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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평전 1, 2

로버트 댈럭 지음 | 푸른숲
1장 귀공자의 어린 시절

30세 하원의원의 귀향


1947년 8월, 존 F. 케네디가 아일랜드를 찾았다. 이때 케네디가 아일랜드를 방문한 것은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 그 무렵 미국 주재 아일랜드 대사를 지낸 이가 케네디를 가리켜 "손꼽히는 '토박이 뉴잉글랜드인'이지만 선대의 조국 아일랜드와 인연이 거의 끊긴 미국인"이라고 지적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케네디가 영국을 제 집 드나들듯 할 때에도 아일랜드에 들른 적이 없다. 이 점을 꼬집어 상기시키면서 주미 아일랜드 대사는 비꼬는 투로 케네디를 '영국계 미국인'이라고 일컬었다. 또 케네디의 한 영국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케네디의 아일랜드 혈통을 높이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그의 성향은 유럽 쪽이었습니다. 아일랜드인보다는 훨씬 더 영국인다웠지요." 그러던 그가 마침내 '귀향'길에 올랐다. 존 F. 케네디의 부친은 아일랜드 혈통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부친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미국의 실업가 재정전문가 공직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본능 못지않게 강렬했다. 그의 일생은 바로 그런 집요한 출세욕의 소산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아일랜드인'이라는 꼬리표는 그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자 분노를 느끼게 했다.

1947년 무렵까지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참담한 잿더미 속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케네디는 마셜플랜(1948~1952년 냉전 속에서 미국이 재정을 지원한 전후 유럽 경제부흥 계획)의 실효성과 타당성을 타진하기 위해 파견된 유럽 실지 답사 사절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방문 일정 중 잠시 짬을 내어 자신이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 캐슬린과 만나 회포를 풀어볼 작정이었다. 캐슬린의 남편 윌리엄 캐번 디시 하팅턴은 서열상 차기 데번셔 공작의 지위에 있던 인물로,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미망인이 되어 영국에 머물던 캐슬린에게 시댁인 데번셔 가문은 깊은 애정을 가지고 격에 맞는 대우를 해주었다. 사실 캐슬린은 오빠보다 한결 더 '영국인다운 미국인'이었다. 데번셔 가문은 캐슬린에게 가문 소유의 영지와 장원 여러 곳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쓸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아일랜드 남부의 워터포드 카운티에 위치한 리스모어 성도 그중 한 곳이었다. 캐슬린은 리스모어 성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곳"이라고 일컬으며 찬탄했는데, 이 성은 한때 월터 래라이 경(스코틀랜드의 문인)이 소유했던 12세기의 유서 깊은 대저택이었다. 앞서 캐슬린은 오빠 잭(존 F. 케네디)의 별칭에게 리스모어 성에서 휴가를 함께 보내자고 청한 바 있다. 그러면서 영국 사교계의 명사들, 정계의 유력 인사들을 불러 모아 친분을 맺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신화의 탄생 -1917, 존 F. 케네디 세상에 나오다

잭이 태어난 바로 그날, 부친 조지프 P. 케네디는 '매사추세츠 일렉트릭'사의 중역으로 선임되었다. 스물여덟 살, 미국 굴지의 대기업 임원으로는 최연소 축이었다. 이를 시발점으로 그는 미국 실업계에서 눈부시게 일취월장했다. 역설적이지만 그가 승승장구한 배경은 다름 아닌 전시라는 시대 상황이었다. 그 시절, 분쟁을 종식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이념 아래 제1차 세계대전을 '십자군의 성전'으로 믿는 미국인이 허다했다. 그러나 조지프에게 그런 열광적 이념 나부랭이는 아예 없다시피 했다.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세대가 나서서 그 아까운 목숨들을 애꿎게 희생한다? 그것은 얼핏 보아도 실로 어처구니없는 부조리였다. 그 전쟁을 통해 뭔가 특별히 그럴싸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냉소주의, 즉 구세계 유럽의 뿌리 깊은 반목 적대 충돌, 나아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냉소적 시각이 너무나 완강했다. 이 때문에 하버드 시절 친구들 대다수와 언성을 높인 끝에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다. 동창 중에는 군 복무를 지원한 친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군 입대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아무런 보람도 소득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전쟁은 무의미하고 몰지각한 대량 학살이다. 이 전쟁으로 승자와 패자, 정복자와 피정복자 양쪽 다 파멸하고 폐허가 될 것이다." 그의 논지는 그랬다. 1916년 솜 강 전투에서 영국군이 공격에 실패해 전사자 수만 명을 냈을 때였다.



그 뉴스를 들은 뒤 앙증맞은 침대 속에 누워 있던 조 주니어를 굽어 내려다보면서 그는 로즈에게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내게 영원할 행복은 이 녀석뿐이야."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조지프가 보인 반응과 태도는 그 뒤에도 미국이 국제적으로 심각한 위기 국면에 맞닥뜨릴 때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국내정세, 특히 미국 경제를 전망한 그의 통찰력과 식견은 이따금 놀랍도록 날카로웠다. 반면 국제정세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릇된 판단으로 점철했다. 그는 전 세계의 제반 중대사를 도덕적 견지나 정치적 관점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사업가로서 자신의 운신에 장애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 그것이 그의 판단의 준거였다. 더 심하게 말하면 행여라도 자신이 비명횡사를 당하는 사태일까 아닐까 하는 것이 중요한 관심사였다.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들들의 생사존망이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하는데, 아무튼 이 같은 개인적 공포와 사사로운 소견 때문에 그는 평생을 고립주의자(특히 유럽 여러 나라와의 상호 불간섭 원칙을 주장하는 미국의 전통적 외교정책)로 처신했다. 1917년 9월 조지프 P. 케네디는 은행장을 그만두고 퀸시(매사추세츠 주 동부 노퍽군에 있는 시)에 있던 '베슬리헴 스틸 계열의 포어 리버' 조선소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비로소 재산 축적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기껏해야 1만 5,000달러 연봉으로는 부자 대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나마 방위 산업체에 근무해 군 복무를 기피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누그러뜨릴 수는 있었다.



2장 미국 중산층의 희망, 케네디 가문

잦은 병치레, 독서의 즐거움 깨닫다


존 F. 케네디, 즉 잭은 미국 최고의 명문 갑부 반열에 드는 집안의 차남으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다른 여러 특권 상류층 청소년들과 자기 자신의 처지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캐봇 로지 솔턴스톨 가 등은 케네디 문중보다 명성이 더 자자한 보스턴 호족이었다. 또 카네기 록펠러 밴더필트 등이 일궈낸 가문은 부의 측면에서 케네디 일가를 능가했다. 그리고 애덤스 루스벨트 태프트가 등은 정계의 명문거족으로서 케네디 문중보다 훨씬 유서 깊었다. 하지만 케네디 집안 또한 자타가 공인할 만한 실세 가운데 하나임엔 분명했다. 더욱이 전도유망한 차세대가 입신출세를 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누구든 괄목하지 않을 수 없는 집안이었다. 이를테면 1938년 《라이프》지에 게재된 다음과 같은 기사에 그런 시각이 적나라하게 반영되어 있다. "가령 조지프 케네디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하자.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의 아들딸들이 큰 호소력으로 일익을 담당했을 것이다.……늠름하고 생기발랄한 자식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시어도어 루스벨트(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이래 정치가 집안으로 대중의 환심을 얻기에 더없이 훌륭한 자산이다." 미국 사회의 기존 중산층은 '남다른 재능과 추진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느 미국인이 으레 품고 있기 마련인 일정한 기대치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고,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가 될 수도 있다'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었다.



경제난이 극심하던 대공황 시절에도 그 투철한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중산층에게 케네디 일가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중산층도 그러했으니 이제 밑바닥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수많은 소수민족 출신에게는 두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열 살 때까지 잭의 어린 시절은 '피츠 외할아버지'에 관한 기억들로 촘촘히 아로새겨져 있다. 조 주니어 형과 자신을 보스턴 레드삭스 경기에 데려가기도 했고, 보스턴 퍼블릭 가든에서 함께 뱃놀이를 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보스턴 일대를 순회하는 선거 유세에도 데리고 다녔는데, 외손주들까지 동반하여 열성을 쏟은 그 주지사 경선에서 '피츠 외할아버지'는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또 다른 기억으로는 병치레에 관한 것들이다. 기관지염 수두 풍진 홍역 볼거리 성홍열 백일해 등 잭은 갖가지 소아 질환을 앓느라 침실에 꼼짝없이 갇혀 있기 일쑤였다. 그 병치레 덕분에 일찍이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는데, 자리보전하고 있을 때면 모친이 곁을 지키며 책을 읽어주기도 했지만 혼자서라도 으레 독서삼매에 빠지곤 했기 때문이다. 잭은 『신밧드의 모험』이라든가 『피터팬』, 『검은 말 이야기』 같은 아동문학의 고전들을 그 당시 섭렵했다. 소설의 등장인물 중에는 '구레나룻 빌리'와 '레디 폭스' 따위가 가장 좋아하는 부류였다.



최고 중에서도 최고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장점이 있기 마련일진대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점을 높이 사주려는 자세가 잭 특유의 면모였다. 잭의 부친이 이따금 아들의 신체적 한계를 못마땅하게 여겨 적의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지만 잭은 적어도 그런 태도에 대해 겉으로는 언짢은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친의 가학적인 언사가 잭에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친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 덕분에 그 숱한 특권들을 거저 누리고 있다 해서 마땅히 그런 수모까지 잠자코 견뎌내야 한단 말인가? "세상에 아버지 없는 사람 어디 있는가?" 잭이 자기 부모 문제로 불평을 늘어놓던 친구에게 체념 어린 말투로 뱉은 말이다. 이런저런 정상을 두루 참작해 보아도 아무튼 자식의 건강문제를 함부로 들먹인 부친의 언행은 잭의 가슴에 못을 박은 처사였다. 당사자인 잭 스스로 자신의 신체적 문제점들을 뼈저리게 의식하면서 그 병약한 모습을 극복하고 무시해버리려고 무척 애쓰지 않았던가. 어떤 친구는 그에 관해 이런 말을 했다. "체구부터 앙상하게 말라 볼품없는 모습인 데다 걸핏하면 등이며 여기저기를 온통 다치거나 골골거리기가 일쑤여서, 그런 얘기라면 아예 입도 벙끗 하려 들지 않았어요. ……그런 모습을 정말이지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초트 학창 시절 잭은 학교생활에 때로는 염증을 나타냈고, 은연중에 부모의 권위에도 반발심을 품고 있었다. 먼저 학과 공부에서 과목별로 여전히 편차가 심했다. 영어나 역사에는 본디부터 흥미가 있었고 성적도 좋았다. 외국어 과목의 경우 대개 꾸준한 학습이 없으면 성과가 따르지 않는다는 게 불문율인 것처럼 잭에게는 그 방면의 끈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력도 기껏해야 중간 정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1932년 1학년 말에는 라틴어 프랑스어 성적이 부진했던 까닭에 여름 보충수업까지 받아야 했다. 뒷날 모친 로즈가 초트 시절 잭의 건강문제로 두 내외가 무척이나 속을 끓였다는 회고 끝에 이렇게 덧붙인 적이 있다. "하지만 건강 문제 못지않게 열심히 하지 않는다." 별 이유 없이 재미가 없는 과목도 한 번 잘해 보겠다고 작심하고 악착같이 덤벼보는, 뭐랄까 '승부근성' 같은 게 없었던 것이다. 초트 시절 내내 잭은 학과 공부보다 시사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교장 선생의 표현대로라면 "언뜻 보기에도 교과서 뒤적이는 건 뒷전인 게 분명한데 세상사에 관한 소식통으로는 자기 학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학생"이었다.



인기 최고의 학생, 대단한 플레이보이

하버드 1, 2학년 시절 잭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라면 바로 친구를 실컷 사귀었다는 점, 그리고 '레이디스 맨(lady's man)', 즉 여자들에게 '끼 있는 남자'로서 그 자질을 유감없이 과시했다는 점이다. 잭은 만나는 사람에게 특유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약간 들창코에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앳된 친구가 어색한 몸짓으로 '하버드 크림슨' 사무실이 있는 건물 층계를 망아지처럼 겅중겅중 몇 계단씩 접어 올라가더군요." 한 동급생의 뇌리에 잭의 인상이 그랬다. 또 교수 한 분은 "수업 시간에 좌중에서 유난히 돋보이고 그 총명하던 앳된 얼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37년 잭이 웰드 홀(하버드 대학교 신입생 기숙사, 매튜스 홀과 함께 하버드 야드 내에서 가장 매력 있는 기숙사로 꼽힌다)에서 존 윈스럽 하우스로 옮기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했을 당시 학장으로서 잭을 면담하고 수락 여부를 검토했던 이의 메모에 따르면, "훌륭한 학생"으로 "웰드에서 인기 최고", "자기 학년에서 인기 최고"를 다투던 학생이었다. 하버드 입학 직후 잭은 초트 시절 친구 몇몇과 연계를 재개했는데 그중 빌링스에게 편지로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우리는 진짜 끝내주게 지내는 중이다." 10월 들어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 "요사이 난 플레이보이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다." "유머가 뛰어나고 아주 영리하고 가식을 모르는 친구", 하버드 시절 잭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로 뒤에 하버드 풋볼팀의 후위로 활약하면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는 로버트 맥도널드의 잭에 대한 평은 그랬다.



잭과 어울려 같이 운동을 하던 또 다른 친구의 회고에 따르면 "함께 있으면 언제나 웃음을 선사하는 친구"였다. 빌링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함께 있으면 즐겁고 재미있기로는 잭이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잭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잭을 그렇게 여겼을 겁니다. "특히 안하무인에 가까우리만치 거침없는 태도가 동급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비결'이었다. 그들 자신이 '성골', '진골' 식으로 분류되는 미국의 사회적 신분 위계의 최상층이었음에도 그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한통속이 되어 일정 부분 혐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하고 자기한테 여자를 '꼬시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잭은 그 점을 유달리 흡족해했다. 열일곱 살이던 1934년에 일찌감치 잭은 또래 여자애들이 자기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해 여름 어느 날, 친구 빌링스에게 코드곶의 자기네 별장 바로 이웃집 여학생이 멀리 클리블랜드에서 장거리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더라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의기양양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잭은 이렇게 단정을 내렸다.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미남이라서 그런 게 아닐 거야. 내가 남들보다 별로 더 잘생긴 것도 아니거든. 내 인간성 때문일 거야." 그때 이후 몇 년에 걸쳐 빌링스는 잭으로부터 섹스 공략의 혁혁한 전과를 자랑스레 기록한 편지를 수도 없이 받았다. 특히 하버드 대학 2학년 때 편지는 1년 동안 한결같이 그 내용이었다.



4장 정치, 필생의 대업을 선택하다

타고난 정치가 기질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일과 사랑에 성공적으로 맞물려 지내야 잘 살아 낸 인생이라고 믿었다. 일과 사랑 모두 선택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풍족한 집안, 가능성이 풍부한 자손이라고 해서 딱히 수월할 까닭도 없다. 잭 케네디도 성년의 초입에서 필생의 천직을 찾는 데 진통을 겪었다. 전쟁에서 돌아와 스물여덟 살 되던 해인 1945년부터 특히 그러했다. 케네디 집안 자식이라면, 당연히 무언가 쓸모가 있는, 아니 없어서는 안 될 직업만을 목표로 삼아야 합당했다. 또 아들자식은 죽도록 가문의 성씨를 이어가고 있으므로 명시적으로 가문의 위신을 떠받칠 책임도 있었다. 가문의 체면,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에게 그것은 집요하고 절실한 관심사였다. 어느 전기 작가는 이런 표현까지 동원했다. "케네디 가문의 이미지를 제고하고자 하는 열망, 그것이야말로 이 복잡 난해한 인물의 내면에 도사리던 추동력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바라던 바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비상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다. 조지프는 애당초 아들들의 장래 직업으로 '사업가'는 제쳐두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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