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1. 나를 바꾸는 프레임
세실과 모리스가 예배를 드리러 가는 중이었다. "모리스,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 "잘 모르겠는데, 랍비께 여쭤보는 게 어떻겠나?" 세실이 랍비에게 물었다. "선생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정색을 하면서) 그건 절대 안 되네. 기도는 신과의 엄숙한 대화인데 그럴 순 없지." 이번에는 모리스가 물었다. "선생님, 담배를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형제여,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미국에서 널리 회자되는 유머이다. 이처럼 동일한 행동도 어떻게 프레임 하느냐 - 담배를 피우면서 기도하는 행동을 프레임 하느냐, 기도하면서 담배 피우는 행동으로 프레임 하느냐 - 에 따라 우리가 삶에서 얻어내는 결과물이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심지어는 비만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프레임은 놀라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프레임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아저씨가 있다. 이른 새벽부터 쓰레기통을 치우고 거리를 청소하는 일을 평생 해 온 사람이다. 존경받는 직업도 아니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닌데 신기한 것은 표정이 늘 밝다는 것이다. 하루는 한 젊은이가 이유를 물었다. 어떻게 항상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느냐고. 환경미화원의 답이 걸작이었다. "나는 지금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 갖고 있는 프레임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돈벌이나 거리청소가 아니라 지구를 청소하는 일로 프레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를 청소하고 있다는 프레임은 돈벌이나 거리 청소의 프레임보다 훨씬 상위 수준이고 의미 중심의 프레임이다.
상위 수준과 하위 수준의 프레임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상위 프레임에서는 WHY를 묻지만 하위 프레임에서는 HOW를 묻는다는 점이다. 상위 프레임은 일을 하는 이유, 의미, 목표를 묻는다. 비전을 묻고 이상을 세운다. 그러나 하위 프레임은 일의 난이도, 걸리는 시간, 성공 가능성 등 구체적인 절차를 묻는다. 그래서 큰 그림을 놓치고 주변의 이슈를 좇느라 에너지를 허비한다. 우리는 동일한 사건을 두고 다양한 수준의 프레임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어떤 수준의 프레임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행복의 의미 추구는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구약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서 생활하다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나온다. 모세는 12명의 사람들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 중 10명의 보고는 부정적이었다. 땅이 풍요롭기는 하지만 그곳에 있는 이민족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에 얼씬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으로 진군할 것을 주장했다. 물론 결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가나안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성취하는 사람과 안주하는 사람의 프레임 차이를 보여준다. 성취하는 사람은 접근 프레임이다. 안주하는 사람은 회피 프레임이다. 접근 프레임은 보상에 주목하며 회피 프레임은 실패가능성에 주목한다. 회피 프레임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어려운 일을 시도하여 성취감을 맛보기보다 일을 도모하다 망신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만 한다.
안락한 지대를 벗어나 '지도 밖으로 행군' 하는 용기 있는 행동은 접근 프레임을 가진 사람에게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도전적인 프레임이 있었기에 비행기가 발명되고 우주선도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지만, 안주하는 사람에겐 어설프게 나섰다가 낭패 보기 십상인 위험한 곳으로만 보일 뿐이다.
2. 세상, 그 참을 수 없는 애매함
"화씨 50도는 섭씨로 몇 도인가?" 누군가 이 문제를 신속하게 풀었을 때 우리는 그를 똑똑한 사람이라고 부를지언정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는 분명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고 그 답은 공식에 맞춰 쉽게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와 같이 분명한 답이 존재하는 문제를 "잘 구조화된 문제"라고 부른다. 반면 지혜를 필요로 하는 문제는 "잘 구조화되지 않은 문제"이다. "미군은 이라크에서 철수해야 하는가?" "부부가 이혼할 경우 자녀 양육권은 둘 중 누가 가져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런 문제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마다 보는 관점, 즉 프레임에 따라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
심리적 속성의 애매성을 잘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실험 참여자에게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를 준 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도록 하는 실험이다. A조건에서 제시된 정보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지적이다 부지런하다 충동적이다 비판적이다 고집이 세다 질투심이 강하다" B조건은 정보 내용은 동일했지만 순서가 정반대였다. "질투심이 강하다 고집이 세다 비판적이다 충동적이다 부지런하다 지적이다" 자료 분석 결과 A조건에서 형성된 인상이 B조건에서 형성된 인상보다 훨씬 호의적이었다. 앞서 제시된 정보들이 뒤따라오는 정보를 해석하는데 영향을 주는 프레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에 대한 인상은 애매한 부분이어서 사용하는 프레임에 따라 동일한 사람을 놓고도 정반대의 해석이 나온다.
코넬대 심리학과 연구팀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게임 종료 순간에 갖는 감정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게임이 종료되고 메달 색깔이 결정되는 순간 동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10점 만점에 7.1로 나타났다. 반면 은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4.8이었다. 객관적인 성취의 크기로 보자면 은메달리스트가 더 큰 성취를 이룬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주관적으로 경험한 성취의 크기는 반대로 나왔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일까? 이것은 선수들이 자신들이 거둔 객관적인 성취를 가상의 성취와 비교함으로써 주관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은메달리스트에게 가상의 성취는 금메달이었다. 최고 도달점인 금메달과 비교한 은메달의 주관적 크기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반면 동메달리스트들이 비교한 가상의 성취는 노메달이었다. 따라서 동메달의 주관적 가치는 은메달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공간상의 비교, 시간상의 비교, 심지어 상상 속의 비교에 의해서 현실은 주관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만큼 우리의 현실은 본질적 애매성을 갖고 있다.
이쯤에서 딴죽을 걸 독자들이 나올 법하다. 같은 상황이 비교를 통해서 여러 갈래로 해석되는 것은 인정하지만, 앞의 사례들이 극단적인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스테이플의 실험을 소개한다. 그는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컴퓨터 화면 왼쪽에서 무엇인가 나타나면 Q 자판을, 오른쪽에서 나타나면 P 자판을 누르도록 지시하였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절반의 학생에게 나타난 것은 아인슈타인 사진이었고, 다른 절반에게 나타난 것은 광대 사진이었다. 그러나 워낙 빠른 속도로 지나갔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는 없었다. 자판 누르기가 끝난 후 학생들은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다고 생각하는지를 7점 만점으로 평점하도록 요구받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아인슈타인 사진을 본 학생들이 광대 사진을 본 대학생보다 자신을 덜 똑똑하다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은 아인슈타인을 자신과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군들 아인슈타인과 비교하여 자기가 더 똑똑하다고 느끼겠는가. 이러한 연구결과는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비교 프레임이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뇌는 끊임없이 비교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임이 외부에서 강요되거나 은밀히 유도되는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건네는 질문도 특정 프레임을 유도할 수 있다. 자신이 외향적인 사람인지 내성적인 사람인지 알고 싶을 때 우리는 "나는 외향적인가?" 또는 "나는 내성적인가?"라고 자문한다. 독자들은 두 질문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런데 연구 결과는 그런 반문이 틀렸음을 보여 준다. 요약하면 "외향적인가?"라고 물었을 때보다 "내성적인가?"라고 물었을 때 응답이 더 내성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질문의 방향이 특정 종류의 증거만을 찾아보도록 하는 프레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외향적인가?"라고 자문하면 외향적으로 행동했던 증거만 찾으려하고, 내성적으로 행동했던 증거는 찾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질문의 방향에 일치하는 쪽으로 자기 판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개념이라는 것도 프레임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진다. 그리고 프레임은 질문의 방향과 같은 사소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3. 자기 프레임, 세상의 중심은 나
스턴버그는 어리석음의 첫 번째 조건으로 자기중심성을 꼽았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보여주는 실험 하나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수행되었다. 이 실험은 대학생 두 명을 한 조로 해서 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서 노래를 연주하게 하고, 다른 사람은 상대가 연주한 노래 제목을 알아맞히는 실험이었다. 연주자의 기대치와 청중의 정확도에 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연주자는 청중이 자신의 연주를 듣고 제목을 맞출 확률을 50%로 기대했다. 그러나 청중이 제목을 맞힌 실제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이런 차이는 연주자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경험한 연주가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자기라는 프레임에 갇힌 우리는 의사전달이 항상 정확하고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전달한 말과 메모,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은 우리 자신의 프레임 속에서만 자명한 것일 뿐, 타인의 프레임에서 보자면 애매하게 여겨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의사불통으로 인해 생겨나는 오해와 갈등에 대해 사람들은 상대의 무감각과 배려 없음을 탓한다. 부모들은 선행학습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어린아이가 알기에 벅찬 내용을 가르치면서 왜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모르냐고 구박하기 일쑤다. 그 개념들이 어른에게나 간단하다는 사실을 망각하면서 말이다. 남녀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토라져 있는 여자 친구에게 "장난친 것 가지고 왜 그리 속 좁게 구냐?"며 되레 화를 내는 남자 친구는 자신의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만 장난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프레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버릇이 있다. 어떤 사람은 타인을 평가하거나 첫인상을 규정할 때 "얼마나 똑똑한가?"라는 차원에서 본다. 반면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따뜻한 사람)의 차원에서 타인을 평가한다. 레비츠키에 따르면 타인을 능력 차원에서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을 평가할 때도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자신을 정의할 때 따뜻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타인을 평가할 때도 동일한 차원에서 본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타인에 대해 말하는 평가를 보면, 다른 사람이 어떤지에 대한 정보를 주기보다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많이 드러낸다. 그러니 주변에 남을 헐뜯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주변 사람이 실제로 남을 헐뜯는 사람이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남의 허물을 습관적으로 들춰내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자기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까이 해도 좋다. 그 사람은 누구와 있어도 상대의 장점부터 보기 때문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라는 옛말이 들어맞는 셈이다.
출근할 때 직장인들의 큰 고민거리는 "오늘은 뭘 입고 나가지?"라는 것이다. 옷장 안에는 옷들로 꽉 차 있지만 막상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계속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면 사람들이 금방 알아볼 것이라는 생각에 백화점으로 달려가 옷을 산다. 신발, 핸드백 등 액세서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착각은 조명효과라는 심리 현상에서 비롯된다. 연극의 주인공도 아닌 보통 사람들이 자신도 스타들처럼 조명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는 현상이다.
토머스 길로비치의 실험은 조명효과의 실체를 보여준다. 한 학생이 유명가수 배리 매닐로의 티셔츠를 입고 학생들이 있는 실험실로 들어가 잠깐 동안 머물렀다. 티셔츠를 입은 학생은 실험실에 있는 학생의 46%가 자신이 어떤 티셔츠를 입었는지 알아맞힐 거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23%만이 매닐로 티셔츠를 보았다고 답했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마음속에 CCTV를 설치해놓고 자신을 감시하면서도 타인이 나를 주목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제 CCTV 스위치를 꺼 버려야 한다.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을 조용히 내려놓는다면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어리석은 일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4. 현재 프레임, 과거와 미래가 왜곡되는 이유
과거에는 없고 현재에만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이다. 막 출산한 산모는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알지만, 출산 직전까지는 성별에 대한 확신이 없다. 현재 시점에서야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조작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연구의 진실성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사건의 결말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과거를 회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심리현상을 저자는 후견지명(hindsight)효과라고 부른다. 여기서 hindsight는 영어의 behind와 sight가 결합한 말로, 결과를 알고 난 후에 뒤에서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가 과거를 지배하는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는 영역이 스포츠 경기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모든 것은 과거가 되고, 과거는 현재에 의해 재평가된다. 2002년 월드컵 중 한국과 미국과의 경기에서 한국은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이을용 선수가 키커로 나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관중들은 "중요한 순간에는 겁 없는 이천수에게 맡겨야지, 감독 뭐하는 거야?"라고 하면서 히딩크의 결정을 비난하였다. 그런데 장담하거니와 만약 이을용 선수가 성공했더라면, 사람들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경험 없는 이천수를 쓰느니 노련한 이을용이 훨씬 낫지." 이처럼 우리는 과거가 아직 과거이기 전, 즉 현재일 때는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과거는 현재의 눈으로 볼 때만 질서정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후견지명 효과는 사후에는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기인한다. 생활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데 설명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 능력이 야기하는 부작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결과든 사후에는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결과에도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애정이 식는다"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알려주면 "당연하지, 안 보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잖아"라고 한다. 반대로 "떨어져 있으면 애정이 더 깊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하면 "당연하지, 떨어져 있으면 그리움이 커지고 그러다 보면 애정이 더 쌓이는 거지"라고 응수한다. 사후에는 설명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당연시하며 그 일이 처음부터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할 때, 우리는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