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 숨겨진 비밀을 밝히다
장장년, 장영진 지음 | 눈과마음
고고학의 발견
이집트 상형문자, 설형문자, 갑골문자의 해독
나폴레옹은 1798년 이집트 원정에서 175명의 문물 발굴단을 조직하고 군대를 이끌고 가 이집트의 문물을 수집했다. 그에 소속된 프랑스의 한 군관이 1799년 이집트 로테타에서 참호를 파다가 검은색 현무암 비석을 발견하게 된다. 군대를 따라 파견된 전문가들은 이 비석의 연구를 시작했고, 즉시 비문 탁본에 들어갔다. 전문가들은 비석에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와 민중문자 그리고 고대 그리스문자가 새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전문가들이 비교적 수월하게 해독한 그리스문자는 기원전 196년 이집트의 신관들이 프톨레미 왕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이집트 문자를 밝혀내기 위해 많은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연구에 매진했으나 그 미스터리는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천재 문자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마침내 이 비밀이 밝혀진다. 14년간의 고군분투 끝에 그리스문자와 이집트 상형문자를 연구했다. 프톨레미 왕의 이름을 해독했는데, 이 해독은 표의문자일 뿐 아니라 표음문자이기도 한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그 실마리 얻었다. 이토록 기나긴 노력 끝에 이루어낸 비문 해독 작업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설형문자는 서아시아의 고대 문자이다. 점토 위에 뾰족한 것으로 새긴 모양이 쐐기 같다고 하여 설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설형문자를 발명한 것은 수메르인인데, 후에 바빌론 문자와 아시리아 문자로 발전하여 페르시아 등지에 영향을 미치며 인류 문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사의 변천 과정 속에서 이런 고대 문자는 소실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발견되었지만 역사적 유적으로만 남을 뿐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세기 초, 사람들이 이런 고대 문자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영국 문자학자 롤린슨이 베히스툰 비문 해독을 시작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그 비밀이 밝혀졌다.
중국의 갑골문자는 하남성의 소둔촌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3천여 년 전 중국 상나라의 유적지인데, 상나라는 다른 말로 은나라라고도 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유적지를 은허라 부른다. 이곳의 사람들은 옛날부터 모종의 부호가 새겨진 짐승의 뼈와 거북이 껍데기를 자주 발견했는데, 당시 이들은 그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옴을 앓는 한 마을의 수장이 땅속의 갑골을 가루로 만들어 덧발랐더니 병이 금방 낫는 것을 보고 갑골에 지혈 작용이 있음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볏짚에도 지혈 작용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갑골을 몹시 신성하게 여겨 용골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약방에서는 그것을 약재로 쓰기 위해 앞 다퉈 사들였다. 세계 문자 역사에서 중국 갑골문자의 발견과 해독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함무라비법전, 파라오 미라, 투탕카멘 묘의 진기한 보물
함무라비법전은 서문, 본문, 결문 등 모두 28조로 구성되어 소송하는 절차, 절도, 소작, 고용, 혼인, 채무, 상해, 고리대, 노예 등 여러 방면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법전은 주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노예와 자유 시민의 반항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다. 예를 들어 노예가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두 귀를 잘랐고, 노예의 도피를 돕거나 숨겨준 자는 사형에 처했다. 함무라비는 오직 법전에 의거해 나라를 다스렸고, 노예를 거느리는 주 계급의 이익을 지켰다. 사람들에게 법전을 알리기 위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겨 바빌론 마르두크 대 신전 앞에 세워 두었다. 함무라비법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 법전이다.
이집트 고고학 역사상 가장 놀라운 발견 중 하나로, 한 번에 40여 구의 미라가 발견된 일이 있었다. 발견된 미라 대다수는 이집트 역사에서 유명한 파라오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발견이 한 도굴단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1922년 고고학자들은 이집트 왕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의 왕릉을 찾아냈다. 투탕카멘의 무덤 안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었다. 투탕카멘의 옥좌는 앞뒤가 모두 황금으로 되어 있고, 채색된 유리와 보석이 박혀 있다. 심지어는 실제 사람 크기만 한 조각상도 있었다. 따라서 투탕카멘의 무덤은 종전에 찾아볼 수 없는, 또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지하 보물 창고라고 할 수 있다.
옛 도시 폼페이의 발굴, 인도 아잔타 석굴발견, 앙코르 유적지 발견
기원전 7세기, 조밀한 인구와 번화한 거리를 가진 작은 도시 폼페이는 부유한 사람들의 피서지이자 오락과 유흥을 즐기던 곳이었다. 하지만 79년에 일어난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인해 역사적인 도시 폼페이는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용암과 잿더미로 뒤덮여 순식간에 매장되었다. 폼페이 성에는 수많은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의 화려한 별장이 있다. 이런 별장들에는 커다란 대리석 기둥과 정교하게 조각된 문이 있고 복도와 정원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방에는 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담장에는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바닥에도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폼페이 재앙 당시의 피해자들은 석고상이 되었다. 폼페이는 1천 9백여 년 전의 옛 성으로 완전하게 보존된 덕분에 당시 로마 사회의 실제 모습을 후손들에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아잔타석굴은 인도 불교 석굴 예술 가운데 가장 전형적이고 유명한 예다. 석굴 예술은 역사에서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1819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8세기 중엽 이후 인도의 불교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불교 저작이 산실되고 불당은 파괴되었으며 석굴은 매장되었다.
12세기 앙코르와트는 인구가 백만 명이 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처럼 한때 지극히 번성했고 아름다운 사원이 무수했던 성지가 무려 4백여 년 동안 역사에서 사라져 있었던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 한 일이다. 전문가들은 앙코르와트가 4백여 년 전의 것임을 고증했으나, 그것이 갑자기 사라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트로이 목마, 고대 마야 유적지 코판 이야기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에는 인류에 널리 회자되는 트로이 목마 이야기가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서술된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인지 신화적 전설인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중 역사적 사실이라고 굳게 믿어 트로이 유적지를 찾겠다고 나서는 이도 있었다. 바로 독일의 고고학자였던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평생 동안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 유적지를 연구한 그는 1870년에 터키로 건너갔다. 당시 사람들은 터키를 트로이 성지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본 터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기술한 부분과 상황이 달랐다. 그는 다시 다른 곳으로 트로이 유적지를 찾아 나섰고, 마침내 기록과 유사한 성을 찾게 된다. 곧바로 발굴 작업을 진행한 결과, 그는 그곳이 정말 트로이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유적지는 오늘날 터키의 차낙칼레 서남쪽에서 약 3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터키 정부는 이곳에 트로이 공원을 만들고 박물관도 지었으며, 그 옆에는 호메로스 서사시 속에 묘사된 모습 그대로 목마를 세웠다.
코판은 고대 마야인이 세운 도시이다. 코판에는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있는데 그 피라미드 사이에는 대형 경기장이 있고, 위에는 큰 비석이 있다. 중앙에 있는 대형 광장에는 짓다 만 운동장이 있고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고무공과 돌난간들도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이들의 오락이 종교성을 띠고 있으며, 아마 게임에서 지는 쪽이 제물을 바쳤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코판 성 안에는 38개의 돌기둥이 있다. 위쪽에는 사람의 키보다 높은 제왕이 조각되어 있다. 천체의 위치에 따라 배열된 돌기둥에는 날짜가 새겨져 있었는데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코판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주목되었던 부분은 바로 마야의 상형문자이다. 돌기둥과 건축물 위의 상형문자는 아주 규칙적으로 쓰여 있었고,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으며, 게다가 수량도 많았다.
명승지 이야기
바빌론의 공중정원, 콜로세움,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피라미드, 로드스의 거상,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마우솔레움, 파로스 등대와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바빌론의 국왕, 테부카드네자르 2세가 아름다운 왕비 아미티스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궁전 옆에 자리한 정원은 대략 25미터 높이에 밑변은 125미터 총 3층으로 지어졌다. 장방 5미터의 대형 기둥이 각 층을 지탱하였고, 약1미터 넓이의 석판이 바닥에 깔렸다. 침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상부에 철판을 대고 가장 윗부분에 흙을 두텁게 깔아 그곳에 각종 꽃과 나무를 심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해' 또는 '매달린 정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빌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성한 도시였다. 기원전 6세기 건립된 공중정원은 3백여 년의 영화를 누린 뒤 기원전 3세기에 멸망했다.
원형의 콜로세움은 초기 기독교인이 설계하였으며 직경이 긴 곳은 188미터, 짧은 곳은 156미터, 외벽의 높이는 대략 48.5미터이다. 12층 정도의 높이로 담황색의 대리석이 사용되었고 전체 경기장은 대략 2만 제곱미터. 모두 4층으로 구성된다. 각 층의 분위기는 서로 다른데, 반원형의 돌기둥으로 나뉘며 80개의 돔 모양 대문이 있다. 경기장을 만들 당시 2층과 3층의 문 안에는 대리석 조각상이 있었다. 경기장의 관람석은 하층민, 기사, 귀족, 황실 석으로 나뉜다. 고대 로마의 잔인한 투우 경기는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대략 4백 년 즈음, 아시아의 한 승려가 투우 경기 중 경기장에 뛰어들어 그만두라고 크게 외치다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로마인들은 투우 경기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402년에 이르러 로마 황제는 마침내 정식으로 투우 경기를 폐지했다.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보존이 잘된 위대한 건축물이다. 기원전 2천 6백 년에 지어진 쿠푸 피라미드는 높이 146.5미터 밑변 232미터로, 탑을 둘러싸면 대략 1킬로미터나 되며, 이를 만드는 데 230만 개의 돌과 2.5톤의 거대한 돌이 사용되었다. 지하에는 천여 개의 무덤이 모여 있었다. 망자의 수장품 속에서 측량과 계산, 가공에 필요한 공구들이 대량으로 나왔으며, 무덤의 벽에는 북군, 남군, 지구군 등 공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더불어 훌륭하게 공사를 마쳤음을 치하하는 문구도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죽은 자가 피라미드를 만든 사람임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를 신성했기에 성스러운 마음으로 피라미드 공사에 나섰다. 대부분 현지의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이 참여했고, 심지어 온 집안 식구들이 공사에 참여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4세기 중엽 유럽 로마 제국의 군주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경외심을 가져 쿠푸 피라미드를 모방한 두 개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피라미드가 있는 아시아 국가로는 중국과 캄보디아가 있다. 유럽에는 피라미드가 이집트보다 더욱 많다. 한 고고학자가 계산해 보았더니 깊이 숨겨진 피라미드만 해도 십만 개에 달한다고 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묘지로 지은 것이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피라미드는 제사와 천문 관측의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폴란드 인어 조각상, 오줌 싸게 동상, 자유의 여신상
폴란드의 인어 조각상은 침략에 저항하고 고향의 안전을 바라는 여성 영웅의 형상을 표현했다.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국가적인 재난을 여러 번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폴란드의 국민들은 좌절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폴란드를 침략하려는 독일의 계획이 이미 만천하에 폭로되자 강한 애국심을 가진 폴란드의 한 여성 조각가는 국민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오랜 생각 끝에 마침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전해져 온 아름다운 인어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조각은 1937년 5월에 완성되었다. 상반신은 아름답고, 건강한 여성의 모습 그대로였고, 비늘로 덮인 하반신은 출렁이는 파도의 모양과도 같았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긴 칼이, 왼손에는 방패가 들려 있어 마치 영웅과도 같은 분위기도 느껴졌다. 전시되자마자 폴란드에서 금세 화제가 된 이 인어상은 독일이 침략하기 전 비스와강 부근에 설치되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는 유명한 오줌 싸게 동상이 있다. 건실한 알몸의 오줌 싸게 동상은 미소를 띤 얼굴로, 꼭 오줌을 누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껏 오줌을 누는 듯한 모습에 사람들의 관심이 적잖이 쏟아진다. 오줌 싸게 동상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스페인 군대가 브뤼셀을 침략하여 점령했는데, 철수할 당시 성 안에 화약을 매장해 도시 전체를 폭파하려 했다. 이때 한 남자아이가 도화선을 보고는 다급한 마음에 오줌을 싸서 불을 껐고, 곧 성 전체를 구했다. 감격한 시민들은 그 아이를 작은 영웅으로 부르며 그를 '브뤼셀 제일의 시민'으로 추대하여 남자아이의 모습을 조각하였고, 도화선을 끈 곳에 조각상을 배치하였던 것이다.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선물하였다. 자유의 여신상의 제작과 설계는 프랑스인 건축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맡았다. 고대 그리스 여신에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융합해 여신상을 설계했다. 자유의 여신상의 오른손에는 자유의 빛을 상징하는 횃불이 들려 있고, 머리에는 일곱 개의 뾰족한 가시가 달린 월계관이 씌어져 있는데, 이것은 광선이 세계 7대륙에 퍼지기를 소망하는 것을 상징한다. 왼손에는 미국의 독립을 축하하고자 '독립선언문'을 들려 놓았다.
베르사유궁전, 버킹엄궁전
프랑스의 보물이자 예술 작품인 베르사유궁전은 세계적인 유명한 건축물이다. 베르사유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2층의 '거울의 방'이다. 거울의 방은 베르사유궁전에서 가장 특색 있는 공간이다. 프랑스의 역사상 수많은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왕 윌리엄 1세는 이곳에서 황제를 선언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 밖에도 베르사유궁전에서 일어난 중대한 사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사람들이 베르사유궁전을 볼 때 예술적 측면에서 감탄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 역사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영국 여왕은 버킹엄궁전에서 생활한다. 궁전은 그녀의 거주 공간이자 업무 공간이며,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왕의 생활은 매우 규칙적이다. 오전 열 시는 여왕이 집무실로 향해 고문들과 접견하는 시간이다. 여왕은 집무실에서 여러 가지 문서를 검토한 후, 붉은 상자와 검은 상자에 각각 외교부와 의회에서 온 문건을 나누어 보관한다. 점심 식사는 일반적으로 혼자 하거나 왕실의 구성원들과 함께 한다. 오후에 비로소 공식 활동을 시작하는데, 오랜 시간 서 있거나 사람들과 악수를 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다. 저녁 시간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때때로 공식적인 파티를 열기도 하는데, 이때 여왕은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고 가장 좋아하는 식기를 내놓는다. 파티는 대체로 큰 회장 안에서 열리며, 꽃 사이에 설치된 특이한 조명이 파티의 진행을 지휘한다는 특징이 있다. 여왕은 옷과 음식에 무척 신경을 쓴다. 어패류와 마늘은 절대 먹지 않고 닭고기와 양젖을 즐겨 먹는다. 술은 선호하지 않아서, 간혹 파티에서 순한 포도주를 마셔도 한 잔을 넘지 않는다. 여행을 떠날 때는 여왕의 옷을 항상 큰 옷상자에 넣어 구겨지지 않도록 준비한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네 벌의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도 있다. 여왕은 항상 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하기 때문에 하루에 다섯 번 장갑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