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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바오

마링 & 리밍 지음 | W미디어
제1장 원자바오의 성장일기



1942년 9월 어느 날, 톈진 외곽의 이싱항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원씨 집안 어른들은 전통에 따라 아기의 탯줄을 정원에 묻고, 아기의 이름을 '보배와 같은 존재'라 하여 '원자바오(溫家寶)'라 지었다. 옛날부터 이 지역에서는 원(溫)씨, 양(楊)씨, 쑤(蘇)씨 가문이 세력을 떨쳤다. 원씨 가문은 벼슬로 인한 권력, 양씨 가문은 무역이나 상업을 통한 재력, 쑤씨 가문은 사람이 많은 세력을 쥐고 있었다. 원자바오의 어머니가 양씨이니 원자바오는 권력과 재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원자바오의 일족은 원씨 가문의 족보에서 빠져 있다. 우리는 원자바오의 고향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원자바오의 고조부는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싱항으로 왔을 때 원씨 가문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원씨 집안사람들은 그가 비록 곤궁해 보였지만 선량해 보이고, 청하는 말에 진심이 느껴져 그를 받아들여 주었다. 당시 족장은 원자바오의 고조부에게 항렬을 선택하도록 하였는데, 고조부는 문중 내에서 가장 낮은 항렬을 선택했다고 한다. 장유유서의 전통에 따라 항렬이 낮으면 자연히 그 지위가 낮기 마련이다. 원자바오의 고조부는 원씨 집안이 장례를 치를 때마다 문중 어른들의 관을 지고 나르거나 곡을 하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치욕을 기꺼이 감내했던 것인데, 그의 소망은 오래 걸리지 않아 이루어졌다.



원자후통에서 원자바오의 집안만이 공부를 하는 선비 집안이었는데, 원자바오의 할아버지 원잉스는 1920년대 이싱항의 민립 제5초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그와 형제인 원잉지에 역시 다른 학교 교장을 지냈다. 그리고 원자바오의 아버지 원깡(溫剛)은 이싱항과 톈진시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원자바오의 숙부인 원펑지우는 외교부 차관과 유럽 주재 중국대사를 역임하였다. 1948년 말엽, 원자바오의 부모는 마을을 떠나게 되었는데,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에 대항하면서 마을에 큰불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마을 주민들은 모두 도시로 떠났으며, 원자바오의 가족들도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따라 톈진으로 간 원자바오는 그곳의 명문 중학교인 난카이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은 저우언라이가 다녔던 학교이기도 한데, 저우언라이는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특별히 학비를 면제받은 유일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원자바오는 저우언라이를 우상으로 삼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마르고 유약해 보였지만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교사를 대신해 학생들의 학습을 지도해 주는 학습위원을 맡았으며, 농구와 장거리 달리기 등 체육도 잘하여 모든 면에서 우수한 학생이었다.

1960년 원자바오는 난카이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베이징 지질학원 지질광산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지질광산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처했던 사회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았다. 당시 국가 공업건설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청년들의 커다란 이상이었다. 러시아에서 광산학을 전공했던 마오쩌둥은 광업개발을 중국 경제건설을 위한 우선발전 영역으로 여겼다. 이로 인해 1952년부터 시작된 신중국의 대규모 경제발전계획과 더불어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톈진대학, 당산철도대학, 서북대학 등의 지질학과들이 합병하여 베이징 지질대학이 탄생하게 되었고, 원자바오는 그곳에서 8년의 시간을 보냈다. 원자바오는 대학을 졸업하던 1968년, 서북지역의 오지인 깐쑤로 갔다. 그때부터 10여 년간 광산을 찾고, 지질을 측량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러한 경력은 그가 농촌과 자원 문제를 유념하게 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제2장 원자바오의 남다른 재능



1968년 원자바오가 깐쑤성 지질국의 지질역학대에 도착했을 때는 문화혁명이 왕성한 기세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파벌싸움도 격렬했다. 원자바오는 문화혁명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소요파(逍遙派 - 문화대혁명에서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던 사람)가 되었으나 그의 글씨체 때문에 정치투쟁에 말려드는 일이 발생했다. 원자바오의 송조체(宋朝體 - 해서체로 가늘고 끝이 날카로운 활자체)가 예쁘다는 이유로 공개 비판 회의에서 비판 내용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한 번은 공개 비판 현장에서 큰 싸움이 일어나자 원자바오는 기록하던 것을 팽개치고 뛰어나가 싸움을 말렸다. 그러자 투쟁의 창 끝은 그를 겨누었고, 결국 원자바오는 농촌으로 쫓겨 가게 되었다. 1년간의 고생스런 시간이 흐르고 원자바오는 다시 지질역학대에 합류하게 되는데, 그는 이때부터 11년 동안 노숙을 하며 광산을 찾아 헤맸다.

원자바오는 야외에서 11년 동안 작업을 하는 사이 치롄산의 지질도를 2장 그렸는데, 치롄산은 길이 1,000km, 너비 200~300km, 평균 고도 4,000km 이상이 되는 황폐하고 높은 산이었다. 그러니 그가 지질도를 완성하면서 겪었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한 번 야외실습을 떠나면 반 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며, 이 기간 동안 매서운 바람과, 고독과 산짐승들과 싸워야 했다. 게다가 매 끼니 식사라고 해 봐야 대부분 잡곡과 말라비틀어진 미나리가 전부였다. 작은 팀들은 낙타나 야크의 등에 식량과 탐사 기구들을 싣고 산을 올라야 했는데, 만약 고삐를 놓치기라도 하면 식량과 기계를 잃어버리곤 했다.



지질역학대에서의 힘겨운 생활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역학대내에서 국민당 간첩들이 대거 발각됨으로 인해 많은 간부들이 면직되었다. 그래서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간부를 발탁했는데, 성실하고 업무성적도 우수하며 파벌성이 없다는 평판으로 원자바오가 선택되었다. 하지만 원자바오는 출신성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부서기와 대장들의 배척을 받기도 했다. 사실 원자바오의 할아버지는 국민당 참의원을 지냈으며, 톈진현 동북지역의 교육행정 기관의 임원이었다. 당시 불손한 출신성분은 생명마저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다. 원자바오에게는 책상마저 배당되지 않았는데 보위과장으로 온 장쯔징이 자신의 사무실에 자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원자바오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원자바오는 이곳에서 근무하는 3년 동안 행정사무를 처리했고, 업무가 없으면 지질연구를 계속했다.



1979년, 원자바오는 깐쑤성의 지질광산국 지질처장으로 임명된다. 당시 간부 발탁을 위해 실시한 검수에서 원자바오는 이제까지 연구해 온 지질학에 대한 학술보고서를 발표하여 높은 식견을 인정받는다. 또한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품이 바르고 파벌이 없으며 업무처리도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었는데, 이 무렵 그가 행한 한 사건이 동료들로부터 진정으로 존경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는 개혁개방 초기로 임금이 매우 박한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인상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70%만 해당되게 되자 부서 안에서 다툼이 일어났다. 원자바오는 고학력자에다 고위직이었으므로 임금 인상자 명단에 올랐으나, 명단에서 탈퇴하여 다른 동료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이로 인해 그는 몇 십 위안의 적은 월급으로 살아가야 했지만, 이 일은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당시 덩샤오핑은 젊은 인재들을 대거 영입하는 '4화조건(혁명화, 청년화, 지식화, 전문화)'을 내세운 인재등용 정책을 폈다. 원자바오는 이 조건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으로 평가되었으며, 지질광산처의 간부들은 모두 파벌성을 배제하고 그의 발탁을 인정했다. 이리하여 원자바오는 37세에 란저우 지질광산처 부처장에 임명되었으며, 1983년에는 지질광산부 차관이 되었다. 하지만 2년 후에는 무엇보다 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20여 년간 몸담아온 지질광산국을 떠나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판공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지질광산국 부장과 판공청 부주임의 위치는 동급이었지만 이때의 전직은 중앙정부의 행정 관료로서 첫발을 내딛는 큰 의미가 있었다. 베이징에 입성한 원자바오는 판공청 주임이라는 중책을 맡으면서 차례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장쩌민 3명의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을 보좌했다. 그리고 정계 정상의 대왕기가 어떻게 바뀌든 간에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원자바오가 정계의 오뚝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누구도 그의 결점을 잡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10시간 일했으며 상·하를 막론하고 존중과 겸손의 태도로 대했다. 또한 시대의 흐름을 잘 관찰하고 식견이 풍부하였다. 그는 말이 적은 사람이었지만 견해나 관점을 발표할 때에는 간결하면서도 완전하게 뜻을 전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그는 어려운 난제에 직접 부딪히더라도 어지러움 속에서 단서를 잘 찾아냈다. 이런 사람을 등용한다면 어느 지도자가 편하지 않겠는가? 그의 태도는 언제나 공무에 충실하고, 사적인 것은 금물이었다. 이랬기 때문에 정계에 폭풍이 불어닥칠 때도 언제나 그는 모든 시비에 대해 공정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라도 불변(不變)으로써 만변(萬變)을 대응하였다.



제3장 원자바오의 명성을 일시에 떨친 대홍수



1998년 여름, 중국 화남(華南)지역과 서남지역의 동부, 그리고 동북지방의 서북부에 전대미문의 수해가 발생했다. 당시 중국의 헤드라인 뉴스는 거의 매일 홍수 소식에 관해 보도하고 있었고, 장쩌민, 주룽지는 잇달아 재난지역의 제1선으로 향했다. 1998년의 대홍수는 새로 들어선 정부에 대한 시험과도 같았다. 그해 봄 주룽지를 중심으로 국무원이 새롭게 구성되었으며, 원자바오는 국무원 신임 부총리로 임명되어 있었다. 장강의 수위가 미친 듯이 상승하자 장쩌민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7월 24일 0시, 국가재해방지대책 총지휘부의 긴급 전체회의가 열리고, 총지휘를 맡은 원자바오는 각급 당정 관리들로 하여금 제방을 순시해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약해진 제방에 즉시 흙과 자갈, 모래를 비축하여 긴급 상황에 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 동시에 기상청의 정확한 예보, 수문관측소의 정확한 수문자료 준비와 제공, 통신부의 원활한 통신확보를 요구했다.



7월 27일 밤 장강의 수위는 29m에 이르렀고, 홍수가 들이닥친 사나흘 동안 건져낸 시신만도 1,000구에 달했다. 7월 30일 오후에는 지우강의 수위가 22.94m로 올라갔다. 장강 제방과 지우강 유역의 100리에 이르는 제방은 150m 간격으로 보초 막사가 세워졌고, 수만 명의 인민해방군 전사들이 사타구니가 물러지는 고통을 인내하며 혼신의 노력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8월 7일 오후, 지우강의 서쪽 4km 거리에 있는 콘크리트 홍수방지 벽이 갑자기 내려앉아 버렸다. 원자바오와 국가재해방지대책 총지휘부는 제방의 무너진 곳에 여덟 척의 배와 두 개의 큰 상자를 띄워 무너진 곳에 반월형의 방죽을 세우고, 그 겉으로 석조 뼈대를 이용해 후방에 버팀 제방을 세웠다. 그리고 저습지를 메우고 새로운 방죽을 지었다. 8월 9일이 되자 무너져 내린 방죽들이 마침내 수면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점차 홍수도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난은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8월 6일 샤시의 수위는 이미 44.75m를 가리키고 있었다. 45m에 이르게 되면 제방이 무너지든지 방류를 하든지 결정을 해야 했다. 성 정부는 중앙위원회에 방류를 요청했다. 방류를 한다면 거주민 33만 5,000명이 고향을 떠나야 하고, 150억 위안(한화 약 2조 원)의 경제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방류를 하지 않아 제방이 터진다면 우한의 3개 마을과 장한 평원은 모두 잠길 것이고, 그 손실과 재해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음날 샤시의 수위가 44.98m까지 미친 듯이 상승하자, 방류를 위한 폭발물의 뇌관이 설치되고, 주룽지는 원자바오에게 방류의 핵단추를 넘긴다. 원자바오는 자신이 배웠던 지질학의 전문지식을 총동원하여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마침내 방류하지 않을 것을 결정한다.



당시 기상예보에 따르면 칭강 유역의 강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홍수의 기세도 약해지고 있었다. 제방을 사수한다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원자바오는 만약 수위가 45m를 넘고 계속 비가 내릴 때 당 중앙의 방류 비준을 받기로 결정하고, 482km에 이르는 장강 방어선에 10m 간격으로 서 있는 수만 명의 민중과 군인들을 격려했다. 25곳에 이르는 위험 부분이 발생했지만 즉시 처리되었고, 힘든 격전이 치러진 후 마침내 비가 멈추면서 수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핵단추는 누를 필요가 없었다. 만일 제방이 터졌다면 하류는 바다로 변했을 것이고, 인명 피해는 물론 징저우와 우한 및 장한의 유전에 큰 손실을 가져왔을 것이다. 원자바오는 훗날 "그때 제방이 견뎌내지 못했다면 그 도도한 홍수 속에 몸을 던졌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처럼 자신의 정책 오류에 대해 목숨까지 던질 각오로 혼신을 다했지만 원자바오가 홍수를 막아낸 장거에 대한 보도는 없었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만 왜소한 체격의 원자바오가 빗줄기 속에서 분주히 뛰어다니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정부조직 내에서는 이때의 일로 인해 원자바오의 명성이 자자해졌다. 예로부터 중국의 통치자들에게 치수 문제는 큰 아킬레스건이었다. 중국인들은 우 임금이 물을 다스린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 4천여 년 전, 우 임금은 처음으로 막힌 물을 통하게 하는 방법으로 황하의 홍수를 성공적으로 막은 선례를 남겨 후에 순 임금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러한 선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원자바오를 능히 총리가 될 수 있는 인물로 여겼다.



제4장 원자바오와 후진타오의 공통점



1942년 생으로 원자바오와 동갑내기인 후진타오는 칭화대학에서 6년 동안 수리(水利)를 공부했다. 그는 100명 중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는 인재시교반(人才施敎班)에 들어가 교수가 단독 교습을 해 주는 특별대우를 받았으며, 사상적으로 투철하고 성적도 우수한 학생들만 발탁되는 수리공정전략반에 뽑혀, 미국과 소련의 원자탄과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전문적인 공부를 했다. 후진타오가 대학을 졸업할 때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존경받는 스승이 교단에서 끌려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된 후진타오는 스승을 보호하기 위해 바른 소리를 하였다가 '소인배', '반동의 앞잡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소요파가 되어 대량의 인문서적을 읽었다.



원자바오의 대학 전공은 지역지질측량·광산탐사였다. 이는 지층 고생물, 암석 및 광산 감정과 지구과학을 합해 검사학과라고 하였는데, 원자바오 재학시절에 지질학과로 개명되었다. 원자바오가 입학한 베이징 지질학원은 각종 조사와 시험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학제가 5년이었다. 원자바오는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지질학원에서 8년을 공부했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막 1년이 되었을 때 문화대혁명을 겪게 되는데, 그 역시 존경받던 총장이 하루아침에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고 소요파가 되었다. 그리고 대량의 인문서적을 읽으며 시야를 넓혀 나갔다.



문화대혁명 당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비전공 서적을 접한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문제를 생각할 때 여러 각도에서 전반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고관은 향후 정치참여에도 훌륭한 기초가 되어 주었다.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는데, 서북에서의 경험 또한 공통적인 품성을 양성해 주었다. 1968년, 두 사람은 모두 대서북의 깐쑤 말단조직에서 일하게 된다. 원자바오는 지질탐사원으로, 후진타오는 수리부 제4공정팀의 일원으로서 수력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근무했는데, 깐쑤에서의 궁핍한 10여 년의 생활은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든지 매진하는 성실성과 모욕을 인내할 줄 아는 품성을 연마하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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