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 예지
취약성의 문턱고대에는 물에 대한 권리와 관개된 토지가 평화와 전쟁을 가름하는 세상이었다. 기원전 31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도시국가들이 관개수로를 단단히 방비하면서 신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신전을 세우고 창고에 곡식을 비축했다. 흉년에 발생하기 마련인 기근과 사회혼란에 대비한 보험인 셈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2200년경에 북쪽 멀리 어딘가에서 대규모 화산 분출이 일어나 화산재가 대기 중에 퍼져나갔다. 그것이 몇 개월 동안 햇빛을 가려 나중에는 연중 내내 추위가 찾아왔다. 그 뒤 278년 동안 가뭄이 지속되면서 한때 비옥했던 하부르 북부 평원은 거의 사막으로 변화했다. 이주민이 늘어나면서 정착민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점차 사회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몇 세대 만에 정부가 해체되자 사람들은 더 작은 공동체로 흩어지거나 고지대로 대피하거나, 그냥 굶어 죽었다.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남부에 있던 대도시였다. 그곳의 복원된 지구라트(언덕사원)에 오르면 황량한 사막이 뻗어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척박하기 짝이 없는 사막이 과거에 세계 최초의 문명 가운데 하나를 먹여 살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기원전 2300년경 우르는 1천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도시였으며, 유서 깊은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였다. 우르의 지배자들은 이집트의 파라오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다. 우르는 동부 지중해까지 영역을 확대했으며, 신전, 포장도로, 궁정, 관공서와 상점들이 즐비했고, 약 5천여 명의 인구가 거주했다. 이는 당시 세계 최대의 인간 공동체였다. 그러나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몬순의 경로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강우의 양태가 달라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하고 말았다.
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새 사냥터를 찾아 이동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해결했지만 우르와 같은 대도시민들에게는 이주의 적응이나 회복이 쉽지 않았다. 커진 규모만큼 환경에 대한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 역시 수천 년 동안 미시시피 삼각주에서 사냥과 어업으로 살아왔으며, 홍수가 닥칠 때면 쉽게 고지대로 이동했다. 그런데 1718년 뉴올리언스에 도착하여 도시를 건설한 프랑스 이주민들은 홍수가 일어나자 강의 경로를 통제했다. 1724년 처음으로 홍수가 발생했을 때 그들은 거주지의 기단을 1미터 정도로 쌓았다. 이는 그리 높지 않은 제방이었기에 미시시피 강물이 한 군데로 집중되지 않고 멀리 퍼져나가면서 큰 재앙이 초래되지 않았다. 그런데 1735년과 1785년에 도시가 다시 홍수에 잠기자 사람들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농장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인공 제방을 삼각주의 끝까지 뻗쳤다. 하지만 제방이 늘어남에 따라 붕괴의 위험성도 급격히 높아져버렸다.
강물은 늘 바다로 가는 지름길을 찾는다. 그 길을 찾으면 강바닥에 침니를 쌓기 시작하고, 그 결과 1천 년에 한 번꼴로 한쪽으로 흘러넘치게 된다. 이런 종류의 변동은 강변을 오가며 반(半) 정주 생활을 하는 수렵·채집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대규모의 도시인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시시피강은 아마존강과 콩고강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넓고 긴 강이다. 1892년 19세기 최대의 홍수가 일어나 280개의 제방이 무너졌고 육군 공병단이 미시시피강의 홍수 통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병단 지도부는 제방을 이용하여 강을 통제하는 방침을 고수했다. 그 결과 강의 주요 경로가 애차팔라야강 쪽으로 변경되었다. 제방은 예전의 둑보다 여섯 배나 높아졌으나 다시 시작된 1927년의 대홍수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200여 명의 인명과 수천 마리의 가축이 죽고 9만 3천 제곱킬로미터의 농토와 촌락들이 침수되었다.
1928년 의회는 기금을 조성하여 제방 시설을 재배치하고 배수구와 수문을 설치했다. 하지만 산업 발달로 상류지역의 환경이 변모하면서-고속도로, 상점가, 주택지구의 발달- 홍수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상류의 균열은 언제든 불어난 강물의 엄청난 힘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공병단은 강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다. 수메르의 우르에서는 최대의 홍수가 발생해도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그쳤다. 그러나 오늘날 1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수백 억 달러의 기간시설을 보유한 도시의 운명은 대륙 절반을 영향권으로 삼고 점점 활동이 활발해지는 강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뉴올리언스는 100년 만의 홍수를 막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1천 년, 1만 년 만에 찾아오는 대홍수에 대해서는 낙관할 수 없다. 이 책은 그렇게 점증하는 취약성을 다루고자 한다. 인류가 1만 5천 년 동안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동을 어떻게 겪었으며 그 문턱을 어떻게 넘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1부 펌프와 컨베이어 벨트
마지막 빙하기의 오케스트라(기원전 18000~기원전 13500년)프랑스 남부 니오 동굴에는 들소, 매머드, 순록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이 벽화는 그 전의 그림들 위에 계속해서 덧 그려진 일종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 원본을 지운 필사본)인데 곳곳에 손바닥의 윤곽선이 생생하다. 이 그림들은 수백 년의 간격을 두고 그려졌다. 1만 8천 년 전 동굴 바깥은 마지막 빙하기의 혹독한 세계였다. 9개월의 긴 겨울 동안 크로마뇽인들은 동굴 속에서 지내며 사냥감이 이동할 때만 먼 곳까지 나갔다. 순록은 동토의 유럽 세계에 계절을 알리는 시계와 같은 역할을 했다. 크로마뇽인들은 순록이 언제 돌아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 번에 수십 마리 혹은 수백 마리까지 도살하여 동굴로 가져갔다. 크로마뇽인들은 동굴 벽 뒤에 동물들의 정령이 있다고 여겼다. 동굴 벽에 새겨진 손바닥 자국은 그러한 힘을 얻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었음을 나타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크로마뇽인은 약 5만 년 동안 서남아시아의 동굴에서 다른 종의 인간인 네안데르탈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에 비해 지능이 모자랐던 네안데르탈인들을 서서히 밀어냈고 약 3만 년 전부터 유럽의 주인으로 군림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1만 5천 년 전까지 유럽은 동토였다. 유럽 중부까지 빙하가 덮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옛날의 기후도 해마다, 또 세기마다 달랐다. 빙하기 중에도 따뜻한 시기에 유럽은 인간과 동물을 끌어들였고, 추울 때는 밖으로 몰아냈다. 1만 8천 년 전 유럽의 기후는 몹시 추웠으나 갑자기 1만 5천 년 전에 기온이 극적으로 상승하면서 매머드와 들소, 북극여우와 순록 등의 고대 빙하기의 동물들은 북쪽으로 이동했다. 크로마뇽인들 중의 일부는 사냥감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또 일부는 점점 퍼져나가는 식물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현대 과학은 토탄 덩어리 같은 심해와 호수의 침전물, 수천 킬로미터의 얼음 층을 뚫고 채취한 샘플, 나무의 나이테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지구의 기후 기록에 접근한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우리는 충적세(마지막 빙하기 이후의 온난기) 초기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이행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조사를 종합해보면 지구의 온난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지구 궤도 변수(이심률, 기울기, 축의 세차운동)의 변화가 태양열 복사의 강도와 분포를 변화시켰고 여기에 화산폭발 등에 의한 온실가스의 증가가 궤도 신호를 증폭시켰다. 이행이 진전되면서 북반구의 방대한 빙하가 급속히 녹아 알베도(반사율)가 감소한 것이 전 지구적 온난화를 가속시켰다.
2000년에 한 국제 과학자 팀이 러시아의 보스토크 기지에서 3,623미터의 얼음 층을 뚫고 채취한 얼음 샘플에 의하면 빙하기에서 온난화 시기로의 이동은 10만 년 간격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온난화 시기에는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대기 중 농도가 크게 변화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빙하기에서 온난한 시기로 이행할 때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180ppmv(부피로 나타낸 ppm)에서 300ppmv로 증가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온난해진 세계에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365ppm이다. 충적세부터 지속된 온난화, 이 특이하게 '긴 여름'을 틈타 인류 문명이 성장했지만 우리는 그 여름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그리고 그 후 어떤 기후 변화가 초래될지를 고민해야 한다.
신대륙(기원전 15000~기원전 11000년)인간이 아메리카에 처음 이주하게 된 경로와 시기는 1만 8천 년 전에 급격히 전개된 지구 온난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마지막 빙하기에 시베리아 북동부는 척박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1만 8천 년 전에 알래스카는 동쪽과 남쪽이 빙하로 둘러싸여 있어 북아메리카의 다른 지역과 차단된 상태였다. 두 개의 거대한 빙상이 캐나다 전역과 현재 미국의 북부지역을 뒤덮고 있었다. 빙상은 북대서양의 변덕스러운 기후 변동에 따라 전진하거나 후퇴했다. 1988년 독일의 고해양학자인 하르트무트 하인리히는 북대서양의 해산(海山)에서 침전층을 채취했다. 이것은 한랭과 온난 사이를 오가는 사이에 형성된 잡석층으로 이를 통해 기원전 1만 500년 전에서 7만 년 전까지 거의 1만 년마다 빙산의 대규모 유출이 있었음을 알아냈다.
수백 년 동안 빙하가 녹은 엄청난 양의 물이 북대서양으로 쏟아져 들어가면서 멕시코 만류의 난류 순환이 차단되었다. 그 결과 유럽으로 불어오는 온난한 서풍의 기세가 꺾여 유럽이 결빙되었다.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광대한 지역이 춥고, 건조하고, 바람이 심한 환경으로 바뀌었으며, 이런 추세가 남쪽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아열대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즉 빠른 온난화가 빠른 한냉화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 이전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기후변화와 상당히 비슷했다. 그렇다면 알래스카의 수렵·채집자들은 어떻게 얼음이 덮인 남쪽으로 이동했을까? 과학자들은 북아메리카로 연결된 두 개의 빙상, 일명 코딜레라 빙상과 로렌타이드 빙상 사이에 얼어붙지 않은 통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캐나다 극지에서 북아메리카의 심장부를 잇는, 황량하지만 생존이 가능한 고속도로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 통로는 대온난화의 산물이었다. 약 2만 1천 년 전에 최대 규모에 달했던 두 빙상은 기원전 16000년에 최소로 줄어들었으며, 급기야 기원전 12000년에는 서로 갈라져 얼어붙지 않은 통로가 열린 것이다. 또한 빙상의 길이도 북쪽으로 짧아졌다. 로렌타이드 빙상은 북극권 캐나다까지 물러났고, 코딜레라 빙상은 서쪽의 산악지대로 후퇴했다. 오늘날 빙상의 흔적은 없으나, 빙상이 후퇴한 뒤 4천 년 동안 형성된 5대호와 고대 캐나다 순상지(楯狀地)의 황량한 풍경이 그것을 입증한다. 어쨌든 통로의 길이는 약 1,500킬로미터에 이르는데, 예측할 수 없는 대기와 기후변화에 따라 열렸다 도로 닫히고, 넓어졌다 좁아지는 등 수십 년 주기로 변덕을 부리다가 나중에야 영구적으로 열렸을 것이다. 이 과정에 들소나 순록 같은 동물들이 이동했을 것이고 그것들을 따라 사람들은 몇 세대에 걸쳐 이동했을 것이다. 어떤 집단은 남쪽으로 왔다가 동물들을 따라 도로 북상하기도 했을 것이며, 일부 집단은 통로의 남쪽에 항구적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북아메리카의 고 인디언 인구 변화를 보면 기원전 11500년 이후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 최초의 거주자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널리 분산된 식량을 열심히 찾아다녔으나 대온난화로 인해 크게 증대한 식용식물을 섭취하게 되면서 식성이 잡식으로 이행되었다. 이때부터 수렵·채집과 정착생활이 병행되었는데, 사람들은 야생식물의 씨앗을 재배하는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뭄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를 더 긴밀하게 조직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 대규모 문명들이 출현했다. 그러나 하지만 복잡성이 증가하면서 사회는 점점 더 기후변동에 취약해지기 시작했다.
대온난화 시기의 유럽(기원전 15000~기원전 11000년)마지막 온난화 이후에는 왜 빙하기가 다시 오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몇 가지 원인을 들자면 우선 지구 궤도가 변화하여 장기적으로 지표면의 온도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답은 해류의 순환 속도다. 플로리다 해협의 염분 농도 변화를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마지막 빙하기에는 대서양 해류의 순환이 급격히 느려졌고, 멀리 유럽의 바다 온도가 급강하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순환이 느려진 이유는 허드슨만과 캐나다 동부를 덮고 있던 로렌타이드 빙상이 녹은 물이 수천 년 동안 래브라도해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민물이 계속 유입되자 염분 농도가 짙은 물의 하강이 차단되었는데, 그로 인해 멕시코만의 난류가 끊겼다. 그 뒤 허드슨만에서 빙하가 녹은 물이 흐름을 멈추자 래브라도해의 하강류가 회복되었고 멕시코 만류가 방향을 바꾸어 북대서양의 순환이 재개되었다. 다습한 서풍이 바다를 덮으며 온기를 북서유럽으로 전했다. 급속한 온난화가 시작된 것이다.
온난화가 시작된 지 불과 2천 년 만에 유럽의 풍경은 크게 달라졌다. 유럽의 윗부분을 덮고 있던 스칸디나비아 빙상과 알프스 빙상이 극적으로 수축되면서 빙하가 녹은 민물 수십 억 리터가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이로 인해 기원전 12000년경 어떤 지역의 해수면은 1년에 40밀리미터씩 상승했다. 육지에서는 관목들이 멀리 퍼져 자작나무 숲이 잉글랜드와 서유럽, 북유럽의 대부분을 덮게 되면서 툰드라 초원은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인간에게 또 다른 환경 적응이라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우선 대형 동물의 사냥이 어려워졌다. 매머드, 털고뿔소, 큰뿔사슴과 같은 빙하기 동물들은 여러 곳에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산맥이 높아지는 등 장애물이 생겨나자 적응력을 잃고 점차 멸종하게 되었다. 당시 유라시아 북부에서만도 약 80속(屬)의 생물들이 사라졌다. 매머드가 최종적으로 멸종된 것은 기원전 2500년경 기자의 피라미드가 나일 강변에 세워지고 유럽 중부와 서부에서 쟁기가 사용될 무렵이었다.
사냥감이 희박해지자 늘어난 식용식물이 생존의 열쇠가 되었다. 크로마뇽인들은 동굴 밖으로 나와 과일과 버섯, 풀씨와 식용 구근 등을 쉽게 채집했다. 특히 전분이 많은 씨앗과 견과는 몇 년 동안 보관이 가능했으므로 지방이나 소형 포유동물보다 더 의지할 만한 식량이 되었다. 인간은 동굴 밖으로 나오면서 영적인 삶도 지상으로 옮겼다. 무당은 오래전의 사냥, 사라져버린 신화적 동물과 긴 겨울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했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세계의 힘에 둘러싸여 인간의 존재를 형성했다. 하지만 극적인 기후 변동은 신의 조화가 아니었다. 지구 궤도의 이심률, 지축의 기울기와 방향이 주기적으로 미세한 변화를 일으키는 탓에 기후변동이 일어나고 전체의 대기·해양 시스템이 갑자기 변화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기후의 주기에 관한 보잘것없는 지식을 바탕으로, 장차 또 한 차례의 추위가 지구를 덮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소박한 믿음일 뿐이다.
천년의 가뭄(기원전 11000~기원전 10000년)기원전 13000년 이후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지표면의 물이 풍부해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때까지 인간이 거주하지 않던 땅으로 들어갔다. 유적 발굴에 의하면 이들은 현재 이스라엘에 속한 카르멜산의 케바라 동굴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고고학자들은 거주지의 이름을 따 이들을 '케바라인'이라고 명명한다. 케바라인들은 의지할 만한 식수원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주로 사냥에 의존하고 살았다. 기원전 11000년경에는 도토리를 품은 참나무와 피스타치오 숲이 유프라테스강 중류에서 다마스쿠스 일대를 거쳐 요르단강까지 뻗어 있었다. 참나무와 피스타치오 지대는 아마 성서에 나오는 젖과 굴이 흐르는 땅을 말할지도 모른다. 케바라인들의 후손들인 나푸트인들은 뼈로 된 손잡이와 예리한 돌칼이 달린 낫으로 도토리와 피스타치오 열매(옻나무의 일종인 캐슈과에 속함)를 따서 식량으로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