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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 이레
1. 신은 감당할 만큼만 고통을 준다

문득 우리는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모든 이들도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것도 깨닫는다. 이것이 '상실 예감'의 시작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또는 우리 자신이 불치병에 걸릴 때 상실의 예감은 더욱 깊어진다. 상실의 예감은 우리 마음속에선 '끝의 시작'이다. 상실을 예감하면서 느끼는 슬픔은 상실 후의 슬픔보다 더 조용하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단지 누군가가 손을 잡아주거나, 말없이 옆에 앉아 있어줌으로써 위안 받을 수 있는 그런 감정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상실을 생각하면서 슬픔에 잠기지만, 상실의 예감에서 오는 슬픔은 앞으로 일어날 상실이 우리를 사로잡게 만든다.



상실의 예감은 그 슬픔의 과정을 더 쉽게 또는 더 짧게 해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실제로 죽기 전에 상실의 다섯 단계(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를 모두 거칠 수도 있고, 어쩌면 단지 분노와 부정만을 경험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의 상태가 호전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단지 형편없는 삶의 질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때, 우리 자신도 상실의 예감 속에서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매우 불확실한 중간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시기가 조용한 절망의 시기가 될 수도 있고 노골적인 분노의 시기가 될 수도 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있으나 채널은 돌릴 수 없는, 배는 고프지만 스푼은 쥘 수 없는 순간들이 바로 이 시기이다.

이 상실의 중간 상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실이기에 많은 이들의 위로를 필요로 한다. 불확실은 일종의 고문이다. 죽음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여러 해에 걸쳐져 있을 경우에는 죽음 후에 그 단계들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 장기적인 병을 앓는 경우에는 사랑하는 이를 매우 서서히 잃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상실의 다섯 단계 모두를 겪을 수도 있다. 상실의 예감이 죽기 몇 달 전, 혹은 몇 년 전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상실의 예감에서 오는 슬픔은 죽음 이후에 느끼는 슬픔과는 별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실의 예감은 앞으로 마주해야 할 고통스런 과정의 전주곡이며, 궁극적으로는 치유되어야 할 이중의 슬픔이다.



2. 슬픔에게 자리를 내어주라

슬픔(상실)의 다섯 단계는 30년 전 소개되어 지금까지 이어오는 과정에서 잘못 이해된 점이 많았다. 이 다섯 단계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만 그 상실과 함께 삶 속에서 배우게 될 것을 한데 모아 놓은 하나의 틀이지, 모두가 이 다섯 단계를 전부 겪거나 정해진 순서대로 경험하지는 않는다. 부정의 단계에서 처음에는 충격에 휩싸여 정신이 멍해지고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인다. "난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라고 말해도 이 부정이 실제 죽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슬픔의 첫 단계는 우리가 상실에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럴 때 부정과 충격은 상실을 극복하고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준다. 부정은 슬픔의 감정이 몰아닥쳐오는 속도를 더디게 해준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겪은 상실에 대해 얘기하고 또 얘기하는데, 그것은 마음이 정신적 충격을 다루는 방법이다. 또한 상실의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동안 고통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부정이 시들해지면, 상실이 현실로 서서히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그리고 '왜'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사랑하는 이가 정말로 떠나버렸음을 믿기 시작한다. 상실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묻기 시작할 때, 자기도 모르게 치유의 과정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강해지면 부정은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치유가 되면서 지금껏 부정해왔던 모든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치유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판단하지 말고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분노 그대로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분노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의료관리 체제에, 삶에, 사랑하는 이가 떠나버림에 분노한다. 삶은 불공평하다. 죽음 역시도 불공평하다. 분노는 상실의 불공평함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분노는 당신이 가장 외로울 때 친구나 가족을 당신 곁에서 떠나버리게 만든다. 당신은 또한 죄책감을 경험한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분노이다. 하지만 당신은 책임이 없다. 당신은 느낄 수 있고, 정말 사랑했었고, 상실했다는 사실들이 분노를 통해 확인된다.

화를 허락하면 할수록 마음속 깊이 감춰진 감정들을 더욱 더 찾게 된다. 보통은 상실의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분노의 강도가 감당하기 버거울 수도 있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반대편 출구로 나오게 될 것이다. 고통은 가라앉고, 상실의 감정들은 다시 형태를 바꾼다.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분노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라. 누구든 당신의 분노를 비난하도록 두지 말라. 심지어 당신 자신이라 할지라도.



타협은 슬픔 속에 자리 잡은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중요한 작용을 한다. 또한 타협은 마음이 상실의 어느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동하도록 돕는다. 타협은 우리가 각 단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는 중간 정거장이 된다. 강한 감정들이 지배하고 있는 공간들이 각각 거리를 두고 유지되도록 그 간격을 타협이 채워준다. 어쩌면 마구 흐트러져 있는 혼란 상태에 질서를 부여해준다고 느껴지게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타협의 상태가 변한다. 사랑한 이를 살리기 위해 타협을 시작한다. 나중에는 심지어 사랑한 이 대신 자신을 죽게 해달라고 타협한다. 사랑한 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가 고통 없이 죽게 해달라고 타협한다. 그들이 죽고 나면 타협은 종종 과거에서 미래로 옮겨간다. 사랑한 사람을 천국에서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타협한다. 남은 가족이 병에 걸리게 될 시기를 미뤄달라고 혹은 또 다른 슬픔이 사랑한 이들에게 찾아오지 않게 해달라고 타협하며 간곡히 청한다. 타협의 단계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만일 이랬다면…" "만일 이런다면…"이라고 가정하며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들을 다르게 바꿔보기도 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매번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사랑한 이가 정말로 가버린 슬픈 현실로.



슬픔이 치유되는 과정이라면, 절망은 그 과정에서 꼭 지나쳐야하는 단계 중 하나이다. 만일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인식하거나 친구들로부터 자신이 낙담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의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을 부정하며 빠져나올 방법을 모색한다. 고통이 혹독한 만큼, 절망은 역설적인 방법으로 치유될 수 있다. 절망을 방문객으로 여기라. 그 손님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라. 피할 방법을 강구하지 말고 다만 함께 앉으라. 슬픔과 공허함으로 인해 정화된 순수함 속에서 상실을 바라보라. 절망을 느끼도록 마음을 놓아두면, 상실 안에서 목적을 달성한 절망은 곧바로 떠날 것이다. 때때로 절망은 다시 찾아올 수 있지만, 이게 바로 슬픔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인 만큼, 절망 안에는 슬픔에 도움이 될 요소가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를 느긋하게 만들어 상실을 세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절망은 밑에서부터 다시 우리 자신을 새롭게 일으켜 세워준다. 그리고 우리가 성숙할 수 있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준다. 사람들은 흔히 슬픔에 잠긴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하며 상황을 너무 냉담하게 보지 말고 삶의 밝은 모습을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애도자가 자신의 슬픔을 인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러면 그는 슬퍼하지 말라는 말없이 그저 함께 앉아 있어준 그 사람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슬픔에 잠긴 이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짜증이 밀려오며 집중할 수도 없다. 주위에 무엇이 있든 외로움을 느낀다. 마치 저 밑바닥으로 내던져진 기분이다. 이런 삶이 영원히 지속될까 불안하다.



수용의 단계는 사랑한 이가 실제로 떠나버린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새로운 현실이 영원한 현실임을 인정하게 되는 단계이다.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도저히 치유될 것 같지 않다고 여겨지더라도 치유와 적응이 확고히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수용의 단계이다. 치유되고 있는 것은 있었던 사건들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다시금 하나씩 돌이켜보는 것이다. 신을 향한 분노가 멈출 것이다. 사랑한 이가 이제 떠나야 할 때였음을 슬프게도 깨닫기 시작한다. 사랑한 이가 퇴장한 이곳에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처음에는 부정하며 사랑한 사람이 죽기 이전의 삶이 계속 유지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현실을 받아들이며 과거를 고스란히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수용하게 된다는 것은 안 좋은 날보다 좋은 날을 보내게 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하고 삶을 즐길 때쯤, 이것은 사랑한 이를 배신하고 있는 거라고 느낀다. 물론 다른 어떤 것으로 잃어버린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결합, 의미 있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상호의존 관계를 형성할 수는 있다. 감정을 부정하는 대신, 움직이고, 변화하고, 성장하고 그리고 발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요구에 귀 기울이라.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하므로 그들의 삶에 참여하게 된다. 우정과 관계 속에 자신을 투자한다.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기 시작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슬픔에게 충분한 시간을 배려할 때만 가능하다.



3. 눈물의 샘이 마를 때까지 울라

낯선 뜻밖의 감정이 상실의 한복판에 자리 잡는다. 넘쳐나는 슬픔과는 대조적인 후련함이 바로 그것이다. 후련함이 든다는 건, 아마 사랑한 이가 무척 고통스러워했고 그 고통이 끝났음에 감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 혼란이 찾아온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후련함과 슬픔이 복잡하게 뒤섞인다. 이 후련함은 그 괴로움이 종결됐고 고통이 끝났으며 병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현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 후련함은 슬픔과 어쩌면 죄책감과도 함께 교차된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 있을 때조차도 후련함을 느끼는 것은 비정상적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느끼는 그 후련함은 폭풍이 지나가고 찾아오는 고요함이다.



눈물은 슬픔을 해소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이며, 몸 안에 내장되어 있는 놀라운 치유 장치이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대개 울기 시작하면 그 자연스러운 현상을 멈추게 하려고 재빨리 자리를 뜬다. 사람들은 한번 울면 결코 멈출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우는 것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을 알라. 정작 피해야만 하는 일은, 쏟아내어야 할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멈춰버리는 것이다. 흘리지 못한 눈물은 슬픔의 샘을 훨씬 더 깊게 채운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 눈물이 전부 빠져나오게 두라. 그러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마지막 눈물 한 방울까지 흘리고 나면 기분이 홀가분할 것이다.



4. 떠나간 이가 해왔던 것, 그것을 하라

사랑한 이가 죽을 때 그들이 맡았던 모든 역할들은 그대로 남겨진다. 어떤 역할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기도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나머지 역할을 할당해주거나 또는 누군가가 그것을 자진해서 떠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넘겨지지 않은 역할들이 아직 남아있다.

마이클과 아내 멜리사는 회사를 운영했다. 마이클은 디자인을 담당하고 멜리사는 재정 및 회사운영, 그리고 스케줄 관리를 했다. 갑자기 멜리사가 췌장암으로 죽고 한 달이 지나 은행으로부터 통장에 잔고가 부족해서 어음을 돌려보낸다는 통보가 왔다. 마이클은 아내가 병원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지난 3개월 동안 고객들에게 운송장을 발송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통장에 입금된 돈이 한 푼도 없었던 것이다. 마이클은 아내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맡았던 중요한 역할도 모두 상실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내가 했던 일을 시도해보았지만, 그 일은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님을 깨닫고 낙담하며 손을 놓았다. 누군가를 고용하려 했지만 마치 아내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이클은 누구도 고용하기를 원치 않았다. 다만 멜리사가 돌아오기만을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의 일을 다른 누군가가 맡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회계사를 회사로 직접 부르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절충안을 냈다. 대신 그는 근처 회계사무소에 자신의 정보를 주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멜리사를 대신할 역할을 비로소 인수인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 우리 삶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지 못한다. 30년 동안 친구 사이였던 엘리너와 신시아는 모든 것을 함께 해왔다. 심지어 두 사람은 2년 간격으로 남편을 잃었다. 지난 10년 간 그들은 서로 동반자가 되어 주었기에 재혼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신시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엘리너는 신시아가 자신의 삶에서 맡아왔던 역할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휴가철이 다가왔을 때, 여직원이 어디로 휴가를 가느냐고 물었을 때, 신시아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지금껏 신시아가 여행을 계획하고 맡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매년 휴가철이 되면 신시아는 선물을 포장하고 그것을 고아원에 배달하는 봉사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두 사람 자리를 미리 예약하곤 했다. 신시아는 그녀의 친구, 영화파트너, 동반자, 여행계획자, 휴가스케줄 담당자였다. 엘리너는 그녀가 상실한 모든 것이 슬펐지만 동시에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몇 해가 지난 후, 엘리너는 교회의 다양한 그룹에 참여해 일 년에 한 번 여행을 했고, 봉사활동도 많이 참여했다. 그렇더라도 어느 특정한 누군가가 나타나 엘리너에게 신시아가 해주었던 역할을 그대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사랑한 이가 죽고 나서 그 비밀이 드러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장 힘든 부분은 그 비밀을 자기 혼자만 마음속에 담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밀이 드러날 때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때론 슬픔과 별도로 그 충격을 감당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여러 면으로 보아 다뤄야 할 슬픔은 딱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사랑했던 이를 상실한 것과 그 비밀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 반응은 종종 슬픔을 만들어내는 요소가 된다. 비밀을 밝혀내면서 슬픔, 화, 분노, 배반감, 의문점들을 단독으로 하나씩 느껴야한다는 것에 유의하라.



사실상 모든 비밀이 다 부정적이지는 않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비밀스런 취미나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랑했던 사람은 충격을 받는다. 사랑한 이의 긍정적인 면을 우연히 알게 되더라도, 그것을 자신과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똑같이 곤혹스러울 것이다.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또는 심지어 그래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사랑한 이가 삶 속에서 비밀을 만들었듯 자신도 죽음과 애도 속에 비밀을 만들어 놓는다. 어떤 이들은 슬퍼하면 약해진다고 생각한다. 슬퍼하는 것은 슬픈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오해를 한다. 하지만 슬픔을 숨길 때 슬픔 자체가 비밀이 되어버린다. 문제가 되는 것은 슬픔을 숨기고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사랑한 이가 죽은 원인을 비밀로 하기로 결심한다. 좋은 죽음이 아니었다는 인식은 고통을 더해주는 비밀이 될 뿐이다. 상실은 비밀의 부담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 만일 일반 사람들에게 완전히 솔직해질 수 없다면 적어도 당신의 슬픔을 솔직하게 터놓을 수 있는 한두 명을 찾도록 하라.



궁극적으로 비밀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을 바꿔놓지 못한다. 그들의 다른 면 때문에 사랑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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