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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성

츠위화 지음 | 시그마북스
1. 일본 여성의 결혼



일본은 원시사회 혈연관계의 탯줄을 그대로 달고 계급사회로 진입했는데 이는 결혼 형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방처혼이란 남녀가 결혼 후에도 각자 자신의 어머니 집에서 살다가 부부생활을 하고 싶으면 신랑이 신부 집을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 야마토 시대에 성행한 방처혼은 헤이안 시대까지 천 년 넘게 이어졌다. 방처혼은 모계제도의 흔적이 있는 혼인 형태로서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당시 일본 여성이 비교적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고 모권 역시 존중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7세기 씨족 중심 조직이 사라지면서 일본 평민 가정에서는 사위가 여자 쪽 집으로 들어가는 초서혼이 방처혼을 대신했다. 초서혼에서 남자는 여자 집에서 거주하면서 장인 장모를 부모님이라 불렀다. 사위라는 존재가 중요시되고 이를 인정하기 위해 결혼 의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 고대 최초의 혼례가 출현하였다. 초서혼의 전통은 무사계급을 제외한 다른 사회계층에서 쭉 이어져 무로마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초서혼은 일본에서 혼인 풍습으로 보존되어 왔는데, 오늘날 일본에서 흔히 보이는 데릴사위 아들 현상도 초서혼의 유습이다.



일본에서 부권제의 상징인 가취혼은 무사계급의 출현과 함께 나타났다. 가취혼에서 남성은 통치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지배당하는 지위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가취혼의 형성은 일본 가족제도 탄생의 기반이 되었으며, 가부장 제도의 확립을 가리킨다. 재산승계와 처리의 권한을 쥐고 있는지의 여부는 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가름하는 중요한 변수이다. 일본 여성은 과거에는 이 두 가지 권리를 모두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사계급 시대 장자계승제가 발전하면서 여성의 경제적인 지위는 독립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1898년 반포된 메이지 민법은 가장제와 남존여비를 핵심으로 하는 봉건가족제도를 옹호하였다. 혼인제도에 있어 개인의 의지는 무시되었고 남자와 여자는 불평등한 지위에 놓여 있었다. 결혼 후 아내는 남편을 쫓아 성을 바꾸어야 했고 남편에게 부속되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더라도 이혼을 요구할 수 없었다. 또한 친권을 행사할 수도 없고 남편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러한 혼인제도하에서 여자는 가장제의 속박과 함께 부권의 억압에 시달려야만 했다.



2차 대전 후 일본은 메이지 민법에 대폭 수정을 가했다. 신민법은 독재적인 가장제와 장자상속우선권을 폐지하고, 혼인 및 상속에 있어 부부 양측의 평등권을 강조했다. 이렇게 하여 한때 부권제의 상징이었던 가취혼의 면모와 내용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또한 사회적 지위와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여성들은 집 바깥의 사회에도 뛰어들었다. "남자는 밖에, 여자는 안에"라는 전통적인 사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여성이 가정 내 가장 낮은 곳에서 벗어나 남성과 평등한 지위를 쟁취하는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2. 일본 여성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왜 현모양처를 떠올리게 되는 걸까?



현모양처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에게 국가 차원에서 요구한 사항이었다. 1890년 일본은 교육칙어의 반포를 통해 여성의 역할을 아내와 어머니의 범위로 규정했고 여성이 주어진 역할을 훌륭히 이행함으로써 국가에 서비스하도록 하였다. 여성의 존재의의가 확장되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가정을 관리하는 책임까지 떠맡은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밖에, 여자는 안에'라는 성별 분업을 통해 여성들의 위치는 남성에게 완전히 종속된 관계에서 표면적으로나마 대등한 관계로 발전을 이루었다. 현모양처 개념은 일본 여성을 봉건시대의 속박에서 해방시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시켰으며,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현모양처 사상은 오래전부터 일본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후에 직장을 그만두고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것은 일본 여성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현모양처는 수많은 일본 여성이 가야 할 길로 여겨졌다. 특히 화려한 인생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현모양처의 길을 택한 여성들도 있다. 고통스럽고 피곤한 일을 기쁘게 받아들인 그들로 인해 사람들은 현모양처 사상의 힘에 감탄했을 뿐 아니라 일종의 경외심까지 품게 되었다.



일본 영화배우 야마구치 모모에는 1980년 느닷없이 은퇴를 결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그녀보다 일곱 살 많은 배우 미우라와 결혼했다. 그녀는 자서전 『푸른시절』을 통해 은퇴 전후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스스로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써 놓았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둥지를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사회에 나가서 일해야만 '자립'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자립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녀는 결혼 후 가정에만 전념하면서 자신이 말한 것을 실천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연예계 복귀를 기다려도, 남편 미우라가 이류 배우로 전락했어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은퇴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파파라치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두 아들의 학교 운동회나 집 근처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모습을 담을 수가 없다. 그녀의 생각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삶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80년대 〈배구부 여자 주장〉이라는 드라마로 스타덤에 올랐던 아라키 유미코는 당시 유명한 음악인 유하라 마사유키와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 후 1주일이 지났을 때 시어머니가 쓰러졌다. 그 후 그녀는 모든 연예 활동을 중단하고 병상에 누운 시어머니의 간병에 온 힘을 쏟았다. 외아들인 남편의 괴로움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시어머니의 병간호와 가정을 돌볼 책임을 도맡아 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결정이었다. 시어머니가 심각한 노인성 치매에 걸려 혼자 힘으로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묻는다.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나요? 그녀는 단호히 대답한다. "자신의 사랑과 완벽한 가정을 위해서 이러한 희생은 당연히 가치 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 일본 전업주부의 행복한 생활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업주부들 역시 독립적인 존재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존은 전적으로 남편에게 달려 있고 희로애락 역시 남편이 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의 거품경제가 무너지고 경제 침체기에 실업인구가 늘면서 국민총수입과 생활의 질이 낮아졌다. 이러한 일들은 전업주부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들은 전업주부의 역할에 대한 의미와 대가, 리스크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일본의 궁정 여성



일본 역사에서 여성 천황은 여덟 명이 있었고 총 10대 동안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 일본 여성의 지위가 높은 것은 아니다. 황위에 오른 여성 천황들은 모두 특수한 상황에서 천황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두 가지 상황이 있었다. 첫째 상황은 당시 황족 내에 남성 승계자가 있었지만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혈연관계를 가진 황녀를 선택한 경우이다. 스이코 천황과 메이쇼 천황이 전형적인 예이다. 둘째 상황은 왕위 계승자의 나이가 어릴 경우 황족 내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임시로 여성 승계자를 세우는 것이다. 부득이 하게 임시방편으로 내세웠다고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재위기간 중에 정치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어 남성 천황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현재 일본의 황후 미치코는 민간 출신이다. 1934년 도쿄에서 태어나서 성심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유명 대기업 닛신제분의 창업자가 아버지이다. 수려한 용모와 뛰어난 능력을 겸비한 재원이었던 그녀는 1957년 테니스 친선경기에서 아키히토 황태자를 만났고 아키히토는 미치코에게 한눈에 반했다. 황실 법도대로라면 황태자비는 황족이나 오섭가 출신이어야 한다. 하지만 황태자는 어머니와 궁중 보수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치코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결혼 후 황태자 부부는 37개국을 공식 방문했고 매년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국민들을 만나 민심을 살폈다. 미치코 황후와 아키히토 천황 사이에는 2남 1녀가 있는데 큰 아들 나루히토, 둘째 아들 후미히토, 딸 노리노미야 사야코이다.

현재 일본의 황태자비인 오와다 마사코는 어릴 적부터 해외생활을 해서 5개 국어에 능통한 재원이다. 하버드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86년 10월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무성 직원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의 운명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일이 생겼다. 일본 황실에서 스페인 공주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젊은 여성 직원 40명을 선발했는데 마사코가 포함된 것이다. 그녀와 일본 황태자 나루히토는 이 연회를 통해 서로 알게 되었다. 나루히토는 마사코에게 한눈에 반해 재빨리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외교관 생활을 꿈꾸던 마사코는 황실의 여러 가지 속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난감함을 느꼈다. 그녀는 결혼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5년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황실에 법도가 많지만 내가 평생토록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보호하겠소." 나루히토의 맹세에 마사코도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1993년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었을 때 여성 운동가들은 '커리어우먼도 황후가 될 수 있다'며 환호했다. 그들은 전문직 여성이 황실 가족이 되면 '남자는 밖에, 여자는 안에' 있는 일본 가정의 구조에 큰 변화가 발생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동화 속에나 가능한 결말임이 입증되었다. 현실생활에서 마사코는 자아를 잃었고 황태자 뒤에서 침묵하는 그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거수거수일투족에 규칙이 있고 틀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황실의 생활방식이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해외에서 성장한 그녀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안겨 준 것이다.



온갖 고생과 두 번의 유산을 겪은 후 2001년 12월 마사코는 귀여운 공주 아이코를 낳았다. 하지만 궁내청은 마사코에게 끊임없이 임신을 재촉하면서 황족과 일본을 위해 반드시 사내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다. 마흔 살이 된 그녀에게는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황태자 나루히토의 목표는 헌법을 수정해 황실의 승계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딸 아이코가 합법적 승계자가 되면 마사코가 대를 이어야 한다는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실 개혁에 큰 포부를 품고 있는 나루히토는 궁내청이 반대하더라도 딸 아이코는 반드시 천황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일본 언론이 '마사코 혁명'이라고 지칭한 이러한 목표가 이루어진다면 한때 외교관이었던 그녀가 일본 황궁의 현대화를 이끈 주역이 될 것이다.



4. 기모노를 벗어던진 일본 여성들



1980년대 일본에서는 25세가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두고 '크리스마스 케이크'라고 불렀다. 12월 25일 먹다 남은 케이크는 다음 날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꼬는 호칭에도 일본의 만혼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25세가 넘어도 결혼하지 않는 여성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일본 사회는 31세가 되어도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에게 주의를 돌렸다. 이들은 '섣달그믐 소바'라고 하는데 12월 31일 밤에 아무도 먹지 않은 소바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현재 20~40대까지의 일본여성은 풍요로운 물질과 개방적인 사상 속에서 자란 세대이다. 그들은 독립적이며 물질적, 정신적으로 수준 높은 생활을 원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생활방식과 전통적인 생활방식이 충돌을 일으킬 때 쉽게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아실현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는 독신, 만혼, 저출산, 이혼율 상승과 같은 사회현상으로 이어졌다.



현대 일본 여성이 결혼을 꺼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결혼 후에 일을 포기하고 남편을 내조하라는 남자들의 요구사항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상대를 고를 때 까다롭고 현실적이다. 그들은 높은 수입과 좋은 학벌, 건강한 체격을 갖춘 남자이거나 결혼 후에도 아내가 계속 일하는 것에 동의하고 가사를 함께 책임질 남자를 구한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만족시킬 남성은 많지 않고 결국 일부 여성들은 독신을 선택한다. 결혼은 이제 일본 여성에게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닌 것이다.



일본의 독신 여성들은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산다. 다카스 미유키는 은행 출납원이다. 그녀는 매일 BMW를 몰고 출근하며 샤넬 핸드백을 들고 다닌다. 휴가 때는 해외여행을 떠난다. '다정한 애인 찾기'라는 모임도 만들었다. 그렇다고 결혼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친한 남성들과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서양에서는 여자가 결혼한 후에 일을 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결혼한 여자는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부모에게 기생하고 있는 독신 여성들은 젊었을 때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고 싶어한다.



일본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서 회사원들의 삶도 힘겨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결혼과 가정을 포기한 독신 여성들일 것이다. 일이 생활의 중심이었던 사람들이 직장에서 구조조정이나 감원의 대상이 되자 피해의식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한 여성은 말한다. "결혼까지 포기하고 일해 왔는데 최근에는 모든 남자 동료들이 저를 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매년 섣달그믐 밤이면 지하철 종점에서 만취한 독신 여성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추운 밤 휘몰아치는 차가운 바람과 목 놓아 우는 소리 속에서 새해를 맞이한다.



일본에서는 남자가 고위직을 맡으면 장수하고 여성이 고위직을 맡으면 일찍 죽는다고 한다. 여성의 업적이 남성보다 월등히 뛰어나지 않으면 여성은 승진할수록 더욱 압력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성공한 독신여성들이 겪어온 험난한 길과 고단한 내면은 남성들이 상상할 수도 없다.

5. 일본 여성의 독특한 성과 사랑



일본에서는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고도 한 번도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 여자아이에게는 일종의 치욕이다. 그녀가 이성의 사랑을 받지 못할 정도로 매력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아이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처녀 딱지를 떼고 싶어한다. 반면 남자친구를 많이 사귀어 본 아이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전쟁 후 일본에서 점점 딱딱하게 변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발이고 또 하나는 여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가장 뚜렷이 나타난 여권의 상징은 성에 대한 개념의 변화라고 한다. 일본의 한 잡지에서 300명의 회사 여직원에게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은 6~10명 정도의 남성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여성에게 파트너의 용모나 체력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나를 즐겁게 해 주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일본 여성들은 성애를 추구하고 즐기는 행동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경험을 글로 표현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용기도 보여주었다. 오늘날 여성이 성애소설을 쓰는 것은 일본의 유명배우 미야자와 리에가 불러일으킨 누드사진 촬영 열풍처럼 유행하고 있다. 2003년 한 잡지는 성애를 주제로 일반 여성이 쓴 소설을 모아서 『검은 책』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다. 22편의 작품을 실었는데 모두 성교 자체를 중심으로 각종 욕망과 쾌감을 직접적이면서 섬세하게 묘사했다.



바람난 부부의 성애를 묘사한 『뒷모습』이라는 소설은 작가 이이 가지요가 쓴 작품이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고 몇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하지만 성애소설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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