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 평전
자크 랑 지음 | 실천문학사
제1막 안티고네「넬슨 롤리흘라흘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었고, 다양한 각도에서 그의 면모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하지만 이 책은 기존 저서들과는 달리, 세계라는 큰 무대 위에 선 존재감 있는 배우로서 만델라를 묘사하고자 한다. 넬슨 만델라가 '인간에 대한 억압'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극복하고 해결해야 했던 내적인 갈등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델라의 삶을 5막의 연극으로 풀어내고 있다. 먼저 1막에서 만델라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Antigone)』 역할로 등장한다. 안티고네가 국가와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갈등했듯이, 이상주의자이며 열정적인 젊은이였던 만델라는,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주어진 숭고한 책무를 깨닫고 이제까지 복종해왔던 도시의 법을 위반해야 함을 깨닫는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트란스케이의 템부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렸을 적 이름은 '로하바'였으며, 부족 말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만델라는 왕자에 준하는 신분이었지만 한 사건을 계기로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1920년대 남아프리카 체제하에서 모든 추장들은 구역 행정을 책임지는 백인 집정관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템부족의 한 부족민이 추장을 고소했다. 소 한 마리가 달아나는 것을 방조했다는 이유였다. 집정관이 곧 출두 명령을 내렸으나 추장은 명령을 거부했다. 그에게 이 사건은 원칙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촌락 내부의 문제에 관한 한 영국 왕의 법이 아닌 템부족의 관습에 따르고자 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만델라의 아버지는 한꺼번에 지위와 재산, 모두를 잃고 만다.
만델라는 물려받을 재산도 교육받을 기회도 상실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뻗친다. 템부족 섭정이 만델라를 궁전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만델라의 아버지가 자신을 섭정으로 추천해준 데 대한 보답의 뜻이었다. 만델라는 섭정의 배려에 의해 다시 귀족 신분으로 자라게 된다. 그는 명문학교인 클라크뷔리에서 중 · 고등학교를 마쳤으며, 이후 대학교 입학을 위한 준비학교라고 할 수 있는 포트헤어 대학에 입학해서 법률을 공부한다. 그는 일반 아프리카인들과는 다른 이러한 계급적 배경과 부유함 속에서 검은 영국인이 되어갔다.
만델라는 이때까지 백인들이 가하는 억압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정책)가 제도화된 형태로 출범하지 못했고, 따라서 카피르(Kaffir, 아프리카부족)들은 본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델라는 그저 나라를 위해 일하리라는 충성심으로 영어를 배우고 남아프리카 법제를 지배하고 있는 네덜란드 법을 공부했다. 그런데 포트 헤어 2학년 때, 만델라는 처음으로 카피르라는 자신의 조건을 인식하게 된다. 그해 겨울, 만델라는 친구 폴과 함께 트란스케이의 한 우체국에 들렀다. 그런데 60대의 한 백인이 폴에게 돈 몇 푼을 건네주며 우표를 사 오라고 했다. 당시 백인이 흑인에게 잡일을 시키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때 폴은 돈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그 백인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화를 내며 폴을 모욕했다. 이 우표 사건을 계기로 만델라는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을 그대로 감수해서는 안 된다고 자각한다.
방학이 끝나고 포트 헤어로 돌아온 만델라는 제도에 대한 공손한 태도를 벗어버리게 된다. 학생대표위원회에 뽑힌 그는 학교 측에 학생들의 요구를 주장했다. 당시 존경을 받고 있던 교장 케어 박사는 이러한 불복종 표시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방학 동안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이를 거부하면 퇴학을 당할 상황이었다. 섭정의 집으로 돌아온 만델라는 고민에 휩싸였고, 섭정은 이 반항적인 젊은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다. 부족의 관습을 어기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이 젊은 흑인 귀족에게 현실은 너무나 제한이 많았다. 만델라는 금광의 야간 순찰원으로 취직했지만 족장의 전통 관할구역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라는 것이 들통 나 쫓겨나고 말았다.
만델라는 법률가가 되고 싶었다. 그는 법을 모두에게 적용되는 지고한 것이라고 믿었고 이러한 공리에 의한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공부가 중단되고 지갑은 텅 비어 있는 상황에서 법률가의 꿈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척의 추천으로 부동산 소개소 문을 두드리게 된다. 그곳에서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인물로 평생 만델라의 스승이자 지도자가 된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만델라보다 몇 살 더 위였던 월터 시술루는 혼혈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백인 판사였으나 아내에게 두 명의 아들을 남긴 채 떠나버렸다. 그래서 16세 이후로는 학교를 떠나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부동산업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위엄이 있고 해박했다.
월터 시술루는 라자르 시델스키라는 변호사 친구에게 만델라를 소개시켜 주었다. 시델스키는 다른 두 명의 변호사와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백인들보다 인종 문제에 있어서 개방적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편견의 희생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만델라는 심부름꾼이자, 흑인과 관련된 계약서를 작성하는 서기로 근무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촛불을 켜고 법학을 공부했다. 배움의 욕구로 가득 찬 이 하급 직원은 일상적인 굴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에는 백인들이 운영하는 사무소에서 일하는 원주민들은 점심을 화장실에서 먹어야 했다. 대학 도서관에서도 만델라는 백인 친구가 일어나 다른 곳에 앉지 않는 한 테이블을 차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흑인들의 복종 속에는 비밀스러운 반역이 감춰져 있었다. 1943년 만델라는 명문 비트바테르스란트 (the Wit Watersrand) 대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6년 동안 법률을 공부하게 된다. 그 사이에 월터 시술루의 사촌 여동생 에블린 메이즈와 결혼을 했으며, 정치에도 입문한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반정부 세력으로 남아프리카 공산당(SACP)과 아프리카 국민회의(ANC)가 활동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산당은 중부 유럽에서 이민 온 유대인들과 영국인들이 창설한 조직으로, 1924년부터 흑인 대중을 조직하고 있었다. 한편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1909년부터 아프리카인들에 의해서만 활동해온 최초의 흑인 정당이었다. 만델라는 월터 시술루의 권유에 의해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몸담게 된다.
1944년 만델라는 월터 시술루, 안톤 렘베데와 같은 젊은이들과 더불어 아프리카 국민회의 내부에 청년연맹을 창설한다. 이 급진파들은 청년연맹을 창설한 그날, '이백만의 백인들이 팔백만의 흑인들을 지배하면서 영토의 87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상황'을 비판했다. 그리고 '1인 1표'라는, 당장은 허황된 듯 보이지만 결국 우세해질 원칙을 명백하게 제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힘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1948년, 백인 정당들 간의 경쟁만 있을 뿐인 선거가 치러지고, 독일제국에 열렬히 찬동했던 다니엘 말란이 이끄는 국민당이 집권하게 된다. 말란은 처음으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단어를 국회에서 표명한 인물이다. 그와 국민당은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법과 규칙들을 만들어냈다. 흑인들을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법규만 거의 1,200쪽에 이르렀다.
1952년 아파르트헤이트의 중요 장치들이 마련되는 가운데 넬슨 만델라는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차기 집권자들에 의해 더욱 계승 발전되어갔다. 1958년 총리에 당선된 헨드릭 페르부르트는 반투스탄(Bantustan)이라는 흑인 자치령을 선포하고, 외국의 시선을 고려해 흑인들의 강제 이주를 연방화로 위장했다. 그리고 각종 금지령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모든 회합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만델라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아들의 생일잔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한 번에 한 사람 이상에게 말할 권리도 갖지 못했다고 한다.
1951년 12월,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드디어 시민 불복종 강령으로,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한다. 인도의 간디가 전개한 비폭력 운동을 본받아 대중운동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시민적 불복종 운동을 '항의의 형태가 아닌 범죄'로 규정했다. 그들은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수뇌부와 여러 인도인 지도자들을 '공산주의 금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재판이 열리자 흑인 시위자들과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법정으로 몰려들었다. 판사는 피고인들에게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공산주의'가 아닌, '법이 규정한 공산주의'라는 죄목으로 2년간의 집행유예와 함께 9개월의 사회봉사를 선고했다. 공권력이 원했던 바와 비교하면 판결은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것이었다. 비교적 정직한 이 판사는 자신이 적용할 수밖에 없었던 법조문에 대해 조심스럽게 거리를 둔 것이었다.
제2막 스파르타쿠스「불복종 캠페인은 실패했지만 그것은 거대한 성공으로 이어졌다.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당원이 십만 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이제 더는 겁에 질린 명사들의 클럽이 아니었다. 부족의 고관이자, 전직 교수였던 알베르트 루툴리 대장이 수장에 올랐고, 만델라는 '국민의 창'이라는 비밀전투조직의 조직과 운영을 맡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변호사로서의 일이 아닌 공공선에 대한 정열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공권력에 맞서는 저항세력의 우두머리로서 스파르타쿠스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 옛날 로마인들에 맞서 싸운 유명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처럼 말이다.」
넬슨 만델라에게 정치는 운명적인 것이 되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점점 그의 가정을 좀 먹어갔다. 아내 에블린은 늘 집에 없는 남편을 못 견뎌 했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딸마저 잃게 되자 '여호와의 증인'에 몸담았다. 상황이 이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하게 된다. 1955년 6월 26일, 소웨토 부근의 한 운동장에서 저항세력들의 회합이 열리고 「자유헌장」이 선포되었다. 만델라는 금지처분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회합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이 선언문을 작성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그는 "백인이건 흑인이건 남아프리카는 인민 모두의 것이며, 어떠한 정부건 인민의 의사에 반하면 그 권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매우 의미 깊은 문구를 실었다. 하지만 이 일로 144명의 주요 책임자들이 기소된다.
불의가 만연한 아파르트헤이트의 이 나라는 앵글로색슨적인 법 형식주의의 천국이기도 했다. 반역죄로 기소된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은 1957년부터 1959년 중반까지 계속되었으며, 피고인들은 거의 매일같이 심리를 위해 출퇴근을 해야 했다. 이 시기에 만델라는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호전적인 그녀의 이름은 놈자모 위니프레드 마디키젤라였는데, 놈자모는 '싸우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름이란 그저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도록 강요한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과 '싸우는 여인'이 결혼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은 그 이름의 의미만큼 질곡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1961년 3월 29일, 우여곡절 끝에 재판이 종결되었다. 법정은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근본적으로 상이한 국가 형태를 세우고자 했다고 인정하면서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 '올바르고 정의로운' 판결문이 낭독되는 법정 밖에서 아프리카인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행정부의 독단에 의해 모든 피고인들은 감옥에 남았다. 또한 아프리카너들은 자신들의 구분하에 10개 종족으로 분리된 흑인들을 영토의 13퍼센트에 몰아넣는 반투스탄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농촌 지역이 들끓기 시작했고 성난 시위자들이 여당 당원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거친 반응을 보였으며 학대를 동반한 체포가 줄을 이었다. 이때 위니는 주저 없이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가입했고 통행증에 대한 반대시위에 참여한 죄로 감옥과 인연을 맺는다.
행동의 통일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상황에서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분열되었다. 만델라가 분노한 것은 '백인이 아닌 인종주의'였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아프리카성(African personality)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당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범아프리카 회의(PAC)'라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국민회의가 의결한 것보다 열흘 앞서 통행증 반납 캠페인을 벌인다. 처음에 시위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샤프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린 집회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대규모 참사가 일어나게 된다. 집회에 고무된 일만 명의 시위자들이 경찰서로 몰려가자 공포를 느낀 경찰들이 총기를 난사한 것이다.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통행증을 대중 앞에서 불태웠고, 수십만의 아프리카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을 따랐다. 곧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만델라와 동료들은 반역죄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프리토리아 감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법정은 다시 최소한의 양심을 보여주었다.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공산주의 집단이며 폭력 사태를 도발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만델라는 다시 풀려났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는 지하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밤에만 활동을 하면서 '가택파업'을 계획했다.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출근을 거부하자는 것이었다. 정부의 강경 대처에 의해 파업은 이틀 만에 종결되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만델라는 무장 투쟁으로 선회한다.
만델라는 '국민의 창'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비밀 군대를 운영하면서 군사기지와 전화선 등 기간시설에 대한 선별적인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어느 날 루툴리 의장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서방에서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은 좋지 않은 때에 왔다. 정부 부처들이 자리한 곳에서 화기를 폭파하기로 예정한 날이 노벨상 수상자가 귀국한 다음날이었기 때문이다. 12월 16일, 수천 장의 전단지가 전국에 뿌려지고 원시적인 화기가 도처에서 터졌다. 폭탄 설치자 한 명이 사고로 죽은 것 외에 다른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루툴리는 한 은신처에서 만델라를 만나 신랄하게 비난을 퍼부었다. 무장투쟁에 대해 전혀 의견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3막 프로메테우스「1962년 2월, 만델라는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기 위해 아프리카 순회 여행을 시작한다. 이웃 국가의 수반들은 그에게 호의를 표시하며 기부금을 맡겨왔다. 만델라는 마지막으로 들른 에티오피아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그해 8월, 운전사로 가장해 요하네스버그로 출발했다. 하지만 만델라의 지하활동은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오는 도중에 체포된 것이다. 이때부터 넬슨 만델라의 운명은 프로메테우스와 같아진다. 냉혹한 정권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에 대한 저항의 불꽃을 인간에게 가져다준 죄로, 인종주의라는 바위에 27년 동안이나 결박된 것이다. 하지만 만델라는 그 영원할 것만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남아프리카를 구현하게 될 것이다.」
1962년 10월 15일, 법정은 코사 전통복인 카로스를 입고 법정에 나타난 이 반란의 지도자에게 노동자들의 파업조장과 거주지 명령을 위반한 죄에 대해서 물었다. 아직 만델라의 '군사적인' 역할을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넬슨 만델라는 변론을 통해 현 상황의 근본적인 모순을 강조했다. "한 사람에게 있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권리가 거부되면, 법 밖에서 사는 존재가 되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부가 법의 이름으로 그를 법 밖에 두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지금 이러한 일이 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