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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다산, 통하다

최종고 지음 | 추수밭
머리말



괴테(Goethe)와 다산(茶山). 한없이 낯익은 두 이름이지만, 함께 붙여놓았을 때의 생소함이란……. 마치 갓 쓰고 양복 입은 모습처럼 낯설기만 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괴테와 다산은 18세기가 한창일 때에 나서 19세기가 동틀 무렵에 세상을 뜬, 문자 그대로 동시대인이었다. 물론 그저 한 시대를 함께 살다 간 우연을 들어 이 둘을 억지로 꿰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간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는 시기는 근대정신이 화려하게 발화한 때였다. 더 나아가 괴테는 서양

에서, 다산은 동양에서 시대정신의 한복판에 서 있지 않았던가. 괴테와 다산의 관계성을,

우연을 내세워 방치해 두기에는 시대적 복선의 깊이가 너무나 짙다.



흔히들 괴테를 "인간 중의 인간"이라 부르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괴테는 한 인간이라기보다 문화다."라는 말도 한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독일사의 발전과 연결되어 있으며, 나아가

그는 서양의 문화를 대변한다. 괴테를 읽는 것은 서양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지름길이다.

저 유명한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는 괴테상을 수상하면서 "괴테가 거대한 태양이라면 나는 자그만 별이다"라고 하면서 "나는 아프리카 원시림 속에서도 매일 괴테와 대화하였

다"라고 고백했다. 미국의 문호요, 사상가인 에머슨(R. Emerson)도 자신의 저서 『대표적 인간들(Representative Men)』에서 인류의 대표적 위인 중 한 명으로 괴테를 꼽았다. 다산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의 지성사에서 다산이 있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움 그 자체다. 흔히

유교문화권 혹은 한자문화권이라 불리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서 다산은 당시 최상의

위치에 서 있는 학자이자 사상가였다. "정약용은 한번 거쳐 가는 사상가가 아니라 평생을

두고 연구해야 할 만큼 풍부한 세계를 간직한 사상가"라고 말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의

금장태 교수처럼 많은 연구자들이 다산에게는 짐작도 하기 어려울 만큼의 깊이와 크기가

있다고 증언한다.





이처럼 괴테와 다산은 18세기 유럽과 동아시아가 낳은 최고의 지성인이자 학자였다. 많은

괴테 연구자와 애호가들은 괴테에게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며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보낸다. 다산 연구자들 또한 어려운 시기에 좁은 조선 땅에 살았지만 크나큰 정신세계를

형성한 다산에게 한없는 존경을 보내며 자랑스러워한다. 실로 두 사람은 당대의 서양과

한국(어쩌면 동양 전체)을 대표하는 최고의 인물이었고, 니체가 괴테에 대해 말한 것처

럼 "한 인물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의문들이 생긴다. 괴테와 다산의 삶과 사상은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른가? 동서양의 교류가 드물었던 시기에 각각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천재와 거인의 공통점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들을 통

해 당시의 서양문화와 동양문화를 그려보면 어떤 모습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괴테와

다산은 상당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직접 만나지 않고도 관계가 있을 수

있으며, 반대로 아무리 자주 만나도 아무런 관계(의미)가 없을 수 있다. 여기서 괴테와

다산의 '무관계성의 관계성'을 추적해 보고자 하는 의도는 이 양면의 어느 즈음에 있을

것이다.



괴테의 삶, 다산의 삶



타고난 복과 가족 수난사

괴테는 한마디로 행운아다. 좋은 가정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타고났으며, 그 능력을 최

대한 발휘하다 간 위인이다.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 자유제국시에서 태어

났다. 아버지 쪽은 튀링겐 출신으로 수공업과 여관업에 종사했던 가문이고, 어머니 쪽은

남독일의 학자이자 법률가 집안이었다. 괴테는 "아버지로부터 건장한 체격을 물려받았고,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고 하였다. 활기차고 명랑한 어머니로부터는 감성적

인 기질을 물려받아, 괴테는 이성과 감성을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소년 괴테는 가정교육을

충실히 받았으며, 특히 루터교식 종교 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쾌활하고 낙천적인 성

격과 환경은 평생 그를 활기 있고 적극적인 인간형으로 살게 했다.



출신 배경을 놓고 보면 다산 또한 괴테 못지 않은 행운아다. 다산은 1762년(영조 38) 음력 6월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일명 마재 마을에서 남원 부사를 지낸 정재원의 6남 4년 중 4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행운은 여기까지다. 이후 다산의 일생을 좌우하게

될 시대적 불운의 씨앗(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굶어죽는 사건)은 다산이 태어나기 약 한 달

전인 5월 13일에 이미 뿌려졌다.



괴테가 복을 타고났다고는 하지만 가족사로만 보면 다산만큼 아픔이 많다. 한 살 아래인

여동생 코르넬리아 외에 4남매가 모두 어린아이 때에 사망했으며, 그 여동생마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다 스물일곱 살에 죽었다. 아버지는 괴테가 서른세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

니는 괴테가 쉰아홉 살 때까지 살았다. 가족사에서 괴테의 아픔이 '외로움'이었다면 다산

의 경우는 '생이별'이다. 다산은 철저히 가족 속에 있었는데, 다산의 친누이가 이승훈에게

시집가서 천주교를 접하면서부터 그의 집안은 역사의 격류에 휩쓸리게 된다.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남달랐던 어린 다산에게 가장 뼈아픈 경험은 무엇보다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읜

것이었다. 교옥(敎獄)과 사화(士禍)로 3형제가 모두 체포되어 매질과 단근질로 국문을 당하

고, 약전과 약용 형제는 귀양길로 들어섰는데 그마저 약전은 흑산도에게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다. 다산은 이처럼 혈육을 잃는 아픔을 일찍부터 겪어왔던 것이다. 부모, 아내와도 생이

별을 했다. 열다섯 살에 결혼한 그는 홍씨 부인과의 사이에 6남 3녀를 두었으나 모두 죽고 2남 1녀만 키웠다. 게다가 단산(斷産)도 하기 전인 마흔 살 때부터 18년 동안 부부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시대를 호흡하는 천재성의 운명

흔히 괴테 하면 『파우스트』를 대표작으로 하는 작가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괴테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의 국무총리 격인 재상까지 지냈고, 그 후에도 일종의

문교부장관이나 국립극장장 같은 공직을 겸하면서 꾸준히 글을 쓴 인물이다. 괴테는 군주가

필요로 하여 부탁하는 일은 뭐든지 사양하지 않고 맡아서 했다. 국립극장도 운영하였고 광산

개발도 담당하였다. 국가 재정의 계획과 집행에도 관여했고,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전쟁할 때

는 전투참모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평소 나폴레옹 황제를 흠모했던 괴테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패배하고 바이마르까지 항복한 상황에서도 나폴레옹 황제에 대한 존경만큼은 끝내 버리지 않

았다. 하지만 공직이 화려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괴테는 공직에서 오는 격무와 스트레스

를 여행으로 극복하였다. "하늘이 어디서나 푸르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닐 필요

는 없다"고 했다. 괴테는 공직의 격무를 해소하면서 살았고, 그것이 그의 육체적·정신적 건

강의 비결이었던 것 같다.



다산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지방 관리도 하고, 오늘날의 국립도서관과 같은 규장각(奎章閣)

의 제수(除授)도 지냈으며, 법무차관 정도 되는 형조참의까지 오를 수 있었다. 정조 대왕의 갑작스런 서거만 아니었다면 영의정 같은 최고 관직까지 오를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던 공

인이었다. 다산은 관직에 오른 후 줄곧 왕을 보필하면서 한강에 배를 연결하여 건너는 주교

(舟橋)를 설계하는가 하면, 당시 신도시였던 화성(華城; 수원)을 설계하기도 하였다. 다산은 "나는 포의(布衣; 벼슬 없는 사람)로 임금님의 알아줌을 받았는데, 정조 대왕께서 총애해 주시고 칭찬해 주심이 동렬(同列)을 넘어섰다. 앞뒤로 상을 받고, 서책, 구마왕이 하사하는 말, 무늬 있는 짐승가죽, 진귀한 여러 물건을 내려주신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기밀에 참여하여 듣도록 허락하시고 생각한 바가 있어서 글로 조목조목 진술하여 올리면 모두 즉석

에서 윤허해 주셨다. 일찍이 규영부 교서로 있을 때에는 맡은 일의 과실을 책망하지 않으셨

으며, 매일 밤 진수성찬을 내려주셔서 배불리 먹게 하셨다. 내부(內府)에 비장된 서적을

각감(閣監)을 통해 청해 보도록 허락해주신 것들은 모두 남다른 운수였다"라고 솔직히 말할

정도로 정조의 총애를 지나치리만큼 받았다. 이러한 모습은 괴테가 아우구스트 대공의 총애

를 받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괴테보다 여덟 살 아래인 아우구스트는 괴테에게 반하다시피

하여 평생 괴테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괴테도 인간적으로 가까우면서도 군주인 아우구스트

에게 충성을 바쳤다. 괴테와 다산, 이 두 비범한 인품은 일찍부터 권력자의 총애와 지원을

받아 안정 속에서 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조가 49세로 급서하자 다산은 자신의 정치생명도 끝났음을 직감하였다. 그를 보호

해줄 번암 채제공도 이미 죽었고, 천재 이가환도 자신 한 몸 지켜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다산은 마재의 고향집으로 내려가서는, '겨울 시내 건너기를 망설이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

워한다(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는 노자의 말을 따서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짓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지냈다. 그러나 다산은 칩거하는 자유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정조

의 사랑을 받은 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유배형을 받아야 했다. 이른바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경상도 장기로 유배 길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곧이어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강진으로 유배 길에 올랐다. 몇 차례

구명운동이 있었지만 번번이 반대파의 저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18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했다.



괴테는 평생 정치권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신이 가진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천재

였던 반면, 다산은 처음에는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출발하였지만 결국 당파정치에 희생되어

자신의 역량을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수난의 지식인이었다. 이처럼 비슷한

조건과 자질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은 정치권력의 변화무쌍 때문에 판이한 공직자의 삶을 살

고 말았다.



괴테와 다산의 유산



계몽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실학

괴테는 문학 내지 문화사적으로 독일에서 계몽주의를 대표하고 그 속에는 그리스·로마에

서 염원하는 고전주의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된다. 그 후에 낭만파 문인들이

나와서 괴테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괴테를 낭만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괴테 스스로는, "고전

적인 것은 건전하고 낭만적인 것은 병적이다"라고 했고, 또 "낭만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포용

하고자 하며, 이렇게 할 때 그들은 근본적인 것에서 길을 잃는다"고도 했다. 기본적으로 고

전적·계몽적 합리주의와 자연과학적 기초를 중시한 것이다. 그렇다고 괴테에게서 감성,

동경 같은 낭만적 면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사실 낭만주의

(Romanticism)라 할 때 그 낭만이란 궁극적으로는 현실보다도 지나간 것에 대한 회고와 동경을 뜻하는 말이다. 괴테가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명을 동경했다면 그 자체가 낭만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는 그 시대의 인간, 사상가로서 근대적인 안목을

갖고 인간성의 보편적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이성을 근거로 발전을 지향한 면이 컸

기 때문에 그를 계몽주의의 편에 세우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양면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기본적으로는 공자와 맹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수사학(修辭學)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근대적 학문과 신앙을 수용하여 발전적으로 사유

했다. 다산은 털끝 하나라도 썩지 않은 곳이 없다고 진단하였다. 다산은 금과옥조로 내려오는 해묵은 법을 고쳐 변법(變法)을 해서라도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경사회에서는 경제가 주로 땅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토지제도의 변혁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나아가 종래의 주자학 중심의 사변적 사유방식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인간관과 우주관을 모색하게 했다. 여기에 중국의 새로

운 고증학(考證學)이 북학(北學)이란 이름으로, 서양의 기술과 그리스도교가 서학이란 이름으

로 조선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상황에서, 다산은 이러한 새로운 조류와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괴테나 다산이나 하나의 주의 내지 학풍으로 한정 짓기에는 폭이 넓고 다양한 요소를 안고

있다. 흔히 괴테와 다산에게서 근대성(modernity)의 요소를 높이 평가하려고 하는데,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굳이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란 말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괴테와 다산에게는 분명 근대성을 넘어선 다른 무엇, 영원하다면 어폐가 있고, 보다 지속적이고도 보편적인 생각이 담겨 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괴테와 다산에게 영원히 매료되게

끔 하는 것이다.



『파우스트』와 『목민심서』

무려 60여 년의 세월을 쏟아 부은 끝에 『파우스트』를 완성한 괴테는 2부 집필이 끝날 무렵 에커만에게 "앞으로의 내 생명은 덤"이라고 했다. 그만큼 이 작품은 괴테 문학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파우스트』는 인간의 보편적인 구원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를 범할 수 있지만 성실히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는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우리는 인간이 희망하고 노력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또 생각하고 체험하는 등 영원히 반복되는 존재의 내용을 『파우스트』에서 발

견할 수 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만인의 책이라 할 수 있는 『파우스트』는 무엇보다 '구원의 책'

이라는 데 그 가치가 있다. 이 책을 읽고 생각하고 느낌으로써 삶의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자신도 모르게 얻게 된다. 또한 가혹하고도 불가해 하며 모순

투성이의 적나라한 삶을 눈앞에서 볼 수 있으나 우리는 그로 인해 몰락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피나도록 생과의 투쟁을 벌이고 내면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를 많이 지적하는데, 어쩌면 이러한 괴테적·파우스트적 인간구원의 문제를

포기한 현대문학과 학문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괴테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 인간의

궁극적 문제를 어떤 교리적 도그마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색과 정신적 모색으로 정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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