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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존 프릴리 지음 | 민음사
비잔티움



해협과 도시, 기원전 658년까지 : 이스탄불로 가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이 도시의 탄생 이후 첫 26세기 동안, 그러니까 이 도시가 비잔티움으로, 그 다음엔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는 동안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다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마르마라 해와 흑해 사이에서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해협 보스포루스 입구의 양쪽 언덕들에는 돔 지붕들과 첨탑들이 솟아 있다. 이곳은 16세기 가까이 세계적인 두 제국의 수도였던 진정한 제국의 도시다. 배가 골든혼(세계 각지의 귀한 물건들이 집결하는 항구이며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황금의 뿔'이란 뜻을 얻었다.) 어귀를 건너 유럽 쪽 해안에 위치한 보스포루스의 남쪽 부두로 다가가면 해협 양쪽 언덕들 꼭대기에 남아있는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유적들이 보인다.



보스포루스의 양쪽 해안은 무수한 만들과 항구들로 들쭉날쭉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보통 한쪽이 만이면 반대쪽 해안의 같은 지점에는 곶이 있다. 언덕들과 계곡들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봄에는 유다나무의 진분홍색 꽃이 도처에 만발한 연 자주색 등나무 꽃과 마로니에의 붉은색, 흰색 꽃과 어우러져 보스포루스에 빼어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특히 늦은 4월과 이른 5월 밤에 나뭇가지에서 나이팅게일이 정답게 세레나데를 부를 때면 그 노랫소리가 우리의 꿈결 속에 울려 퍼진다.



이스탄불을 잠시 찾는 방문객은, 특히 겨울철에 방문한다면 보스포루스가 괴팍하고 위험한 물이 될 수도 있음을 믿기가 어려울 것이다. 보스포루스의 불규칙한 흐름과 역류, 이 혼잡한 국제적인 물길에서 항해를 돕거나 방해하는 갖가지 바람들, 자욱한 안개, 가끔 해협을 막는 빙산을 보게 되면 이곳이 제어할 수 없는 바다의 일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비잔틴 제국의 명장 벨리사리우스는 무적의 고래 포르피리와 맞서 싸웠으며 이곳에서 모비 딕은 수개월 동안 모든 배들을 난파시켰고 이곳에서 페트루스 길리우스(16세기 중엽 집필 활동을 했던 프랑스인 학자)는 자신이 본 것 중에서 가장 거대한 상어를 목격한다. 물결이 잔잔한 한겨울 동지 무렵에는 해협을 지나는 돌고래 떼가 파도와 장난치는 광경을 볼 수 있으며,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비잔티움의 초기 동전들에 돌고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게 생각난다.



그리스 신화에 보스포루스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처음으로 에게 해 헬레스폰트 너머의 세계와 교류하기 시작했던 기원전 2000년 후반인 청동기 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신화들 중에는 제우스와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 이오의 이야기도 있는데 제우스는 질투심 많은 아내 헤라의 눈을 속이기 위해 이오를 어린 암소로 둔갑시킨다. 그러나 헤라는 속지 않고 무자비한 쇠파리를 시켜 이오를 쫓게 하며 결국 이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해협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때부터 '이나코스의 딸이며 제우스의 연인'인 이오를 기리는 뜻에서 그 해협은 '암소의 여울'이란 의미의 보스포루스란 이름을 갖게 된다.



제국의 도시 이스탄불은 맨 처음 그리스 식민지 비잔티움으로 탄생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비잔티움은 메가라인 비자스가 세웠으며 비자스는 제우스와 이오의 딸 케로시아와 포세이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신화가 있다. 비잔티움인들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고대의 자료들에는 거의 없고 얼마 안 되는 기록들에는 대개 고대의 민주주의와 상업의 전통, 그리고 혈맹 관계였던 비잔티움과 칼케돈 사람들의 향락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비잔티움이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 것은 비잔티움인들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비잔티움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 중의 하나는 어업이었고 또 다른 비잔티움 주민들의 수입원은 해협을 지나는 배들에게서 거둔 통행료와 정박료여서 비잔티움은 처음부터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배했던 것이다. 페르투스 길리우스는 보스포루스를 이렇게 지적했다. "보스포루스야말로 비잔티움의 시조 비자스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한 비잔티움의 첫 창조자이다." 그리스 식민지 비잔티움은 그렇게 생겨났고 이내 '도시 중의 도시'가 되었으며 그곳을 수도로 삼았던 제국들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제국의 도시다운 장려함을 간직하고 있다. 196년에는 로마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비잔티움이 함락되면서 자주권을 지닌 그리스 도시국가로서의 역사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나 로마의 도시국가로 새 삶을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330~337 : 로마의 도시국가로서 새 삶을 시작한 비잔티움은 이후 많은 침략과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312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단독으로 통치되기에 이른다. 새로 재건된 도시는 노바 로마라는 공식 명칭이 있었지만 대중들 사이에서는 처음부터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그리스어 콘스탄티노폴리스(영어로는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하지만 토박이들은 스스로를 '비잔티움'이라는 뜻의 '비잔티니'라고 칭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더 큰 규모로 재건하기로 결심한다. 그 이유는 이미 오래전에 제국의 행정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로마보다 비잔티움이 수도로 더 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게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는 이교적 전통이 강했던 로마를 제국의 수도로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도시를 세계 최초의 기독교 수도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새 수도에 많은 교회들을 설립하거나 재건한 것으로 자료에 나오는데 하기아 소피아, 하기아 아레네, 성사도 교회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가장 믿을 만한 자료는 5세기 역사가 소크라테스의 것으로, 콘스탄티누스가 성사도 교회 건립과 하기아 이레네 복원에만 관련되어 있으며 하기아 소피아는 그의 아들(콘스탄티우스)이 황제 올랐을 때 첫 건물이 완공된 것으로 되어 있다.



새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5세기 말에 씌어진 조시무스의 『히스토리아 노바』에 들어 있다. 조시무스는 새 도시의 범위를 설명한 뒤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수도를 장식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들을 소개했는데 특히 히포드롬(주 기능은 경기장이며 전차 경주와 서커스 공연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대중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했다)에서의 전차 경주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는 다음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경주는 기쁨보다는 분노를 부르는 듯하며 이미 몇몇 중요한 마을들이 파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경주는 재산의 탕진과 범죄, 죽음으로 이어진다. 남자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가족이나 조국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실로 경주는 만연한 정신질환이라고 할 수 있다.' 히포드롬에서의 과도한 열기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무덤으로 삼기 위해 지은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그가 이 도시를 세계 최초의 기독교 수도로 만든 지 16세기하고도 반세기가 더 지났지만 그리스정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의 축일이면 예배식을 열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527~565년 :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는 비잔틴 제국의 황금기이다. 유스티누스 황제는 527년 초 중병에 걸리자 자신의 처형 아들인 유스티니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유스티니아누스시대에 그가 가장 먼저 세운 건축물은 마라바라 해변 히포드롬 아래에 있는 성 세르기우스와 바쿠스 교회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유스티누스에게 황위와 함께 싸움에 대한 책임도 물려받았는데 제국의 동부 전선에서 유스티누스가 죽던 해에 프러시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는 긴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동부와 서부 전선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들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던 중 폭동으로 인해 교회인 하기아 아레네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폭동 진압 후 대대적인 복구 진압이 시작되었고 테오도시우스 교회의 폐허 위에 새로 하기아 소피아를 세우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위기에 대한 자료에 따르면 "황제는 비용 문제는 개의치 않고 전 세계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축조 작업을 강력히 추진했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수석 건축가는 트랄라스 출신의 안테미우스로 당대 최고의 수리물리학자였으며 아테네에서 플라톤 학파의 수장을 지낸 저명한 수학자인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루스가 그를 도왔다. 교회는 6년 만에 완공(537년)되었다. 최근의 한 연구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 시내와 외곽에 마흔 개의 교회를 지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하기아 소피아, 하기아 이레네, 성 세르기우스와 바쿠스 교회뿐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종교적 통합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제국 내에 남아 있는 이교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고자 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주목할 만한 조처는 529년에 이교 철학의 마지막 본거지였던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폐쇄한 것이다. 아카데미의 폐쇄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에 고전 문화의 마지막 르네상스가 찾아왔는데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들이 야만인들에게 짓밟힌 뒤라 그 장소는 콘스탄티노플이 되었다. 그것은 이교적이기보다는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긴 했지만 그리스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었고 사실 콘스탄티노플에서 라틴어는 거의 행정과 법 용어로밖에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아내(테오도라)가 죽은 후엔 딴사람이 되어 측근들로부터 멀어지고 국사를 소홀히 했으며 결정들을 미루고 신학의 심오한 문제들에만 매달렸다. 그의 황제로서의 원대한 꿈은 이미 실현된 상태로 그의 제국은 이제 페르시아 국경에서부터 소아시아, 발칸 반도, 이탈리아까지 뻗어 나갔으며 스페인의 남서 해안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서도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여든세 살을 일기로 38년이 넘게 제국을 다스린 뒤 서거했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유스티니아누스를 높이 평가하며 하기아 소피아의 축조와 잃어버린 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겠다는 그의 야심을 높이 사서 그의 재위기를 비잔틴 역사의 황금기로 보고 있다.



천 년 전 유스티니아누스의 건축물이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는데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의 사절단이 제국의 도시에 다녀와서 하기아 소피아에 대해 경외감에 차서 한 말이 그것이다. "저희는 천상에 있는지 지상에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상에는 그러한 장려함이, 그러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상을 뜨고 몇 해 안 되어 침략자들에 의해 사방에서 국경이 뚫리기 시작했고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비잔틴 제국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을 쳐야 했다.



이스탄불



비잔틴 제국의 멸망 1354~1453 :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세기는 1354년부터 시작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급속한 부상은 유럽의 기독교 세력을 놀라고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는 1451년 술탄이 된 즉시 콘스탄티노플의 정복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당대의 많은 연대기 작가들이 투르크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의 참상에 대해 썼는데 그중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은 임브로스 출신의 크리토볼로스의 것으로 4,000명가량의 콘스탄티노플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크리스토볼로스는 술탄 메메드가 자신이 정복한 위대한 도시에 입성하면서 도처의 파괴현장을 보며 충격을 받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해 놓았다. '술탄은 도시로 들어가 그 거대한 규모와 위치, 그 장대함과 아름다움, 그 넘치는 인구, 그 매력, 교회들과 공공건물들의 화려함을 목도했고… 무수한 주민들이 목숨을 잃고 도시가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보고 연민에 가득 차서 파괴와 약탈을 꽤 후회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깊고 뜨겁게 탄식했다. "이런 위대한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하다니!"'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소식이 서방에 처음 전해진 것은 1453년 6월 9일이었다. 크레타 중부 가라토스 수도원의 필경사는 그 소식을 듣고 이렇게 기록했다.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사건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참담한 심경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슬퍼하는 내용의 그리스 민요들에 아직도 남아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1453~1520 : 술탄 메메드 2세는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늦은 오후, 콘스탄티노플에 당당히 입성했다. 투르크인들은 그를 파티흐(정복자)로 맞이했으며 이후 그는 파티흐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그는 술탄 자리에 오른 지 2년이 좀 넘었고 겨우 스물한 살이었는데도, 투르크인들에게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를 함락시킨 것이다. 17세기 투르크의 연대기 작가 에울리아 첼레비는 『한 여행자의 기록』이란 저서에서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윽고 술탄이 터번과 하늘색 장화 차림으로 손에는 마호메트의 칼을 들고 노새를 타고 칠팔만의 무슬림 영웅들을 거느리고 행진해 들어오며 외쳤다. "정복자들이여, 멈추지 마라! 신을 찬양하라! 그대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들이다!"'



정복자 메메드는 기독교 세계에서 뿐 아니라 이슬람 세계에서도 잘 알려진 대교회 하기아 소피아로 곧장 달려가 노새에서 내려 무릎 끓고 앉아 겸손의 표시로 흙을 한 줌 집어 자신의 터번 위로 뿌렸다. 그런 다음 교회를 둘러보고는 즉시 '아야 소피아 자미 카비르(하기아 소피아 대(大) 모스크)'라는 이름의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도시를 점검한 후 복구가 끝나고 다시 주민들을 채우는 즉시 이스탄불을 자신의 새 수도로 삼겠노라고 선언했다. 술탄의 이민 장려 정책의 결과 새로운 제국의 전역에서 몰려든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새 주민이 되었고 이들 중 다수가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메메드가 이끈 무수한 전투에 참전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새 주민이 된 무슬림들은 모스크들을 짓거나 정복자가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한 것처럼 비잔틴 교회들을 이슬람교 성전으로 개조했다. 새 주민들 중에서 비무슬림들은 종교에 따라 '밀레트(아랍어로 국가라는 뜻)'라는 공동체로 나뉘었으며 각 종교의 지도자, 즉 그리스 밀레트는 그리스정교회 총대주교, 아르메니아 밀레트는 그레고리파 교회 초대주교, 유대인 밀레트는 최고 랍비가 공동체를 이끌었다. 정복자는 그들에게 종교적인 문제들뿐 아니라 법적인 문제들에 관한 권한까지 부여했지만 범죄 사건만은 예외여서 반드시 술탄의 재판관들이 판결을 내렸다. 이 밀레트 체제는 오스만 제국 말기까지 이어졌으며 다인종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에 걸맞은 정책이었다. 정복 직후 정복자는 황금문 안쪽에 예디쿨레(일곱 개의 탑) 요새를 세웠다. 그리고 1453년 말경 마침내 궁전을 에디르네에서 이스탄불로 옮겨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탄생했다.



정복 10년 후 메메드는 거대한 모스크 복합단지를 짓기로 결심하고 그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성사도 교회를 헐었다. 그 모스크가 바로 '파티흐 자미'로 종교와 자선 기관들이 모여 있는 대규모 귈리예(복합종교단지)의 중심에 위치했다. 파티흐는 바예지드 메이단(광장) 근처에 카팔르 차르쉬(지붕 덮인 시장이란 뜻이며 그램드 바자르로 알려져 있다)라는 큰 시장도 만들었는데, 이곳은 메메드 2세 시대에 이슬람 상권의 심장부였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러하다. 투르크의 도시로 거듭난 이스탄불은 파티흐들이 건설한 모스크 복합단지들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형태의 발전은 후대 술탄들의 시대에도 이어졌다.



오스만 제국이 서방의 기독교 세력과 맺은 첫 외교조약은 1454년 4월 18일에 이루어진 베네치아와의 협약으로 메메드 2세는 베네치아인들에게 2퍼센트의 관세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이스탄불에서 자유로이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콘스탄티노플 정복 후 18년 동안 파티흐는 제국의 유럽 쪽과 아시아 쪽 국경을 모두 넓히기 위해 해마다 전쟁을 벌였으며 그 다수를 몸소 이끌었다. 비잔티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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