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신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핑계 Ⅰ
1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어"
노인의 나이는 65세. 그는 한때 성공한 레스토랑 사업가였다. 그의 나이 40세 무렵에 시작한 레스토랑은 입소문을 타고 초고속 번창가도를 달렸다. 그는 독창적인 맛을 개발하여 지역의 명성을 드높였다는 공로로 주지사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의 성공은 아무런 문제없이 탄탄대로로 들어선 듯 보였다. 그러나 불운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쳤다. 레스토랑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다. 그토록 당당했던 레스토랑은 뼈대만 남고 다 타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금세 재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주위의 도움을 얻어 작은 음식점을 열었다. 그러나 한번 밀려온 불운은 또 다른 불운을 끌고 들어왔다. 연초부터 술렁대던 불황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식당은 곧 문을 닫고 말았다. 그는 화재로 레스토랑을 잃었고, 화재 직전에는 아끼던 아들을 잃었다. 작은 레스토랑을 다시 열었지만 재기하지 못했고, 결국 아내마저 그를 떠났다. 마음의 절망이 몸의 병을 낳고 말았다.
어느 날 그는 햇볕 따뜻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앞에 산책하는 다정한 연인들과 단란한 가족들이 지나갔다. "아… 모두들 행복해 보이는데, 나는 왜 이럴까?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걸까?" 세상은 그의 캄캄한 앞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부시기만 했다. 그때 어디선가 귀에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으나 한 여자의 찬송가가 묘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뭉클해진 가슴으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그래, 다시 해보자!'
그의 나이는 분명 65라는 숫자에 서 있지만 다시 시작하는 것과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이는 단지 시작하지 못하고 들먹이는 핑계일 뿐이니까. 그는 40대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사업을 벌여 나갔다. 사람들은 독특한 음식 맛에 매료되었고, 레스토랑은 하나둘 찾아오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그로부터 10년 뒤, 그의 나이가 74라는 숫자에 다다랐을 때 삶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미 북미 지역에 6백여 개의 지점을 거느린 세계적인 레스토랑 체인점의 사장이 되었고, 심지어 그 자신도 세계 여러 나라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기업 마스코트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하랜드 샌더스(Harland Sanders). 우리에게 'KFC할아버지'로 알려진 바로 그 사람이다.
2 남편을 잘못 만났어
메리는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발이 퉁퉁 붓고 구두가 옥죄어 눈물이 찔끔 나도록 욱신거렸다. 오늘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화장품을 팔았다. 외판원의 삶이란 고통과 수치스러움의 반복이었다. 그래도 일을 그만둘 순 없었다. 메리에겐 세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들을 혼자 돌봐야만 했다. '벤 로저스! 그 인간만 만나지 않았다면!' 하필이면 그런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다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실수였다. 벤은 가수였다. 세상에 이보다 더 멋진 남자는 없을 것 같았다. 메리는 일곱 살 때부터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결핵에 걸린 아버지의 병 수발도 그녀의 몫이었다. 공부는 잘했지만 대학에 가지 못했다. 우울한 그녀 앞에 나타난 남자에게 정신없이 빠져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벤에게 메리는 단순히 옛날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세 아이와 기타 한 대만 남겨놓고, 그는 훌쩍 떠나버렸다. 남자에게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건 자기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철없이 캐묻는 아들 때문에 메리는 더욱 괴로웠다. "어리광부리지 마, 리처드. 아빠는 오지 않아. 이제는 우리 힘으로 살아야 해."
그렇게 시작한 화장품 외판원 일은 이를 악물고 도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매일같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가면 집안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전남편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밤을 꼬박 새운 날도 많았다. 그러나 손님을 상대할 때만큼은 활짝 웃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자신은 화장품을 파는 게 아니라 '당신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팔고 있다고, 하찮은 외판원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는 메신저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믿음이 30년 동안이나 그녀를 버티게 해주었다. 뉴욕 호텔 연회장에서 미국 국내 1위의 화장품 방문판매 회사인 메리 케이의 연말 판매왕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백발의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메리 케이 회장인 메리 케이의 인사말이 있었다. "이제는 남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를 사랑했던 순간도, 그가 떠나간 순간도, 그리고 혼자 살아온 세월도 모두 의미있는 시간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사랑이 아무리 의미있었다고 해도 내 인생 전체와 바꿀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으니까요. 자신의 삶, 자신의 인생, 자기 자신을 사랑하세요!"
3 난 지지리도 운이 없어
헤더 밀스(Heather Mills)는 기자를 향해 살짝 웃었다. "제 이야기요? 글쎄요, 처음부터 모든 게 꼬여 있었죠. 아버지는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계셨어요. 가만히 있다가도 마구 울부짖고, 엄마와 나를 이유없이 두들겨 패기도 하고. 끔찍했어요. 어떻게 가족들을 괴롭힐까만 궁리하는 사람 같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도망을 갔어요. 그 후로 난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지요. 아버지의 병은 더욱 심해졌고, 그만큼 가난도 심해졌어요. 살던 집에서 쫓겨나 4개월 정도 다리 밑에서 살기도 했답니다. 전 나름대로 일을 했어요. 다행히 사람들이 제 외모를 좋게 봐줘서 일자리를 얻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식당이나 술집에서 웨이트리스 생활을 하며 틈틈이 사진모델로 돈을 벌었어요. 그렇게 이름도 알려지고, 돈도 어느 정도 모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건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지요. 그래서 이렇게 한쪽 다리를 잃고 말았답니다. 세계적인 모델이 되어 런웨이를 사뿐사뿐 걷는 것이 유일하게 나를 지탱하는 꿈이었던 저는 정말 그 일을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어때요, 저 정말 운이 없어 보이지요?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답니다."
1993년, 그녀의 나이 스물세 살 때 경찰 오토바이에 치이는 사고로 그녀의 늑골은 부러지고 폐에는 구멍이 뚫렸으며 골반은 뒤틀어졌다. 그리고 오토바이 앞바퀴에 깔린 그녀의 왼쪽 다리는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여자로서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절단 장애인'이 된 헤더 밀스는 모델 일을 계속 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절단된 다리로 테니스를 즐겼고, 미소를 활짝 머금고 방송 무대에 올랐다. 그뿐이 아니었다. 보스니아 내전에 휘말린 크로아티아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전쟁으로 수족이 잘린 사람들에게 의수족을 나누어 주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녀의 빛나는 활약은 끝이 없었다. 방송계로 진출한 헤더 밀스는 저명한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성공시켰고, 손수 의족에 스키를 신고 세계의 스키장을 소개하는 여행 프로그램을 제작했으며,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와 함께 지뢰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영국정부는 그녀에게 눈부신 성취에 대한 공로로 상을 수여했고, 1996년에는 노벨상 후보로 지목되기도 했다.
4 "뭘 하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 하지"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일본인으로,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사업을 시작할 만한 좋은 아이템이 있었지만, 가지고 있는 돈은 고작 100엔(800원)이 전부였다. 다른 한 사람은 미국인이다. 그는 미혼모에게 태어나 가난한 양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가난 때문에 중퇴를 해야 했다. 친구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려고 다짐했을 때, 그의 수중에는 1,300달러(120만 원)가 전부였다. 자, 그들은 이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첫 번째 사람은 아홉 살 때부터 자전거 상회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 기술자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겨우 끼니를 이을 만큼의 봉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성실했다. "이 녀석, 어린 놈이 눈썰미가 대단한걸? 이것도 한번 해 볼래?" 영리하고 성실한 그가 주인의 신임을 얻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곧 그는 정식 기술자가 되었다. 그가 전구 소켓의 기능을 향상시킬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것은 24세 때의 일이다. 당시 그가 가진 100엔은 공장을 짓는 건 고사하고 기본적인 재료도 살 수 없는 돈이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시작되었고, 그가 개발한 '쌍소켓'은 간단한 가전제품에서부터 첨단 전기산업분야, 소재산업분야까지 활용도를 높였다. 그리고 1980년대, 이미 그는 많은 일본인에게 '경영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해 있었다. "10년 뒤를 내다보고 이 회사를 키워주십시오. 그럼 나는 100년 뒤를 내다보고 이 사회를 키우겠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은퇴할 무렵 자본금의 딱 1억배인 100억 엔을 들여 일본의 정치, 경제의 리더를 육성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제 두 번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난한 양부모 손에서 자라난 그는 서류상으로는 대학을 중퇴했지만, 여전히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들었다. 그가 청강한 수업은 원래의 전공과는 관련 없는 철학과 문학이었다. 가난했지만 여유로웠던 그때의 공부는 그에게 평생의 재산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를 만나게 된다. 스티브 위즈니악은 컴퓨터라면 모르는 게 없는 녀석이었다. 그들은 뜻과 마음이 잘 맞았다. 손수 제작한 컴퓨터를 들고 두 사람은 무작정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1,300달러를 손에 쥐고서 그렇게 그들의 작은 사업이 시작되었다. 몇 년 뒤, 그들은 기존의 컴퓨터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제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 어이없게도 회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그것도 자신이 차린 회사에서 그가 직접 뽑은 경영진에 의해. 그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던 그는 남은 자본으로 새로운 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그것마저 망하고 그는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모두들 그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다시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사업에 손을 뻗었고, 한 편의 3D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리고 처음 차렸던 컴퓨터 회사로 되돌아가 움츠렸던 날개를 활짝 폈다. 컴퓨터는 물론 휴대용 뮤직 플레이어의 전설이 된 기기를 개발하면서 그의 이름은 삽시간에 세계에 알려졌다. 오늘날 그의 회사는 탁월한 기술과 디자인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첫 번째 사람은 내셔널 파나소닉의 창립자 마츠시타 고노스케,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바로 애플사의 창립자 스티브 잡스이다.
5 "학벌이 안 좋아서 힘들어"
'S대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는 책상맡에 붙여 놓은 글귀를 사납게 찢어 버렸다. 그의 두 형은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의 의대와 법대로 진학했다. 아버지도 같은 학교 법대를 졸업한 고위공무원이었다. "나는 세 아들과 함께 동문회에 가는 게 소원이다. 형들은 그렇게 했으니, 너만 잘하면 된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누누이 일렀다. 온 가족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그에게는 심장이 조여드는 부담이었다. 그는 형들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결국 대입시험에서 그는 아버지가 바라는 학교에 가기에 부족한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재수를 결심하고 기숙사형 학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듬해 치른 시험에서 또다시 실패했다. 이번에는 절로 들어갔다. 머리까지 박박 깎아가며 치른 세 번째 시험에서도 S대에 진학하지 못했다.
어느덧 대학에 가지 않으면 입영영장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는 점수에 맞는 아무 대학에나 원서를 밀어 넣었다. 합격소식에도 아버지는 싸늘하게 등을 돌렸고, 형제들은 시큰둥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S대뿐이었다. S대가 아니면 죽음을 바라던 그에게 남은 것은 입학한 대학에 다니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목표를 잃어버린 그는 툭하면 학교를 빼먹고,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가 지도교수를 찾아가 상의를 드렸다. 사정을 들은 교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교수는 아이를 호출하였다. 교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은 넓어. 겨우 손바닥만한 우리나라에 얽매여 재능을 썩히는 게 옳은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멀리 뻗어 나가야지." 교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유학시절에 만난 절친한 친구가 스리랑카 출신이었어. 우리 지도교수는 대한민국 서울은 몰랐지만,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는 잘 알더군. 홍차 애호가였거든. 사람은 그런 법이야. 관심 있는 것이 더 의미있게 보이지. S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찾아보게."
얼마 후, 연구실로 엽서 한 통이 날아들었다. '교수님, 지금은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서울이라는 대학보다 한국이라는 대학이, 한국이라는 대학보다 세계라는 대학이 더 크더군요. 전 그 안에서 실력으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S대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큰 꿈을 꾸는 근사한 젊은이였다.
6 "난 여자잖아"
면접관은 한참 서류를 뒤적거렸다. 꼼꼼한 그녀가 힘들게 준비한 자료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사업의 전망, 중요 경쟁업체, 예상수익 및 소요비용 등 면접관이 물을 만한 모든 질문에 그녀는 얼마든지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면접관은 천천히 입을 열더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여자가 힘들지 않겠어요?" 남자 지원자들에게 주어진 질문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에게는 사업이 아닌 '여자'에 초점이 맞춰진 질문만 떨어질 뿐이었다. 창업을 위해서는 꼭 통과해야 하는 면접 심사,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분하고 억울했다.
그녀는 이름 없는 지방대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학업성적과 성실함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녀를 눈여겨본 교수님의 추천으로 그녀는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정부 출연 연구소의 직원이 되었다. 연구소에 처음 출근한 날, 방 안을 가득 메운 실험기자재를 보고 마구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녀 앞의 현실은 너무 차가웠다. "여기, 커피 좀 갖다 줘요." "이거 열 부만 더 복사해 줄래?" 일류대에서 몰려든 연구원들 사이에서 그녀가 낄 자리는 없었다. 동료들의 눈에 그녀는 연구원이 아닌 '일하는 여자'였을 뿐이었다. 참다못한 그녀는 상사를 찾아갔다. "복사도 좋고, 커피 심부름도 좋습니다. 하지만 연구원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주십시오. 저도 전산을 전공한 연구원입니다!" 상사는 들은 척도 않고 자판만 두드렸다. 그녀는 눈물을 꾹 참고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탁, 탁, 탁, 타탁..., 탁, 탁.'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화면 한번 보고, 자판 한번 보고, 그야말로 전형적인 독수리 타법이었다. "제가 타이핑, 해 드릴까요?" 그날 이후, 그녀는 상사의 모든 타이핑 심부름을 도맡았다. 자질구레한 문서 정리가 빠른 시간 안에 완벽하게 처리되었다. 어느 날 드디어 그녀에게 일감이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양의 해외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해서 새로운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걸 다 혼자 했단 말이야?" 일이 맡겨지면 누구보다 완벽하게 최고로 처리하는 그녀의 업무능력에 남자 연구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후로 아무도 그녀에게 '여자니까'라는 말을 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