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한국사
김갑동 지음 | 애플북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라이벌들
미완에 그친 시대적 요구
- 삼국 통일인가 반도 통일인가 : 남북국의 성립과 김춘추 vs. 연개소문
반도 통일과 남북국의 성립
김춘추의 외교 전략이 성공함으로써 나당 연합군이 편성되자 나당 연합군은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신라 무렬왕 7년)에 계백이 지휘한 5,000의 백제군을 황산에서 격파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 후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 장자 남생이 당에 투항하게 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고구려는 구심점을 잃고 좌초했는데, 결국 668년에 고구려는 당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에 698년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함으로써 압록강 중류 지역을 포함해 송화강 유역 및 한반도 동북부와 시베리아 연해주까지를 잇는 발해와,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이남의 땅을 차지하게 된 통일신라가 서로 대치함으로써 남북시대가 형성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을 당하고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대두되는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과 김춘추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가 되는 인물이다. 첫째, 두 사람 모두 귀족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김춘추는 진골 출신으로서 중고기(中古期)의 왕위계승전에 패배한 사륜(司輪) 계열이었다. 연개소문은 조상 대대로 호족 출신이었고, 조부와 부친이 모두 막리지를 역임했다. 둘째, 김춘추는 대범하고 관대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성적이면서 감성적인 인물이었다. 연개소문은 성격이 잔인하고 난폭했으며, 싸움을 잘하는 무사로서 평소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몸에 차고 다님으로써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셋째, 김춘추는 대신들이 왕으로 추대할 만큼 인격이 후덕했고, 대인관계가 원만함으로써 평판이 좋았으며, 때를 기다릴 줄을 아는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연개소문은 매우 독선적이고 성급한 성격으로서, 대신들이 왕과 결탁해서 그를 제거하고자 했을 때 선수를 쳐서 영류왕과 이하 수많은 대신들을 주살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했던 인물이었다. 넷째, 김춘추는 거시안적(巨示眼的)인 시각을 가진 인물로서 매우 탁월한 외교적인 수완을 가지고, 일본을 설득시키고, 당을 설득시킴으로써 나당 동맹을 맺어 신라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미시안적(微示眼的)인 안목의 소유자로서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나라를 고립무원에 빠지게 했다. 다섯째, 김춘추는 신라 통일을 완수하고, 신라인들의 사기를 극대화시키고 백성들을 결집시킴으로써 당을 한반도에서 밀어내는 데 기여하게 만들었다. 연개소문은 독재정치로 고구려 사회를 경직화시켰고, 유연하게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괴함으로써 그가 죽은 다음에 고구려 멸망의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한 시대가 저무는 자리, 승자는 누구인가
집안싸움에 고래 등 터지다? : 구한말의 쇄국. 개화 정책과 대원군 vs. 명성황후
한일합방의 비극을 낳은 앙숙 관계
조선은 정조가 1800년 48세의 나이로 급서하자 11세의 순조가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외척의 발호, 즉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에 조선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인물이 흥선 대원군과 민비다. 이 두 사람은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를 잡고 대립과 투쟁으로 일관함으로써 조선 역사에 상처를 남긴 인물들로 평가된다.
1853년 철종이 서거하자 조대비(헌종의 왕비, 신정왕후)의 결정에 따라 흥선군의 둘째 아들 고종을 왕으로 책봉하게 되었다. 이 당시 고종의 나이가 12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고종의 친부인 흥선 대원군이 섭정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흥선군은 정권을 잡자 외척의 전횡을 억압하고 신분을 구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호포제를 실시해 당시 상민에게만 부과하던 호포를 양반에게도 부과했고, 환곡제(還穀制)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함으로써 농민들이 실제적으로 구휼 혜택을 받게 하고, 공직자 사정 작업을 과감하게 실시했다. 당시 국가 경제와 지방 백성들에게 심각한 폐해를 끼치고 있었던 서원을 철폐했으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경복궁 재건사업을 시도했는데,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는 과정에서 유통 경제의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국제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 사건, 1871년 신미양요 사건을 계기로 개방의 문호를 닫고 쇄국정책으로 전환했다.
고종 3년에 철종의 3년 상이 끝나자 고종의 왕비 책립 문제가 지대한 관심사로 떠올랐는데, 이때 대원군은 외척 발호의 가능성이 없는 적절한 인물을 물색하다가 민비를 발견하고 고종의 왕비로 최종 간택을 했다. 민비는 처음에는 대원군과 갈등이 없었지만, 궁정 생활에 익숙해지고 정치적인 식견이 열리게 되면서, 고종의 친정 체제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끼게 되어 정치적으로 변모했다. 먼
저 자기 사람들을 주변에 포진시키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친 민비는 서원 철폐로 원한이 많았던 유림 세력의 거두인 최익현을 이용해서 대원군 탄핵 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흥선군을 권력의 자리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발발함으로써 민비의 측근인 민겸호와 이최응이 살해를 당하고 민비가 습격을 받게 되자 민비는 충주로 도피함으로써 위기를 면했다.
고종은 사태수습을 위해서 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였으며, 대원군은 집권하자 민비의 국상을 발표했다. 이는 임오군란의 표적이 되었던 민비의 죽음을 발표해서 난동을 멈추게 하고, 민비가 살아 있어도 정치적 야심을 포기시키려는 심리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원군의 처사에 반발했던 민비는 비밀리에 고종과 연락을 취하고 청의 이홍장에게 대원군의 납치를 부탁했다. 청은 민비를 통해서 조선에 발판을 마련할 기회로 삼고자 민비의 요구를 수락함으로써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했다. 다시 정권의 실세로 등장한 민비는 고종 22년, 대원군이 청에서 돌아오자 대원군의 거동을 운현궁으로 제한함으로써 대원군을 사실상 유폐시켰다.
민비가 집권하는 동안 전봉준의 지휘하에 농민들을 중심으로 동학혁명(1894)이 일어났다. 이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일본군을 동원함으로써 금강치 전투에서 전봉준을 사로잡고 동학혁명을 평정했다. 동학혁명 진압을 계기로 조선정부에 확고한 발판을 구축한 일본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조각하게 하고 민비정권을 억압했는데, 이는 민비가 반일 친러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민비가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앞장 세워 재집권을 시도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의 마우라 공사는 고종 32년(1895)에 낭인들을 동원해 민비를 살해했다. 이때 민비의 나이가 44세였다. 이 민비 시해의 사건 배후에 대원군(당시 76세)의 동의와 지시가 있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사실은 얼마나 대원군과 민비의 알력이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이 사건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대원군과 민비 사이에 끼어 있는 고종의 역할이다. 만일 고종이 지혜롭고 현명한 인물이었다면 이 둘 사이를 효과적으로 조율함으로써 이렇게 까지 극단적인 사태로 몰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권력 투쟁은 국권을 약화시키고, 국가 에너지를 낭비함으로써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할 뿐인 것이다.
같은 신념 같은 길, 역사 속 동반자들
빼앗긴 땅, 정신만은 지키리라 :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학과 신채호 vs. 백남운
일제 식민사학에 맞선 지식인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일본은 식민통치를 위해서 다양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역사 왜곡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침략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학자들을 동원해 역사를 왜곡했으며, 이 역사왜곡으로 한국 민족을 패배주의적 운명론에 빠지게 하고 항일 운동의 싹을 자르고자 했다. 이것이 식민사관이다.
일본의 식민사관의 내용을 보면, 첫째는 타율성론으로 한국의 수 천년 역사가 북쪽의 중국, 몽골, 만주와 남쪽의 일본 등 이웃한 외세에 의해 침략과 압제 속에서 비주체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반도적 성격론으로서 한국사의 최대 형성 요인을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본 이론인데,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으로 한국은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략을 받음으로써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생래적으로 사대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정체성론(停滯性論)으로서 한국이 왕조 교체 등 사회적 변혁 속에서도 사회경제 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해 전 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사학에 대해 당시 양심 있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 허구성을 타파·극복하려 했는데, 그 한 일파가 민족의 혼과 정신을 일깨우려한 민족주의 사학이며, 다른 일파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발전성을 강조하려 한 사회경제사학이었다. 전자의 대표는 신채호(申采浩, 1880~1936)를 들 수 있고 후자의 대표로는 백남운(白南雲, 1894~1979)이 있다.
신채호의 사상이나 역사관은 대략 3기로 구분되는데, 1기는 1905년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재직할 때부터 1910년 국외 망명 전까지다. 그는 초기에는 영웅사관을 내세우고, 후기에는 '신국민설'을 내세워 국민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웠다. 신채호는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을 민족사의 영웅으로 내세우고 그들의 전기를 신문에 연재함으로써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감을 높이고자 했다. 다음은 신국민설로서 당시 민족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주체적인 변혁을 이루지 못하고 식민지화의 위기에 빠진 원인은 신국민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2기는 1910년부터 1923년까지로 그가 저술한 《조선상고문화사》를 통해 만주·한반도는 물론 부여족 식민지로서의 중국까지 우리 역사에 포함시킴으로써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고양시키고자 했다. 3기는 1923년 《조선혁명선언》을 쓴 이후부터 말년까지로 민중적 민족주의, 나아가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민중의 폭력혁명론을 이론화했다.
백남운은 191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고등상업학교 예과에 입학하고, 1922년에는 본과에 진학해서 조선 경제사 연구에 착수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정리를 해 나갔다. 그의 역사관은 크게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역사는 과거의 역사적, 사회적 발전의 변동 과정을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으로 규명하고 그 실천적 동향을 이론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실천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는 세계사 속에 보편적이고 일원론적인 역사 발전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역사도 세계사의 발전 법칙 속에서 이해할 때 식민사학이 설정한 정체성,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식민사학들의 '봉건제 결여론'을 비판하면서 한국에도 봉건제가 존재했음을 역설했는데, 특히 고려시대에 토지국유제를 물질적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적 봉건사회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본 학자들의 식민사관을 비판했다.
딜레마에 빠진 라이벌들, 역사에 질문을 던지다
반란의 또 다른 이름 '개혁' : 고려 중기의 모순과 묘청 vs. 김부식
반역자 묘청과 영웅 김부식 - 역사의 시각에 의문을 던지다
고려왕조는 지방 호족들의 협조로 건국·통일되었기 때문에 그 초기에는 호족 연합 정권적인 성격을 띠었다. 태조는 호족 연합 정책의 일환으로 호족들의 딸들과 정략적인 혼인을 해 20명의 후비를 두었는데 여기에서 난 자식만 25명의 왕자와 9명의 왕녀가 있었다. 이는 권력 쟁탈전을 야기함으로써 고려 정국을 혼란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으며, 광종과 성종 대에 왕권의 안정이 잠시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외척의 발호가 심화되어 고려 정권은 늘 소용돌이치는 불안정한 정국이었다. 외척의 발호는 난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이자의 난, 이자겸의 난이 외척이 일으킨 난으로 유명하며, 모두 실패한 난으로 끝났다. 이와 같이 어수선한 시대에 불교 승려 묘청이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묘청은 서경천도파의 주동자로서 《고려사》 권 127 묘청전의 내용이 묘청에 대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능했던 인물로서 서경의 일관(日官)인 제자 백수한(白壽翰)과 음양비술(陰陽秘術)로 백성들을 현혹했다. 묘청은 당시 고려 수도였던 개경이 지덕이 쇠진하니 궁궐이 불타 없어질 것이고 서경은 왕기(王氣)가 있어 그곳을 수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종도 이들의 말에 현혹당함으로써 왕 5년에 서경으로 행차하여 관정도장(灌頂道場)을 베풀고 유신정령(維新政令)을 반포했으며 인종왕 6년(1128)에는 임원역 땅에 대화궁을 짓기까지 했다.
그러나 묘청과 백수한의 요청대로 왕이 서경에 행차할 때마다 홍수, 한발, 폭풍, 우박, 낙뢰의 재변이 꼬리를 물로 일어나자 대신들의 여론이 악화되었고 묘청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으며, 왕 또한 등을 돌렸다. 이처럼 묘청의 서경천도 주장에 대한 왕의 태도가 부정적으로 바뀌자 묘청은 서경천도의 한계를 깨닫고 인종 13년(1135)에 분사시랑 조광, 분사병부상서 유감 등과 더불어 거사를 일으켰는데, 이들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그들의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했다.
이에 조정은 김부식을 원수로 한 토벌군을 편성하게 되었다. 김부식의 대군이 출정하자 조광 등은 정부군의 위세에 전의를 상실했고, '묘청의 난'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함으로써 묘청, 유감 및 그 아들 유호의 머리를 베어 윤첨을 통해 조정에 바쳤다. 김부식은 3인의 머리를 효수하고 윤첨을 옥에 가두었는데, 투항한 윤첨이 투옥되자 조광은 태도를 바꾸어 정부군에게 저항함으로써 반란을 진행시켰다. 인종 14년 2월에 김부식이 총공격을 가하자 조광이 중과부적임을 알고 자살함으로써 서경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묘청의 난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사》가 문신 위주로,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적인 입장에서 서술되었으므로 승려 출신인 묘청에 대해 공정성과 객관성을 결여했다는 것이다. 또한 묘청 일파가 주장한 금국정벌론은 무리한 주장이기는 했지만, 이자겸, 척준경이 군신의 예로 금나라에 굴복해야 한다는 사대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태도에 비교한다면 자주적이고 주체적이며, 또한 묘청 일파가 벌인 일련의 행동은 일종의 현실 개혁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인종 5년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내린 유신정령(維新政令)을 보면, 모두 15개 조항 중에서 풍수지리에 관한 것은 1개 항뿐이고 4개 항은 훌륭한 인재 선발에 관한 것, 10개 항은 모두 일반 백성의 생활 향상에 관련된 것들로서 묘청이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묘청을 긍정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인물이 신채호다. 그는 이 사건을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면서 "조선 천 년 이래 제일 큰 사건"이라고 평했다.
묘청 일파를 토벌한 김부식(1075~1151)은 숙종 대에 과거에 합격하여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 후 한림원, 우사간,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했다. 예종 말년 경에는 청연각과 숭문전에서 왕을 모시고 《주역》이나 《상서》를 강의했고, 정치의 정도와 고금의 득실을 논했다. 김부식은 외국에까지 알려질 만큼 학문이 뛰어난 인물로서 송나라의 사신을 수행한 서긍(徐兢)이라는 사람이 김부식의 인품을 사모하여 김부식의 화상을 그려 황제에게 보고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은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이 역사서는 보물 같은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