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평전
여명협 지음 | 지훈
1 제갈량이 생장한 시대와 그의 가계
제갈량은, 한나라 영제(靈帝) 광화 4년(181년)에 태어나 모순이 첩첩이 쌓여 사방에 위기가 도사리던 동한(후한) 말년에 생장했다. 환제의 재위 21년간 일어났던 농민봉기는 14차례, 영제 즉위 후 12년간은 6차례 발생했고, 참가한 군중은 수만 명에서 10만여 명이나 되었다. 농민의 불만은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영제 중평 원년(184년) 2월에 대규모의 황건적의 난으로 폭발했다. 이때 제갈량은 네 살이었으니 농민의 난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황건적의 난이 동한 정권의 통치권을 뒤흔들자 각지 군웅들은 분분히 군대를 일으켜 진압에 나섰다. 조조(曹操)와 유비(劉備) 및 손견(孫堅)도 이들 군벌의 대오에 참여했다. 제갈량이 생장한 동한 말엽은 정치적 암흑기로서 군벌이 혼전을 거듭하고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재난의 시대였다.
이런 혼란기는 제갈량의 삶이나 정치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군벌의 혼전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보면서 제갈량은 한 왕실의 앞날을 걱정했고, 백성들의 고통에 깊은 동정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청년의 가슴속에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도록 했다. 청소년기의 제갈량에게는 그가 생존한 사회토양, 접촉한 시대적 정보, 직접 경험한 불안정한 정국, 날마다 겪는 상황 등 그 어느 하나도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남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모든 것들이 그의 신상에 집중되어 그의 사물에 대한 관점과 태도, 개인의 기질 형성, 정치적 노선의 확립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제갈량의 고향은 서주 낭사군 양도현으로 낭사군의 제갈씨는 비록 명문귀족은 아닐지라도 자손이 번성해 그 지역에서는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꼽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갈량은 스스로를 서한 제갈풍의 후예라 밝혔다. 제갈풍은 서한 원제(元帝) 때 사례교위를 지냈다. 사례교위는 도성의 백관과 도성에 부속된 주변 각 군의 규찰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그 직무는 주의 자사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제갈풍은 강직하고 청렴하며 엄중히 법을 집행해, 아무리 권세 있는 자라도 법을 어기면 과감히 검거해 탄핵했다. 제갈량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제갈풍에서 제갈량의 부친 제갈규에 이르는 계보가 뚜렷하지 않다. 현재 『낭사군예당제갈씨종보』에는 이렇게만 전한다. "풍공( 公) 이후 몇 대가 지나 제갈규가 있었는데, 자는 군공이요, 태산군증이었다. 규는 세 아들을 두어 장남이 근, 차남이 양, 삼남이 균이었다."
제갈량의 아버지 제갈규는 일찍이 태산군의 군증(태수를 도와 행정 및 사법 방면의 사무를 처리하는 직책)을 지냈다. 동한 영제 광화 4년(181년) 공명이 태어났는데, 그는 3형제 중 둘째로, 형은 제갈근, 아우는 제갈균이며, 이 밖에도 두 누이가 있었다. 모친 장씨는 공명이 서너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부친은 정무에 종사하기 위해 후처를 얻어 집안일을 처리하며 아이들을 돌보게 했다. 대대로 이어져온 유가적 교육 때문에 제갈량보다 8살이 많은 제갈근은 충군, 효친, 형제 간의 우애 등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계모를 정성껏 모셔 아들의 도리를 다했고," 큰형으로서 동생과 누이들을 잘 보호하고 가르쳤는데, 특히 제갈량에 대한 정이 깊었다. 공명이 8세 되던 해 부친 제갈규마저 세상을 떠났다. 당시 큰 형 제갈근의 나이는 겨우 열 몇 살 정도였기 때문에 숙부 제갈현의 도움으로 집안을 꾸려 나갔다.
동한 말년에 전쟁이 자주 있었지만 서주 자사 도겸의 선정으로 평온했던 서주가 혹독한 재난을 당한 것은 조조의 살육 때문이었다. 한나라 조정의 태위를 사직하고 고향인 초에 내려가 살던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전란이 끊이지 않고 중원이 들끓자 초평 4년, 서주 낭사군으로 피신했다. 조조가 연주를 점령하고 태산의 태수 응소를 파견해 조숭을 맞이하자. 도겸 역시 도위 장기를 파견해 군사를 이끌고 호송하게 했다. 그러나 태산군의 경계에서 조숭의 재물이 치중마차 100승이 넘을 만큼 많은 것을 본 장기는 조숭의 일가족을 몰살하고 재물을 빼앗아 화남으로 도피했다. 조조는 비분에 떨며 그 원한을 전부 도겸에게 돌려 군대를 이끌고 서주로 진격해 들어가 닥치는 대로 살육을 저질렀고 이로 인해 조조의 악명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제갈량의 고향인 낭사는 조조의 대군이 남하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전쟁의 피해가 극도로 심했다. 그때 마침 회남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양주 자사 원술이 제갈현에게 예장 태수를 맡아달라고 청했다. 원술은 4대에 걸쳐 삼공의 자리를 차지한 명문귀족 출신으로 호시탐탐 야심을 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가 제갈현에게 군수라는 요직을 맡아달라고 청한 것은 그들의 관계가 이미 오래전에 깊었음을 말하는 것뿐 아니라 제갈현의 재능이 출중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갈현은 195년에 원술의 추천으로 예장 태수에 취임했으나 마침 그때 한 조정에서 주호를 대신 파견해 한 조정을 거스르지 아니하고 제갈량 형제와 그 누이를 데리고 옛 친구인 형주 목사 유표를 찾아갔다.
2 융즁에서 10년간 농사짓고 독서하다
유표는 한나라 황실의 먼 후손으로 환관들이 대대적인 당옥을 일으켰을 때 이리저리 피해 겨우 화를 면했다. 188년, 형주 자사 자리가 비자 조정에서는 유표에게 이 요직을 맡도록 했다. 그는 중려 사람인 괴량과 괴월, 그리고 양양 사람인 채모의 도움을 얻어 지역의 반란세력과 할거세력을 평정하고, 주의 중심을 한수에서 양양으로 옮겨, 이곳에서 형주를 다스렸다.
동한 말년에 전쟁은 확산되어 중원이 큰 혼란에 빠졌다. 유표는 비록 원대한 대책을 세웠던 것은 아니지만, 꾀가 있고 의심이 많아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백성들을 편안히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중평 이래로 오직 형주만이 안전했으며, 유표가 목사가 되자 백성들은 다시 풍요를 즐겼다. 그러자 부근 지역에서 대량의 유민이 형주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이 외에도 뛰어난 학자와 재주 있는 자들 역시 적지 않게 양양으로 피난해 들어왔다. 양양은 당시 형주의 정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어 교통이 발달했고 경제 역시 번영해 많은 세가와 명족, 부상과 거고들이 여기서 살았다.
동한 말년 오랜 전란 때문에 전국 대부분의 관학과 사학 또한 파괴되어 국가의 장서가 사라져버릴 상황이었는데 형주만은 달랐다. 유표는 널리 학교를 세우고, 친히 향사를 행하며, 학문을 중시하고, 뛰어난 인재를 예우함으로써 당시 형주의 교육은 크게 발달했다. 유표가 선비들을 예로 대했기 때문에 "형주로 피난한 선비들은 대개가 천하의 준걸들이었다." 그 중 고문경학가인 사마휘 같은 사람은 양양에서 학교를 열어 많은 인재를 길러냈는데, 제갈량의 학식과 재능 역시 양양에서 배양되었다. 제갈량이 처음 양양에 왔을 때는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유표가 세운 학업당에서 공부했는데, 여기서 배운 내용은 자연 유가의 경전이었다. 이 시절 그는 숙부 제갈현의 사회적 지위와 인간관계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성한 학구열과 총명하고 뛰어난 자질로 인해 많은 청년 준걸을 사귈 수 있었으며, 학문에도 많은 진보가 있었다.
제갈량과 그의 절친한 친구 서서는 일찍이 사마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서서와 사마휘로 인해 제갈량의 인간관계는 더욱 넓어졌다. 의성 사람인 항량은 "어릴 때 사마덕조를 스승으로 섬겼고, 서원직 · 한덕고 · 방사원(방통)과 모두 친하게 지냈으니" 제갈량은 서서를 통해 이들과 사귈 수 있었다. 사마휘는 호도 수경으로 불렸는데, 인물에 대한 평가가 마치 깨끗한 물에 비추는 것처럼 공정하고 합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명사를 찾아 학문을 더 보태도록 권유했다. 양양에 머물렀던 제갈량의 12년은 이후 그의 평생의 업적을 가능하게 한 핵심적인 밑바탕이 되었다.
건안 2년, 제갈량이 17세 때 숙부 제갈현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은 제갈균과 함께 양양에서 멀지 않은 시골인 융중에 자리를 잡았다. 융중은 아름다운 산촌으로 깨끗하고 고요한 환경은 사람의 마음을 트이게 하고 정신을 평온하게 할 만했다. 제갈량이 융중의 산촌을 택했던 데에는 융중의 수려한 산천과 깨끗한 환경 외에도 형주의 중심지인 양양과 가깝기 때문이기도 했다. 양양은 중원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남북을 왕래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고, 전국 각지의 중요한 정보가 빠르게 전해졌다. 그리고 양양에는 유명한 학자와 명인, 환관과 선비가 대거 운집해 있어 이곳 사람들은 나라의 형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매번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서로 논평하고 각자 자신의 견해를 개진했다. 이 때문에 당시의 변화무쌍한 정치적 상황, 군사상의 승부나 성패, 그리고 각종 정보들이 빠르게 전해졌다.
융중에서 지낸 10년은 제갈량의 신체상 성장뿐 아니라 고금을 망라한 학식과 뚜렷한 세계관, 정치상의 식견이 확립된 시기였다. 공명은 17세 때 융중에 은거해 27세가 되어 떠났는데, 후에 그가 치밀한 계획으로 경륜을 펼쳐 천하를 삼분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은 모두 융중에 있던 10년 동안의 각고와 노력, 벗들과의 절차탁마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가슴에 큰 뜻을 품은 제갈량은 융중에 있을 때 자주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교하곤 했는데, 그의 정치적 신념은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한 왕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
3 천하를 삼분할 기틀을 갖추다
제갈량이 융중에서 밭 갈고 있던 10여 년 동안 중원의 형세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크고 작은 군벌 간에 성을 빼앗고 땅을 차지하기 위한 잔혹한 전쟁이 무수히 치러진 뒤, 많은 중소 할거 세력들이 하나 둘 병합됨으로써 황하 중하류 지역은 원소와 조조의 두 세력이 가장 강한 군벌로 남게 되었다. 건안 4년(199년) 8월부터 관도에서 조조와 원소의 대접전이 시작되었는데, 이 싸움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대승으로 끝났다. 건안 7년(202년) 5월, 원소는 분을 삭이지 못해 병으로 죽었고, 조조는 승리한 기세를 몰아 북진해 건안 11년(206년)에는 원소가 장악하고 있던 기, 청, 유, 병의 네 주를 점령하고 한 헌제 명으로 스스로를 기주 목사에 임명했다.
조조가 북방을 통일하기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강남지역에서는 강대해진 역량으로 강동 6군을 장악한 손책의 뒤를 이은 손권이 내부를 안정시키고, 장강 이남 지역의 발전을 도모해 자신의 실력을 굳히고 확대시켰다. 그는 한편으로는 "뛰어난 인물을 초대하고 명사를 임용해" 장소·주유·정보·노숙 등의 보좌를 받았고, 낭사에서 피난 온 제갈근 또한 예로 모셔 두텁게 신임했다. 당시 조조는 강남까지 돌아볼 겨를이 없는 터라 헌제 명으로 손권을 "토로장군에 봉하고 회계 태수에 임명"해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고자 했다. 한편, 군웅들이 각축을 벌일 때 조그마한 토대도 마련하지 못해 이곳 저곳을 떠돌던 유비는 건안 6년(201년) 유표에게 일신을 의탁했다.
세월은 총총 흘러 유비가 형주에 온 지도 어언 여러 해, 조조가 남침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면서 형주에는 불안한 정서가 어둡게 깔리기 시작했다. 유비는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면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수하에 인재는 없고, 비록 관우·장비·조운 등의 무장들 모두 "만인을 상대할 만한" 용장이지만, 병사라고 해봐야 고작 수천에 불과하니 어찌 조조의 대군에 맞설 수 있으랴? 미축, 간옹, 손건 등과 같은 문관은 재능이 중간 정도로 기발한 계책이 없으니, 모신만 해도 구름같이 많은 조조에게 어찌 대항할 수 있으랴? 생각을 거듭하던 유비는 어느 날 양양에서 이름이 드높은 수경선생 사마휘를 찾았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찾아온 유비에게 수경선생은 뜻밖의 말을 일러주었다. "이 고장에 '엎드린 용'과 '봉황의 새끼'가 있습니다. 바로 제갈공명과 방사원입니다."
유비가 융중의 오두막에서 제갈량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비범한 풍모가 과연 '와룡'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다. 유비의 삼고초려와 간곡한 청에 공명이 마침내 뜻을 같이 할 것을 승낙하고 유비에게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대계를 밝히니 바로 그 유명한 융중의 대책으로 일반적으로 이것을 「융중대」 또는 「초려대」라 부른다. 그 내용은 첫째, 형주와 익주를 점령함으로써 천하를 삼분해 정족(鼎足)의 안정을 구축하고 둘째, 손권과 연합해 조조에 대항하며 셋째, "한실을 부흥시킨다"는 대의 명분의 기치하에 호응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해 조조를 토벌한다. 그리고 마침내 여세를 몰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것으로 불과 300여 자 정도 되는 이 짧은 문장에는 천하의 형세가 정치하고도 생동감 있게 분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제걀량의 치밀하고도 정교한 전략과 대책이 잘 나타나 있으며, 유비를 위한 절실하고도 실행 가능한 노선이 완벽히 제시되었다.
건안 13년 8월, 유표가 병으로 죽자 채모와 장윤 등은 마침내 유종을 형주의 주인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그때는 조조의 대군이 이미 완성 가까이 이르러 형세가 위급했다. 자리를 잇자마자 조조의 침략에 맞서게 돼 두려워하는 유종에게 예장 태수 괴월과 모사 부손 등은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다. 사태가 긴박해지자 자신이 「초려대」에서 건의한, "먼저 형주를 취해 기초로 삼는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 있음을 느낀 제갈량은 유비에게 형주를 먼저 쳐서 취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유비는 머리를 흔들었다. "유형주(유표)께서 임종하시면서 나에게 자식을 부탁하셨는데, 신의를 배신하고 스스로만 살려고 그럴 순 없소.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유형주를 대하겠소?" 유비는 공명의 계책을 거부하고 양양성 동쪽에 이르러 특별히 유표의 무덤에 제사 지내고 처연히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형주까지 손에 쥔 조조의 항복요구를 접한 동오는 주화파와 주전파로 의견이 크게 양분되었다. 그러나 유비를 대신하여 동오에 온 제갈량은 손권의 중신 노숙과 함께 주유와 손권을 움직여 마침내 조조에 맞서기로 하는 동오 · 유비 동맹을 이끌어내었다. 한편 너무 쉽게 형주를 얻은 데다 장판에서 유비를 크게 격파하면서 교만해진 조조는 이 해 한겨울 드디어 대군을 이끌고 강릉에서 수륙 두 길로 나누어 대거 동쪽으로 내려갔다. 적벽에서 마주친 손권·유비 연합군과의 첫 교전에서는 조조군이 불리했다. 휘몰아치는 삭풍으로 파도가 높이 일어 배는 끊임없이 흔들렸고 수전에 익숙지 못한 대부분의 조조군은 배 위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조조는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크고 작은 배의 머리와 꼬리를 쇠줄로 연결시켰다. 선체가 안정되자 조조군의 사기는 다시 높아졌고 전투력은 되살아났다.
전황이 연합군에 불리해지자 공명과 주유가 함께 계책을 마련했는데 바로 화공이었다. 이를 위해 주유의 부장인 황개가 다시 계책을 올리니, 조조에게 거짓 항복함으로써 그의 신임을 얻은 다음, 적당한 시기에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이끌고 항복하는 척 적진으로 돌진해 화공을 시작하면 손권·유비 연합군은 이때를 노려 수륙 양면으로 신속히 진격하는 것이었다. 황개의 이 계책은 주도면밀해서 조조의 의심을 사지 않고 거짓 항복을 믿게 하는 데 성공했다. 선단을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하기로 약속한 날, 때마침 동풍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황개는 조조군과 약속한 대로 군호를 주고받으며 조조군의 수채에 이르자마자 마른 갈대와 장작을 싣고 기름을 끼얹은 몽충과 투함에 불을 붙여 조조군의 배로 돌진시켰다. 거센 바람을 타고 불길이 붙은 채 화살같이 날아든 배는 순식간에 쇠줄로 서로 연결된 조조군의 배들을 차례로 불살랐고 조조군의 진영은 화염으로 온 하늘이 벌겋게 물들었다.
적벽의 전투에서 손권·유비 연합군은 5만의 병력으로 조조의 20만이 넘는 정예병을 격퇴하고 연이어 조조를 추격해 주유는 형주에 속했던 강하군과 남군을 얻고 유비는 남쪽 네 군의 토벌에 나서 무릉, 장사, 계양, 영릉을 얻었다. 이때 여강의 뇌서가 조조의 부장 하후연에게 패하자 수만 명을 데리고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