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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거짓말

기 소르망 지음 | 문학세계사
저항하는 사람들



2005년, 새해 첫날이었다. 웨이징성(魏京生)이 워싱턴의 차이나타운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그를 반겼다. 웨이는 중국 감옥에서 1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미국으로 추방당한 노동자 출신의 반체제 인물이자 인권운동가이다. 그의 공적인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78년 12월 5일이었다. 그 당시 웨이는 29세로 폴란드의 레프 바웬사와 같은 전기공이었다. 그는 베이징의 한 담벼락에 대자보를 붙였다. 대자보 제목은 '제5대 현대화-민주주의'였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용어로 '4개 현대화'라고 부르는 것을 권장하였다. 이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였다. 웨이는 '4개 현대화' 속에 다섯 번째 현대화를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의 현대화였다.



대자보가 붙여졌던 '민주의 벽'은 파괴되었고, 웨이는 체포되었다. 웨이의 재판은 선택된 방청객들 앞에서만 개최되었다. 그러나 한 기자가 그 재판 장면을 찍었고, 그 해적판 비디오테이프가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기자는 이 일로 인해 10년간 강제노동형을 살았다. 웨이는 창문 없는 지하 독방에서 스탈린과 나치 시대 때의 죄수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공포를 모두 참고 견디었다. 그러나 1994년, 형을 다 마치고 석방된 후 그는 또다시 체포되었다. 2년 동안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웨이가 다시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었을 때, 서양의 인권단체들이 웨이의 석방을 요청했고 웨이는 건강상의 이유로 미국으로 보내졌다.



웨이징성이 미국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클린턴 대통령이 그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 어떤 공식적인 지지도 누리지 못했다. 수많은 미국 재단들이 공산당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공산당은 웨이징성과 같은 반체제 인사들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기구들과 정부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일은 비즈니스 계약을 취소하거나 비자 발급을 못해 준다는 단순한 위협만으로도 충분하다. 쟈크 시라크 대통령은 달라이 라마와 웨이징성이 프랑스를 경유할 때 그들과 만나는 것을 언제나 거부했다. 그러나 파리 시장 시절의 자크 시라크는 바로 그 달라이 라마에게 찬사를 보냈었다.



민주주의의 베테랑 펑란루이

펑 여사는 20살인 1940년대부터 마오쩌둥 곁에서 일한 중국 공산당의 주동인물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자유주의의 영감에서 나온 경제서적 시리즈를 출간하면서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드러냈다. 그때부터 이 책들은 사회개혁론의 입문서로 간주되었고, 1989년 봄, 천안문에서 베이징의 학생들과 많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학생들은 당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과거 자신이 혁명을 믿었던 것은 바로 젊음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혁명의 본질보다는 지식인의 서정주의가 더 컸던 것이다. 그녀는 중국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려면 간헐적인 시위가 아닌 "꼭대기를 통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대다수의 중국 지식인들처럼 그녀도 당 내부에서 조직을 무너뜨릴 중국의 고르바초프나 옐친을 기다리고 있었다.

잡초들



'잡초 뽑기' 이 용어는 1959년 마오쩌둥이 공산당 당원들에게 내린 강령이다. 마오쩌둥은 짧은 기간이나마 "백 송이 꽃이여 피어나라(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는 슬로건에 따라 예술과 학술분야에서 작품 및 학설을 자유로이 발표하고 논쟁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활짝 피어나자 마오쩌둥은 겁을 먹었다. 마오는 곧 '백송이 꽃의 시대'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독재 하에서 가장 말을 듣지 않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모두 가려냈다. 그리고 그들 중 10%를 다시 뽑아내어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거나 처형시키라고 공표했다. 이렇게 시작된 '잡초 뽑기'라는 표현은 아직까지 공산당 내부 용어로 남아 있다.



허난성의 수도 정저우(政州)의 병원 의사였던 가오 야오지에는 65세까지 별 탈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오 박사의 운명은 1994년 상차이 현에서 온 농촌 여자 두 명을 진찰하게 되면서 뒤바뀌고 말았다. 상차이의 두 여자는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었다. 가오는 두 여인을 진찰하다가 그들의 양팔에 주사 바늘 자국이 수없이 많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들은 십 년 전부터 생계 수단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피를 팔아 왔던 것이다. 허난성에서는 1980년대 초부터 혈액매매가 자행되었다. 이를 통해 부자가 된 간부들은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매혈을 한 희생자들도 역시 부자가 되었을까?



가오 박사는 조사를 위해 상차이에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매혈을 하는 마을 사람들의 혈액이 단 하나의 주사기를 통해 채혈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혈액은 그 자리에서 원심 분리되어 혈장만 보관되고 혈구와 혈소판들은 제공자들에게 도로 재수혈되었다. 이로 인해 기운이 빨리 회복된 매혈자들은 일주일에 두 번, 아니면 그보다 더 자주 피를 팔 수 있었다. 다시 매혈을 할 사람은 처음에 받은 돈의 절반가량을 도로 반납해야 했지만 가난한 그들은 이러한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고, 모두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었다. 가오 박사는 곧 보건당국에 이러한 사실을 알렸으나, 그들은 입을 다물 것을 그녀에게 명령했다.



가오 박사는 국제적인 신문에 이 사실을 제보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즈》와 《리베라시옹》이 현장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의 기사를 읽은 베이징의 지도자들은 1996년 마침내 혈액매매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허난성 하나만 보더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사는 이주자들이 많다. 이들은 벌써 베이징이나 광둥에서 이런저런 통로로 바이러스를 확산시켰을 것이다. 여기에다 허난에서 팔려 간 혈액을 수혈 받은 사람들까지 있지 않은가. 공식적인 시효를 넘기고 혈액이 거래되는 것도 문제다. 가오는 법적 시효기간을 2년이나 넘긴 혈액 재고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기사화하는 언론 매체는 없었다. 그래서 가오는 이러한 사실을 웹사이트에 전부 다 올렸다. 그녀는 투쟁만 할 뿐, 정치화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 잡초들이 일을 도맡았다.



반체제 신문기자 옌(Yan), 검역에 반기를 들다

옌은 신문기자로서 지방 일간지에 시평(時評)들을 연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필명으로 공산당의 내부 기관지의 편집자 일도 한다. 내부 기관지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많은 대중들에게 배포하는 용도이고 다른 하나는 당 간부들 용이다. 첫 번째 신문은 오로지 선전만 실어 간행한다. 공산당 간부들은 이 기사들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들이 선전을 만들어낸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중앙당의 편집부는 매 십 일마다 취급할 주제와 찬양해야 할 영웅들 이름을 기입해 놓는다. 기자들은 파면당하지 않기 위해 여기에 순종한다. 간혹 대담한 자들도 있다. 이들은 지시의 틈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가 다양한 사건들과 중국 사회의 잔혹성을 드러내 주는 수탈 사례를 상세히 보도하기도 한다.



스타오라는 기자는 2005년 9월, 국가 기밀을 폭로한 죄로 10년 형을 언도 받았다. 사실 그는 선전부가 내린 지시사항들 중 특별한 비밀도 아닌 자료를 하나 웹에 올렸을 뿐이다. 스타오가 제일 먼저 글을 올린 곳은 야후에 있는 그의 이메일 주소를 통해서였다. 야후의 사장도 중국 태생이다. 그런데 그는 스타오의 이름을 공개했다. 미국의 대중매체들이 이를 공격하자 그는 우리나라의 관습을 존중한다고 변명했다. 도대체 관습이라니? 당의 관습은 검열과 밀고에 동조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야후에 '알리바바'라는 이름으로 웹 포털을 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투자를 축하하기 위하여 빌 클린턴은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신비주의자들



중국 공산당은 유교 뒤에 몸을 숨기고자 한다. 그들이 중국 전통 안에 서 있다면, 당이 대죄를 저질렀다고 사람들이 당을 규탄하거나 단죄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자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밖에서 더욱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은 노련하게도 공자 뒤에 몸을 숨기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식들과 제사가 치러지던 사당들은 파괴되고 없다. 이는 본래의 유교에 대한 살균조치 이다. 중국 공산당은 2005년 공자가 태어난 고향인 산둥성에 있는 취푸라는 도시에 성벽을 다시 쌓았다. 이로써 '취푸'는 관광객들의 놀이공원이 되어버렸다. 엄격한 숭상의 대상이었던 유교가 마케팅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반-공산당으로서의 파룬궁

1980년대 온 중국이 기공 열풍에 사로잡혔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하면 기공이나 전통의학이나 침술은 서구적인 지식에 대한 애국적인 대안들이었다. 그러나 기공 열풍에는 불교와 도교에 대한 중국인들의 향수가 깔려 있었다. 리홍즈는 공산당 간부로 당이 격려하는 기공(氣功) 선생이었다. 그는 반세기 동안의 폭력, 밀고, 조직화된 증오 위에 단지 사랑과 환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다. 이에 파룬궁의 신도들은 매료되었다. 파룬궁의 가입자들은 대다수 퇴직자들인데, 이외에도 공무원, 군인, 대학생, 심지어 당원들 중에서도 리홍즈의 메시지를 믿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파군궁은 당 지도자들에게 불안의 근원이 되었다.



1999년 4월 17일, 인터넷으로 협의한 만 명의 파룬궁 신도들이 베이징의 인민대회당 앞에 모였다. 리홍즈를 모욕하는 신문 기사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이날로부터 파룬궁 신도들은 추적당했다. 중국 정부는 파룬궁 신도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지역의 기초 위원회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따라서 지역장은 파룬궁 신도를 발견하면 재판 없이 행정적인 감금을 하거나, 감옥에 보내거나 처형을 하는 등 강력한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단지 건강을 위해서 기공체조를 하는 사람들과 교주를 따르는 파룬궁 신도를 가려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특수간부들은 공원, 호수가, 사원 부근들에 체조 기계를 설치해 놓았다. 또한 현대적인 왈츠를 추라고 권장했다. 공원에서는 왈츠음악이 흘러나오고, 노인 커플이 형성되고 옛 중국은 사라졌다. 이렇게 하여 파룬궁은 겉으로는 사라졌다. 그러나 파룬궁은 거대한 비밀 단체가 되었다. 이들은 인터넷으로 그리고 SMS로 회원들을 모집하고 있다.



굴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우리는 시안의 서쪽에서 밤낮으로 건설 중인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200㎞쯤 가자 고속도로의 폭이 좁아졌다. 여기저기 파손된 부분이 드러나고 움푹 패인 구덩이 속으로 트럭들이 빠졌다. 이 도로는 '두부'길이라고 누가 설명해 주었다. 이 지역의 공무원들이 자금을 빼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공항과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을 때가 많다. 중앙부와 서부지방에서 고속도로를 주로 이용하는 자들은 단지 정치 지도자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누가 상환해 줄 것인가? 고속도로 건설에는 국립은행들이 융자를 해 준다. 그리고 이 은행들은 대출해 준 금액들을 절대로 돌려받지 못한다. 고속도로 회사들도 대부분 국유기업들이다. 이들은 도로 양쪽으로 넓게 땅을 수용하고 있다.



여행의 종착지는 불사조 탑이라는 마을이었다. 그곳의 주민은 만 이천 명이다. 중국의 농촌은 멀리서 보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목가적이다. 그러나 실상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목가적이지도 않다. 집안에는 필요한 침구들과 풍로, 걸상 몇 개밖에 없다. 난방기구로는 벽돌 화로인 캉뿐이며 지푸라기나 잔가지들로 불을 땐다. 위생 같은 것도 없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는 공공장소가 없으니 사교생활도 없고, 서로 간의 일치나 협조도 없다. 물론 읍마다 전기가 들어오고 텔레비전도 개통되었다. 그러나 공영 채널 하나밖에는 시청할 수 없다. 이 채널은 정부의 훈계조 방송을 내보내며 쇼 프로를 많이 방송한다.



불사조 탑 마을에는 외관이 좋고 세련된 학교가 하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4분의 1 이상은 길거리에서 배회하거나 밭에서 일을 한다. 부모들의 가난 때문이다. 도시의 학교들은 무상교육이거나 공기업들로부터 보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부모들이 학용품과 교실 난방비와 분필 사는 비용과 구내 식당비도 지불해야 한다. 또한 교장들이 생각해내는 다른 여러 가지 수당들도 지불해야 하며, 교사들의 선물도 챙겨야 한다. 교사들을 변호하자면 그들이 받는 월급이라는 것이 극히 소액이다. 교사들이 기거하는 오막살이는 난방이 되지 않는 방 한 칸이며 그 안에는 초라한 침대와 화로만 있을 뿐이다.



도시에서 양성된 학위증이 있는 교사들은 모두 이런 환경을 떠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을에 남아 있는 교사들은 진짜 교사가 아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교사들은 2주간의 표면적인 연수만 받은 지방의 농부들이다. 이런 교사들은 수업시간 사이사이에 밭으로 나가 경작을 한다. 당이 떠벌리는 9년 무상교육은 하나의 소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문맹자 비율이 인구의 4분의 1, 특히 여자들의 문맹율이 왜 높은지를 설명해 주는 단적인 예다.



농부들에게 최악의 불행은 병에 걸리는 것이다. 그들은 위생규칙들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손을 잘 씻지도 않으며 가축들과 같이 생활하는데 이 두 가지 사항이 주된 감염요소이다. 수술비는 항상 선불로 지불해야 하며 약값이 지나치게 비싸다. 이 약값은 수년 동안이나 빚을 져야 하는 금액과 맞먹는다. 이렇게 비싼 비용을 치르고도 때로는 더 안 좋은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한 번 사용한 주사바늘을 재사용하고 시효가 지난 약들을 주기도 하여 간염에 감염된 많은 환자들이 간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농촌에는 젊은 남자나 여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두 중국 동부의 공장으로 일하러 갔기 때문이다. 마을의 책임자들은 지역당의 상관으로부터 연간 쿼터 할당을 통고 받는다. 책임자가 이 쿼터제를 지키지 않으면 벌금을 물거나 당에서 강등당하게 된다. 즉 아이들이 16세만 되면 마을에서 떠나 노동력을 팔게 하라고 책임자를 부추긴다. 부모들도 이런 집단 이동에 협력한다. 자식이 도시로 나가게 되면 그가 받는 월급의 일부를 생활에 보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이 종적을 감춰버리고, 이로 인해 고아들의 수는 더 많아졌다. 이 고아들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즉시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이제 중국에서 중요한 덕행으로 치는 효심은 시장경제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현재 중국 대도시에 있는 사람들의 3분의 1은 농촌 이주민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도시호구를 취득하기란 불가능하다. 상하이를 예로 들자면, 이곳도 다른 중국의 도시들처럼 혈연을 통해 내려오는 일종의 지방 국적이 존재한다. 2005년 상하이 시에서는 결혼을 통해 호구를 취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하지만 15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한 후에야 비로소 지방 호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사정이 이러니 이주민들은 도시 주변 빈민지대의 시민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임대주택, 초등교육, 의료혜택, 도시나 기업의 보조금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이들이 도시의 납세자도 아니거니와 분담금을 낸 적도 없다는 것이 이유이다.



2005년 10월, 중국정부는 민주주의에 관련된 백서를 공표하였다. 이 백서는 중국어와 영어로 동시 출판되었다. 백서가 영어로 출간되었다는 것은 서양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이 백서는 오로지 1949년부터 당이 이룩한 성공 사례만 수록되어 있었다. 같은 10월, 정부는 과학을 통한 조화의 프로그램을 예고했다. 10월에 로켓탄포를 발사하여 두 명의 우주인을 우주로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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