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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서설 - 18세기의 미친 바보들

18세기 들어 서구에서는 중세의 형이상학적 관념이성이 합리주의적 계몽철학에 자리를 내주었다. 종교의 속박, 이념의 굴레를 박차고 나와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고, 구원의 미명 아래 자행된 온갖 우상과 폭력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근대의 조짐은 서양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18세기 조선에서도 주자학의 세례를 벗어던지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합리성과 동시에 벽(癖)과 치(癡)의 미친 열정이 옹호되었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뜻의 '벽(癖)'이란 말은 이 시기 지식인의 한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꽃, 새, 벼루, 담배, 골동품, 여행 등 개인적인 취미의 차원에서부터 천연두, 수레, 배 만드는 법, 무예실기 등 사회 현안에 대한, 또는 국방과 관련된 정부 분야까지 다채로운 층위의 지식과 정보를 재배열하였다.



성현의 도를 실현하는 군자적 삶의 이상이 시정(市井)의 목소리에 점차 파묻히면서, '치(癡)', 즉 바보, 멍청이를 자처하고 나서는 경향도 생겨났다. 이들은 미치지도 못하고 그럭저럭 욕 안 먹고 사는 건 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 지점에서 근대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지식의 패턴이 달라지고 정보의 인식이 바뀌면서 삶의 목표 또한 궤도 수정이 불가피했다.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백과전서류 전집들과 총서류 저작들은 정보의 독점적 권위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서울과 지방의 문화 격차는 하루가 달리 현격하게 벌어졌고, 지방의 지식인들에게 이러한 서울의 풍조는 해괴한 망국의 조짐으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사정(司正)의 칼날을 빼 들지 않을 수 없었으리만치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18세기에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한쪽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외칠 때, 다른 한쪽에서는 중국제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호화사치 풍조도 만연했다. 서양에서 강요된 경건함의 세월이 지나고 쾌락의 옹호와 관능의 광기가 휩쓸 때, 조선에서도 웰빙의 미명 아래 온갖 호화사치 풍조와 풍속의 타락이 자행되었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산업혁명으로 근대를 꽃피웠다. 반면 우리에게 근대는 여전히 타자로 남아 있었다. 이는 근대에 대한 일본과 조선의 차이, 정조와 메이지(明治)의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보다 근본적이고 면밀한 시야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18, 19세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어차피 해답은 거기에 있을 테니까.



1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과 세계 인식



18세기의 문화 개방과 조선 지식인의 세계화 대응


'무찌르자 오랑캐'의 북벌을 국시로 하던 세상의 젊은이들이 처음 북경에 도착했을 때 받은 문화적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사방으로 죽죽 뻗은 도로에 넘쳐나는 재화, 거리를 가득 메운 서점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쌓여 있는 서책들, 고딕식 서양 성당과 서구 과학기술 정보들까지, 그들이 직접 목격한 청나라는 애초에 조선이 무찌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중국의 각종 서적과 사치성 소비재들이 서울로 흘러 들어오면서 외국 문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우리 것에 대한 자기혐오가 동시에 일어났다. 당시 북경에서 들여온 서책들은 겉으로는 전통적인 성리학 서적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패관소품문과 백과전서적 총서류 들이 더 많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대한 총서들이 들어오면서 예전에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금기시되었던 사물에 대한 관심은 어느새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위치로 격상되었다. 이전까지 사물은 마음공부와 이치 탐구의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자체가 탐구의 대상으로 승격되었다. 18세기 지식인들은 무엇이건 관심이 생기면 모으고 정리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모은 것이 아니라 목차와 범례를 세워놓고 단계를 밟아 작업을 진행했다. 집체 작업에 의한 편집서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 시기 지식시장의 성격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년 귀양살이 동안 제자들과 함께 500권에 이르는 각종 저작을 펴낸 정약용의 작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다산의 현손인 정규영(丁奎英)이 1921년에 정리한 〈사암선생연보〉에 의하면 다산의 제자들은 역량에 따라 카드 작업하는 사람, 베껴 쓰는 사람, 교정보는 사람, 제본하는 사람 등으로 역할을 나누어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초당에서는 작업 목표가 정해지면 가장 먼저 관련 정보를 수집했고, 정보가 모이면 각각의 정보를 하나하나 교차 대조했다. 이렇게 정보의 우열과 정오(正誤)를 판단하고 나면 다산이 이를 총괄하여 점검하고 서문을 얹어 책으로 묶었다. 이러한 편집의 성격을 강조하여 다산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첫 장에 '정약용 저(著)'라 하지 않고, '정약용 편(編)'이라고 분명히 적어놓았다.



다산의 위대성은 그의 작업량이 아니라 작업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자칫 잡학적 호사 취미에 빠지기도 했던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그는 경학과 경제의 핵심 주제들을 관통하는 작업을 해냈다. 다산은 신유한(申維翰)의 일본여행기 《해사문견록(海 聞見錄)》에 얹은 발문에서 그저 문화적 우월감에만 젖어 일본에서 배울 것은 하나도 취해 오지 않는 신유한의 집필 태도를 맹렬하게 나무랐다. 당시 우리나라의 어부들이 일본으로 표류해 들어가면 그들은 배를 새로 건조해서 돌려보내 주었다. 그 배에서 본받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어부들은 일본 배라며 도착 즉시 배를 부숴버리기에 바빴다. 정약용은 이런 예들을 열거하며, 세계화의 경쟁력을 갖추려면 좋은 것을 취해 배우고, 우리에게 맞지 않는 건 고쳐서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약용은 화성 축성 당시 임금이 참고자료로 내려준 서양 선교사 테렌츠의 《기기도설(奇器圖設)》을 참고해서 도르래 장치로 된 기중가(起重架)를 발명하기도 했다. 이에 정조는 다산 덕에 경비 4만 냥을 줄일 수 있었다며 좋아했다.



다산뿐만 아니라 이 시기 지식인들 중에는 객관적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암 박지원은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과거의 유산에만 주목하고 있을 때 중국 여행기 《열하일기》를 통해 중국의 진정한 장관은 똥 덩어리와 벽돌에 있다고 외쳐 젊은 층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연암이 보기에 진짜 오랑캐는 청나라가 아니라 소중화(小中華)를 자부하던 조선이었다. 그래서 《열하일기》속에 〈허생전〉을 실어, 북벌을 내세우면서도 매점매석으로 나라 경제를 독점한 이완 대장의 허위허식을 준열하게 나무랐다. 또한 〈호곡장론(好哭場論)〉에서는 '똑바로 보고 제대로 보아야 저들을 이길 수 있다'는 논리를 해학과 풍자를 뒤섞은 일장 논설로 펼쳐, 이 책은 완성되기도 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생각을 바꾸니 모든 것이 다 전인미답의 경지였다. 진정한 경쟁력은 모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콘텐트의 독자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점차 절감하게 되면서, 모방의 불꽃이 어느새 창조의 에너지로 점화되었다. 문화계 전반에서 주체에 대한 자각의 붐이 일어나면서, 너희가 있는데 우리라고 없겠느냐는 사고관이 형성되었다. 그 예로 서유본(徐有本)이 천문학자 김영(金泳)에게 《동국분야기(東國分野記)》 집필을 주문한 것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 별자리의 방위에 따라 각 지역을 나누었다면 우리도 마땅히 조선의 땅을 기준으로 해 새롭게 우리만의 분야(分野)를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경우 조선은 더 이상 중국의 변방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으로 다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주체에 대한 각성은 이렇게 왔다.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벽'과 '치' 추구 경향

18세기 지식인들의 글에는 실존에 짓눌리며 과잉된 자의식을 주체하지 못하는 번민이 자주 토로된다. 그런데 이처럼 부정적 현실 인식으로 방관자가 된 이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벽'과 '치'의 추구가 나타나는 점이 흥미롭다. 이전 시기까지 '벽(癖)'은 군자가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일이었다. 이는 유가의 전통적인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논의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사물을 즐기는 벽은 바른 뜻을 잃게 하여 마침내 몸을 해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벽에 대한 인식이 18세기에 이르면 일부이기는 해도 지식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미덕으로 변모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명말청초의 지식인 집단 속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명나라 때 지식인들은 사람에게 벽이 없으면 깊은 정이 없기 때문에 더불어 사귈 수가 없다고 하였다. 청나라의 지식인들도 돌에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면서 사람에게는 벽이 없어선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확산은 이른바 명청의 패관소품문을 즐겨 읽던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처럼,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인식은 당시 지식인들의 성향과 맞물렸다. 요컨대 이들에게 벽은 단순히 취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친 듯 몰두한 몰입의 상태를 의미했다.



박제가는 시간만 나면 꽃을 그렸던 모양인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술의 모양, 잎새의 모습 등을 실은 《백화보서(百花譜序)》를 저술했다. 그리고 그는 "전문 기예를 익히는 건 왕왕 벽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박제가의 친구 유득공은 자신의 문집에 실은 〈제삼십이화첩(題三十二花帖)〉이란 글을 통해 《백화보서》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뭇사람의 찬사를 받던 아름다운 여인도, 아침이슬을 머금은 싱그러운 꽃떨기도 어느 때엔 이미 시들고 없다. 세상은 부질없고 모든 것은 변해 가는데, 그림책 속에서의 꽃들은 늘 변치 않고 절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유득공은 꽃 그림을 통해 티끌세상을 건너가는 이런저런 근심을 잊고 싶다고 했다.



벽이란 그 일을 하는 행위 자체가 즐겁고 기뻐서 온전히 자신을 잊고 몰입하는 순수한 행위이다. 말하자면 동기의 무목적성, 순수성에 대한 옹호인 셈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의 관점으로는 이러한 벽이 바보 아니면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이 반영된 표현이 바로 '치다. 그래서 18세기 지식인들의 글에는 '치'와 관련된 언급이 자주 보인다. 이덕무는 자신이 책만 보는 바보라 하여 〈간서치전(看書癡傳)〉을 지었다. 그리고 정철조는 '돌에 미친 바보'라는 뜻에서 호를 석치(石癡)라 하였다. 그는 비교적 높은 벼슬까지 지냈던 인물이었는데 돌만 보면 벼루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당대에는 그가 깎은 벼루를 최고로 칠 정도였으며 모두 그의 벼루를 소장하고 싶어했다.

이들 외에도 매화에 벽이 있어 매화 수십 그루를 심어놓고 시에 능한 사람 수천에게 매화시를 구했던 김석손 같은 인물이나, 칼 수집에 벽이 있어 구슬과 자개로 꾸민 칼을 방과 기둥에 죽 걸어놓고, 날마다 번갈아가며 찼지만 1년이 지나도록 다 찰 수 없었다는 악사 김억 같은 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벽과 치를 추구했던 박지원·이덕무·박제가·김억·정철조 등과 같은 이들이 주로 몰락한 지식인이나 서얼 집단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요컨대 이들에게 있어 벽과 치의 추구란 자신의 포부를 펼쳐 볼 수 없는 왜곡된 세상에 대한 저항적 몸짓이기도 했던 셈이다. 이들은 도시 문화의 발랄한 분위기와는 달리 점증하는 사회경제 체제의 모순 속에서 이른바 '벽'과 '치'의 추구를 통해 내적 갈등을 추스르며 암울한 시대와 맞서 나갔던 것이다.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 변모와 그 방향성

18세기 지식인들의 자의식 변화는 사회 시스템의 전반적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의식은 빠르게 변모해간 반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제도는 변모된 의식을 포용할 여유가 없었고, 지식인들은 이러한 제도의 억압을 답답해 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자의식의 변화는 이러한 갈등의 결과이며, 그 변화의 축은 크게 세 방향으로 나타난다. 첫째, 변치 않을 '도(道)'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던 가치 지향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눈앞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둘째, 추구해야 할 이상적 가치가 과거에 있다고 믿었던 퇴행적 역사관 대신 지금 눈앞의 세계를 중시하는 진보적 역사 인식이 자리 잡았다. 셋째, 중국을 기준으로 삼던 '저기'에 대한 관심이 조선 중심의 '여기'를 향한 관심으로 바뀌었다.



세계와 자아 사이에 커진 갈등은 자의식의 붕괴를 가져왔다. 사회의 통념이 요구하는 자아와 자신이 되고 싶은 자아는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불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박지원의 〈염재기〉에 나오는 송욱의 이야기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있다가 아침에 깨어난 송욱은 방 안에 있던 물건은 모두 제자리에 있는데, 정작 이불 속에 있어야 할 자신이 사라진 것을 깨닫는다. 어디론가 사라진 자신을 찾아서 마침내 그는 온 거리를 이리저리 헤맨다. "내가 없어졌다!" 자의식의 과잉으로 자기정체성을 상실해버린 송욱은 절망적 현실 앞에서 급기야 미쳐버린 것이다.」 송욱이 외치는 이 말 속에는 당시 지식인의 심각한 자아분열이 목도된다. 송욱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송욱이 미치게 된 건 과거시험이라는 제도 때문이었다. 당시 인재 선발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과거 제도는 이미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으려면 과거에 급제해야 하는데, 합격이 돈으로 거래되고, 설사 합격을 한다 해도 배경이 없으면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송욱은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점쟁이를 찾아간 이후 과거 시험을 볼 때마다 유건(儒巾)을 쓰고 들어가 자신이 쓴 시험 답안에 가장 높은 등수를 써놓고 나오는 기행을 일삼곤 했다. 이 글을 쓴 박지원 자신도 주변의 강권에 못 이겨 과거 시험을 보기는 했지만, 답안지를 아예 제출하지 않거나 답안지에 산수화를 그려놓고 나온 일이 있다. 지식인이 세상에 나서서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없다면 송욱과 같이 정체성 상실의 비극적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당시 청나라로부터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던 신문물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혼란을 부추겼다. 그래서 아예 외면하거나 휩쓸리는 부류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가치관의 혼돈 상황을 박지원은 〈낭환집서( 丸集序)〉에서 다른 비유로 이어간다. 「임제(林悌)가 술에 취해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나오자 하인이 그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자 임제는 이렇게 말하고 말에 오른다. "길 오른편에서 나를 본 사람은 내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할 터이고, 길 왼편에서 본 사람은 내가 나막신을 신었다고 할 터이니 무엇이 문제인가?"」사람들은 한쪽에서 바라본 사실만을 진실인 양 믿는다. 박지원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둘 다 틀렸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는데, 그 중간 지점에는 아무도 서려 하지 않으려는 세태에 대한 지적을 이 글에 담았던 것이다.



18세기 문인들은 바깥의 이목을 개의치 않고 자아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서구는 《자문시하인언(自問是何人言)》을 집필하여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자기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다짐을 피력하였다. 또 유금은 자신의 문집 제목을 《낭환집( 丸集)》으로 붙였는데, 자신의 글이 남 보기에는 말똥처럼 하잘것없지만 말똥구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요컨대 이 시대 지식인들은 자신을 비하하는 듯한 명명을 취함으로써 상대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드러내는 한편, 외부 세계와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무력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는 이러한 의식 변화에 위기를 느끼고 강력한 문체 검열을 실시했다. 박지원을 비롯한 많은 작가가 이 검열의 덫에 걸려들었으나, 정조는 이러한 의식의 바탕에 내부의 변화를 갈망하는 본질적인 문제제기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미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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