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톰 라이트 지음 | 살림
제1부 예수 - 과거와 현재
아름다운 꿈의 끝
설령 예루살렘의 거리들을 실제로 걸어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곳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기는 어렵지 않다. 내가 맨 처음 예루살렘에 왔을 때, 나는 이 도시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전 세계의 마법과 광기가, 온 인류의 기쁨과 고통이 모두 이 도시 안에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가 아는 모든 고통이, 내 안에 있던 그리고 온 세상 가운데 존재하던 모든 고통이 정확히 바로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1세기에 발생했던 충격적인 사건들도, 20세기에 일어난 생생한 고통들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했던 크고 작은, 얽히고설킨 그 모든 사건들도 모두 이곳으로 빨려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 세상의 영광과 어리석음이 집중되어 있는 장소였다. 예루살렘은 인류의 기쁨과 고통이, 저항할 수 없이 강력한 힘과 확고한 반대 세력이 대치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불과 몇 마일 떨어진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예수의 이야기도 결국 이곳 예루살렘에서 끝이 났다. 예루살렘은 예수가 입성하여, 잔치를 열고, 죽어간 곳이다.
서구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혼란을 느끼며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2천 년 전에 전혀 다른 문화와 전혀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한 인간의 죽음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인류 구원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특정 장소, 특정 시점에 발생했다니, 인류의 보편적인 진리가 될 만한 일이라면 적어도 순식간에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을 대규모 사건이 발생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아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은 매우 비유대적이다. 혹은 굳이 표현하자면, 매우 비예루살렘적인 질문이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예배하는 신인 하나님이 온 땅에 유일한 참 신이라고 여겨왔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확장되어 전 우주적인 중요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당신도 예루살렘 거리에 서 보면 이런 그들의 생각이 그리 어리석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곳은 아브라함이 하마터면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칠 뻔했던 곳이다. 마지막 순간 아브라함은 덤불에 뿔이 걸려 꼼짝 못하고 있던 양을 아들 대신 희생 제물로 삼는다. 이 이야기는 아직도 유대 전승으로 대물림되어 내려오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난 민족인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것임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바로 이 도시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다윗 왕이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바로 이 도시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을 건축했던 곳이다. 바로 이 도시가 성경의 시편이 다음과 같이 노래했던 곳이다. "우뚝 솟은 아름다운 봉우리, 온 누리의 기쁨이로구나." 바로 이 도시가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파괴당했던 곳이다. 바로 이 도시가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당했던 곳이다. 바로 이 도시가 큰 슬픔과 새로운 희망이 서로 이웃하며 3천 년 동안 공존해 왔던 곳이다. 그리고 성경 속의 예언자들에 따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전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직접 계시하실 장소도 바로 이 도시다.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원이 매우 빠른 시일 내에 일어나리라 믿었다. 사실 이곳에 서 보면, 과거의 그 어떤 사건도 그렇게 오래된 역사 속의 이야기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성벽의 돌들은 여전히 당시 모습 그대로이다. 바로 이곳 예루살렘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전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이다. 이 모든 형형색색의 렌즈를 통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장면들을 살펴보라. 불과 며칠 전에도 젊은 시위자가 이스라엘군에게 진압을 당했던 장면처럼, 이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의 사건이다. 저항 세력들은 강한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들이 조국을 해방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나, 오래지 않아 자신들 앞에 반대 세력이 버티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점령 세력들은 저항세력들을 어김없이 이런 식으로 다루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실패한 메시아들에게 일어났던 일이며, 바로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가 처형당했던 지점인 성묘 교회 위에 서자, 나는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의 중심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나사렛의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이는 아마도 세계 역사상 가장 분명한 사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 후 불과 50년 내에 말 그대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예수의 십자가 좌우편에서 처형당했다는 사실도 안다. 바로 그날도 두 명이 예수의 십자가 바로 옆에서 처형당했었다. 그렇다면 예수를 특별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인가? 왜 세상 사람들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당시의 화면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의 곁을 지켰던 잡다한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예수를 따르는 이유를 물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과연 어떻게 대답했을까? 그들은 아마도 예수가 특별한 이유는 지난 2-3년간 그가 한 말이나 행동들 때문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우리의 하나님이자 곧 온 세상의 하나님께서 바로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모든 고통 가운데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이곳 예루살렘에 온 것은 예수께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외세의 압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가 늘 원했던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유를 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신성한 도시로 다시 돌아오실 것을 믿는다. 예수는 왕이 되실 것이며, 우리는 그의 신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이스라엘과 온 세계를 마땅한 모습으로 바꾸실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다시피 예수가 처형됨으로써 이 모든 꿈이 담겨 있던 병의 마개가 닫혀버렸다. 기억하는가? 예수는 십자가에서 종말을 맞이한 실패한 메시아였다. 바로 이 장소만이 홀로 그 아름다운 꿈의 종말을 목격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예수를 특별하게 여겼던 것일까? 그에 대해 그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난 일 때문이라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의 부활은 각본에는 없던 일이었다. 우리는 점차 금요일 오후에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예루살렘에 얽힌 다른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한 곳으로 집약하는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언들이 성취되는 방법이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이 늘 상징하던 바였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때와 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그 제물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었을 뿐이다. 이곳이 바로 온 세상과 온 민족, 과거와 그 이후의 모든 역사 속의 고통과 죄악, 수치심, 죄책감이 집중되었던 장소였다. 그리고 단번에 그 모든 것들이 해소되었던 장소였다. 이곳이야말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고 치유하기 위해 역사하셨던 장소였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바로 이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주장을 보다 자세히 조사해 보기 위해서는 멀찍이 서서 내부를 들여다보는 정도로는 곤란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문제에 있어서는 중립성이나 객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나비를 핀에 꽂아 벽에 고정시키듯 역사를 고정시킬 수 있다면, 역사를 보다 조직적으로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그 나비가 다시 날아오르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역사의 중심으로 다가가고 싶다면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직접 생활하며 느껴 보아야 한다. 이 책은 당신을 이와 같은 작업 속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우리는 십자가 처형 장면까지 스토리를 다소 큰 그림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 후에는 십자가형 이후에 발생했던 다소 이상한 사건들도 살펴볼 것이다. 예수를 따르다 크게 낙심했던 추종자들이 과거에,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의 십자가 처형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였다고 믿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그들은 이 사건이 단순히 잔인하고 끔찍한 살인 사건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의 단호한 사랑과 구원의 행위였다고 믿는 것일까? 그리고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이야기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역사의 최저점
사해 바로 북쪽에 위치한 요르단 계곡은 해발 2백 피트 아래에 위치해 있는 지상의 최저점이다. 만약 이보다 더 낮은 지역으로 내려가고 싶다면 아마 땅을 파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당신이 1세기에 살던 유대인이라면, 사막이란 무언가 새로운 일이 발생하기를 기대할 만한 장소였다. 특별히 사막이란 소망이 다시 한 번 잉태되기를 기대할 만한 장소이다. 그런데 왜 하필 사막인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내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출애굽'이라고 알려진 대탈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로질러 이들을 데리고 나오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의 언저리에 닿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을 떠돌아야 했다. 이곳까지 이들을 인도했던 모세는 요르단 계속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그의 뒤를 이었다. 여호수아는 유대 민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모든 사건들이 벌어졌던 요르단 광야는 새로운 시작과 출발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질투에 찬 연인으로 묘사했다.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이 그를 떠나 다른 누군가와 함께 도망했다. 이로 인해 모세를 통해 맺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결혼 서약은 깨어졌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광야)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호 2:14).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때에도 선지자들은 광야에 길이 예비될 것이라 말했다. 이스라엘에게는 자신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길이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길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가 되었던 장소가 바로 광야였다.
예수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큰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 로마인들과 이들과 야합한 국내 정치인들의 통제 아래에서 점점 더 깊은 죄 가운데로 빠져들고 있었다. 선지자나 왕을 꿈꾸던 자들이 주축이 되어 수많은 봉기가 일어났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들이 추구했던 것은 정치 지도부의 변혁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꿈은 훨씬 원대했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며, 평화와 공의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소망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지자나 메시아를 자처한 자들의 삶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요르단 계곡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는 유명한 쿰란의 정착촌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에세네파'라 불리던 집단이 거주했던 장소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높은 산 위에서 역사하셔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배교한 유대인들을 벌하시며, 공의와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은신처로 거리를 좁히며 압박해 들어오자, 이들은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던 자료들을 근처 동굴에 숨겼다. 우리는 이 자료를 '사해 두루마리'라 부른다.
한편, 그 중에는 요한이라 불리던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든 또 다른 그룹이 있었다. 요한은 다른 지도자들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 그는 사람들을 요단강으로 인도해 물속에 잠기게 했다. 사람들은 요한이 한 일을 '세례(침례)'라 칭했다. 요한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요단강을 통과한 후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때의 일을 상징적으로 재연하고 있었다. 이것은 출애굽의 상징으로 유대 민족이 그토록 원하던 구원과 구출, 해방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나님도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악은 패배할 것이고 참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지만, 요한은 자신의 어조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본다면, 바로 지금이 역사의 최저점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바로 지금, 이곳에서 행동을 취하셔야 한다.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최후의 출애굽을 통해 구원될 백성이 되고 싶다는 상징으로 강물 속에 뛰어들었다. 이때, 예수는 요한의 운동에 동참하여 자신의 때를 기다렸다. 요한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듯이 예수를 지목하여 이제부터 이 운동을 이끌어 나갈 사람이라 했다. 물 보듯 빤한 일이었던 요한의 체포가 현실화되자, 예수는 깊게 숨을 들이쉰 후에 마침내 자신의 독립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예수가 말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준비의 날들은 끝났다. 이제 마침내 우리 하나님께서 왕이 되실 때가 왔다. 예수는 갈릴리 마을을 누비며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고 선포했다. 이제 이스라엘의 고난은 끝났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을 구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온 세상의 최저점에서, 마침내 악은 패할 것이며 정의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를 따랐다. 예수의 말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듣고자 했던 정의와 희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전했던 이 메시지의 본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이야기에 대해 수정을 가하고 있었다. 공의와 평화는,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방식인 로마 정권에 대항하는 군사 혁명을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공의와 평화는 단순히 하나님께 받은 영감을 기록하고 그 내용을 신봉한다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옛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도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한다면 이는 훨씬 더 혁명적인 사건이 될 것임을 당시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세상의 모든 권력 구조가 전복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예상도 완전히 뒤엎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도래한단 말인가? 예수는 결국 자신이 홀로 인간 경험의 최저점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어떤 방법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악을 멸하실 것이고 그러면 정의와 평화가 다시 잉태될 것이며, 마침내 온 세계가 본향으로 돌아올 것이다.
양날을 가진 이야기
오늘날의 문화에서 이야기는 그저 아이들에게나 걸맞는 것으로 치부되는 반면, 예화도 거의 없고 추상적인 사상이 담겨 있는 글이어야 비로소 그 실제적인 가치를 인정받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의 이야기 또한 '천국을 비유한 그저 그런 이야기'일 뿐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야기에는 보다 강력한 영향력이 있다. 이야기는 세계를 창조한다.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전해 보라. 세상이 바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의도한 바였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야기 중 '탕자의 귀향' 비유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또 이 이야기에 반영된 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이야기는 보통 탕자와도 같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이 해석도 옳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1세기에 살던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