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빵을 들고 땅 끝까지
이윤구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내 생명은 나 아닌 주변의 삶,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하늘이 주신 선물입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책읽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책을 읽고 눈물로 감동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청소년기를 잘 보낼 수 있었고, 밝게 살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철이 든 다음에는 6·25 전쟁의 비극이 제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었습니다. 죽고 죽이는 살벌한 싸움터에서 저 자신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생명의 존엄성과 삶의 참 의미를 죽음의 체험을 하고서야 알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은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고 존중해야 하는 지엄한 것임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내 생명은 나 아닌 주변의 삶,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하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야전 병원에서 며칠 치료를 받은 후 곧 유엔 군복을 벗고 부산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새로 찾은 나의 혼을 바로 키우고 싶어서였습니다. 서울로 수복한 다음 빈민굴로, 고아원으로 뛰어 다니면서 봉사하는 공부를 하다가 사회 복지로 전공을 바꾼 것도 제 삶을 이웃 사랑의 현장으로 몰아넣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쟁 직후, 기독교 세계 봉사회라는 미국 기관의 구제 사업에 몸을 담기도 하고 경제 원조처 같은 거대한 미국 해외 협력 기구에서도 일을 하면서, 우리 나라, 우리 겨레는 언제 남의 나라, 가난한 이웃을 돕는 자리에 서게 될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65년, 저와 제 가족에게 해외 봉사의 길을 떠나는 행운이 왔습니다. 2년 계약으로 성지 예루살렘에서 아랍 피난민을 돕는 중동 기독교 연합회의 피난민 사업부 책임을 맡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가는 길"이라고 함석헌 님은 환송 모임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1967년, 요르단 땅에서 전쟁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요란한 총포 소리와 함께 거룩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생지옥을 보았습니다. 전쟁 후에는 세계 기독교 협의회(WCC)의 특별 대표로 구호와 복구 사업을 했습니다. 5년 동안 젊은 혼신을 다 쏟아 부으며 팔레스타인 실향민들의 벗 노릇을 잘 해보려 노력했지만 끝도 한도 없었습니다. 상처가 깊은 백성이었습니다.
곤비한 몸과 마음을 영국에서 쉬면서 박사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귀국하여 대학 강단에 서기로 되어 있었는데 운명은 다른 길로 저를 몰아 붙였습니다. 이번에는 유엔아동기금의 간부 직원으로 이집트로 사령을 받고 국제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인도에서 5년, 방글라데시와 유엔 본부에서 5년을 보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국제 협력이라는 이름 아래 이웃 사랑이 얼마나 숭고한지도 느꼈지만 또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뼈아프게 느꼈습니다. 세상은 좁아져, 지구촌이 이제는 인류를 한 가족으로 뭉치게 하는 작은 곳임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2년의 해외 봉사가 20년으로 마냥 길어졌습니다. 그 20여 년을 떠다니면서 한시도 잊지 않고 기도하며 희망했던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국 땅으로 돌아가서 우리 나라가 해외 원조기금에서 받았던 사랑의 빚을 갚고 싶은 간절한 소원 말입니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아서 참담한 고난을 이기고 잘사는 나라가 되었는데 그 고마움을 조금씩 갚아 나가는 백성이 되어야 하겠다는 지극히 소박하고 당연한 욕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1984년에 유엔에서 조기 은퇴(55세)를 결심하고 귀국했습니다. 너무 늙기 전에 한국 사회와 교회에 세상의 가난한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이룩하고자 하는 물질적 풍요만큼이나 정신적인 풍요도 함께 일구어 낼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고, 그것의 근간이 되는 해외 원조를 위한 NGO 운동을 개척할 때라고 믿었습니다.
그 꿈이 현실로 이어져 월드비전(한국 선명회) 회장으로 취임한 것이 1991년 1월 1일이었습니다. 마침 몹시 추웠던 정초였습니다. 취임과 시무 인사를 한 후 곧바로 사랑의 쌀을 방글라데시 월드비전으로 전해주기 위해 떠났습니다. 40년 수혜국의 굴레를 벗고 돕는 나라로 탈바꿈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해외 원조의 사역을 이어가는 동안에 너무도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름다운 추억들이 제 마음을 꽉 채우고, 퇴임 후 10년이 지나간 지금도 회고하면 무지개 동산 같은 일화들이 주마등처럼 기억의 호수를 밝혀줍니다. 이 기억이 살아있는 동안 이 보물섬 같은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방가족의 나라 방글라데시 - 사랑의 쌀을 가지고 온 나라 사람입니까?
'방가' 족의 나라 방글라데시는 벵갈 말로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주저함 없이 방글라데시로 날아갔습니다. 한민족 첫사랑의 선물을 가난한 이웃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몇 명 안 되지만 치타공의 우리 교포들이 흔들어 주던 태극기는 제 가슴을 한 번 더 뭉클하게 했습니다. 천 톤의 쌀은 해방 후 우리 민족이 받았던 구호양곡에 비하면 태산의 한 줌 흙에도 못 미치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걸음, 한 발짝이 천리 길의 소중한 시발이 되는 법이지요.
그 죽음의 땅에서 배고픈 어린아이들을 먹이고 돌보는 사역은 그 후로도 착실하게 계속되었습니다. 차츰 구호 사업이 확산되면서 구호만으로는 안 된다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그래서 지역 공동체를 총체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교육하고 조직하여 스스로 개발하는 힘을 길러 주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밖의 힘으로 구호를 받는 것은 백 년이 가도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지역 사회의 개발이 궁극적으로 빈곤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치료의 길입니다.
치타공에서 테이프를 끊은 월드비전 한국의 사역이 벌써 16년째를 맞아, 2006년 6월, 제게는 제2의 고향 같은 방글라데시에 다시 가서 정다운 땅, 반가운 사람들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날 공식 행사는 라자푸르 지방에서 있었습니다. 넓은 평야 끝이 안 보이는 옥토의 땅입니다. 땀을 흘려 벼농사와 감자를 심는 700에이커의 넓은 땅이 몬순 계절만 오면 논밭이 물에 잠기고 헛농사를 짓는 일을 반복해 왔습니다. 그 땅에 약 2킬로미터의 튼튼한 수로가 준공되는 날이었으니 농민의 기쁨이 어떠했을까 상상도 힘듭니다. 그날 아침 제방 뚝 위에 기념 식목을 했습니다. 농민 가족들과 손을 잡고 춤을 추었습니다. 300여 농민이 이 수리 공사를 위해 농토를 헌납한 것도 제게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홍수와 한발의 재해에서 해방되어 2만이 조금 안 되는 많은 빈곤 농민 가족들이 쌀과 감자를 풍성하게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쌀을 갖다 준 도움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고 지속성이 있는 원조 사업이었습니다.
둘째 날은 보그라의 말로티나고르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보그라 지역에서 4,000명의 어린이들이 2001년부터 한국인들이 보내는 도움으로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는 9,500명의 어린이들이 한국의 양부모(후원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보내는 아주 작은 후원금이 모여 조금씩 그러나 분명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들의 고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선더반 쿨나에도 우리와 결연을 맺은 4,000명의 어린이들이 조그만 골방에 모여 깔끔한 모습으로 공부도 하고 활짝 핀 얼굴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호랑이 같은 야생 맹수들의 정글도 우리의 작은 사랑이 있으면 아름다운 사람의 낙원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성매매와 마약으로 버려졌던 삶에서 새로운 삶의 길을 찾게 된 젊은 여인들의 빛나는 눈동자 속에서도 이 세상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떠나던 날 찾아간 다카 외곽의 의료 봉사 센터는 인구에 비해 의료 시설이 부족해서 거리에 누워 있는 환자들이 너무 많은 그곳에서 일차 진료의 간병과 치료와 숙식을 제공하는 참 귀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데는 좀 특별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이곳의 앰뷸런스가 너무 낡아 못쓰게 되어 새 구급차가 꼭 필요했는데, 마침 한국 월드비전이 훌륭한 최신형 앰뷸런스를 기증하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의 앰뷸런스에는 진귀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를 사랑하며 열심을 다하여 일하다가 3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월드비전 직원 윤매영 님이 있었는데, 고인이 된 그녀의 가족이 적지 않은 헌금을 내 놓았습니다. 그 금보다 귀한 돈이 앰뷸런스 구입에 큰 몫을 했던 것입니다. 이 구급차가 굴러다니며 응급 환자들을 돌볼 때마다 윤매영 님의 사랑의 숨소리가 향기처럼 스며 나와 환자와 앰뷸런스를 따뜻하게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사랑이 이렇게 큰일을 합니다. 한국과 방글라데시를 강하게 묶어 주는 사랑의 줄이 된 것입니다. 매영 님은 하늘나라에서도 방글라데시를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말없이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날아서 방글라데시로 16년 동안 밤낮으로 가고 또 갔습니다.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그렇게 지속될 것입니다.
킬링필드와 대자연의 캄보디아 - 못하겠다고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극빈하고 어려운 나라가 많고 동남아에도 미개발 국가가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유난히 이목을 집중하게 됩니다. 캄보디아라는 이름의 유래부터 참 흥미롭습니다. 인도의 큰스님 '캄푸'의 이름에다가 그의 후손이라는 '디아'를 붙여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약소민족이 겪어야 했던 모든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 민족이 각별히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이런 공통된 역사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립을 얻은 이후에도 정국이 안정되게 지나는 날이 없었습니다. 국민 233명 가운데 한 사람은 스님일 만큼 순수한 민족일 텐데, 힘을 기르기보다 평화를 기원했을 그들이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1975년에 시작되어 1979년에 끝난 크미르 루즈의 집권 4년 동안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폴포트가 이끄는 혁명 정부보다 더한 집단 살인의 예는 없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농민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프놈펜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계의 모든 지도자와 가족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예일 대학의 조사단은 희생자를 200만 내외로 발표했고, 자체적으로는 500만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하면 자기의 가족이나 동족에게도 극한의 참극을 연출할 수 있음을 크미르 루즈 폭군은 보여 주었습니다. 세계 100여 나라를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많지만 캄보디아처럼 비참하고 눈물겨운 곳도 없었습니다.
캄보디아를 방문하여 닷새 동안 월드비전의 사업장을 두루 돌아본 후, 마지막 날 저는 부통령 겸 부총리를 예방했습니다. 인자하게 생긴 농업 전문가의 얼굴은 너무도 피곤해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자리기에 그렇게 기운이 없어 보일까 생각하니 정말 동정이 갔습니다. 이야기가 끝이 날 무렵 그는 제게 한 가지 힘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캄보디아의 농민들은 오랜 전쟁 속에서도 꾸준히 농사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모든 농기구를 잃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꼭 필요한 호미, 괭이, 삽, 낫 같은 것이 전혀 없어서 맨손으로 땅을 파고 밭을 갈다 보니 손가락과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되어 너무도 보기 딱해 괭이를 좀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몇 자루나 원하느냐 했더니 70만 자루만 속히 원조해 줄 수 있겠느냐고 호소했습니다. 너무도 진솔한 대화였습니다. 그 돈은 없었지만 못하겠다고 할 용기가 제게는 없었습니다. 무력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숙제로 마음에 깊이 새기고 돌아왔습니다.
월드비전의 시작과 도약 - 사랑의 빚, 이제는 돕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월드비전이라는 세계적 구호 개발 기구는 한반도에서 6·25 전쟁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누가 계획이나 한 것처럼 월드비전의 창설자 로버트 윌라드 피어스는 그해 봄 부산과 대구, 서울 등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한국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피어스 목사의 뜨거운 가슴은 그를 가만히 앉아 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즈음 그의 설교 속에는 언제나 한국 전쟁 구호의 호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몇 달을 크게 고민한 끝에 직접 구호 단체를 만들어서 앞장서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9월 22일 오레건 포틀랜드에서 월드비전 인터내셔널을 창설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10월에 한국에 옵니다. 외국 사람들은 모두 피난 출국하던 때에 젊은 부흥 목사 피어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피어스의 첫 번째 한국 구호 사업은 한경직 목사의 영락 교회에서 시작됩니다. 다비다 모자원의 설립을 위해 소중한 지원금을 요청하면서 눈물로 호소하는 글을 써서 미국의 교회와 교인들에게 보냈습니다. 게다가 그는 거의 전문적인 사진 작가였습니다. 그 재주를 십분 발휘해 참혹한 전쟁 난민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서 미국인들이 보고 감동하여 헌금을 내게 했습니다. 피어스 목사에게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동으로 직접 옮기는 삶의 기본이었습니다. 사랑은 명사이기보다 강렬한 동사였습니다.
피어스 목사는 잠을 설치며 피난민을 찾아 다녔습니다. 동양 선교회, 대구 동산 병원, 포로수용소 등 닥치는 대로 구호의 손길을 폈습니다. 육군 군단장 백선엽 장군이 설립한 광주 백선 고아원에도 도움을 보냈습니다. 지리산 토벌 작전으로 많은 고아들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것을 본 백 장군은 어려운 처지였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맨주먹으로 황무지에 고아원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고아원을 피어스 목사가 좌시하지 못했습니다. 그곳뿐 아니라 전쟁 중에 생겨난 수백을 헤아리는 고아원과 모자원들 중 미국 기독교 봉사회나 기독교 아동 복리회, 그리고 월드비전의 도움 없이 운영되는 곳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사회사업은 6·25 전쟁 때문에 자리를 잡고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피어스는 위대한 사회 복지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전쟁 중에 일시적으로 먹을 것과 입을 옷을 나누어주는 구제도 참 귀한데 피어스 목사는 새로운 사회 복지 사업을 개척하게 됩니다. 그것은 결연 후원입니다. 한 전쟁미망인과 네 딸을 월드비전이 첫 번째 정기 후원 대상으로 결정합니다. 생계 보증(Sponsorship)을 하겠다는 지속적 원조의 새 출발이었습니다. 사회 복지 사상과 기숙의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전쟁 직후에도 피어스 목사는 한국에 남아 지속적으로 애절하게 후원자들을 찾아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보낸 피어스의 편지 한 통은 우리가 쉽게 갚을 수 없는 벅찬 사랑의 빚을 지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이미 대지를 구해 놓았고, 이번 달부터 대전에서 한센병 환자의 영아들을 위한 집을 운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돌보고 있는 여자 한센병 환자는 55명인데, 그들은 그 몸으로 이 영아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들이 우리에게 찾아와 아직도 감염되지 않은 어린 자식들을 격리시켜 남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해 달라는 간청을 해 왔습니다. 일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번창하고 화려해진 대전의 어느 후미진 곳에서 반세기 전 문둥병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신음하던 여성들을 상상하여 봅니다. 그리고 죄 없는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한 젊은 미국 목사가 이렇게 지성으로 돌본 흔적을 피부로 느껴 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들과 그 자녀들을 내 가족처럼 돌보아 준 피어스의 바다보다 넓고 깊은 사랑을 떠올려 봅니다. 이러한 사랑이 무르익어 1959년 5월 9일 '월드비전 특수 피부 진료소'가 세브란스 병원 앞에 세워졌으며, 10만이나 되는 한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