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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 복음서

장 이브 블루 지음 | 루비박스
장 이브 블루 지음 / 박미영 옮김

루비박스 / 2006년 5월 / 219쪽 / 11,800원

위대한 미스터리를 찾아서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가 처음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1896년이다. 이 복음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에게 예수의 존재와 그의 부활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보게 한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훨씬 뛰어넘는 저 높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예수의 말씀은 하나의 환상이자 우리 삶을 이끄는 원칙이다. 2천 년 전에 그가 말하고 행한 것들은 빛나는 광채가 되어 세상을 올바르게 변화시켜왔고, 지금도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희망의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강퍅한 현대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분의 영적인 가르침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님이자 귀머거리가 되어버렸다.

영적인 가르침이란 저 위에서 들려오는 주문이자 요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안'이자 '위'이기도 한 그곳을 민감하게 감지해낼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본래 목적이 있다. 더불어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은 인간 존재 안에 부활이 임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 보면 내면은 저절로 자아(자신 안의 하나님)에 귀 기울이고 겸허하게 복종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인 내면의 인도자와 존재의 진정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부단한 구도와 정진을 통해 외따로 놀고 있는 자아와 영혼이 서로 물 흐르듯 소통할 수 있도록 교류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혀야 한다. 강한 집중력과 누스(nous)로 일컬어지는 지성을 동시에 계발함으로써 이 둘을 짝 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천상의 세계로 미화된, 내면의식을 이어주는 중간지대인 그것은 우리의 고상한 기질과 질 낮은 기질을 올바른 방향으로 중재해준다. 그 결과 우리는 깊이 있고 내밀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굶주리고 혼돈으로 뒤엉킨 자아에 대한 사랑이자, 정신적 가난을 겪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이다. 예수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할 때의 그 사랑이며, 내 자신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그런 사랑이다.



예수의 모든 영적인 가르침은 표피적이면서 동시에 깊은 무의식의 한가운데서 나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이성이란 것이 절대 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가운데 마음이 문을 열어 그 조용한 귀향을 알아채도록 해주는 것이다. 속으로는 내내 알고 있었지만 지쳐서 찾겠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 순간 우리는 영적인 가르침의 귀향을 경험하게 된다. 이보다 더 반갑고 위대한 미스터리가 또 있을까! 이제 우리는 저 위에서, 그리고 침묵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하는 복음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신약 4복음서이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부정한, 흔히 영지주의 복음서로 알려진 외경에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외경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일부 살아남아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외경 문서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발견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사막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문서였다. 당시 커다란 단지 안에 들어 있던 두루마리 문서들은 원래 발견자인 유목민의 손을 떠나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고, 그중 문서 하나가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의 손에 들어갔다. 단지에서 나온 문서들을 통칭하여 영지주의 복음서라고 하는데,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나그함마디에서 발굴된 단지 안에 없었으며 그보다 이른 1896년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아주 먼 옛날에 살았던 베일에 싸인 인물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접근방법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신약의 4복음서와 영지주의 복음서에서 마리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눈과 경험을 거쳐 완성된 작품을 통해 그녀의 생애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성서 속의 마리아를 자신만의 직관(물론 문화적 관점을 통해 걸러내긴 하지만)을 통해 새롭게 해석해냈다. 우리는 전 세계 박물관을 문턱이 닳도록 찾아다니면서 예술작품을 찬찬히 살펴보고 몇 가지 비슷한 상징들을 발견하고는 탄성을 질렀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붉은 머리카락이나 금발로 묘사되어 있고, 향유 단지와 해골을 든 채로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작품에 담긴 반복되는 상징과 이미지들을 가능한 한 많이 채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탐색 작업을 통해 막달라 마리아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그녀와 예수의 특별한 관계로 상징되는 심오한 영적 진실에 한 발 한 발 다가감에 따라 우리의 연구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신약의 4복음서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여러 번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는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네 복음서에 직접 실명이 거론된 유일한 여성이며, 십자가 형벌 현장에서 가장 먼저 이름이 언급된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더불어 예수가 일곱 마귀에게서 자유롭게 해방시켜줌으로써 막달라 마리아를 고쳤다는 사실과,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하는 모습을 그녀가 가장 먼저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사도 중의 사도로 불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성서에는 수많은 치유 장면이 등장하지만,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에게서는 끔찍하게도 무려 일곱 마귀가 풀려 나온다. 일곱이란 숫자는 그녀의 일곱 가지 죄의 근원이다. 하지만 일곱이라는 숫자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고래로 영의 과학에서는 인간의 육체 안에 에너지가 모이는 일곱 군데의 혈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에너지의 수레바퀴'를 산스크리트어로 차크라라고 부른다. 히브리 경전에서는 영적인 세계가 지닌 일곱 겹의 구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7이란 숫자가 3백여 번 등장하는데, 주로 시간이나 창조를 상징한다. 지혜의 일곱 기둥(잠언 9장)이나 요단강에서의 일곱 번의 세정 의식(열왕기하 5장), 야훼의 계약의 궤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일곱 바퀴 돌기(여호수아 6장), 돌에 새겨진 신의 일곱 개의 눈(스가랴 3,4장) 그리고 다니엘서에서의 수많은 언급처럼 대부분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유대교의 신비주의적 교파인 카발라교에서는 이 모든 것을, 시간을 포함해서 인간과 신의 에너지에 대한 내밀한 비밀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가 일곱 마귀에게 시달린, 일곱 죄악에 물든 마리아를 신뢰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더 이상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악(교만, 호색, 시기, 분노, 탐욕, 폭식, 나태)을 품고 있지 않다. 그것들이 떠난 자리에는 그에 상응하는 덕목들(교만은 겸손으로, 호색은 형제애로, 시기는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분노는 통제된 의지로, 탐욕은 가난 또는 의존으로, 폭식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의 부동의 자세와 침묵으로, 나태는 삶에 대한 사랑으로)이 자리하게 된다. 마리아는 이것 외에 중요한 한 가지 덕목을 더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일곱 악덕을 깨닫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다. 정화가 이런 것이라면 그녀는 신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정화된 성인인 셈이다. 편견과 해묵은 원한, 허상, 유전적 질환들, 그리고 온갖 형태의 욕망이 완전무결하게 씻겨나간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마침내 그녀는 모든 것 안에서 활동하는 영적인 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예수의 가르침이 지닌 탁월한 아름다움은 물론 인간이 지닌 난잡함까지 꿰뚫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대적 용어로 풀이하면 그녀의 가슴과 에너지의 중심이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십자가 형벌이 있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오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녀는 홀로 무덤가에 서서 부활하는 예수를 목격한다. "나를 붙들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예수는 지상의 육신과 하나님에게 들어올려진 육신 사이에 있는 부활한 육신 상태였다. 즉 '순수하게 정화된 이상적 형상'을 뜻하는 것이다. 말끔히 정화된 그녀는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는 그녀를 제자로 삼아 자신의 가르침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도록 명한다. 십자가 형벌 현장에 와 있지 않은 사람들, 부활을 예고했을 때 그 말을 믿지 않았던 불신자들이 그 대상이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한마디로 그녀가 예수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담고 있는 자료이다.



성서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상세히 그려내고 있다. 그의 곁에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다. 이들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은 널리 알려진다. (요한복음 19:25). 성모 마리아는 사도들의 중심축이 되어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맞이한다. 그로 인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도들은 밖으로 나가 널리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개종하여 세례를 베푼다. 여기서 사도 계승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것은 베드로를 시작으로 장로들을 통해 기독교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계승 라인의 중심에서 인간의 조상 역할을 하는 성모 마리아는 모든 내밀한 욕망이 투여된 신비스러운 존재가 된다.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영적인 계승의 전통은 이제 교회 외부의 일에 집중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깨달음을 전해주고자 사람들을 개종하는 데 전념한다. 한편 두 번째 인물인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에 가서 말년을 보내다가 그곳의 종교지도자가 된다. 이후 밧모 섬으로 추방된 뒤에는 강력한 영적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집필한다. 세례 요한도 사도 요한의 영적인 가르침과 거기서 파생된 신비주의 테두리 안에 둘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오순절 강림 현장에 없었다. 그녀에 대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개종했다고 신을 직접 경험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녀가 받은 지혜는 설교로서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막달라 마리아는 그보다는 내면세계에 집중하여 허식이나 겉치레가 아니라 직접적인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찾았다. 그녀가 추구한 것은 깨달음 안에서 신성한 결혼(솔로몬 왕의 <아가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을 하는 것이다. 그녀가 추구한 깨달음은 내면의 준비과정과 자아성찰, 그리고 변화를 강조한다. 감각의 세계를 상징하는 그녀는 감각을 지니고 있되 그 안에서 보석 같은 신성을 발견한다.



십자가 형벌 현장과 부활의 무덤가에 나타난 것은 예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넘어 그녀가 죽음을 친숙하고 편안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러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해골을 든 마리아의 그림은 그녀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골고다 언덕은 '해골산'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혹시 영적인 예술가들이 그림을 통해 마리아가 죽음의 문턱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향유는 바로 인간이 죽음에 이르러 그 문턱을 편안히 넘도록 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던가. 예수는 향유를 붓는 일을 기꺼이 수락한다. 다른 사도들에게는 마리아가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말은 마리아가 여느 사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마리아의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왜 기독교인들은 그녀를 회개한 창녀로만 알고 있는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면 그녀가 오늘날 우리에게 상징하는 것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에 곁을 지켜준 사람,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믿어준 사람인 그녀는 진정한 '내면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활짝 열린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적 죽음과 신 사이의 영적인 연결고리를 통해 명확하게 뭔가를 볼 수 있는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들어가며



막달라 마리아는 신약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도 아니요, 색을 파는 창녀도 아니다. 그녀는 예수의 가까운 친구이자 불가해한 그의 가르침을 전파한 사도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를 단숨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미묘한 가르침과 그 안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는 인류학(인간 본성과 우주 속에서의 존재의 위치를 깨닫는 우주 철학)과 형이상학 때문이다. 이것은 서구 철학에서 낯익은 이원론적인 인류학도, 존재에 대한 인류학도 아니다. 인간을 다층적으로 풀이한 인류학 문헌이자, 형이상학적인 상상으로 가득 찬 작품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자유로운 지성들은 이제 막 그 열쇠를 발견하고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는 어떤 관계인가?

예수는 모든 인간,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신적인 사랑을 베풀도록 요구한다. 그에 비해 인간적인 사랑에는 좋고 싫음이 끼어든다. 특별한 사람과는 좀 더 친밀감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예수가 친교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적 성욕을 지닌 인간이었나 하는 것이다. 옛 격언에 이르길 "살려지지 않는 것은 속죄받지 못한다"라고 했다. 메시아인 그리스도로 떠받들어지는 예수가 성적 욕망을 살리지 않고 그대로 죽였다면 그의 성욕은 속죄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완전한 의미에서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이는 결국 살아 있는 삶보다는 죽음 쪽으로 기울어진 교리를 만들어내게 된다. 죄로 덧칠해진 성적 욕망은 우리를 병들어 말라죽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예수가 여성과 친교할 수 있는 사람임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친교란 비단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감정적이며 영적인 것을 두루 포함한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과 사랑의 물결이 존재의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가 완전한 구원과 해방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일깨움으로써 영적이고 신적인 본성에 깃든 성령(프뉴마)를 훼손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가 예루살렘 수난 앞에서 흘린 눈물과 죽음과 대면했을 때 보인 공포와 번민과 회의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감성을 통해 비로소 신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수의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신약과 마찬가지로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우리를 갈가리 찢어놓고 '사악'하게 만드는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을 과감히 떨쳐낼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육체나 물질을 부정하기보다 스스로 신성하게 변모하는 실체들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에 겸허하게 굴복하는 것으로 비로소 가능해진다. 창의적인 상상을 통해 미약한 열정과 지성이 갇혀 있는 부분들 안에 사랑을 옮겨다놓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막달라 마리아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성스러운 지혜에 다가선 특별한 여자다. 그녀가 살던 당시는 여자는 토라를 공부하거나 심지어 읽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사회였다. 그런데 예수의 연인이란 후광도 부족하여 이젠 감히 스승의 가르침까지 훔치려들다니. 더욱이 편견이라는 좁은 우물에 갇혀 사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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