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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250년의 역사

아르네 다니엘스, 슈테판 슈미츠 지음 | 미래의창
밭에서 공장으로(1760~1830)

하인리히 크리스티안 마이어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만든 산책용 지팡이를 내다 팔았다. 함부르크 시민들은 그를 '지팡이 마이어'라고 불렀다. 어린 하인리히가 지팡이를 몇 개 판다고 해서 그의 가족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때는 1805년이었다. 그보다 50년 전이었더라면 하인리히는 그의 아버지처럼 영세 수공업자가 되어 지팡이를 만들고, 그의 자식들을 거리로 내보내 지팡이를 팔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아버지 세대들과 전혀 딴판으로 인생이 흘러갈 수 있는 시대에 성장했다. 고향인 함부르크에서 죽을 때까지 '지팡이 마이어'로 불렸던 하인리히는 함부르크 최초의 대기업가였고 함부르크 최초의 자본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1817년 'H.C. 마이어 jr.'라는 회사를 창립했고, 48세가 되었을 때는 300명이 넘는 노동자를 거느리고, 산책용 지팡이 이외에 여러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그는 이익을 사업 확장에 투자했고, 채권업자들과 투자자들에게 이자를 지불하거나 이익에 대한 지분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거액을 조달했다. 1848년 '지팡이 마이어'가 사망하면서 유산으로 남긴 돈은 무려 100만 마르크나 되었다. 그 돈을 그가 혼자 힘으로 모은 것은 아니다. 마이어 공장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거의 90시간을 뼈 빠지게 일했고, '부지런하고 순종적'이어야 했다. 19세기 초반에 태어난 많은 사람들의 일생이 이와 비슷했다. 영세 수공업자들, 부자유 농민의 자식들이, 또 일부 귀족과 관료들이 새 기술과 사상을 배우고, 자유를 이용해 경제 제국을 건설하기도 하고 금방 실패를 겪기도 했다.



산업화는 1760년 무렵 영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영국에는 영업의 자유가 있었고 노동시장의 규제가 폐지되었으며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고 큰 내수시장이 있는 데다 식민지들 덕분에 저렴한 원료와 수익성 있는 수출시장들이 확보되어 있었다. 이 시대에는 기계가 수작업을 몰아내고 증기력이 인력을 대신하고 새로운 제조기법들이 예상하지도 못했던 능률을 창출하고 철도가 먼 거리도 신속하게 사람과 상품을 수송하여 아주 새로운 시장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경제방식과 사고의 혁명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돈의 소유가 더 이상 경제활동의 결과만이 아니라 전제조건이기도 했다. 당시 몰락하던 봉건체제의 영주들은 자기 영토의 생산물을 팔아 생긴 돈으로 새 상품을 샀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런 단순한 경제활동의 토대는 그들의 땅이었는데, 땅은 무한정 늘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장이 거의 불가능했고, 이것이 산업혁명 이전 수백 년 동안 상대적 침체가 계속된 이유였다. 반대로 신흥 자본가들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상품을 생산하고 그것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금을 투자했다. 그러니까 돈을 상품으로 바꾸고 그 상품을 더 많은 돈으로 바꾼 것이다. 1850년과 1960년 사이에 서유럽 경제는 과거 600년 동안보다 평균 40~50배 빨리 성장했다. 신흥 자본가 계급은 옛 엘리트들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차차 몰아냈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은 신분질서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덕분에 인간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고, 프랑스 혁명(1789~1799)으로 유럽 여러 지역에서 구질서가 흔들리게 되었다. 독일에서도 19세기 초반 봉건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농민들이 점차 해방되었으며 영업의 자유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영업세를 납부하면 누구나 거의 모든 영업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도덕철학가이자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1776년 발표된 그의 대표작 『국부론』에서 개인의 이기주의는 경제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선언하였다. 개인은 자신의 자본을 되도록 이윤이 나는 쪽으로 투자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때 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익이고, 개인의 그런 행동은 '필연적으로 국가에도 최대의 이익을 가져오는' 곳에 자본을 투입하게 된다.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 따르면 필요와 수요가 있는 곳에서 투자자는 알맞은 재화나 원하는 용역을 공급함으로써 돈을 벌 수 있고, 오로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어떤 투자가 가치 있고 어떤 제품이 어떤 가격일 때 구매자가 생기고 어떤 회사가 살아남는지를 결정한다. 생산자와 고객은 서로를 발견하게 되고 양쪽 다 상대의 이기심으로 득을 보며, 전체 국민경제가 그렇게 성사되는 거래로 이득을 본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이기주의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부수 현상이 아닌 속도조절 바퀴이며, 이는 새로운 경제활동에 있어서 돈 다음으로 중요한 두 번째 전제조건이다.



초기 산업자본주의의 세 번째 요소는 바로 사람이었다. 새 기계를 작동할 사람들, 급증하는 에너지와 철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광산에서 석탄과 광석을 채굴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독일만 해도 180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인구가 2,300만 명에서 3,600만 명으로 증가했고, 1890년에 들어서는 5천만 명을 넘었다. 농업의 효율이 극대화되면서 식료품 공급이 개선되고, 의학이 진보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인구가 그렇게 급성장한 것이었다. 동시에 봉건시대의 농노 신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영주의 보호와 재산으로부터도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유일한 재산인 노동력을 팔아야만 했고, 그 결과 새로운 예속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과거의 농노들과 수공업자들이 주로 새로운 노동자 계급을 형성했고, 수가 많았던 탓에 초기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대단히 헐값이었다. 새로운 경제형태의 부상은 많은 낙오자를 양산했다. 기계들의 발명으로 도시에서는 일자리를 잃은 수공업자들이 자꾸만 늘어갔다. 인구 증가는 물자 공급의 개선을 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재차 경제력의 증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경제력의 증대는 분업으로 달성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효율, 크기의 필연성, 성장으로 구성되는 자본주의적 순환이 완성된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사람들은 새로운 구상에 대해 호된 대가를 치렀다. 분업으로 인해 단순한 작업단계로 철저히 전문화되고, 더불어 노동시간이 매우 길어지고 임금이 형편없이 낮아지면서 사람들은 최대로 아둔하고 단순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빨리 변했다. 일출과 일몰에 따라 생활했던 그들은 기계의 명령에 종속되었고, 공장주가 원하는 만큼 일을 해야 했다. 도시들은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옛 성벽들이 헐리고 노동자들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유형의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도와 운하, 늘어나는 상선대(商船隊)들이 공간을 뛰어넘었고, 애덤 스미스나 영국의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이론가들은 국제적인 경제 논리를 펼쳤고, 외국에서 더 저렴하게 생산될 수 있는 상품은 비교우위에 따라 수입하는 편이 국민 경제에 합리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땅을 경작해 감자를 재배하고 이를 가까운 소도시에 내다 팔던 사람들은, 이제 임금을 받는 직조공으로 다른 나라의 근대적 공장들과 가차 없는 직접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대단한 경제적 원동력을 가진 자본주의는 길게 봤을 때는 애덤 스미스 같은 자본주의 이론가들의 예견대로 실제로 모든 사람을 더 풍요롭게 했다. 그러나 당시 신흥 자본주의는 가장 격렬한 투쟁을 아직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진보의 고통(1830~1918)

19세기 중반,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유럽 대륙을 점령했고, 그때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경제 발전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그러하듯이 단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가난을 대가로 치른 발전이었다. 자본주의 세계는 애덤 스미스와 다른 학자들이 서술한 대로 굴러갔다. 길드 가입 의무와 봉건사회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은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활력을 발생시켰지만, 갑작스런 발전의 부수적 피해는 막대했다. 초기 이론가들이 무시한 것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수세기 동안 똑같은 삶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세상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급진적이고 가차 없으며 멈출 줄 몰랐다. 당시 이런 변화를 경고한 사람들의 말은 지금 들으면 바보 같다. 가령 1835년 독일에서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었을 때 바이에른의 의사들은 소견서에서 "일종의 증기기관을 이용해 지역을 이동하는 것은 공공의 건강을 위해 금지되어야 한다"라고 권유했다. '정신적 불안'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선로 양편에 '최소한 6피트 높이'의 울타리를 꼭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가 요제프 폰 아이펜도르프는 기차를 타고서 "나의 유일한 목적이기도 했던 여행이라는 인생의 벌에 있어서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 관건이라는 듯이 맹렬하게 달려왔다"고 여유의 상실을 한탄했다.



그렇게 효율성이 특권계층의 백일몽과 가난한 시골 주민들의 낡은 생활방식을 몰아냈다. 기계가 삶의 박자를 결정했으며, 그 누구도 기계를 멈출 수 없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증기기관이 공장들을 점령했고, 기계화는 점점 빨리 진행되었다. 처음으로 인간은 자연에 적응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바꾸었다. 증기력을 이용하여 석탄 갱에서 물을 빼낸 덕분에 양질의 연료가 점점 더 많이 공장으로 운송되었다. 섬유업계는 가내수공업에서 대규모 산업으로 탈바꿈했고, 용광로는 점점 더 많은 철을 생산해냈다. 또한 최신의 제초기들이 경작지에 등장했고, 윤전기를 이용한 인쇄는 신문과 출판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기계뿐 아니라 경제학자들의 많은 요구를 충족시킨 정책도 이러한 변화에 한몫했다. 1834년 성립된 관세동맹으로 무역이 쉬워지면서 프로이센의 주도로 대부분의 독일 영방(領邦)국가들은 독일 내 국경에서 관세를 폐지하고 외국과의 국경에서는 통일된 규정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1860~1870년에만 유럽에서 120개 무역조약이 체결되었다. 금융업 또한 융성했는데, 전통적 금융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 이외의 지역에서 용감한 개인 은행가들이 대부업에 뛰어들었다. 자의식 있는 시민계급이 탄생하였다. 이제는 황제, 왕, 봉건영주들이 아니라 유산시민계급과 노동자 대중의 사회적 대결의 중심에 서 있었다.



신세대 경제학자들은 물건은 객관적 가치를 갖는다는 고전주의적 사고에 작별을 고했다. 자본주의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모든 것이 구매자에게 주는 효용만큼만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료가 얼마나 우수한지 제품 생산에 얼마나 많은 노동시간이 필요한지는 아무 상관없다. 소비자는 가격이 맨 마지막으로 획득한 단위의 효용에 일치하는 양만큼 구매한다." 이것이 시장 균형 이론의 기초였다. 이 이론은 프랑스 레옹 왈라스 같은 경제학자들을 신고전학파 이론의 핵심으로 이끌었다. 그 핵심은 시장에서는 경쟁이 있을 때 공급과 수요가 스스로 균형을 이룬다는 명제이다. 그런데 타인의 효용을 줄이지 않고는 더 이상 아무도 나아질 수 없는 지점에서 그렇게 된다. 그런다고 세상이 이론대로 공정하게 흘러가지는 않았고, 19세기의 경제학자들은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한편으로 자유 경쟁이 성장을 촉진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사회적 부를 증진시킨다는 인식과 다른 한편으로 이런 부가 소수에게만 집중된다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신고전학파와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사회주의는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갔다. 칼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역사는 계급투쟁의 연속이었다. 현재 비참한 사람들에게는 계급이 없는 사회라는 낙원이 손짓하고 있었고 착취자들은 몰락할 운명이었다. 착취자들의 상품을 구매할 소비자들이 차차 줄어들어 결국 수익률은 감소하고, 전체 경제가 위기에 위기를 거듭하다가 혁명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게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자본주의가 이대로 계속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언제부터인가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서서히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노동자들의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중반만 해도 하루 12~16시간에 달했던 일일 노동시간이 1870년대 이후 점차 줄어들었다. 19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대도시가 근대적 급수체계를 갖추었고, 열악했던 위생상태가 현저히 개선되었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불안감에서 제정된 사회보험은 산업노동자들에게 노후, 질병에 대한 약간의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사회 분야에서의 진보는 무척 느렸지만 1883년 디리히 사(社)는 랑엔비라우 마을에 최초의 공장 사택을 지었고, 그로부터 15년 뒤 디리히 공장 부지에는 직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까지 세워져서 200명의 노동자 자녀들을 돌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급부는 주로 자선행위로만 제공되었다.



사회민주당이 독일제국의 제1당이 되고 수백만 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하더라도 공장주들은 직원들에 대해 거의 무제한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 노동자들이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겨우 깨닫게 되었다. 19세기 경제학자들이 세상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려 했던 수단인 신고전학파의 모델은 경기의 부침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경제학의 다음 혁명이 벌써 윤곽을 드러냈다. 그 혁명은 알프레드 마셜의 제자인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 의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어떤 봉기와 혁명보다 심한 타격을 자본주의에 안겨주고 유럽에 대량 빈곤을 다시 가져올 세계 경제의 가장 가혹한 공황이 지나가고 난 뒤의 일이었다.

불황이라는 지옥으로의 여행(1918~1945)

저녁 7시 8분이 되자 그 빌어먹을 것이 마침내 침묵하였다. 뉴욕 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의 전신 수신기는 하루 종일 폭락하는 주가, 날아가 버린 재산, 파괴된 꿈을 알리는 흉보들이 적힌 좁다랗고 긴 종이를 뿜어냈다. 미국 전역에서 주식 중매 사무실 앞에 사람들이 몰려와 소동을 피웠다. 이날 하루에만 12,894,650주의 주식이 거래되었다. 당황스럽고 절망적인 불안감에서 매도가 줄을 이었다. 시세는 계속 빠른 속도로 곤두박질쳤고, 더 많은 주식이 매물로 나왔다. 그러나 사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식은 무제한으로 매도되었다. 투자자들은 실제로 소유도 해 본 적이 없었던 거액을 잃었다. 왜냐하면 증권거래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투자액의 겨우 10%만 자기자본으로 조달하고, 나머지 90%는 최고 20%의 금리로 빌려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돈을 투자신탁에 투자했고, 투자신탁은 그것대로 90%의 자금을 신용대부로 조달했다. 그래서 1달러만 가지고 있으면 100달러를 움직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재난은 계속해서 주식시장들을 덮쳤다. 다우존스 공업평균지수는 1932년 7월 8일에야 최저점에 도달했다. 그 후 옛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 무려 25년이 걸렸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은 세계 경제 역사상 최대 위기의 시작이었다. 그 몇 년은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의 집단적 기억 속에 '대공황'으로 불릴 만큼 끔찍했다. 수많은 중산층 가족들이 집과 꿈을 잃었다. 아주 대단한 사람들도 대공황을 피해 갈 수 없었는데 이를테면 제너럴 모터스의 창립자이자 재산이 수십 억 달러였던 자동차업계의 거물 윌리엄 C. 듀런트는 미시건 주 플린트에서 작은 볼링장 사장으로 생을 마감했다.



독일은 대공황으로 어떤 나라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다. 1929년에 이미 경기침체가 시작되었고, 미국 증시 붕괴의 불똥은 단 하루 만에 대서양을 건너 독일까지 튀었다(그래서 독일에서는 '검은 금요일'로 악명을 떨쳤다). 더군다나 증시와 더불어 미국의 신용대부제도도 무너졌기 때문에 미국 은행들은 서둘러 막대한 해외차관을 중지했고, 대출한 돈으로 자금을 댔던 독일 경제에 엄청난 일격을 가했다. 그렇게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근대 산업자본주의 역사상 최대의 침체였다. 이 시대의 이론가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18, 19세기에 시장에 의해 조정되는 자본주의 모델을 창안했다. 이 모델들에서는 조화가 이루어지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조만간 모든 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과잉생산과 실업은 절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에는 고전학파가 말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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