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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머리말: 반란자들의 동아시아를 위하여

'지역 문명'을 이야기하기가 늘 두렵다. 그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너무 많은 경우에 차별과 배제의 방편으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우리 유럽인'들이 거론될 때마다 당장에 태생적으로 '우리'가 될 수 없었던 흑인이나 '동양인'들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사실 '우리 동아시아인'도 개념 악용의 차원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역 문명' 이야기는 오랫동안 차별의 기제로 이용된 데다 '지역'이란 경계의 불분명성과 임의성 역시 차별과 배제의 여지를 남긴다.



반란자의 공동체로서의 유럽

한국인의 몸으로 일본이나 중국에 가면 서구보다 훨씬 친근한 음식 문화로부터 서구의 언어로 제대로 번역하기도 힘든 '인연'(因緣), '서민'(庶民), '민생'(民生),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같은 전통 문화 계통의 단어들까지, 여러 차원에서 몸에 와 닿는 동질성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전통 문화에 기반한 동질성과 현실적인 필요성의 코드만으로 우리에게 '동아시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는가? 유럽을 예로 들어보자. 보수주의자들처럼 유럽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기독교적 가치'에서 찾는 사람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유럽'으로 규정할 수 있는 여러 소규모 문화권마다 권력화, 교조화된 제도권 기독교에 반기를 들어 원시 기독교의 민중적 가치로 회귀하자고 주장하거나 아예 기독교의 석화된 도그마를 부정하는 반란자들도 있었다.



진보적 의미의 '유럽적 전통'을 찾자면 퀘이커, 두코보르 같은 민중 교파들이 일찌감치 내걸었던 군사주의 반대와 병역거부가 가장 대표적이지 않을까? 이처럼 풀뿌리 차원의 서민적인 교파로 거슬러 올라가는 반(反)권력, 반(反)군사 투쟁의 전통을 집대성한 이가 바로 유럽의 위대한 정신적 아나키스트, 톨스토이다. 중국이나 일본에까지 확산된 톨스토이의 평화 사상이 한때 상당수 유럽인의 심금을 울렸다는 것은 역시 '반란자의 공동체'로서 유럽의 잠재력을 보여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한차원 높은 동아시아 연대의 싹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한 그룹의 '동아시아론'이 한국의 지적 풍토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논의의 수준을 한 차원 올렸음에 틀림없다. 백영서 교수와 같은 논자들이 과거의 동서 문화 양분법을 뛰어넘어(역사적으로 서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인권의 '보편적' 측면과 한때 세계 체제의 주변으로 밀려났다가 지금도 '추격형(追擊型)개발' 과정에서 '집단 인권'이나 '생존권'을 우선시하게 돼 있는 동아시아적 '특수'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는 일환으로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법치주의, 집단행동, 개인주의 전통으로 주의를 돌리기도 하고, 복합적 정체성과 국적에 대한 초월적 태도를 전제로 하는, 남북과 해외 교포를 아우르는 탈(脫)국가적인 코리아의 정체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동아시아시대는 어떤 면에서 이미 도래했고, 어떤 면에서는 현재 진행형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지역화의 추세는 굳이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지만, 이 지역화의 사회·정치·문화는 역사의 주인공인 우리 모두의 선택의 문제다. 한국의 기업들이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이나 중국에서 현지 노동자에 대한 무리한 착취와 임금 체불, 폭언, 구타 등의 행위로 물의를 일으킨 것도 지역화의 한 얼굴이고, 조선인 동포와 중국인을 포함한 30만 명 이상의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한국인 활동가들과 함께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도 지역화의 한 얼굴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의 '동아시아'를 원하고 있는가? 각종 규율로 우리 내외 면을 구속하는 한편, '소비'라는 달콤한 당근과 '대중문화'라는 신종 '아편'으로 우리를 부단히 유혹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순치되어 주체적 인간의 뿌리인 '반란성'을 상실한 동아시아인으로서 우리가 새롭게 지향해야 할 '반란자적 모습'을 찾는 데 이 책이 하나의 버팀목이 되길 바란다.



1부 진흙 속의 연꽃: 동아시아 휴머니즘의 계보



유교적 좌파의 거두, 공의 사회 역설하다



유교를 너무 단순화하지 말라

국내의 '아시아 가치' 옹호자는 1970~1980년대 일본 우파의 '일본인론'을 방불케 하는 '한국사회론'에 주력했다. 한국의 '유교적 가족주의' 사회에서는 학연·지연·혈연 위주의 사적인 네트워크가 지배적인 단위인 만큼 차라리 그 '패거리' 안에서 '상생의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향우회·동창회가 성황을 이루고 룸살롱으로 2~3차를 가는 것이 '유교적인' 우리의 문화이므로 학벌·지벌 없는 사회는 아예 꿈꾸지 말자는 소리였다. 1970년대 관변 학자들의 '한국적 민주주의'(유신 공포정치) 찬양론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이 논리는 명분상 유교의 '미덕'을 내세우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유교를 '전근대'의 상징으로 보는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왜곡된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교의 가족적 윤리 중심주의, 위정자 본위의 온정주의, 예속된 백성에 대한 시혜의 논리, 근대 서구의 사회공익 관념과 사회 구성원 사이의 계약적 관계, 공익 본위의 합리적인 관료 제도를 강조한 막스 베버(1864-1920)와 같은 서구 오리엔탈리스트의 '유교' 담론을 받아들이되 '가치 평가' 난에다 '마이너스' 대신 '플러스'를 매겼을 뿐이다.



환관 정치에 대한 언론 투쟁

황종희가 후세에 존경받는 이유는 그의 사상 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知)와 행(行)을 따로 보지 않는 지사였기 때문이다. 동림파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부친 황존소(黃尊素·1584-1626)는 천계제(天啓帝·재위 1620~1627)시대에 간신배의 원흉이었던 환고나 위충현( 沖賢·?-1627)을 탄핵하다 환관들의 무고로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그런 황종희에게 권신(權臣)파벌의 공포정치와 싸우는 것은 곧 '효도의 실천'이기도 했다. 진보적 지식인 단체였던 '복사(復社:1629년 조직)'에 들어가서 환관 정치에 대한 언론 투쟁을 벌인 그는 수년 동안 중국의 모든 정사(正史)와 명나라의 실록을 독파하면서 치열하게 역사 공부를 한 끝에 명나라 위기의 근본 원인을 깨달았다.



황종희는 명나라가 망한 뒤 위용군에 가담하여 무장 구국 투쟁도 하고 일본에게 반청(反淸)운동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지만, 명나라의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안 뒤, 1649년부터 고향에 칩거하면서 독서와 집필,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요즘 일부 우파 논객들이 친일파의 부역 행각을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이라 변호하지만, 황종희처럼 불가피한 조건인 변발( 髮)을 하고도 청나라에 협력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유교적인 원칙론과 현실의 진정한 절충이 아닌가. 당국의 회유와 핍박을 무시하면서도 저술활동을 활발히 펼침으로써 당대 최고의 유림이라는 명성을 얻은 황종희는, 독립적이며 출세에 무관심한 지식인이 얼마나 생산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황종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

〈명이 대방록〉이 제시하는 '공(公)의 사회'는 진보적 의미의 '이상사회'는 아니다. 세론(世論)을 대변할 학관(學官)들이나 상업 부흥책의 덕을 입을 부민(富民)들은 황종희 자신과 가까웠던 17세기 중국의 지방 엘리트였다. 그런데 〈명이 대방록〉에서 왕조·관료의 횡포를 비판한 목적 중의 하나는 이들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표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국의 멸망이라는 쓰라린 아픔을 겪은 황종희는 만인의 욕구가 자유롭게 대변·충족되는 '공(公)의 사회'를 진심으로 갈구하게 되었다. 만인을 위한 합리적인 사회가 돼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참된 '유교적 가치'인 이 진리를 오늘날 남한의 기득권자들은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의 뜻을 따른다면 대다수를 위한 기본적인 복지망이 없는 사회는 결코 안정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가 아닐까.



야수의 세상에서 평화를 꿈꾸다



개화기의 한국 지식인들이 처음 해외를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본이나 미국 등지의 웅장한 건물이나 화륜선(기선), 철도 등 기술 혁명의 성과물들도 압도적이었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일본과 서구 열강들의 무비(武備:군사시설), 그리고 '개명한 신세계'에서 전쟁과 같은 국가적 폭력의 엄청난 역할이었다.



〈한성순보〉의 논설, 미래를 예견하다

'근대 충격'이 빚은 현실론과 이상론의 충돌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유교적 신념이 강한 많은 온건 개화파나 개신 유림들은 당장은 부국강병이 중요하지만 차후에는 세계가 평화의 인의예지의 이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현실과 이상의 절충 논리를 폈다. 단순히 전쟁과 경쟁만을 주장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의 초기 사례를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1883~1884)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위대한 시인이자 온건 개화파였던 강위(姜瑋·1820-1884)와 나중에 서예의 대가가 된 오세창(吳世昌·1864-1953) 등의 여러 지식인이 만든 이 신문의 주된 관심사는 재정과 징병제, 산업 등 '부국강병의 비결'이었다. 하지만 가끔씩 유교적 이상론의 입장에서 세계의 현실을 비판하고 전쟁 없는 세상을 모색하는 논설도 실렸다. 예컨대 제6호(1883년 12월 20일)의 '소병론(銷兵論:병기를 녹이자는 이야기)'이라는 탁월한 논설의 서두를 보자.



하늘과 땅 사이에 무도하고 가장 비참하고 가장 해독스러운 것은 병란이고, 꼭 없애야 하면서도 늘 없애지 못하는 게 병란이다. …… 두 나라의 혈전에서 예봉들이 휘날려지고 총탄들이 날아가는데 한 순간에 서로 죽이는 데에 있어서 어찌 전후의 순서가 있는가? 아버지가 아이를 잃고 아이가 고아가 되고 부인이 과부가 되고…… 하늘의 도리를 벗어나고 인륜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가? 한 장군이 운이 좋아 전승을 얻어 개선한 뒤 기고만장하여 상을 얻었다 해도…… 처참하게 죽은 사람의 주검들이 평야를 가득 채우고…… 늙어서 혼자 남은 늙은이와 고아와 과부들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애통하게 운다. 그런데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나 당나라 등이 백전백승하여…… 수백만의 군대로 천하를 호령해도…… 결국 하루아침에 민심이 이반하여 무너지고 만다.



전쟁의 참회를 여실히 서술하는 이 논설은 이라크 파병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보다 훨씬 어렵고 위험한 처지에 처했던 100여 년 전 선각자들이 군국자의적인 세계 현실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비판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의 행동에 부끄러움이 느껴질 것이다.



무조건 항복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전쟁으로 가득 찬 제국주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길을 현실적으로 모색하면서도 동시에 제국주의·군사주의를 지양할 방법을 탐구하는 것은 1880년대 이후에도 많은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의 골간이었다. 그들이 보는 세계의 모습은, 한국의 최초의 본격적인 제국주의 비판자 변명만(卞榮晩·1889-1954)이 번안한 반(反)제국주의적 저술 〈세계 삼 괴물 世界三槐物〉(1908)의 서문에서 그의 절친한 친구 신채호가 쓴 그대로이다. "강자가 무대에 올라서면 약자가 한풀 꺾이고, ……인의 도덕이 백기를 흔들고, 산들과 부처님이 공연히 씨름만 하고 있고, 전쟁과 경쟁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참상이 그것인데, 그들이 꼭 "경쟁의 전사(戰士)"로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유명한 유림이자 계몽주의자 해학 이기(海鶴 李沂·1848-1909)처럼 묵자(墨子)의 박애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고, 최초의 도미 유학생으로 알려진 유길준처럼 열강의 힘이 유린하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법과 도덕이 지배하는 국제사회를 열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세계적 야수들이 어떤 국제기구나 국제법에 의해 순치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입장에서 끝없이 나이브(NAIVE)해 보이기도 한다. 제국주의에 대한 세계적 규모의 혁명적 부정이 없다면 살육과 약탈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걸 20세기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한국의 개신 유교적 지성은 결코 야수들에게 '무조건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2부 21세기를 휘젓는 20세기의 망령



국적이란 움직이는 것



2005년에 벌어진 국적 포기자에 대한 여론 재판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 상황이 단순히 유산층의 병역 면탈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병역을 천역(賤役)으로 알았던 전근대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빈민 개병제의 국가를 운영하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특권층에 대한 빈민 개병제 희생자들의 분노는 클 수밖에 없다. 살인적인 경쟁사회를 만들어 놓은 한국 지배자들이, 평민의 자손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억압적인 규율과 막노동을 강요하고 자기 자손에게는 사회 진출을 잘 준비하려는 특별한 기회를 준다고 하니, 이는 기회 균등에서 한참 벗어난 이야기다.



국적의 신비화는 유선시대부터

'국적 있는 교육', '국적 있는 문학', '국적 있는 역사학' 등의 개념이 확보됐던 그 시기에 지배자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국적'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게끔 유도했다. 병영국가에서 이루어진 국적 신성화 작업에 의해 한국 국적을 보유한 정상인 남자는 무엇보다 먼저 '군인'으로 규정되었다. 학교에서의 교련, 대학에서의 군사 훈련, 본인의 의지나 신념과 무관한 군복무, 그리고 그 뒤의 예비군 훈련과 방위세 납부는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정상인 남성의 전통사회에서 존재해왔던 '우리'와 '남' 사이의 관용의 '회색지대'는 없어졌다.



국적 포기자는 마치 전시라면 총살당해야 할 탈영병처럼 인식되고 병역 불이행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거나 '비국민적', '반국민적' 행각으로 개념화됐다. 유신시대가 막을 내린 지 오래됐지만, 당시에 제도화된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현실 생활뿐 아니라 마음까지 지배하고 있다. 자신이 나고 자란 흙에 대한 사랑과 그 땅의 민중에 대한 애착이 꼭 여권이나 주민등록증으로만 표현되지는 않는다는 걸, 특정 국가에서 출생한 비(非)장애인 남자라고 해서 살인 훈련을 받을 천부적 의무는 없다는 걸, 우리는 언제쯤이면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랑해요 미국'의 원조, 조병옥



한국 역사의 치욕으로 남게 될 이라크 파병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화두로 등장한 것은 '숭미주의'였다. 파병은 곧 테러 위협을 의미하며 이번 파병이 전례가 돼 한국군이 미국의 다음 침략 전쟁에도 불려나가게 될 줄 알면서도 이라크 현지인은 물론 다수의 국민들이 원하지 않은 파병을 감행한 것은 왜곡된 '신앙고백'에 가깝다.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을 기억하라

물론 이 결정의 뒷면에는 북한의 침략 가능성, 한국의 수출 경제, 미국 기관투자 등과 관련한 미국의 협박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가까운 시일 내에 현실화될 확률이 크지 않은 이런 협박만으로 한국의 관료 및 정치인들이 국익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협박보다 더 근원적인 동기는 '자유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의 '어버이다운 보살핌'에 대한 한국 지배자들의 몸에 밴 충성심과 신앙적 믿음이었다. 베트남·이라크에서 최첨단 무기로 대량 학살을 마다하지 않는 미군들이 단순한 AK소총을 든 농민·빈민에게 당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잠시 흔들릴 수도 있지만 영영 사라지지는 않는다. '미국'과 '나'를 구별조차 하기 싫어할 정도로 내면적인 '숭미화'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신앙의 원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숭미 퇴치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숭미 콤플렉스 형성의 연혁이 한국의 근현대사만큼이나 길다는 것이다. 숭미적 세계관의 공고화 제1단계라 할 만한 개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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