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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존중

조너선 색스 지음 | 말글빛냄
머리말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차이의 존중』은 오늘날의 극단주의 시대에 관용을 호소하는 책이다. 나로서는 온 힘을 다해 쓴 책이다. 나는 인종 갈등과 문명 충돌, 테러 행위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가 나날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 시대에서 인간에게 닥친 명백하고 시급한 위험을 보고 있다. 너무 오랫동안 하느님의 이름으로 흘린 피가 인간의 역사를 더럽혀 왔다. 대량 살상무기와 결합한 종교적 극단주의는 지구상의 삶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긴밀하게 상호 연결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차이 때문에 위협감을 느끼는 대신 자신이 커진다고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상이 내가 주장한 내용이다.



서문: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2002년 1월, 나는 2001년 9월 11일에 세계 무역센터가 무참하게 파괴된 장소에 서 있었다. 내 곁에는 그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충격과 상처를 받은 도시에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뉴욕으로 자리를 옮긴 세계 경제포럼에 참석하러 세계 곳곳에서 모인 종교 지도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기도를 올렸다. 이슬람교 이맘이 기도를 드렸다. 인도에서 온 힌두교 그루는 묵상을 하고는 장미 꽃잎과 함께 갠지스 강에서 퍼온 성수를 뿌렸다. 이스라엘의 최고 랍비는 그가 직접 써온 글을 낭독했다. 다른 랍비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추도문인 카디시를 읊었다. 인류가 지닌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직면하여 인류의 연대감을 표시하는 드문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비행기 납치범들의 종교적 열정과 그곳에 모인 종교 지도자들의 그에 못지않게 뜨거운 평화에 대한 갈구 사이에서 엄청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선과 악, 화합과 반목, 세계 평화와 성전(聖戰)의 병치는 이제 우리가 막 들어선 세기를 나타내는 적절한 은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우리가 변화에 적응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변하고 사건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발생한다면 나쁜 일은 당연히 생기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불안은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은 분노로 이어지고 분노는 폭력을 잉태하며 대량 살상무기와 결합하여 우리의 무시무시한 현실이 된다. 폭력을 막는 단 하나의 훌륭한 해독제는 '대화'이다. 서로서로 자신의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타인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대화이다. 나는 반드시 전 지구적인 대화로 이어져야 하는 이 공론의 자리에 한 유대인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모두 미래에 제 몫의 운명이 걸려 있고 우리의 미래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기술

그러나 종교 간, 아니 헌팅턴의 말대로 '문명' 간 대화 역시 그에 못지않게 시급하고 중요하다. 우리는 과연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서로에게 공간을 내줄 수 있을까? 오랜 반목과 불화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쯤에서 나는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새롭고 위험한 시대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기 위해 서양 일신교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세계화가, 과거에는 우리가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피할 도리가 없는 궁극의 도전에 맞닥뜨리게 하기 위해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을 소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인간(적)인 '너'에게서 신(적)인 '당신'의 일부를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와 모습이 다른 자에게서도 하느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까? 하느님이 낯선 자의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는 때가 있다. 세계화 시대는 이 세상을 낯선 자의 사회로 바꾸었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우리가 때때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시급하게 요구되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관대함에 대한 요청이다. 유대인인 내가 나와 모습이 다른 사람들, 즉 힌두교 신자나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혹은 녹아 내리는 빙하에 대해 얘기했던 그린란드의 에스키모 등에게서도 하느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내가 작아진다는 느낌이 아니라 커진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이쯤에서 자전적인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자유주의 신자가 아니다. 나는 정통 유대교도이다. 나는 종종 자유주의 동료들에게 근본주의자라 불렸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얼마나 중대하고 심각한지가 잘 드러난다.



내가 알고 존경했던 만년의 이사야 벌린(Isaish Berlin) 경은 훌륭한 에세이 『자유의 두 개념 Two Concepts of Liberty』에서 자유주의적 신조의 핵심을 이제는 유명해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 바 있다. "자기 신념의 상대적 타당성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 신념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야만인과 구별되는 문명인의 태도이다." 이는 대단히 고귀한 감정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가인 마이클 샌들(Michael Sandel)은 이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신념이 상대적으로만 타당하다면 그것을 끈질기게 옹호할 까닭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널리 반향을 얻은 물음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라는 여섯 번째 보편적인 질서에서 살고 있다. 이는 어떤 사상의 체계가 아니라 제도의 체계로 지탱되는 최초의 질서이다. 그 제도란 시장이나 언론, 다국적 기업, 인터넷 등이다. 그렇다고 해서 효과가 덜 심각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역적이고 전통적이고 특수한 것을 모두 위협한다. 어제의 생각으로 오늘의 도전에 맞서면 위기가 찾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화 시대를 파괴적인 전쟁으로 물들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유대교 전통 안에서 발언하고 있지만,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전통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모습을 보고 놀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야기와 심각한 충돌을 빚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화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에 대한 논박에서 진리가 움터 나온다는 소크라테스식 대화술이 아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대화의 기술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해석하는 타자들을 용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세계화 속의 불만

새로운 통신 체계를 통해 세계 곳곳이 긴밀하게 상호 연결된 세계화는 수렵시대에서 농업시대, 아니 봉건시대에서 산업시대로의 변화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역사적 변화이다. 다른 모든 변화와 마찬가지로 세계화도 심각한 불안을 낳고 있다. 시애틀, 워싱턴, 프라하, 퀘벡, 제노바 등 세계 경제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 경제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에서나 환경론자와 인권 행동가, 반자본주의자 등의 항의 시위가 벌어지는 것이 그 뚜렷한 증거이다.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의 말을 빌리면, 마치 우리는 "하나는 이미 죽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태어날 만큼 힘이 없는 두 세계"사이에 끼어 있는 처지이다. 현 상황의 특이성은 우리가 공통의 미래로 나아갈 길을 찾기 힘들 만큼 변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 데 있다. 기술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우리의 도덕적 신념은 점점 더 갈피를 잃고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세계화의 어떤 면이 우리로 하여금 지도도 없이 브레이크도 없는 차를 몰고 여행에 나선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일까? 세계 전역의 전반적인 사회 환경은 급격하게 변화하기 일쑤여서 점점 더 예측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환율 변동과 임금률에 따라 공장을 여기저기로 자유로이 옮길 수 있게 되자 제조업뿐만 아니라 관리나 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도 상당히 불안정해졌다. 거대한 국제자본은 새로운 경제권에 들어가서는 투기와 부동산 붐을 일으키다가도 급속하게 빠져나가 파산과 대량실업을 남겨 놓는다. 세계화는 단지 경제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화에는 문화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인터넷, 유선 및 위성 텔레비전, 그리고 지구상 곳곳에 편재하는 거대 기업은 이미지와 상품의 국제화를 초래했다. 이를 두고 벤저민 바버(Benjamin Barber)는 맥월드라고 불렀다. 세계 곳곳의 주요도시뿐만 아니라 많은 외딴 시골에서도 똑같은 청바지와 티셔츠, 청량음료, 패스트푸드점, 음악, 영화 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미국적인 세계를 표현하거나 기껏해야 관광객의 흥미를 끌기 위해 보존된 지역 전통을 궤멸시킬 가능성이 있다.



시장의 지배

시장이 주도하는 소비문화가 사회제도에 미치는 충격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반세계화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나온 바 있다. 일찍이 1947년 요셉 슘페터(Joshep Schumpeter)는 "자본주의는 다른 많은 제도의 도덕적 권위를 파괴하고 궁극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도덕적 권위마저 파괴할 비판적 정신을 키워 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양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예외 없이 가족과 공동체가 쇠퇴하고 있고, 빈곤의 집중화와 사회의 붕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겨우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 특히 어린이들 사이에, 정신질환에서부터 섭식 장애, 약물 및 알코올 중독, 폭력, 범죄, 자살시도와 같은 스트레스성 증후군이 세 배 내지 열 배 정도 증가했다.



간단히 말해서 시장은 빈부격차만을 극대화한 것이 아니다. 시장은 사회의 일원을 공통 운명으로 맺어주는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와 같은 유대관계를 파괴했고 지금까지 우리가 '나는 원한다'와 '나는 해야 한다'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도덕적 담론을 무력화했다. 시장은 집단적 의무로 묶인 위계제(hierarchy)를 개인적인 생활방식과 취향을 누리는 슈퍼마켓으로 대체함으로써 공공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허물었다. 여기서 공공선이란 공원에서부터 공공서비스와 애국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거나 소유하거나 공유하지 않는 것들을 일컫는다.



차이의 존엄: 플라톤의 유령 몰아내기

이사야 벌린의 말을 빌리면, 거창한 역사적 이상의 제단에 개인들을 희생한 책임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신념이다. 나와 신앙(혹은 인종이나 이데올로기)이 다른 자들은 나와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신념 말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이등 시민일 뿐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생명의 거룩함을 박탈당해 마땅한 존재이다. 그들은 구제받지 못할 불신자이며 이단자이고 구원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는 이방인이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게 신앙이라면 우리와 신앙이 다른 자들은 완전한 인간이 아닌 셈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 지하드, 러시아의 유대인 대학살(포그롬) 등 인간의 피를 희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서 신앙이 인종으로 바뀐 것이 나치의 홀로코스트다.



나는 홀로코스트가 우리의 저런 사고방식을 제거했다고, 우리가 아우슈비츠의 유령들이 외치는 '두 번 다시는 안 된다'는 절규를 어찌 듣지 못하겠느냐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다. 나는 점차 우리가 야곱처럼 우리 본성과 신앙 내부의 어두운 천사와 대결하지 않으면 또 다른 비극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르완다, 캄보디아, 발칸 반도에서는 이미 비극이 일어났고 앞으로 더 많은 비극이 생길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고, 기대하고, 꿈꾸고 열망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중요한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서로 다르다. 저마다 독특한 풍경과 언어와 문화와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존엄한 것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일란성 쌍둥이조차 서로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저마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며, 어떤 유형의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단순한 유기체나 기계가 아니라 사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공통성만이 중요한 문제라면, 차이는 극복해야 할 장애 요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서양 역사에서 여러 차례 저질러진 잘못인데, 우리는 지금 그 잘못을 세계화의 형태로 또다시 범하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해야 할 다른 어떤 말도 이 주장만큼 근본적이고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천 년 동안 서양 문명의 핵심에 있던 가설에 도전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즉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공통성과 차이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유령

우리는 어릴 때는 가족하고만 더불어 지내다가 점차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서 친구와 이웃, 지역 공동체, 사회,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를 포옹하기에 이른다. 문명도 이와 다를 바 없다. 호모사피엔스의 역사는 여기저기를 떠도는 작은 무리가 부족이 되고, 이 부족이 도시국가로, 이어서 국가로, 궁극적으로는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세계정부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특수성(감각과 열정의 세계)은 갈등과 편견, 오류, 전쟁의 원천이다. 보편성은 진리와 조화, 평화의 영역이다. 원시에서 문명으로, 국지성에서 국제성으로, 지역성에서 세계성으로 나아가는 것은 특수한 애착관계를 벗어나서 보편적인 이성으로 향하는 것이다. 유대교는 두 시기에 끼어 있다. 한편에는 고대의 지방 신들과 부족문화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리스 문화나 로마 문화 같은 보편적인 문화와 그것의 종교적 계승인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있다. 말하자면 유대교는 조산(早産)된 종교이다. 이러한 견해는 곡해나 다름없지만, 내가 여기서 다룰 사안은 아니다.



내 주장은 보다 근본적이다. 즉 보편주의는 부족주의에 대한 부적절한 반응이며 부족주의 못지않게 위험하다. 보편주의는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결국 그릇된 믿음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 조건의 본질에 관한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그 진리가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 대해 참이라는 믿음이다. 이에 따르면 내가 옳다면 너는 그른 것이고, 내가 믿는 게 참이면 네가 믿는 것은 거짓이며, 너는 그 거짓 믿음에서 빠져나와 구제받아야 한다. 역사의 참극은 이런 생각에서 생겨났다. 일부는 종교의 비호 아래에서, 또 일부(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 같은 경우)는 세속적 철학의 기치 아래에서 말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를 홀린 것은 자신의 종교만이 진리이자 생명이라는 플라톤의 유령이었다.

차이의 관용

이스라엘의 종교는 하느님의 유일성과 인간의 다수성을 증언한다. 그것은 부족주의와 그것의 반대인 보편주의를 모두 뛰어넘는다. 부족주의와 그 현대적 판본인 민족주의는 민족마다 오직 하나의 신(혹은 '정신'이나 '인종', '성격')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주의는 전 인류에게 오직 하나의 신(따라서 하나의 진리, 하나의 방법, 하나의 신조)만 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도 우리와 모습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타자와 이방인을 정당하게 대접하지 않는다. 부족주의는 이방인의 권리를 부인하고 보편주의는 이방인이 개종하고 순응하고 동화되어서 이방인이기를 그칠 때에만 권리를 인정한다. 보편주의는 단일한 문화의 진리를 전 인류의 척도로 삼는다. 그 결과는 종종 비극적이었고 언제나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모욕이었다. 모든 제국이 보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오스만제국은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다양한 문화와 신앙 공동체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자율성을 용인했다.

서양역사에는 다섯 차례에 걸쳐 보편 문화가 등장했다. 알렉산더 제국, 고대 로마, 중세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계몽주의가 그것인데, 유대인은 다섯 문화 아래에서 모두 고통을 받았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세 문화(그리스와 로마, 계몽주의)가 관용의 미덕을 자랑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통용되는 몇몇 형태의 관용('정치적 올바름'이 우선 떠오른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대단히 제한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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