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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권력

아서 제이 클링호퍼 지음 | 알마
지도 제작자의 거울

지도 제작자는 분명 과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지도를 제작하지만 그들은 같은 지역에 대해서도 상이한 지도를 제작한다. 지도는 제작자의 경험, 미학, 정치학을 반영하며 의도적으로 제작된다.



마음의 눈 : 지도는 투영도(投影圖, projection)다. 우리는 빛이 필름이나 투명한 물체를 통과해 스크린에 이미지를 만드는 현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안이 들여다보이는 구체 안에 불이 켜진 전구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구체 표면의 특징들이 구체를 싸고 있는 종이, 즉 이후 평평하게 펼쳐질 종이 위에 나타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구체는 2차원의 평면 지도를 만드는 데 이용되는데, 종이로 구체를 원통 모양으로 싸느냐 원뿔 모양으로 싸느냐에 따라 투영도의 본질이 달라진다. 이와 같은 투영도는 지도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조작될 수 있다.



기원전 7세기경 지도가 등장하기 시작하자 중심에 그려지는 대상이 자민족 중심적 가치(개인적인 자기중심주의와 사회적 혼합물)에 따라 결정되었다. 지도 제작에서 외부 세계에 대한 투영도는 지도 제작자의 내적 심리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그 지도는 '관찰된 것'이 아니라 '보는 행위'에 바탕을 두었다. 지도 제작자가 지도를 제작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바는 객관적일 수 있으나 그것은 상당 부분 제작자 자신의 문화적·정치적 견해(심지어 지도 제작자 자신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결국 지도 제작은 제작자의 세계관을 반영하게 되며 전통적인 '투영의 심리적 기능'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사실 검증 : 과학은 수천 년 동안 지도 제작에 이용되어 왔다. 측량 도구, 인쇄 기술, 위성사진, 컴퓨터 등은 과학으로서의 특성을 분명하게 갖고 있다. 하지만 지도 자체는 아직도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과학적 객관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록 위성사진들이 지도 제작의 기반이 되고 있지만 제작자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구역, 각도, 축척 및 기타 요소들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3차원적 실체를 2차원으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지구의 양극은 평평하게, 적도는 불룩하게 표시됨으로써 거리와 각도가 왜곡된다. 지도와 사진은 변형된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작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지도 제작자의 '지도 제작 개념'이다. 지구는 또한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진화한다. 역동적으로 공간변화를 이루고 있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이제 더 이상 연결되어 있지 않고, 최소한 기원전 2만 년까지는 좁은 땅으로 연결되어 있던 북아메리카와 아시아도 분리되었다. 만약 지구온난화가 계속된다면 해안선은 후퇴하고 키리바시(Kirivati)와 몰디브 같은 섬나라들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금도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매일 해안선이 변하고 있다. 종종 강줄기의 위치가 변하기도 하는데, 국경 지대인 경우 정치적 분쟁마저 불러일으킨다.



즉 지도는 제작자의 심리적 투영에 의해 생성된 부정확성과 축척의 한계 때문에 단지 재현하려고 의도한 사실의 일부만을 묘사할 뿐이다.



정치적 여파 : 어린 시절 나는 세계지도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왠지 내가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 확실성에 조화된다는 믿음으로 여러 나라의 지도를 그렸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학급 '시사 문제' 담당 기자로, 급우들에게 그 전쟁에 관해 알려주었다. 그때 나는 《뉴욕타임즈》를 통해 지도로 표시된 전쟁을 꼼꼼히 추적했는데, 화살표와 선들이 지형뿐만 아니라 전술과 정치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국제 관계를 전공하는 정치학자가 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지도에 매력을 느꼈으며, 지도가 세계 정치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지도에는 언제나 주관적인 인식이 들어가 있다. 제작자의 관점이 축척, 중심점, 방위, 지역 명칭 그리고 지도에 표시할 것을 정하는 등의 다른 많은 요소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지도의 객관성은 신화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목적은 표면에 나타난 이미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해 그것이 지도 제작자의 의도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나아가 더욱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한 개인의 세계관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을 반영하며, 문화적인 제한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도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 제작자의 의도를 밝혀내는 일이다.



권력의 도구



문화적 요인


지도는 '문화와 문명의 거울','문화적 텍스트'라고 이야기되어 왔다. 지도는 인간 습성의 정신적 특질을 반영하며 그 시대와 장소의 사회적 질서에 대한 시각을 제공한다.



어디가 위쪽인가? : 중국인들은 '천하(天下)'라는 개념에 따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기원전 5세기 지도를 보면 중심이 같은 사각형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도의 가장 안쪽 사각형에는 황궁이 있고, 바깥쪽으로 수도, 봉건 제후들의 영토, 평화 지역, 야만인 지역 그리고 '야만적인 미개인들의 땅'이 존재한다. 여기에 표준화된 축척은 존재하지 않는다. 황궁에서 밖으로 뻗어 있는 각각의 지역은 점진적으로 작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심, 즉 '자기'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감소되는 도덕적 가치는 '자기중심주의(egocentrism)'의 증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지도의 방위도 자의적이다. 문화적 전통에 의해 지도의 디자인이 정해진다. 북쪽이 지도 위쪽에 위치해야 할 과학적인 증거는 없으며, 미국 사람들이 '위쪽인 북'으로 또는 '아래쪽인 남으로' 가야 할 이유도 없다. 글을 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쓰는 관습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현대화가 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방위가 표준화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방위는 어떤 장소에 접근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구불구불한 강을 고정된 기준점으로 이용하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도를 그릴 때는 일정한 양식을 따르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북쪽을 향하는 지도는 고대 그리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작한 지도는 이 점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거의 모든 지도의 방위는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예외적 지도가 있는데, 스튜어트 맥아더(Stuart MaArthur)의 〈수정본 세계지도(Universal Corrective Map of the World)〉이다. 1979년 호주에서 출판된 이 지도는 남쪽을 향해 있고 자오선은 호주의 캔버라(Canberra)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지도에서 유럽은 오른쪽 하단 구석에 위치하며 미국은 왼쪽 하단에 놓여 있다. 이 지도의 주석에 따르면 이것의 목적은 '세계 권력투쟁의 암울한 무명의 심연'으로부터 호주를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정치적 조각 그림 맞추기


지도는 단순한 도식이 아니라 권력을 나타낸다. 지도는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 본질적으로 공간에 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개념을 전파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권력의 공모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통제 :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의 권위를 표현한다. 고대 중국에서 패전국은 정복자에게 복종과 영토 분할의 상징으로 자신들의 지도를 바쳤다. 보다 강력한 국가와의 동맹을 원하는 중국의 제후국은 복속의 상징으로 지도를 넘겨주었다. 1940년 소련군이 핀란드의 카렐리아를 점령했을 때, 소련에 합병되는 과정에서 거의 1,600만 개의 지역 지도가 압수되었다. 또한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정보부는 전시에 독일을 위해 일했던 스웨덴의 지도 제작자 헤딘(Sven Hedin)이 제작한 중앙아시아 지도들을 찾기 위해 소련이 점령한 지역을 수색했다.



지도가 국가 안보나 상업적인 이유 때문에 비밀에 붙여지는 경우도 많다. 1504년 포르투갈에서는 지도나 항해 일지를 국외로 반출하는 사람에게 사형을 구형하며 동시에 지도 제작 도구의 수출을 금지하는 국왕의 칙령이 공포되었다. 지도에 관한 포르투갈의 보안 제도는 스페인과의 심각한 해상 경쟁과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향료를 얻기 위해 아시아에서 경쟁할 시기에는 그 절정에 달했다.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에 인도에 도달했는데, 항해와 아시아 탐험에 관한 결정적 세부 사항이 16세기 전반기 내내 베일에 쌓여 있었다.



잠재적으로 군사적 표적이 된 지점이 있는 지도에서 적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전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30년대부터 소련은 자신들의 지도를 심하게 왜곡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첩보 요원들을 기만하고 정확한 폭격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지도에 축척을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거리를 잴 수가 없었다. 해안선은 변경되었으며 위도와 경도는 정기적으로 부정확하게 표시되었다. 강, 철도역, 다리의 위치도 약간 변경되었다. 1988년 소련의 지도 제작 책임자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했으며 국가보안위원회가 지시한 일이라고 밝혔다. 이때는 이미 인공위성 사진 기술이 발달해 더 이상 허위 지도가 필요 없는 시절이었다. 냉전 시기 동안 모스크바 지도에는 국가보안위원회(KGB) 본부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1960년대에 미국 정부는 버지니아 주 랭글리에 있는 중앙정보국(CIA) 건물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지리학과 정치학 : 초기의 지도는 '국가' 형태의 정치적 단위를 묘사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개념을 중시하는 우주론적인 것이었다. 영토는 정복을 통해 획득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거대한 땅덩어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발견'의 개념은 없었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유럽인들의 '발견'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세계의 조각난 지역들이 국가의 형태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7~18세기 지도들은 권력과 주권을 강조했으며, 정치학이 지도 제작에서 재현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은 현재도 유효하다. 쓰라린 국민 감정 때문에 한 지역에 대한 지명들이 경합하는 일이 발생하는 예를 보자. 남한과 북한은 '일본해(Sea of Japan)'란 명칭을 거부하고 '동해(East Sea)'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은 '동해'라는 명칭을 사용해왔지만 '한국해(Sea of Korea)', '동방해(Oriental Sea)', '고래 바다(Sea of Whales)' 등의 다른 명칭도 존재했다. 영국국립도서관에 소장된 80장의 18세기 지도들을 조사해본 결과, '한국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62개, '동해'는 7개, '한국해'와 '동해'를 동시에 사용한 것은 2개, '일본해'는 6개, '중국해'는 3개가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일본의 군사력이 강해지고 일본인들이 영문판 지도를 출판하기 시작하자 '한국해'라는 명칭 대신 '일본해'라는 명칭이 우세하게 되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1929년 국제수로기구(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는 이 명칭을 인정해주었다.

2차 대전 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국인들은 이 문제를 국가적 자긍심과 관련된 문제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한국(남한) 사람들은 '일본해'라는 명칭이 제국주의의 잔재라고 주장하면서 개명에 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동해'라는 명칭을 선호했으며 '한국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1991년 국제연합에 가입한 후로 한국은 국제연합 지명표준화회(CSGN)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1998년, 제7차 국제연합 회의에서는 '일본해'와 '동해'의 병기를 권고함으로써 이 분쟁의 결정을 미결로 남겨두었다. 많은 지도책과 단체가 이 관례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국제연합의 기관들과 CNN은 다른 접근 방식을 생각해냈는데, 그것은 이 바다에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않는 것이었다.



중동의 용광로 : 땅과 국경, 민족 자결권에 대한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은 끊임없이 무력 사태를 발생시켜 왔다. 이 역시 지도가 정치 도구로서 선택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생생한 실례다. 지도 제작자들의 취사선택의 자유는, 그들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다.



아랍 국가들은 1947년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에 의해 설정된 국경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의 건국을 합법화해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1949년에 국경은 휴전선으로 바뀌었는데, 이스라엘은 더욱 확장되었고 팔레스타인 아랍국가는 사라졌으며, 국제연합의 계획하에 예루살렘과 웨스트뱅크, 가자지구는 '특별 국제 제도'로 관리하게 되었다.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지도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일들이 수없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지도에서는 그 나라의 휴전선이 사실대로 표시됐고,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를 요르단과 이집트가 점령한 것으로 표시했다. 영국과 파키스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세계지도에는 이 합병을 합법적인 것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아랍인들의 지도는 다양했다. 실제 상황에 충실한 지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묘사하지 않았다. 그 지역은 '팔레스타인'으로 표기되었고, 급진적 아랍인들은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에 포함시켰다.



관찰자의 시각


해석하는 사람은 자신의 평가 기준에 따라 상을 수립하기 때문에 심리적 투영은 지리학적 개념의 근거가 된다.



지형의 상대적 배치 : 사하라 사막의 투아레그 족은 방위를 결정할 때 자신의 위치와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 사이의 관계를 기준으로 한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중심으로 지구를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누며 그 동쪽(East)을 '동방(Orient)'이라고 부른다. 지난 4세기 동안 유럽은 지도를 지배해왔기 때문에 많은 유럽인의 인식은 지도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말엽에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 생겼고, 이에 따라 지리학 용어들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서아시아(West Asia)'라는 명칭은 '중동(Middle East)'이라는 이름으로 장족의 발전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서인도제도(West Indies)'라는 명칭은 변하지 않았다. 민족적 입장에서 볼 때 '동방(Orient)'이란 명칭은 '정치적으로 불평등'한 단어가 되었다. 이 명칭은 자체적으로 그 지역이나 문화적 유산을 정의한 용어가 아니라 유럽의 입장에서 방위를 해석해 정의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대륙의 개념도 항상 자의적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구별은 정말로 모호하다. 러시아는 이 두 대륙에 걸쳐 있다. 터키는 대체로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유럽 연합(EU)에 가입할 가능성이 있다. 터키의 외무장관 캠(Ismail Cem)에 의하면 "터키는 7세기부터 유럽과 아시아에 모두 속한다고 생각하며, 그 다양성을 자산으로 여긴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분명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주변국들로부터 배척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아시안 게임에서 제외되었고, 근본적으로 유럽 국가로 행세해야만 한다. 이스라엘 팀은 유럽 농구연맹과 축구연맹에서 경기를 하고 있으며 매년 유로비전 콘테스트에 참가곡을 내고 있다. 지리학적 지역을 기준으로 교대로 의석을 차지하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스라엘은 비상임 회원으로서 서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와 함께 절충 집단에 속해 있다.

기독교 세계 : 유럽은 지중해 북부에 위치한 불확실한 지역이었다. 특히 7세기에 이슬람이 부흥한 후 유럽은 견제세력이 되었고 '정신적 우월성'의 태도를 견지하기 시작했는데, 문화역사학자 딜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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