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지음 | 루비박스
1부 : 집정관이 되기까지, 기원전 100~59년
1 _ 카이사르의 세계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전 세대 사람인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오로지 로마가 어떻게 해서 융성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계사 Universal History』를 저술했다. 그는 3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72~기원전 167년)에 직접 참여하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그 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직접 목격했고 이후 인질로 로마에 끌려갔다. 그는 로마 귀족의 집에 살면서 그의 출정에 도의했으며 카르타고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로마 군사체계의 효율성에 주목하면서도 실제 로마가 융성하게 된 원인은 그 정치 체제에 있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로마 공화정은 어느 한 개인이나 파벌이 압도적인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균형을 유지하게 하여줌으로써 그리스 도시 국가 대부분에 재앙으로 작용했던 잦은 혁명과 국란으로부터 로마를 자유롭게 지켜준 체제였다. 내부가 안정되면서 공화정 로마는 어떤 상대도 필적할 수 없는 규모와 집요함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 동시대의 어떤 국가도 한니발에게 유린당했을 시의 재앙과도 같은 치명적 손실을 입었다면 살아남을 수도, 계속 싸워 이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태어났을 때 공화정은 400년간 지속되어 왔으며 그 체제하에서 로마는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 로마의 성장과는 달리 공화정 체제는 종말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훗날 카이사르는 공화정 로마가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내전에 의해 분열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로마인들은 공화정 체제가 이미 카이사르 생전에 무너졌다고 느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를 공화정을 암살한 주범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양자 아우구스투스가 스스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을 무렵에는 공화정이 과거의 추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의 빠른 성공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2세기 말 로마 공화정은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징조와 함께 종말에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2 _ 카이사르의 어린 시절 율리우스 씨족은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공화정 초기에 권력을 독점하여 많은 평민들을 통치했던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자세한 자료는 없지만 율리우스 씨족은 공화정 초기 200년 동안 10여 명의 고위 행정관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성공적이었던 다른 씨족, 예를 들면 파비우스나 만리우스 씨족과는 달리 율리우스 씨족은 선조들의 업적을 잘 계승, 발전시켰던 것 같지는 않다. 상황은 변해가고 있었다. 여전히 몇몇 귀족 가문은 강력한 영향력을 고수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평민들의 요구가 점점 거세어짐에 따라 명문 귀족들이 독점하던 권력은 약해지고 있었으며, 부유한 평민 가문들이 계속해서 통치권에 도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할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사실상 거의 없다. 어쩌면 법무관을 지냈을 수도 있다. 그의 부인은 기원전 144년에 법무관을 지냈던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의 딸 마르시아였다. 그들은 적어도 2명의 아이를 가졌는데,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와 고모 율리아였다. 율리아는 나중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결혼하게 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기원전 91년에 집정관이 되는 섹스투스가 그들의 또 하나의 아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년 시절과 교육카이사르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들이 많지 않다. 하지만 당시 로마 귀족들의 일반적인 생활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사실들로부터 유추해볼 수는 있다.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회에서 출산은 집에서 이루어졌다. 원로원 의원 가문에서 출산은 중요한 행사였으며 사람들에게 공개되어야 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산파는 아이를 바닥에 누이고 기형이나 결함이 있는지 또는 아이가 생존 가능한지를 살펴보았다. 이런 과정이 끝난 뒤, 부모는 아이를 받아들여 기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그 결정은 아버지에게 달려 있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 같은 강한 여인이 그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카이사르가 살던 시대에는 원로원 의원들의 자녀들은 대개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2가지 언어를 구사하도록 키워졌다. 그리스어 조기 교육은 아마도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은 그리스 노예(paedagogus)가 맡았을 것이다. 또, 가문의 의식과 전통 그리고 로마의 역사에 대한 교육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로마의 역사에는 당연히 그 선조들의 업적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며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이 로마인이 알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서 제시되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끔 키워졌다. 물론 이는 아주 보기 드문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문을 이을 유일한 남자로서, 그리고 특별히 강하고 존경받는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그가 처음부터 남달리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점점 깊고 높게 키워갔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로마식 교육은 극히 실용적인 것이었으며 그 목적은 아이에게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귀족 가문의 소년에게는 공직과 가족을 위한 영광을 획득하는 것, 그리고 그가 언젠가는 가장(paterfamilias)이 되어 다음 세대를 키워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략 일곱 살이 되면 남자아이는 아버지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그 또래 여자아이의 경우에는 하인을 감독하거나 옷을 만드는 등 어머니의 가사를 따라 배웠다. 남자아이들에게는 아버지를 따라가 그가 다른 원로원 의원들을 만나는 것을 지켜보거나 원로원 회의장 문밖에 앉아 토론을 듣는 것이 허용되었다. 결국 아이들은 누가 가장 영향력이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배우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공화국의 중요 사안들이 처리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그 세계의 일원이며 훗날 충분히 나이가 들면 자신도 그 세계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4 _ 젊은 카이사르 카이사르의 모습은 흉상과 동전으로 남아 있다. 일부는 그가 살아 있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일부는 처음 만들어진 것을 모방한 것이지만 모두 중년시절의 그를 묘사한 것들뿐이다. 그것은 단호하고 강건한 모습, 주름진 얼굴과 가는 머리카락으로 표현된(최소한 사실적으로 묘사된 작품들에 의하면) 위대한 장군 또는 독재관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힘과 경험과 엄청난 자신감으로 빛을 발하며 어떤 조각과 그림, 심지어 사진으로도 잡아낼 수 없는 한 인간의 개성을 어렴풋이나마 암시해준다. 사실 우리 스스로 고대 세계는 돌과 대리석의 세계라는 의식에 깊이 빠져 있기도 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에 고대의 초상화는 과도하게 근엄해 보이고 생동감이 떨어지며 너무 단순해 보인다. 또, 아무리 잘 꾸며진 것이라 해도 흉상은 그 인물의 일면만을 내보여줄 뿐이다. 로마인들, 특히 귀족들에게 외모와 멋 내기는 무척 중요했다. 로마인들이 고안해낸 시설 중 가장 복잡한 기술을 요하는 것이 시민들의 휴식과 청결을 위한 목욕장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의원들이 잠재적인 동료 또는 클리엔테스를 만나거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거리를 걷거나 하는 활동들이 공직 생활에 있어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그들의 옷차림과 몸가짐은 항상 관찰의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매우 멋쟁이였으며 그 옷차림은 유별나기는 해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이는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부유한 이들의 경우에는 매우 비싸고 이국적인 소재를 구할 수도 있었다.
원로원 가문의 젊은 귀족들은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많은 노예와 함께 옷차림에도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 또, 사치스런 생활을 유지할 만한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종종 빚을 져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풍조가 만연했다고 하더라도 카이사르가 외모에 들이는 정성은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당시에는 짧게 깎은 머리와 말끔히 면도한 모습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했는데, 카이사르가 머리카락을 제외한 모든 체모를 제거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외모와 모순되는 그의 성격이었을 것이다. 옷차림에 신경 쓰던 많은 로마의 젊은 귀족들은 생활에 있어서도 사치스러운 경향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경우 손님은 잘 대접했지만 본인이 먹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아 과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결국 그는 현대적인 방종과 전통적인 절제가 묘하게 결합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8 _ 집정관 기원전 61년 9월28일과 29일, 위대한 폼페이우스는 세 번째 개선식을 치렀다. 해적들과 미트리다테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한 것이었다. 그 축전은 그의 45회 생일과 겹쳐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규모와 화려함으로 펼쳐졌다. 20년 전에 있었던 그의 첫 번째 개선식과는 달리 코끼리가 끄는 전차와 같은 터무니없는 장면은 없었다. 폼페이우스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 원숙해졌으며 그런 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할 필요 역시 없었다. 그의 눈부신 업적은 과거의 위대한 장군들을 초라해 보이게 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개선식은 결코 절제와 겸양이 요구되는 행사가 아니었다. 로마 귀족들이 흔히 그렇듯이 폼페이우스도 자신의 업적을 규모와 물량으로 나타내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행렬에 포함된 플랜카드에 의하면 그가 죽이거나 사로잡거나 패배시킨 사람의 수는 1천 218만 3천 명, 나포하거나 침몰시킨 적함은 846척, 그에게 항복한 도시 또는 요새는 1천 538개였다. 그가 획득한 전리품을 실은 거대한 운반선에는 그가 정복한 왕국, 백성, 지역이 차례로 표시되었다. 그 뒤로는 주요 전쟁 장면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줄을 이었다.
모든 병사들에게는 각자의 10년치 연봉이 넘는 1천 500백 데나리우스가 지급되었고 국고에는 총 2만 탤런트의 금과 은이 새로이 채워졌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노력으로 연간 국가 재정 수입이 5천만 데나리우스에서 1억 3천 5백만 데나리우스로 2배 이상 증가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행렬 말미에는 당시 알려진 세계 각지의 전승 기념물들이 가득 실린 거대한 운반선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폼페이우스가 3개의 대륙을 정복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승리로 아프리카를, 두 번째 승리로 유럽, 특히 이스파니아를, 세 번째 승리로 아시아를 정복했다고 말이다. 폼페이우스는 전통 복장을 입힌 왕과 왕비와 공주, 부족장과 장군으로 이루어진 300명을 앞세워 행진했다. 폼페이우스 자신은 보석으로 장식된 전차를 타고 미트리다테스로부터 빼앗은, 그가 오래전 알렉산더 대왕이 입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아피아누스는 그로부터 약 150년 후에 쓴 글에서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으나 폼페이우스 자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 정복자와 비교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폼페이우스의 업적은 규모면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대단한 것이었다. 세심한 계획과 신속한 행동이 어우러져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던 해적 소탕 작전은 더 큰 성공의 서막이었을 뿐이었다.
2부 : 프로콘술, 기원전 58~50년
9 _ 갈리아 로마를 떠나 속주로 향한 카이사르는 이제 41세였다. 그는 앞으로 9년간 로마에 돌아오지 않을 운명이었다. 그의 남은 인생은 그야말로 전쟁으로 점철될 것이다. 앞으로 그의 인생에서 그가 대규모 군사 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보낼 수 있는 해는 단 2년. 기원전 50년, 갈리아 정복이 완료되고 지역을 안정화하던 해와 기원전 44년, 대대적인 첫 다키아 원정과 연이어 계획된 파르티아 원정을 불과 며칠 앞두고 암살당한 해가 그것이다. 그 외 나머지 모든 해마다 그는 적어도 한 번, 대부분 여러 번의 전투와 포위 공격을 치르게 된다. 플리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총 50회의 전투를 치렀다고 했다. 그 수치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투와 교전, 소규모 충돌을 구분 짓는 기준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런 저술가들의 기록이 널리 알려진 믿음, 즉 카이사르는 다른 로마 장군들보다 훨씬 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곧잘 비교되던 알렉산더 대왕은 소규모 집전을 제외한다면 단 5회의 회전과 3회의 대규모 공성전을 치렀을 뿐이다. 한니발은 큰 규모의 전투 횟수에서는 알렉산더를 뛰어넘지만 역시 카이사르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기록은 전쟁의 양상이 더 격렬해지고 일부 지휘관들이 카이사르 및 고대의 지휘관들에 비해 더 많은 날에 걸쳐 중요한 전쟁을 치르게 되었던 나폴레옹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깨어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기원전 58년을 전후로 카이사르의 생애는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그때까지 그가 이탈리아를 떠나 있었던 기간은 기껏해야 9년이었으며 대략 그 중반 정도가 군사 활동에 바쳐졌다. 이는 평균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로마 원로원 의원에게는 일반적인 기간이었다. 물론 대중의 눈에 띄기 위해 꾸준히 법정에 모습을 보였던 키케로와 같은 인물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자신의 화려함과 약간 수상쩍은 인물들과의 교류 그리고 집정관 시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일부 행동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의 경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최연소 연령 기준보다 2년 일찍 집정관이 되었기에 그는 전직 집정관(proconsul)으로서는 젊은 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폼페이우스와 비교한다면 그에게는 기회가 무척 늦게 찾아왔다. 알렉산더 대왕은 33세의 나이로 죽었고, 한니발은 45세에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46세에 워털루에서 격돌했다. 비록 당시 블뤼허(Blucher, 웰링턴을 도왔던 프로이센 장군-옮긴이)는 73세였지만. 대조적으로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로버트 리 장군은 오십대였으며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을 당시 미국 장군 패튼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및 최근 기준으로 본다면 기원전 58년의 카이사르가 지휘관으로서 나이가 많았다고 볼 수도 없다.
10 _ 이주민, 그리고 용병: 첫번째 출정, 기원전 58년기원전 58년 3월 28일, 헬베티족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제네바 호수 근처의 론 강 유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동에 참여한 사람은 36만 8천 명으로 그중 4분의 1은 전투가 가능한 연령대의 남성들이었고 나머지는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현재의 스위스에 해당되는 고향을 떠나 보다 넓고 비옥한 정착지를 찾아 대서양 연안의 갈리아로 이동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동 경로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카이사르는 3월초 그들의 이동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속주로 출발한 바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로마 외곽에 머물며 원로원과 포름에서 벌어지는 정치 투쟁을 주시하고 있었다. 헬베티족은 가장 쉬운 이동 경로를 희망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갈리아 트란살피나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방대한 통치 지역 중 북쪽 경계가 위험에 처해 있었다. 여론은 위기에 빠져 있는 통치 지역의 총독이 로마 근처에서 꾸물거리는 것을 반기지 않을 것이었다. 그 지휘권을 확보하기 위해 쏟아 부었던 노력과 그것에 딸린 기회를 생각한다면 카이사르는 어떤 종류의 실패도 감수할 여력이 없었다. 앞으로 자주 사람들을 경악시키게 되는 특유의 놀라운 속도로 그는 서둘러 북쪽으로 향했다. 하루에 145킬로미터를 행군했다. 8일 후 그는 론 강 앞에 서 있었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헬베티족의 이주는 급작스런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몇 년에 걸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 그 계획을 세운 것은 카이사르가 약간 못마땅한 어조로 "부족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고 부유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