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머리말 : 커뮤니케이션사 연구를 위하여



커뮤니케이션은 라틴어 communis(공유)와 communicare(나누어 갖는다)에서 유래된 단어로 '공통의 것을 갖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사람들이 서로 의미를 공유함으로써 이해에 도달하고 합의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공동체의 규범으로서의 문화를 창출하는 걸 가리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쌍방적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 강력한 '중앙 1극 구조'를 유지해온 한국 사회에서 '쌍방향성'은 참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덕목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의 '시위 문화'가 잘 입증해주고 있다. 물론 시위도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이긴 하지만, '분신자살'과 같은 표현방법은, 소통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이 '말' 단계에서 죽어버렸기 때문에 '몸'을 매개로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시위 같은 '작은' 현안에서부터 출발해 사회개혁을 시도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단칼에 해결하려는 '거대담론증'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개혁을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연역적 개혁'과 '귀납적 개혁'이 있을 수 있다. 연역적 개혁은 개혁의 대명제를 세우고 '위에서 아래로' 각 사안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반면 귀납적 개혁은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개별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아래서 위로' 개혁 명제를 세우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간 역대 정권들에 의해 추진된 개혁은 모두 연역적 개혁이었다. 연역적 개혁은 강력한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고 개혁 주체의 개혁성을 널리 홍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론이 현실에 적용되면서 반발·염증·불신 등을 초래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갈수록 연역적 개혁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치 참여 층이 점점 확대되고 이질화되면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가설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가설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에 의존하게 되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직관은 당연히 서로 다르므로 결국 충돌과 힘의 정치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 사회, 특히 정치와 관련해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외면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민주화 역사는 있어도 민주화 커뮤니케이션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갈등과 분열의 폭발을 민주주의 현상으로 미화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통의 독선에 관한 한 독재정권과 민주정권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한국의 정권들은 '원조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다. 이전 정권들과 차별화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자기 정당화나 미화를 위해 역사를 오·남용해온 경우가 많았다. 달리 말하자면, 기존 역사 서술은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소홀히 하면서 '거대담론의 폭력성'을 은연중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 각론에서 출발했더라면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사안도 총론에서 거창하게 치고 나가는 바람에 반발과 분열을 초래했던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이들 정권의 주체였던 왕년의 민주화 투사들은 과거 자신들이 겪은 고난과 시련에 대해 '과도한 보상 욕구'를 가졌었다. 이는 해방정국의 독립투사들이 가졌던 보상 욕구와 비슷한 것으로, 이것이 당시의 극단적 분열에 일조했다. 노무현 정권은 또 다른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지역주의 구도와 그에 따른 소용돌이 구조에 의해 갑작스럽게 대권을 쟁취한 아웃사이더 정치인이 그걸 나름의 '시대정신'으로 읽고 싶어 하는 영웅주의와 오랜 세월 고향에서 박해를 받아온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풀이 욕망, 그리고 한 세대 넘게 집권한 독재정권 들에 의한 '편가르기' 구도의 극한적 이용 등이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을 논의하지 않은 채 역사를 기술하게 되면 온갖 결정론과 예정론이 지배하는, 즉 소통도 없고 커뮤니케이션도 없는 역사가 물려지게 된다.

인간 세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 영역은 없다. 따라서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역사를 커뮤니케이션으로 이해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예컨대 도시사회학자가 '전주의 역사'를 다룬다면 주로 도시사회학의 관점에서 보겠지만, 커뮤니케이션사가는 전주의 독특한 문화와 전주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행태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생성시킨 역사적 과정에 집중할 것이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은 자아·개인·공중뿐만 아니라 '시대정신'이니 '문명사적 흐름'이니 하는 거시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요컨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한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에 대한 통합사를 지향하자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사의 취지다.



미네르바의 부엉이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으로 황혼녘 산책을 즐길 때마다 부엉이를 데리고 다녔다. 이 신화에 근거하여 역사연구에서는 '거리두기'의 의미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적용한다. 즉 아침부터 낮까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그 즉시 관찰해선 모든 걸 제대로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일이 끝난 황혼녘에 가서야 지혜로운 평가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적어도 한두 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신념을 고수하고 있다. 더 독한 사람도 있다. 중국의 저우언라이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에 관한 질문에 대해 "아직 얘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답했다.



거리두기의 역사관은 역사의 흐름을 그 흐름 밖에서 보아야 '분노와 정열 없이' 관조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은 사건의 종결성 여부에 의해 그 공정성과 공평성을 판가름하게 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래서 한양대 사학과 교수 김현식은 '포스트모던의 부엉이'는 한낮에 날아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역사가는 자신의 창작품에 자신의 목소리를 서명하고 이를 사냥꾼에게 과감히 노출시켜야, '차이의 인식'이라는 공감의 토대가 서로 부딪히는 진정한 반대 심문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어느 때에 날건 일장일단이 있다. 황혼녘에 난다고 해서 모든 걸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며, 사냥꾼이 쳐들어오면 어느 때라도 날아야 한다. 한국의 역사학을 놓고 보자.



한국의 현대사는 온갖 의문과 의혹과 비밀과 음모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정통' 역사가들은 역사의 '숨을 죽이기 위해' 현대사는 잘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사를 외면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현대사가 이념화될 걸 두려워하는 보수파의 강한 반대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현대사는 죽어가고 있다. 실제로 젊은 학생들에게 슬그머니 물어보라. 100년 전 사건은 알아도 10년 전 사건은 모른다. 2006년 6월 손기정 기념재단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서울 시내 중·고등학생 462명 중 39퍼센트가 손기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조차 없다고 했다. 더구나 이름을 들어봤다는 응답자 3명 중 1명은 손기정을 '친일파'로 알고 있더라는 것이다. 현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에 그 어떤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이 이상 더 위험할 수 있을까?



김동식은 신역사학이 미래의 비전과 현재의 관심에 의해 과거를 읽고 서술하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즉 신역사학은 역사상의 사실과 각 시대에 따른 역사가의 지적 교류의 산물이라는 지적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이러한 흐름에 대한 우려를 자신의 저서 『부의 미래』에서 '무용지식'의 문제로 거론했다. "디지털 데이터베이스건, 두뇌 속이건, 지식이 저장된 곳은 어디나 무용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흡사 필요 없는 물건으로 가득 차 있는 에밀리 아줌마네 다락방 같다. 변화가 더욱 빨라지면서 어떤 데이터베이스를 완성할 때쯤이면 그것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기업과, 정부 그리고 개인은 알게 모르게 전보다 더 쓸모없어진 지식, 즉 변화로 인해 이미 거짓이 되어 버린 생각이나 가정을 근거로 매일 의사 결정을 내리고 있다."



앨빈 토플러의 주장에서 주지할 점은 그러한 현상이 우리가 지식을 얻고자 사용하는 인식의 도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팩션을 예로 들어보자. 팩션(faction)은 사실(fact)과 허구(fiction)의 합성어로, 몇 해 전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다 빈치 코드』나 『단테 클럽』 등의 역사추리소설이 이에 해당된다. 팩션 열풍은 텔레비전에도 불어닥쳐 〈영웅시대〉, 〈해신〉, 〈불멸의 이순신〉, 〈제5공화국〉과 같은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열풍에 대해 문학평론가인 숭실대 교수 박진은 외국의 경우 스릴러나 액션 요소들이 강한 팩션이 인기를 끄는 반면, 우리는 '진실을 이제야 밝힌다' 식의 〈실미도〉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왜곡된 근·현대사를 거친 우리에겐 '진실이라 믿어왔던 모든 것에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며, 그 특성상 이면을 파헤치는 팩션에 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을 출간한 백승종은 역사적 진실을 중층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팩션이 제격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일반 역사서에서 역모자들은 범죄자, 반역자 취급을 당하지만 그건 왕조 중심의 시각이며 역적 조사 기록도 자세히 뜯어보면 진술자들의 상호 관계나 전략, 그들의 삶 자체가 새롭게 보인다는 것이다. 즉 거시적으로 역사를 보면 민중은 죽어버리므로 그들이 실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의 다양한 생존 전략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려면 미시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백승종은 역사 서술에서 동원하는 허구조차도 근거 없이 날조해선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바로 여기서 필요한 게 연구자의 진정성과 성찰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팩션은 늘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수용자의 관점에선 '진실 파워'의 한계에 대한 실망과 환멸,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에서 팩션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여러 대중문화사 연구는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텍스트를 넘어선 해석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망탈리테와 커뮤니케이션

망탈리테(mentaliti )는 흔히 '심성'으로 번역되어 사용되지만, 몇몇 학자들은 적절한 번역어로 '정신자세'를 제안한다. 조한욱은 '망탈리테'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데올로기'라는 개념과 대비시킨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란 이른바 '대의명분', '이념', '가치관' 등과 같이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망탈리테'는 집단적으로 확립되기는 했지만, 반드시 의식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태도, 개념, 규범, 특정 집단의 가치관 등을 지칭한다. 바꾸어 말하면 '망탈리테'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집단적인 사고방식, 생활 습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조한욱은 이데올로기와 망탈리테의 차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정치의 현실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적인 신념인가, 아니면 지역적인 정서인가?" 즉 이데올로기보다는 망탈리테가 사람들의 행동 선택에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망탈리테는 인간의 사고를 제약할 수 있는 틀이기 때문에, 이 틀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한 상호 소통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예컨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망탈리테의 충돌과 더불어 망탈리테 내부의 모순으로 인한 불신이 소통 불능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노무현의 '말'만 해도 그렇다. 왜 과거엔 그런 어법이 박수를 받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가? 과거 박수를 받았을 땐 서민을 위한 담론을 구사했을 때였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청와대를 비롯한 공직 사회와 '낙하산 인사'의 텃밭인 공기업을 향해 정녕 서민의 고통을 생각하는 자세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더라면 아무리 거친 어법을 사용했더라도 뜨거운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은 늘 민생과는 동떨어진 정치적 주제로 정적(政敵)을 향해서만 거친 어법을 구사해 왔다. 정신주의 망탈리테의 생명은 언행일치와 솔선수범이다. 그럴 때에 비로소 망탈리테의 균형과 소통도 가능해진다.



'역사 콤플렉스'도 일종의 망탈리테로 볼 수 있다. 어느 나라 사람이건 '역사 콤플렉스'가 전혀 없지 않겠지만,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상호 대비되는 콤플렉스의 두 주인공이 있으니 바로 한국인과 미국인이다. 미국인부터 살펴보자.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지만 다른 나라엔 다 있는데 그들에겐 없는 게 있으니 바로 '오랜 역사'다. 그래서 초기의 미국인들은 유럽은 늙고 썩은 반면 미국은 젊고 신선하다는 논리로 역사를 조롱했다. 그들은 이처럼 다른 나라들의 경험에서 무언가 배우려 하지 않는 철저한 자국 중심주의의 독선과 오만을 지니고 있다. 세계 여론을 무시하는 부시 행정부의 '마이웨이'도 상당 부분 이와 관련된 것이다.



반면 한국인은 늘 '반 만 년'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 역사에 '승리와 정복'이 없는 건 물론, 당하고만 살아온 기록에 대해 지긋지긋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는 고구려와 그 이전의 역사에만 심취하고 일부는 서양과 중국의 역사 쪽으로 달려간다. 웬 '로마인 이야기'와 '삼국지'는 그리도 좋아하는지! 특히 수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는 우울하다는 이유로 적극 외면한다. 그 결과 자국의 경험에서 무엇인가 배우려 하지 않고 늘 밖만 쳐다보게 되었다. 미국으로 갔다가 프랑스로 달려가고 네덜란드로 갔다가 스웨덴도 기웃거린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나라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자기보다 좀 못하다 싶으면 노골적으로 얕잡아 본다. 명암의 양면을 다 보면 좋으련만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어찌됐든 미국은 오랜 역사를 얕잡아 보면서 뭐든 새롭게 창조하겠다는 야망과 열의로 성공을 거두었고 한국은 자기비하를 하면서 세계의 앞서가는 것을 그대로 해보겠다는 집념과 열의로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두 나라 모두 그에 따른 비용과 희생을 치렀지만 '성공'이라 말해도 무방할 정도의 진보를 이룩했다. 그러나 늘 행운이 따를 수는 없다.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원동력으로 삼아 성공을 거둔 인물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멈출 때를 아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망탈리테' 개념이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한국 언론의 문제는 단지 제도적이고 법적인 것뿐인가? 국민과 언론인들의 '망탈리테' 문제는 없는가? 경제적 결정론과의 타협을 어떻게 우아하게 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에 대한 망탈리테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아비투스와 커뮤니케이션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도로남〉이라는 트로트 가요다. 깜깜한 새벽 버스 속에서 이 노래를 들은 한 여대생은 꺼이꺼이 목 놓아 울고 말았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겠지. 그 울음 덕분에 그 여대생은 트로트는 물론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평소 천박하고 비속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떤 경우엔 위로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여대생은 가수가 되길 원했지만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떨어진 바람에 가요 연구자로 돌아서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가요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 실력으로 내놓은 책이 『오빠는 풍각쟁이야 : 대중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이다.

나는 『한국대중매체사』라는 책을 쓰기 위해 이 책을 손에 들었다가 그만 푹 빠지고 말았다. 재미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에 대한 편견에 도전한 것이 나로선 동병상련이었다. 나는 『한국 현대사 산책』을 쓰면서 1990년대를 '문화의 시대'로 규정해 대중문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랬더니 어느 독자가 '대중문화 나부랭이'나 늘어놓았다고 호통을 치는 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민중' 운운하면서 다시 정치 중심으로 쓰라고 했다. 정작 1990년대의 민중은 노래방을 몹시 사랑했는데, 그 독자가 생각하는 민중은 누굴까?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는 말을 곧잘 한다. 그렇다면 '아래의 삶'부터 관심을 가져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