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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빠지는 즐거운 유혹 3 : 고성과 건축여행

베니야마 지음 | 스타북스
1. 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은 언제부터 성을 만들기 시작했나

영국에는 정상 부근 형태가 기묘한 언덕이 곳곳에 존재하는데, 그곳은 대개 주위 평야보다 높이 솟아 있는 형태의 언덕으로 정상 부근에는 마치 언덕에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지면에 '커다란 주름'이 생겨나, 그곳이 언덕 전체를 감싸듯이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언덕의 대부분은 옛날부터 목초지로 사용됐는데, 옛날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기묘한 지형이 됐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식자들은 그것이 아주 오래전의 요새나 그와 유사한 무엇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어 그곳을 힐 포트라고 부르고 있었다. '언덕 요새'라는 의미다.



한편 유럽 대륙에도 이와 아주 유사한 유적이 있으나, 영국처럼 많지는 않다. 그러면 가장 장대한 힐 포트의 하나인 메이덴 캐슬(Maiden Castle)을 살펴보자. 장소는 영국 서남부 도셋 지방의 도체스터(Dorchester)라는 마을에서 가까운 곳인데, 주위가 급사면으로 되어 있는 언덕으로 요새로 삼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지형이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의 발굴조사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 언덕 위에 최초로 요새가 생긴 것은 기원전 3000년경의 신석기시대이고, 현존하고 있는 2.5km 길이의 장대한 토루를 세운 것은 기원전 6세기 무렵에 새로이 대륙에서 건너온 켈트인이었다. 아울러 마지막 토루의 내 측은 널찍한 공터처럼 되어 있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주거 흔적을 발굴하고, 언덕 위 한 곳이 성벽 마을이었던 것을 지적했다.



상식적으로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것을 요새, 큰 것을 성이라고 부르지만, 성이라는 단어로 양자를 대표해도 된다. 그리고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가능한 자연의 지형지물이 유리한 장소를 선택하고 그 위에 인공적인 요소를 추가해, 다양한 구축물들을 설치하고 다수의 인간이 그 안에 몸을 의지할 수 있도록 마련한 장소를 성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성을 특히 성채라고 하는데, 선사시대의 성은 모두 성채이며, 고대의 성도 거의가 성채였다. 마을 단위로 성채화 된 것들을 특별히 성채촌이라고 하며, 그 외에 피난 성채 또는 피난 요새라고 불리는 것들도 있다. 영국의 힐 포트도 대부분은 피난 요새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 오리엔트의 성벽도시

유럽에서는 성벽도시라고 해봐야 아직 토루에 목책 정도였던 무렵, 고대 오리엔트에는 이미 돌과 벽돌로 된 성벽을 구비한 마을이 있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최고의 성벽도시는 요르단강이 사해로 흘러드는 지점 북서쪽에 있는 예리코(Jericho)이다. 기원전 6200년경의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성벽과 해자가 발견되어 유적으로서 보존, 공개되고 있다. 한편 대영박물관의 19, 20, 21호실에는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왕궁 유적에서 발굴된 장대한 부조가 있는데, 그중에는 아시리아군이 성벽도시를 공격하고 있는 정경이 몇 점인가 있어, 당시의 싸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시리아인은 무력 일변도였던 점으로 악명이 높으나, 그들이 개발한 혹은 집대성한 다양한 공성 방법들은 그 이후로도 거의 달라지지 않은 채로 서아시아와 유럽에서 사용되어, 중세 말 대포가 출현할 때까지 이어졌다. 예를 들면, 지면에 터널을 뚫어 성벽 아래로 기어 들어가려는 갱도작전, 아래에는 차륜이 붙어 있어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그 위로 목조로 된 키 높은 노를 연결시킨 공성로, 커다란 통나무와 같은 것에 튼튼한 쇳덩어리가 달려 있어 전체를 당목처럼 흔들며 움직여 쾅 하고 성벽을 찍어 무너뜨리는 파성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성과 성벽도시

아테네의 중심에 솟아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에서 북서로 1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케라미코스라는 고대묘지의 유적이 있다. 케라미코스 즉 '도기'라는 지명은, 옛날 이 부근에서 양질의 도자기 흙이 산출되어, 도기 공방이 많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케라미코스의 고대묘지와 성벽, 성문의 유적은 수풀이 무성하게 돋아 있는 정숙한 풍경으로, 아크로폴리스와 같이 항상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는 장소와는 또 다른 맛이 있어, 유적을 감상하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그리고 나폴리에서 동남쪽으로 9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파에스툼은 그리스인의 식민도시로, 기원전 600년경에 만들어졌는데, 장대한 신전과 성벽 등이, 물론 긴 세월 동안 상당히 붕괴되고는 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주민이 그곳에 살고 있었던 듯한 느낌을 간직한 채로, 용케도 남아 있다. 그리고 유적에 부속되어 있는 박물관의 수집품이 훌륭하다는 이유도 있어, 남 이탈리아 여행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장소가 되고 있다.

한편 로마인은 유럽 각지에 다수의 성과 성벽도시를 만들었다. 성과 도시의 입지를 고르는 데 있어서 매우 뛰어난 식견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참고로 로마는 넓은 영토의 전역에 걸쳐 간선도로를 정비하고 교통의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켜, 위기상황 시에는 그 간선도로를 이용해 군대를 급파하는 정책을 취했다. 따라서 군대의 주둔지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인 동시에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그 위에 치안도 좋고 군대라는 큰 소비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부터 다수의 상인과 그 외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까닭으로 군대의 주둔지는 처음에는 허허벌판이었다고 해도 어느 사이엔가 활기가 넘치는 도시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리고 주둔지 그 자체의 지명이 현재도 도시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예가 많다. 영국에 특히 많은데 돈커스터, 튜스터, 콜체스터, 맨체스터, 윈체스터, 도체스터 등이 모두 그러하다.



아마 항공편으로 로마에 도착한 사람이 시내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고대유적은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장대한 성벽과 성 파올로 문이라고 불리는 성문이다. 이 성벽은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271년경부터 5년여에 걸쳐 쌓아 올린 것이다. 그래서 아우렐리아누스의 성벽이라고 불리며 그 후로도 보수가 반복되어 지금도 구시가지를 휘감고 있다. 참고로 고대로마의 전성기 때는 수도 로마에 성벽이 없었다. 왜냐하면 오래전부터 있었던 낡은 성벽을 기원전 40년대에 케사르가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의 대부분 철거해버렸기 때문이다. 케사르가 철거해버린 이 오래된 성벽은 세르비우스의 성벽이라고 불렸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왕정 시대 6번째 왕 세르비우스가 〈로마의 일곱 언덕〉을 감싸는 듯한 형태로 만든 것이란다. 지금도 시내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2. 중세의 성을 방문하다



모트 베일리에서 석조 성으로

게르만인의 대이동과 서 로마제국 멸망에 의한 혼란이 지나고, 로마인들이 쌓아 올린 여러 다양한 제도와 기술은 대부분 없어졌다. 원래 게르만인에게 성을 만드는 관습이 없었던 점도 작용해 알프스 이북의 유럽에서 다시 한 번 본격적으로 성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중세의 절반이 지난 11세기 무렵부터였다. 하지만 그나마 대부분이 조악한 토루와 목책을 둘러치거나, 목조탑을 설치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성은 모트 베일리 양식이라고 불렸는데,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영국과 독일 등지로 퍼졌다. 참고로 모트(motte)는 프랑스어로 '흙더미, 작은 산'이라는 의미이고, 베일리(bailey)는 고대 프랑스어로 '목책, 울타리, 얼개'라는 의미의 'baille'에서 유래했는데, 모트와 베일리는 중세 성의 원점이 된 구조물로, 그 후 차츰 돌과 벽돌과 같은 견고한 구조로 발전했다.



유럽대륙에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모트 베일리 양식의 성이 적은데, 영국에는 다수가 남아 있다. 대부분이 베일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모트만이 초록이 무성하게 돋아난 낮은 산처럼 되어 있거나 석조 성의 일부가 되어 있다. 모트의 실례로서 가장 좋은 것은 요크의 클리포드 타워(Clifford's Tower)인데, 모트라는 것이 원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래로부터 올려다보면 어떤 느낌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대륙 쪽에 남아 있는 예로는 네덜란드와 라이덴에 있는 부르크트(Burcht)가 흥미를 끈다. '부르크트'란 네덜란드어로 '성'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모트가 영국에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11세기 정복왕 윌리엄이 국내 각지에 다수의 성을 지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윈저 성(Windsor Castle)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성은 런던의 서쪽 근교에 있고 히드로 공항과 가까워 대부분의 투어 일정에 들어 있는데, 이 성의 큰 특징은 정복왕 윌리엄이 최초로 세운 모트에서 후세에 추가로 증축된 부분들에 이르기까지 한눈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유럽의 성과 역사의 살아 있는 모델이라고 일컬어져 상당히 흥미를 끈다. 아무튼 우리들은 먼저 헨리 8세 문이라는 견고한 성문을 지나 로워 워드(Lower Ward)에 들어가게 되는데, 왼편으로는 동화 속의 나라에서 튀어나온 듯한 붉은 제복의 위병들, 정면에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 그리고 오른편에는 숲에 둘러싸인 완만하고 낮은 산 위에 묵직한 원탑이 보인다. 이 낮은 산이야말로 정복왕 윌리엄이 세운 모트로, 윈저 성 발상의 중핵이 되었던 곳이다.



한편 윈저에서 템즈강을 따라 3km 정도 내려온 곳에 색슨족의 왕 해럴드가 남긴 저택이 있는데, 해럴드를 쓰러뜨리고 그 저택을 손에 넣은 정복왕 윌리엄은 유사시에 안전한 거처 확보와 런던 서쪽의 수비 강화를 위해서 윈저 성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그는 런던에도 성 3채를 만들었는데, 3곳 모두 모트 베일리 양식이었다. 그리고 1078년에 그는 런던에 만들어 둔 3개 성 가운데 당시의 시가지 바로 동쪽에 있던 성을 완전히 개축해서 장대한 석조 성으로 만들기 위한 공사를 시작했는데, 런던탑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화이트 타워가 바로 그것이다. 화이트 타워의 주위에는 그 후로도 왕들이 계속해서 타워를 세우고 타워와 타워 사이를 성벽으로 연결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다수의 타워가 늘어서게 되었고, 그래서 성 전체가 옛날부터 '더 타워 오브 런던(The Tower of London)'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현재는 그것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 참고로 증축이 반복된 결과 런던탑은 전형적인 컨센트릭형(동심원형) 성이 됐다.



무엇을 위해, 어떤 장소에 축성했는가

11세기 중엽부터 13세기 중엽에 걸친 기간을 대(大)개간의 시대라고 하는데, 유럽 특유의 삼포농법이 확립되어 안정된 농업생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사회 전체로 봤을 경우 중세 유럽인은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먹을 것을 확보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만 하는 데서 해방되어 그 이외의 일들에도 힘을 쏟을 여유가 생겨났다. 그리고 정복왕 윌리엄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은 먼저 성주와 그 일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소였고, 동시에 영민에 대해 영주의 힘을 과시하고 가상의 적에게 위압을 가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넓은 영지를 지배하는 경우,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중세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영 내 각지에 성이 필요했다.



한편 성은 산 위의 협소한 장소에 있는 산성과 평야에 있는 평성의 2종류로 크게 구별된다. 산성은 지키기 쉽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병사의 행동이 제약되어 주위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었고, 평성은 지형적으로 방위에 불리했지만 성벽과 해자 등의 인공 구조물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충할 수 있었는데, 중세에 접어들면서 유럽에서는 차츰 평성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 갔다. 다음으로 평성의 입지에 대해서인데, 완전히 평평한 곳보다 가능하면 주위보다 어느 정도 솟아 있는 언덕이 축성에는 적합했다. 즉 주변이 모두 평야이고 그곳만이 불쑥 솟아 있는 대지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 그리고 대지가 전혀 없는 낮고 평평한 지형에서는 하중도라든가 호수와 늪지로 태반이 둘러싸여 있는 곳과 같은 장소를 고르거나, 주위 저습지에 물을 끌어들여 인공적으로 넓은 수면을 조성하거나 해서 축성한 예가 많았다. 이를 이른바 수성(水城)이라 하는데, 독일어로는 바셀브루크(Wasserburg)라고 하며 북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등에 특히 많다.



유럽 성의 특징

유럽 여행에서는 성을 방문할 기회가 아주 많은데 유럽의 성 구조에 대해 조금만 알아두면 성을 구경할 때의 재미가 배가된다. 우선 중세에 만들어진 유럽의 성문은, 도개교, 낙석용 난간,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틈, 격자문 등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근세에 들어 성의 군사적 의의가 사라진 후, 도개교가 폐지되고 보통의 다리로 바뀐 예도 상당히 많다. 그래도 일찍이 그곳에 도개교가 있었다는 증거는 확실하게 남아 있는데, 석조 외벽에서 볼 수 있는 두세 줄의 커다란 종구(縱溝-세로로 파진 홈)가 그것이다. 종구보다 더 위쪽에는 외벽에서 돌출된 형태의 낙석용 난간이 있고, 성문의 독특한 설비인 내리닫이 격자문이 있다. 이 격자문은 사방 10cm 정도의 두터운 철제로 되어 있어, 평상시에는 성문 위로 끌어올려져 있다가 위급 시 낙하되어 일거에 성문을 막아버렸다. 성벽의 가장 위쪽에는 흉벽이 있는데, 성의 병사는 가능한 그 뒤로 숨어 몸을 보호하면서 응전했다. 또 성벽에는 탑이 반드시 붙어 있는데 성 주위를 감시하고, 성벽의 방어력을 높이는 등 심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밖에 성벽의 중대한 방어시설이었던 널빤지 회랑(hourd, 우르)은 성의 병사가 극히 유리한 위치에서 응전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성벽의 밖으로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을 지르기 쉽고 투석기로 파괴하기 쉽다는 약점이 있었다. 참고로 화장실을 잠깐 살펴보면, 성주나 신분이 높은 자들은 '요강'을 사용했으나 그 외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벽 위에 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았는데, 성벽 일각이 밖으로 돌출되어 있고 바닥에는 양동이 정도 크기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그것이다.



중세의 성은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가

중세의 성 부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니 이른바 구역의 변모를 되짚어 보도록 하자.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중세 성의 출발점이 된 모트 베일리 양식에서는 성의 중핵을 담당하는 킵이 처음에는 거의 목조였으나 차츰 견고한 석조로 개수되어 갔다. 대다수의 경우 킵은 영주의 거주 공간으로서 일상적인 활동의 중심이 되는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에, 시대가 흐름에 따라 좁은 모트 위에 지어진 셀 킵으로는 장소가 비좁아서, 커다란 각진 탑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을 스퀘어 킵이라고 한다. 또 모트에 딸린 베일리의 위벽도 차츰 석조 성벽으로 개수되어 갔고, 시대의 흐름과 함께 베일리의 면적도 넓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13세기 말엽부터 성이 점점 대규모화함에 따라, 킵을 중심으로 성벽과 탑 등의 방어시설이 주변을 감싸는 양식이 주류가 되었는데, 이것을 컨센트릭(동심원)형 성이라고 하며, 런던탑이 좋은 예이다. 이러한 컨센트릭형 구역은 다음에 킵 게이트하우스형 구역으로 이동해 가는데, 원래 성내에 있는 모든 건조물 중에서 가장 높고 가장 견고한 것은 킵이므로, 킵을 최일선으로 옮겨 와 처음부터 방위에 도움이 되도록 한 것이 킵 게이트하우스형의 성이다.



중세 성에서의 생활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중세의 성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의견이다. 성주와 가족은 성 밖에 별도의 저택을 마련해놓고 그곳에 살지 않는 한 성내의 킵에서 생활했는데, 성의 창문은 좁고 숫자도 제한되어 있어서 덧문을 모두 열어놓아도 통풍과 채광은 매우 열악했고, 출입구는 이 단으로 설계되어 사다리를 걸어 두고 만일을 대비해 밤에는 사다리를 안으로 끌어올려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성주와 그 가족은 킵 안에서 가장 조건이 좋은 위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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