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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사기꾼

사라 버튼 지음 | 이카루스미디어
사라 버튼 지음 / 채계병 옮김

이카루스미디어 / 2006년 11월 / 390쪽 /13,000원

루이 드 루즈몽 : '일종의 환상적 모험가'


『루이 드 루즈몽의 모험 - 루즈몽 자신의 이야기』는 1890년대 출판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드 루즈몽은 《와일드 월드》지에 연재된 자서전에서 배가 난파당하면서 상륙한 오스트레일리아 오지의 광대한 황무지에서 잃어버린 30년간의 믿기지 않는 모험을 기술했다. 그는 자신의 생존을 희한한 사칭 덕분이라고 말했다. 즉 인간이 아니라 신인 척했다는 것이다. 루즈몽의 놀라운 이야기를 전 세계의 독자들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와일드 월드》지의 판매부수는 급증했다.



첫 회분이 게재되자 드 루즈몽이 언급한 두 가지 사건은 곧 엄청난 비평을 불러일으켰다. 첫 번째는 배가 난파되어 홀로 있던 처음 며칠 동안 바다거북을 타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는 주장과 관련된 것이었다. 드 루즈몽은 발가락으로 눈을 찔러 바다거북을 조정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은 분명 많은 독자에게 우스운 것이었다. 또 다른 논쟁을 일으킨 초기의 주장은 드 루즈몽의 배가 난파되기 전 그와 함께 진주 채취 여행을 한 남자가 거대한 문어에게 희생되었다는 주장이었다. 거대한 문어가 사람과 배를 휘감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건 모두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되었다.



실망한 드 루즈몽의 비판자들은 다른 부분을 공격했다. 드 루즈몽은 어떻게 그 지역을 횡단하면서 수많은 진주 채취자들과 광물 채굴자들을 만나지 못했을까? 그가 어떻게 오스트레일리아에 무수히 많은 항구들을 알지 못했을까? 아마도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2명의 백인 탐험가들에게 총격을 받았다는 드 루즈몽의 주장이었을 것이다. 탐험가이기도 한 데이비드 카네기는 "토끼에게 발포하듯이 흑인들에게 총을 쏘는 짓은 백인 탐험가나 광물 채굴자의 관행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드 루즈몽의 옹호자들은 그의 환상적인 주장들에 대해 분명한 전례를 인용하면서 비판자들 못지않은 강도로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해서 게재했다.



《데일리 크로니클》지에 쏟아지는 투고전쟁은 신문을 흥미롭게 만들었다. 또한 그에 대한 공격은 더욱 인신공격적인 것이 되었다. 풍자화와 시에서 그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되었다. 드 루즈몽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는 상당한 흥미의 대상이었다. 런던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어떤 사람은 모험가의 모습에 대해 "식인종들이 그를 잡아먹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고 실망감을 표현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논쟁은 더 고차원적인 문제로 옮겨가고 있었다.



《데일리 크로니클》지 편집자는 드 루즈몽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데일리 크로니클》의 끈질긴 진상조사로 밝혀진 진짜 이야기는 신문의 판매부수를 급증시켰다. 밝혀진 진실은 젊은 드 루즈몽은 독립심이 강한 신사가 아니라 여행 직원으로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그랭, 그리언 혹은 그린이라고 한 그는 정말 진주 채취 탐험을 시작했으며 실제로 난파당했다. 그러나 실종되었던 기간은 길어야 3년이었다. 이 신문은 드 루즈몽과 관련된 일련의 실패한 사업 계획의 윤곽을 보도했고 또한 몇 명의 아이들과 시드니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드 루즈몽의 버려진 아내의 소재까지 파악했다. 드 루즈몽의 가족들은 그가 30년간 실종되었다는 견해에 웃음을 터뜨렸다. 루즈몽의 가족은 그가 없는 동안에도 그로부터 편지를 받았었다.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편집자들은 또 다른 사실을 찾아내곤 즐거워 어쩔 줄 몰랐다. 드 루즈몽이 구출했다고 주장한 난파당한 영국소녀 블랑슈와 글라디가 존재한다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아직도 시드니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그랭의 딸 이름도 또한 블랑슈와 글라디라는 사실을 알고 당혹했다. 그랭이 순진한 독자들에게 저지른 '엄청난 사기'는 이야기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몇 주간 도서관을 드나들며 꾸며 낸 것이었다. 그러자 명성을 얻기 위해 애쓰던 루이의 종적은 묘연해졌다. 사기의 첫 번째 명백한 증거가 발표된 이후에도 드 루즈몽 혹은 그랭은 잘 피해 가고 있었다.



이 일은 아주 재미있는 소동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데일리 크로니클》과 《와일드 월드》지는 수혜자로 보였다. 불쌍한 늙은 앙리 그랭은 유일하게 손해를 본 사람이자 실패자로 웃음거리가 되었다. 더 세부적인 사실들이 밝혀지자 하인과 진주 채취자로서의 경력뿐 아니라 그가 때에 따라서 의사, 사진사, 예술가, 그리고 발명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의 '인생 이야기'는 분명 얼마간의 돈을 벌게 해 주기도 했지만 그를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루이 드 루즈몽의 모험』에서 앙리 그랭은 자신의 실패한 삶을 성공적으로 재창조했다. 사업적 통찰력의 결여는 영웅적인 생존자의 진취적 정신으로 변화되었다. 현실 세계에서 완전히 실패한 그는 상상 속 모험의 섬에서 스스로를 조난자로 만들었다. 하인 신분의 그는 선구적인 자수성가형 인간의 인생에서 스스로를 왕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대단히 실용적인 사람'은 수년 동안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1906년 7월 런던 극장에 나타났다. 그는 거대한 물탱크를 이용해 거북이 타는 기술을 공개적으로 증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성공했다. 앙리 그랭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식용고기 대용식 발명자로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호리호리하고 허리가 구부정한 채 긴 수염을 한 모습'은 샤프트베리가에서 성냥을 파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칭 탐험가이자 식인종 추장이었던 앙리 그랭은 1920년 거지로 삶을 마감했다.



VIP들 혹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

사칭은 명성에 대한 특별한 욕구로 '일련의' VIP가 되어 자신의 삶 중 상당부분을 자신의 신분을 입증하는 데 헌신한 많은 VIP 사칭자들이 존재한다. VIP사칭자들은 금전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때때로 VIP 사칭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단지 존경, 즉 자신이 '그럴듯한 어떤 사람'이라는 공식적 인정이다.



1906년 10월, 프러시아 근위대 장교 한 명과 병사들이 쾨페니크 시청으로 들이닥쳐 시장과 시장의 회계원을 체포했다. 시장은 누군가 시 회계장부를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장과 회계원은 심문을 받도록 군 감시 하에 베를린에 있는 몰트게 장군에게로 호송되었다. 사실 시장과 회계원은 무죄였으며 사건의 악역은 그들을 체포한 장교였다. 그는 장교가 아니라 구두수선공(빌헬름 보이히트)이었으며 그 순간 4,000마르크를 사취하여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퀘페니크 장교' 사건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여론은 권위를 사칭한 범죄에 분개하는 사람들과 구두수선공의 창의성과 과감성에 유쾌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기까지 한 대다수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보이히트는 군의 오만한 위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것이다. 카이저조차 보이히트를 '미워할 수 없는 악당'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이히트가 4년의 형량 중 2년만 복역한 것도 카이저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보이히트를 '국보'로 생각한 일부 호사가들은 또한 그에게 적지 않은 생활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보이히트는 카바레에서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쇼를 하며 미국 순회공연을 했고 그의 이야기는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졌다.



보이히트처럼 단독 사기행각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벤트성' 사칭자로 지칭할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이벤트성 사칭자의 대가는 미국인 베이만이었다. 베이만은 사칭이 들통나기 쉬운 것은 중재자나 보증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베이만은 세르비아 군 수행원과 미 해군 대위 두 사람의 역할을 한다. 그 둘은 제3자가 어떤 유형의 확인을 요구한다면 그를 다른 쪽 사람에게 조회할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명의 인물은 동시에 체포되어 적어도 감옥에서 벗이 될 수 있었다. 1915년 출소하자 베이만은 에단 알렌 바인베르크 중령(루마니아 총영사)이 되었다.

베이만이 미국 증기선 '와이오밍'호를 검열할 때, 후에 '와이오밍'호 선장은 "그 작은 사내는 중요한 시찰을 하는 체 했다"고 말한다. 당시 다른 사람들처럼 선장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에스톨 호텔로 그들 모두를 저녁만찬에 초대하겠다는 총영사의 뜻밖의 제안에 선장은 부하 장교들처럼 기꺼이 수락했다. 파티는 FBI가 그 사건을 주시하면서 《뉴욕 타임스》지의 주목을 받았다. FBI는 무례하게도 파티 중에 베이만을 체포했고, 끌려 나갈 때 "디저트가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 줄 수 있는 것 아니냐"라는 말이 들렸다. 역사는 '와이오밍'호 장교들이 후식을 먹었는지 여부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베이만은 병원직원, 변호사, 순회설교자, 의사 등을 사칭했다. 1948년 베이만은 가짜 신분증으로 국제연합에 들어가면서 언론인으로 변신한다. 그는 곧 미국과 러시아 대표단 의장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여기서의 '실제'직업은 베이만에게 아주 잘 맞았다. 베이만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받은 태국 대표단은 그에게 자신들의 언론 담당관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베이만은 완전한 외교 신임장을 받은 그 자리가 자신의 미국 시민권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에 대해 미국무성에 문의함으로써 파멸을 자초했다. 베이만의 이름은 곧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으로 그의 UN 접촉은 끝을 맺었다. 이처럼 사칭자들은 때로 불필요하게 위험한 전략들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히트, 오토, 베이만 모두가 제복의 힘을 알고 있었다. 베이만이 다양한 직업의 직함들로 시험했듯이 사칭자들은 또한 세습적 칭호와 배타적 관계의 특이한 매력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VIP 계급 중 최고위층을 탐색했다.



1568년 포르투갈의 세바스찬 왕은 모로코 정복에 나섰다가 전사자의 명단에 포함됐다. 그러나 세바스찬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적당한 시기에 실종된 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584년 이후 10년간 3명의 세바스찬이 나타났다. 첫 번째 젊은이가 나타나 자신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리기도 전에 갤리선의 노예로 보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기지를 발휘해 다시 노르망디 공작을 사칭한다. 두 번째의 '실패한 수도사'는 다소 잘 해 나갔다. 그는 포르투갈이 몰락한 데 대한 자신의 책임을 비통해 하는 것이 '드러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계산된 연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는 사칭을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국왕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계획이었다고 선언하는 순간 스페인 군대에게 체포되었다. 그의 놀라운 계획은 교수형과 함께 좌절되었다. 세 번째 세바스찬은 60살의 요리사로 세바스찬의 역할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으며 약식으로 처형당했다.



세바스찬주의는 일종의 포르투갈 판 메시아주의가 되었다. 세바스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조건적 복종에 익숙한 군인 집단이든 혹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집단이나 상징적 인물을 몹시 필요로 하는 정치 단체이든 간에 VIP 사칭자들의 성공여부는 그들을 필요로 하며 그들의 주장에 쉽게 동조하는 특정 사회집단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사회집단이 20세기 말의 뉴욕인들처럼 똑똑하고 부유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사칭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페르디난트 발도 데마라와 다른 전문직 사칭자들

사칭자들 중 가장 당혹스러운 유형들 중 하나는 교수, 의사, 목사 등 전문직 사칭자들이다. 전문직 사칭자들의 범죄로 상처를 입는 사람이 그들의 교육이나 치료, 조언을 받은 사람들만은 아니다. 그들이 위장한 직업들도 신뢰를 잃으며 대중이 분노를 터뜨리는 대상도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단체들이다. 이러한 단체들의 '잘못'은 사칭자들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체와 전문직업인들은 사칭자들의 행각에 대한 공개를 피하고 싶어 하는 바람 때문에 사칭자들을 돕게 된다. 결국 사칭자는 다른 대학, 다른 병원, 다른 교구에서 또다시 거짓말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전문직 사칭자들은 확고한 목적의식과 운명관에서 동기를 부여받는다. 사실이 드러났다고 사칭자의 욕망이 축소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단지 계획된 도정을 어렵게 할 뿐이다. 변호사 사칭자들도 많지만 주된 관심이 돈이기 때문에 이 책에선 포함되지 않았다. 반면 의사와 교수 사칭자들은 분명 다른 모호한 이득을 추구하며 성직자를 사칭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리브드 윌프레드 엘리스는 1883년 교회 목사가 아니라 전 정육점 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25년 동안이나 목사로 있었다. 이러한 사칭의 심각한 결과는 도덕적 공황이라기보다는 행정적인 문제였다. 백여 쌍의 부부들은 결혼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죄인들의 아이들이 사생아가 아니라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의회가 개입해야 했다.



'위대한 사칭자'로 알려지게 된 페르디난트 발도 데마라의 유일한 장점은 다재다능했다는 것이었다. 데마라는 교회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 이름으로 트라피스트회 수도사와 베네딕트회 수도사를 사칭했었다. 데마라는 자신이 사칭한 일들을 잘 해냈으며 때로 극적으로 해냈고 해군 군의관으로서 환자의 생명을 여러 차례 구했다. 학교 선생으로서 데마라의 능력은 체포되었을 때 학부모 대표가 그의 석방뿐 아니라 복직을 탄원했을 정도였다. 학부모들은 데마라가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합법적인 실제 인물로서의 그는 영락없는 낙오자였다.



1941년 데마라는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미군에 입대했다. 곧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데마라는 군대에서 도망친 후 두 곳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 짧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했다. 데마라는 다시 변화가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본명으로 해군에 지원했다. 데마라는 신분을 도용하고 공식 증명서를 위조하고 가짜 증명서를 만드는 데 능숙했다. 그는 위조된 서류를 가지고 장교위원회로 갔다. 군 당국은 그의 증명서를 대조했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해군군복과 함께 부두에서 발견된 그의 유언장에는 "바보같은 짓을 했다. 용서를 빈다"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데마라의 죽음은 그의 위조된 문서들처럼 거짓이었다.



데마라는 명예 제대증과 장교 신분증(둘 다 위조한 것)을 구입했고 모아두었던 신분증들 중 해군 장교인 심리학 박사 프렌치가 되기로 결심했다. 데마라는 프렌치 박사로서 성 비아터 성직자회에 가입했다. 그렇지만 수도사 수련과정이 시작되자 데마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교회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많은 성직자에 대해 그다지 좋은 평가를 할 수는 없었지만 데마라는 분명 신성한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마라는 성 비아터를 떠나 가톨릭 교육기관인 개넌 대학으로 갔다. 그는 대학 당국에 심리학과를 설립해 운영하겠다고 제안하며 접근했다. 단기간에 데마라는 철학과 학장이 되었다. 데마라는 권력관계가 확립되어 있고 이미 이해관계의 영역이 드러나 있는 다른 사람의 위원회에 결코 가입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자신의 위원회를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불신하거나 해코지할 이유를 찾게 될 원인을 제공하지 않아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사칭자들에게는 '적을 만들지 않으면서' 권력을 얻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이 같은 예는 데마라가 심리학을 지혜롭게 응용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데마라는 군당국에 체포된다.



출옥한 이후 전과자라는 낙인은 데마라를 괴롭혔다. 데마라는 캐나다 해군 징병국에 자신이 조셉 사이어 박사라고 소개했다. 한국전이 진행 중에 있었고 캐나다 해군은 의사를 몹시 필요로 하고 있었다. 데마라는 해군 군의관이 되어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진짜 사이어 박사는 그의 영웅적 기사를 읽고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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