 있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그 자리를 뜨는 것도 한 방법이다.
대신 아이가 의도하지 못한 순간에 아이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관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행동을 했다면 크게 관심을 보여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말썽을 부릴 때 무관심하게 행동하고, 착한 행동을 했을 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면 아이도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부모의 관심을 끄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더 이상 말썽을 부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얌전하고 수줍음 많은 아이가 가진 함정 : 우리 사회에서 얌전한 건 미덕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 얌전하고 수줍음 많은 성격이 더 환영받는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에게 얌전하고 말 없는 아이들은 한마디로 '요주의 대상'이다. 아이라면 활기에 차 있고 떠들썩하게 마련인데, 지나치게 말이 없고 얌전하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수줍음 많고 말이 없는 아이에게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길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넌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정말 답답해 죽겠네" 식의 반응을 보이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얜 원래 수줍음이 많아요" 하고 낙인찍는 것은 아이를 더욱 위축시킨다. 어떤 부모는 수줍음 타는 성격을 개조하겠다며 아이를 일부러 사람 많은 장소에 데려가거나 대중 앞에서 발표를 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좋지 않다. 아이의 기질을 억지로 바꾸려 하면 부작용이 따른다. 단번에 강압적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일상에서 아이 스스로 자신감을 찾고 성취감을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많이 주는 게 좋다.
칭찬과 격려는 자신감을 쑥쑥 키워주는 보약이다. 다른 사람, 특히 부모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듣는 아이는 자존감 있고 매사 자신에 넘치는 성격으로 자랄 수 있다. 아이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일상에서 자질구레한 과제를 많이 주는 것도 좋다. 양말이나 속옷 널기, 저녁 식탁에 수저 놓기, 동생과 놀아주기 등 아이가 쉽게 해낼 수 있는 과제를 주고 아이가 성공하면 충분히 칭찬을 해준다. 아이가 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실수를 했을 경우 비난하지 말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일에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는 아이로 기를 수 있다.
툭하면 삐치는 아이 현명하게 달래기 : 통계적으로 보면 잘 삐치는 버릇은 주로 형제가 있는 아이들, 특히 맏이에게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엄마가 자기만 봐주고 자기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여주었으면 좋겠는데, 엄마 주변에는 항상 동생이 있다. 동생처럼 울고불고 자기 좀 봐달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다가는 형답지 못하다고 꾸중이나 듣기 일쑤고, 동생과의 차별화에도 실패한다. 맏이들은 동생과는 반대의 전략을 취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꾹 다문 채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났다는 표정으로 방에 쏙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쉽게 삐치는 건 엄마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어서다. 동시에 아이는 불안해한다. 엄마가 나를 달래주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이 방에 혼자 있다는 것조차 잊으면 어쩌나 하면서….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방에 들어간 아이는 지금 엄마의 사랑을 두고 베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는 주사위를 던졌다. 그럼 엄마는 아이의 베팅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
이런 경우 부모들은 대부분 아이를 달래러 방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 몇 번이지, 아이가 그 전략에 맛을 들여 연거푸 활용하기 시작하면 부모들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야단을 쳐도 아이의 태도에 변함이 없으면 부모들은 아이를 대놓고 무시하며 이죽거리는 방법을 쓴다. "내버려 둬. 쟤 원래 잘 삐쳐. 지가 나올 때까지 달래지도 마." 그러나 잘 삐치는 아이에게 무시하거나 이죽거리기는 좋은 처방전이 못 된다. 아이에게 더 큰 슬픔과 상실감을 주고 반항심을 부채질하기 쉬운 방법이다. 그렇다고 아이가 삐칠 때마다 번번이 달려가 달래주라는 뜻은 아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 스스로 기분을 풀고 나올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달래지는 말되 아이가 방 밖으로 나올 빌미를 제공해주는 방법이다. "사과 깎아놨어. 먹으러 나와" 하면 아이는 십중팔구 싫다고 소리 지를 것이다. 그러면 "그래? 알았어. 거실에 놓을 테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면 나와서 먹어.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게" 하면 된다. 아이들은 대부분 몇 분 후 쭈뼛거리면서 나오게 되어있다. 아이가 민망함을 견디고 방 밖으로 나온 이 순간, 엄마의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냥 웃는 얼굴로 아이를 맞아주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애초에 아이가 삐칠 만한 환경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때 곧바로 반응을 보여주면 아이는 절대 문제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혼자 노는 외톨이는 요주의 대상 : 언제부턴가 '은둔형 외톨이' 또는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들은 외면하고 싶은 현실,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사회와 격리한다. 청소년기 이전의 아이들은 원래 혼자 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관심과 주목을 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런 성향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아이라면 뭔가 이상이 있는 것이다.
혼자 놀면서도 활기에 차 있고 뭔가에 흥미를 느끼는 기색이 보이면 괜찮은데, 자발적으로 외톨이가 되는 아이는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다. 자폐아처럼 신체 생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이런 증세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부모로부터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면 어떤 아이는 아예 타인으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으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기도 한다. 말썽쟁이, 지각대장, 오줌싸개들은 포기하지 않고 제 목소리를 계속 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희망적이지만, 자발적으로 외톨이가 되는 아이들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을 다른 문제아들보다 훨씬 심각하고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다.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사건의 조승희 역시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늘 외톨이였다고 한다. 스스로 외톨이가 되려 했던 조승희는 끝내 타인으로부터 이해받고 사랑받으려는 노력 대신 극단적인 분노와 공격성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아이의 인생이 부모의 무관심과 방임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황량하게 망쳐질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아이들은 애초에 부모의 양육 태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므로 부모가 어떻게 해볼 단계가 아니다. 이런 경우 아이는 물론이고 그 부모까지도 반드시 전문가로부터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아이의 양육 환경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으면 아이를 상대로 상담과 놀이치료를 아무리 열심히 병행한다고 해도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변에 자발적 외톨이가 있다면 어떻게든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볼 수 있게 도와주길 바란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과 시선이 그 아이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구원할 수도 있다.
애정 없는 부모, 예의 없는 아이 : 식당이나 백화점,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다 보면 예의 없는 아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광경을 보면 나는 그냥 못 지나친다. 아이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제지하기는커녕 방관만 하고 있는 엄마들에게 한마디한다. "여보세요. 지금 당신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고 있으니까 얼른 데리고 나가주세요." 그런데 내가 이런 식으로 엄마들에게 따끔한 소리를 하면 오히려 한술 더 뜨는 엄마들이 많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는커녕 사나운 눈길로 째려본다. 심지어 "무슨 상관이에요? 애 기죽게…" 하며 따지고 드는 엄마들도 있다.
이런 엄마들에게 묻고 싶다. 이런 식으로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감싸주는 게 과연 아이를 위한 길일까. 공중도덕과 예의범절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덕목이자, 사회성 발달에 꼭 필요한 요소다.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모나지 않게 잘 살아가길 바란다면 예의 없고 버릇없는 행동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근의 예의 없는 아이들은 확실히 부모의 양육 태도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는 성적만 잘 나오면 된다는 부모들의 은근한 압력 행사 때문에 미국 교사들이 엄격한 인성교육을 포기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우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