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
앨리슨 위어 지음 | 루비박스
프롤로그 - 1558년 11월 17일 1558년 11월 17일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 웨스트민스터 궁 및 여타 런던 내 왕국 주변에 군중이 운집했다. 이윽고 전령이 나타나 그날 새벽 메리 1세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 뒤 메리의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유나이티드 킹덤이라 불리는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 네 개 권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웨일스는 13세기, 스코틀랜드는 18세기 초에 잉글랜드에 연합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를 무렵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결탁하여 잉글랜드를 견제하고 있었다 - 옮긴이) 여왕으로 등극했다. 같은 시간 요크 대주교(잉글랜드 국교인 성공회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직책-옮긴이)이자 대법관(의회 개회 중에는 상원의장의 역할을 겸함 - 옮긴이)이었던 니콜라스 히스가 상원에서 새 군주의 탄생을 공표하고 있었다. 말년에 접어들며 폭군으로 지탄받았던 여인의 죽음, 그리고 구원자로 추앙받은 또 다른 여인의 즉위를 온 런던 시민들이 경축하는 가운데 추밀원 위원들은 하트퍼드셔 해트필드에 있는 궁에 도착했다. 어떻게든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려 했던 이복 언니의 계속되는 음해를 피해 엘리자베스 공주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곳이었다. 정오가 가까워 오는 시각, 공주는 매서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원에 나가 바람을 쐬며 고목 아래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공주는 자신의 신변에 엄청난 변화가 일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약삭빠른 귀족 및 위원들은 죽어가는 메리 여왕의 궁정을 버리고 젊디젊은 후계자에게 충의를 표하기 위해 해트필드가 있는 북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추밀원 위원들이 정원으로 몰려와 자신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그녀는 풀밭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라틴어로 이렇게 읊조렸다.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이윽고 평정을 되찾은 그녀는 일행을 이끌고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했다. 그리고 잉글랜드를 다스리게 되었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잉글랜드 인다운 여성 엘리자베스는 여왕으로 등극한 뒤 가장 먼저 왕위를 평화롭게 물려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준 신께 감사를 드렸으며, 훗날 그녀가 에스파냐 대사에게 밝혔던 대로 '피를 뿌리는 일 없이 유화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내용의 기도를 올렸다. 앞서 간 언니의 과오를 목도했던 터라 그녀는 에스파냐건 로마건 간에 외세가 잉글랜드 내정에 간섭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또, 스스로 잉글랜드의 국수주의를 강화하는 구심점, 즉 '잉글랜드에서 가장 잉글랜드인 다운 여성'이 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엘리자베스는 진정한 잉글랜드 혈통이라 할 수 있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플랜태저넷 왕가(프랑스의 앙주가에서 들어온 헨리 2세를 시조로 하는 왕가-옮긴이)의 후예이며 동시에 선왕 헨리 7세로부터 웨일스 인의 피를 물려받았다. 1558년까지 엘리자베스란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신의 생각을 절대 남에게 털어놓지 않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가능한 한 몸을 낮추고 있어야 쓸데없는 소문을 잠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부터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문불출 은거하면서도 그녀는 잉글랜드 국민들이 바라는 바가 곧 자신이 바라는 바요, 진정한 국교인 개신교의 수호자는 오직 자신뿐이라는 메시지를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확산시켰다.
주여, 우리의 여왕 폐하께 남편을 내려 주소서 대관식 전 날 아침, 엘리자베스 여왕은 금사와 은사로 짠 피륙 21미터에 흰 담비 가죽과 금사 레이스를 써서 지은 옷을 걸쳤다. 대관식을 위해 이러한 의상을 네 벌이나 맞추어 놓은 상태였다. 머리에는공주의 왕관과 황금 모자를 겹쳐 썼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왕을 수행하는 수많은 귀족들은 값비싼 새틴과 벨벳, 눈부신 보석으로 온몸을 뒤덮어 그야말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가마에 오르기 위해 천천히 걸어가는 엘리자베스의 뒤로 1천여 명에 달하는 고관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는 장관이 펼쳐졌다. 흰 새틴과 황금빛 다마스크 천으로 장식한 가마는 '무척이나 잘생긴 노새' 두 마리가 끌었다. 가마에 오르기 전 그녀는 큰 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전능하고 영원하신 주여, 오늘과 같이 기쁜 날을 허락해주신 자비에 깊이 감사드리나이다. 사나운 사자 떼가 버티고 있는 굴에서 다니엘을 구해 내시었듯 주께서는 제게도 자비와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그와 같이 크게 감동받았고, 그처럼 오직 주께서만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때마침 런던탑 동물원에서 사자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고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와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청중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다름 아닌 신이 자신을 왕좌로 이끌었음을 거듭 강조한 뒤 여왕은 가마에 올라 여덟 개나 되는 거대한 새틴 쿠션에 편안히 몸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밸더킨 아래 좌정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6~7킬로미터에 걸쳐 행진하면서 군중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찮기 그지없는 논쟁 엘리자베스 여왕은 청소년기부터 케임브리지 개혁가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들의 신념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신교를 믿으며 자랐어도 스스로 개혁가는 아니었다. 그녀는 전통적인 종교 의식, 성가대가 부르는 장중한 성가와 모테토,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신학 서적 등에 매혹되었다. 그녀는 1566년 의회에서 "왕위를 물려받을 때까지 신학 외에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화형을 당할 수도 있었던 그 시대에 엘리자베스는 놀라우리만치 개화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대사 앙드레 위로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뿐이다. 나머지 논쟁은 전부 하찮기 그지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언니와 달리 그녀는 광신도가 아니었다. 신교, 구교 가리지 않고 광신적 행위라면 무조건 혐오했다. 그랬기에 주교들과의 접촉을 피했을 뿐 아니라 서로를 "예수 안의 내 형제"라 불러대는 강경파 신교들 역시 멀리했다. 그녀는 강제로 주교들의 교구에서 나오는 소득을 국고로 돌리기도 했다. 그녀가 보기에 구교 신학자와 신교 신학자 간 대립은 '모래나 진흙으로 꼰 밧줄을 타고 달에 오르는 격'이었다. 그녀는 1590년 의회에서 "마치 법률가가 유언을 분석하듯 신의 뜻을 교묘하게 해석하는 뻔뻔한 자들이 많다. 신의 뜻과 맞닿아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 한 나는 절대 나의 해석을 그대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통치 초기 그녀는 페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성체 성사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있음을 믿고, 서너 가지를 제외하고는 미사 절차에도 불만이 없기에 내 종교적 신념은 구교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같은 발언이 잉글랜드가 에스파냐의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시점에 나왔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상 그녀는 신랄한 어조로 구교를 모독하곤 했다. 1577년 독일 신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구교를 '암울하고 추악한 교황 절대주의'라 표현하기도 했다. 펠리페 왕이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에서 신교도들을 박해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백성들이 제 발로 사탄을 따라가건 말건 간에 무슨 상관이냐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또, 로마의 주교(잉글랜드 신교도들은 교황을 이렇게 불렀다)와 함께 자신도 구원받기를 바란다는 말로 에스파냐 사절들을 경악시켰다. 통치 후기에 그녀는 무신론자 혐의를 받았던 월터 롤리 경에 대한 수사를 윤허하지 않았다. 그와 벌이는 신학 논쟁이 즐겁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수치스럽고 추잡한 세평에 휘말리다 더들 리가 아내의 죽음을 사주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사제들은 설교 중 '여왕에게 매우 불경하고 불충한 태도로 이 소문을 되풀이해 언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이 이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10월 10일 파리의 니콜라스 스록모턴 경은 세실에게 서신을 보내어 에이미 더들리의 '미심쩍은 죽음'에 관해 알게 되었다고 전했다. 프랑스 왕실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부지런히 입방아를 찧어대며 악질적인 추론을 덧붙이곤 했다. 노샘프턴 후작에게 보내는 기밀 서한에서 스록모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차라리 죽어 없어져서 여왕에 대한 저 수치스럽고 추잡한 세평을 안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랑스 왕족들은 잉글랜드가 자신들에게 넘어올 수도 있게 되었다며 쾌재를 부르고 있습니다. 머리가 곤두서고 귀가 화끈거립니다. 우리를 비웃는 자, 위협하는 자, 여왕을 헐뜯는 자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도대체 어떤 종교이기에 신하가 아내를 죽였는데도 군주가 괘념키는커녕 그와 결혼까지 하려 드는가?"라고 비아냥댑니다. 이런 중상적인 소문이 진화되지 않거나 혹 진실로 드러난다면 우리의 명예는 당장 실추되고 말 것이며 전쟁이 발발하고 여왕과 국가가 전복될 수도 있습니다.
니콜라스 경은 여왕으로 인해 자신의 심장이 피를 흘리고 있다면서, 잉글랜드의 안전과 국익을 위해, 그리고 여왕 스스로의 위신을 위해 그녀가 더글리와 결혼할 만큼 '본분을 저버리고 상스러워지지는'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타 유럽 왕실에 파견된 잉글랜드 대사들도 한뜻이었다.
후계자 없는 왕실엘리자베스 통치 초기에 천연두가 전에 없이 맹위를 떨쳤다. 1560년대 초반이 되자 천연두는 전국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노인과 여자들'의 피해가 특히 컸다. 베드퍼드 백작 부인을 비롯하여 수백에 달하는 평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천연두는 사망률이 높기도 했지만 요행이 살아남더라도 끔찍한 흉터를 남기기에 더욱 무서운 병이었다. 토머스 랜돌프는 초기 증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병에 걸리면 두통이 있고, 위가 쓰리면서 심한 기침이 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562년 10월 10일 햄프턴코트에서 처음 이상한 조짐을 느꼈다. 흔히 그렇듯 그녀도 목욕을 하면 금방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목욕을 마친 뒤에는 기분전환을 위해 야외 산책을 했다. 그러다 감기에 걸렸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고열로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다. 실력은 뛰어났으나 좀 경솔하다는 단점이 있었던 독일 출신 의사 부르코트 박사가 불려왔다. 그는 천연두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붉은 반점이 보이지 않았다. 여왕은 돌팔이라며 그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후로도 발진이 생기지 않자 모두 더 위중한 병의 전조가 분명하다며 불안에 떨었다. 하루 이틀 뒤 열이 더 심해졌다. 10월 16일 여왕의 증세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처음에는 말을 하지 못하더니 곧 의식을 잃고 하루 종일 깨어나지 못했다. 왕실 주치의들은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여 급히 세실에게 런던으로 입성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다음 날 밤 엘리자베스는 정말로 최후가 다가온 듯 의식을 잃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초조해진 추밀원에서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추밀원위원들은 미결로 남아 있는 왕위계승 문제 때문에 공황상태였다. 아무래도 여왕은 곧 서거할 듯한데, 과연 누가 그 뒤를 이어야 할 것인가?
위험한 인물 1567년 2월 10일 새벽 두 시, 엄청난 폭발음이 에든버러를 뒤흔들었다. 놀란 시민들은 커크오필드로 몰려들었다. 집은 완전히 무너져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과수원에서 알몸에 잠옷만 걸친 단리와 시종 테일러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목에 난 자국으로 보아 둘 다 교살당했음이 분명했다. 폭발 사고는 타살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위장일 뿐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단리가 시종과 함께 집 근처를 돌아보러 나갔다가 변을 당한 듯했다. 한 이웃은 그가 "살려주게, 제발 살려주게"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폭발 직후 거리로 가장 먼저 뛰쳐나간 사람은 보스웰의 앞잡이인 윌리엄 블래커더 대위였다. 그는 즉시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웃에 사는 친구의 집에서 술을 한잔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폭발음을 듣고 잠이 깨었다가 비보를 접한 여왕은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울 따름이라고 말하면서 남편의 살인자들을 조속히 '색출하여' 응징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녀는 살인자들이 자신 역시 암살하려 했던 듯하다고 덧붙였다. 그날 홀리루드에서 열린 가면극에 참석하지 않았던들 자신도 분명 살해당했을 것이라면서,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사연'을 각국 왕실에 널리 알렸다. 단리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를 없애고자 할 만한 동기가 있는 사람, 그의 죽음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중 으뜸은 단연코 여왕이었다. 사랑은 이미 예전에 식었고, 그와 헤어질 궁리를 한 지도 오래되었다. 게다가 그가 언제든 자신을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쾌하고 기품 있고 화려한 궁정 엘리자베스 여왕시대 잉글랜드 왕궁은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장엄하고 화려하다 할 수 있었다. 배수를 용이하게 하고 배로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대부분 템스 강변 가까이에 지었다. 일부 왕궁은 런던까지 여왕 전용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중 첼시, 리치먼드, 햄프턴코트를 잇는 킹스로드와 템스 강변 남쪽 기슭을 따라 램베스 궁으로부터 그리니치, 엘섬으로 이어지는 길이 특히 유명했다. 의상이며 각종 의식과 함께 여왕의 일상을 이루었던 이 왕궁들은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표상과도 같았다. 각 궁에는 헨리 8세가 수집한 태피스트리 2천 점(이중 스물 여덟 점은 지금도 햄프턴코트에 걸려 있다) 및 그 아들딸들이 모은 태피스트리, 각종 초상화와 미술 작품 등이 한가득 걸려 있었다. 튜더 군주들은 한꺼번에 1천 5백 명 이상 되는 궁정 식구들을 거느리고 이 궁에서 저 궁으로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공중위생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존 해링턴 경은 "아무리 지하실과 수로와 갖가지 관문을 만들고 사람들이 미친 듯이 쓸고 닦아도 우리 왕국 내에서 가장 찬란하고 웅장한 궁조차 참을 수 없는 악취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여왕이 사용하는 뚜껑 달린 변기는 궁녀들이 날마다 비우고 청소했다. 그러나 나머지 궁정인들은 재래식 화장실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다. 따라서 대다수가 정원이나 성벽에 실례를 하는 형편이었다. 1596년 존 해링턴 경이 수세식 변소를 개발했다. 이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엘리자베스의 명에 따라 리치먼드 궁에 설치되었다. 또, 먹을 것이 부족했던 당시, 이러한 대규모 궁정이 이주해 오면 주변 지역 식량 자원이 한꺼번에 고갈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한 곳에 일정 기간 머문 뒤에는 청소를 하고 악취를 없애고 각종 물품을 채워 넣기 위해 궁 내부를 깨끗이 비워야 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이 궁 저 궁으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골치 아픈 문제 1572년 4월 19일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비상 시 서로 육군 및 해군 병력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블루아 조약을 체결하고 공동의 적에 함께 맞서기로 했다. 공동의 적이란 에스파냐 및 신교도 국가인 네덜란드 등을 가리켰다. 그러면서도 엘리자베스는 그저 펠리페와 알바를 언짢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는지, 네덜란드에 내밀히 원조를 지속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조약으로 잉글랜드는 더 이상 유럽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게 되었고, 메리 스튜어트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레스터의 주관하에 조약 체결을 기념하는 연회가 화이트 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레스터는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멋진 연회였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그해 봄, 메리가 에스파냐에 도움을 요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토머스 스미스 경과 만나 양국 연합을 확실히 굳히는 차원에서 국혼을 추진하자고 건의했다. "주여!" 모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여왕은 결혼하지 않는 한 끝없는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가? 좋은 혼처를 구한다면 어느 누가 감히 그녀에게 허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