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 외과의사다
민병철 지음 | 새론북스
01. 소년 인생을 펼치다
호기심 천재서울에 올라온 것은 경기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태생은 서울 소격동이지만 다섯 살 때 진주로 이사를 갔으니, 서울은 내게 낯선 타향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1941년 일정시대의 서울은 진주에 비하면 활기가 넘쳐흘렀다. 보는 것마다 신기하고 재미있어 잠시도 똑바로 걷지 못한 채 시내 구경에 한눈을 팔았다. 그중에서도 내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 것이 전차였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대한 압박감이나 긴장감은 둘째치고, 시골에 내려가기 전에 꼭 한 번 전차를 타보겠다는 설렘에 들떠 있었다. '정말 신기하다.'
입학시험은 잘 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판시험이 까다롭기는 했어도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적어 넣었다. 이틀에 걸친 입학시험이 끝났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2차 지원 중학교에 가서 또 시험을 쳤다. 그 당시에는 으레 그렇게 입시를 치렀다. 2차 시험을 보고 교문을 나서는데 정문 앞에 아버지가 서 계셨다. "병철아, 니 경기중학교에 합격됐다." 시험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아버지, 전차를 한번 타보고 싶습니더." "그리 하그라."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서 내 손에 5전을 쥐어 주었다. 동시에 여관 이름이 적힌 종이와 수험번호를 쥐어 주고는 안국동에서 전차를 태워주었다.
02. 전쟁과 의과대학생
바이올리니스트 의과대학생8·15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진주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그때부터 나는 바이올린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음악에 취미를 갖게 되면서 나에게는 다방에서 온종일 명곡을 감상하는 취미가 생겼다.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사준 바이올린으로 나는 골방이나 광에서 연습했다. 수험생이 되면서부터는 일단 대학을 들어가고 봐야 했기에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공부에 열중했다. 놀긴 했지만 한번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광기를 뿜어대며 미친 듯이 공부했다. 3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한 끝에 나는 경성대학 예과(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경성대학 예과에 다니면서 나는 바이올린에 심취했다. 본과 1,2학년 때까지도 옆집에서는 내가 음대생인 줄 알 정도였다. 배가 고파 공부를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생활고로 먹는 것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골에서 부쳐온 생활비 절반을 레슨비로 사용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작곡 레슨까지 받았다. 연주하기 좋게 편곡을 해야 할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해 함께 연습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라디오 방송에까지 출연하여 생방송으로 연주도 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메디컬 오케스트라'는 1년에 두 번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그 시절 나는 음악으로 재능을 살리고 싶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서울대 예과 2학년 때, 집안에서 혼담이 오가는 규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경기여고를 다니다가 소개 전학(疏開轉學: 공습이나 화재 따위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이나 시설을 분산시키는 것)으로 진주에 내려와 진주여고를 다녔고 해방 후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갔던 규수였다. 진양군(晋陽郡) 지수면(智水面) 승산리(勝山里)가 고향인 규수 허영애(許英愛)는 만석꾼 명문가의 1남 3녀 중 막내였다. 당시만 해도 직접 맞선을 보는 것은 어려웠고 서로 사진을 교환해 보는 정도였는데, 나는 도무지 사진만 보고는 결정할 수 없었다. 내 뜻대로 여학생이 학교를 오가는 길목에 서 있다가, 교복을 입고 지나치는 모습을 찬찬히 엿보았다. 참한 얼굴과 조신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 결국 집에 결혼하겠다고 기별을 보냈다. 결혼식은 처가인 지수면에서 전통 혼례로 치렀다.
의과대학 3학년 때, 소독(消毒)에 대한 개념이 없어 혼났던 경험이 있다. 본과 3학년에 갓 올라온 우리는 산부인과 수술을 참관하러 수술실에 들어갔다.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조를 이뤄서 들어갔는데, 간호 조무사가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수술대에 가까이 가지 마세요." 그때 수술대 아래로 기구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얼른 그것을 집어서 소독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소독하지 않은 손으로 만진 오염된 기구를 수술대에 올려놓자마자, 조교수였던 이수종 선생(훗날 수도의과대학 학장)이 눈을 부라리며 불호령으로 나를 수술실에서 내쫓았다. 나중에 설명을 듣고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내가 쫓겨나자마자 소독한 테이블보 전체를 교체하였다고 한다. 그 뒤 우리가 이비인후과를 돌 무렵 6·25 전쟁이 발발했다.
생계, 그 참을 수 없는 문제전시연합대학이 부산에 발족되었다.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의 의과대학생들을 한군데 모아 합동수업을 했다. 서울의 4개 대학, 즉 서울대, 연대, 이화여대, 수도의과대학(고대 전신) 학생이 함께 수업을 받았는데 한 학년당 학생 수는 30명이 전부였다. 그 수업을 받기 위해 거리로 나오다가 까딱 잘못하면 곧바로 징집되어 전장으로 끌려가기 일쑤였다. 일단 학교는 졸업해놓고 입대하기 위해서 요령껏 밖에 나다녀야 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1952년 2월, 졸업이 다가왔다. 이때 나는 자신을 돌이켜 보며 뭔가 획기적인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졸업과 함께 주저 없이 해군 군의관에 자원입대를 했다. 1952년 3월, 서울대, 연세대 졸업생 열세 명과 함께였다. 군의학교에 입소한 열세 명의 군 후보생들은 한방에서 자고 함께 훈련했다. 훈련 중에 가장 큰 고생은 뭐니뭐니 해도 배고픔이었다. 식사라고 해봐야 잡곡밥과 소금물 한 종지가 전부였다. 끼니때마다 식탁에 앉을라치면 소금물에 밥을 말아 젓가락으로 휘저어 후루룩 마시면 뚝딱이었으니, 식사시간은 30초면 족했다. 하루 세 끼가 이런 식이었다. 혈기 왕성한 장정들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칼로리 섭취는 꿈도 못 꾸었고, 만날 영양결핍 상태인지라 틈만 나면 졸렸다. 옆에 있는 동료들도 나와 똑같은 증세를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우리의 그것은 퍽, 하고 퍼지는 소똥처럼 푸석푸석했다. 보통의 자줏빛을 띤 갈색의 똥과는 전혀 달랐다. 풀만 먹는 소가 푸석푸석한 똥을 누는 이유를 그때 알았다. 어쩌다가 일요일에 외출이 허용되어 쌀밥과 수육을 먹고 들어오면, 다음날 본 용변 상태는 확연히 달라졌다. 군 당국은 석 달의 훈련 기간 동안 오전에는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52년 졸업생부터는 의사고시를 치러야만 의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새로운 제도 속에서 우리는 모두 열심히 공부하여 그해 5월 말, 열세 명 전원이 의사고시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내 앞에는 임관(任官) 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해상 근무에 적합한지의 여부를 가늠하는 것인데, 나는 배멀미를 심하게 했다. 당연히 인사기록부에는 해상 근무 부적격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그러한 판정을 안고 해군 중위로 임관된 직후, 나를 비롯한 모두가 진해 해군병원의 인턴으로 배치되었다. 주로 외과만 있던 진해 해군병원에서 그렇게 교대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1952년 6월이었다.
유학 가지 않을래?진해 해군병원 일반외과 과장은 송전무 대위였다. 송 과장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미국에서 2년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보기 드문 인재였다. 그는 인턴들을 가르치는 일이 몸에 익은 사람이었다. 송 과장은 인턴들에게 교대로 세미나 주제를 준 뒤, 여러 군의관들 앞에서 발표를 시켰다. 나는 나에게 부여된 '급성 신장부전증'에 대해 공부를 해야 했고 2주일 뒤 세미나에서 30분간 발표를 했다. 급성 신장부전증이란 심한 출혈로 혈압이 떨어져 신장의 혈액순환 상태가 나빠지면서 신장의 기능이 소실되어 오줌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증상을 말한다. 나는 부상병들을 통해 그와 같은 상태를 봐왔다. 의료 지식이 부족했고, 인공신장기도 등장하기 전인 시절이었기에 이 증세가 오면 대개 살아남지 못했다.
나는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해 급히 관련 참고문헌을 찾고 이를 구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나는 존슨 중령을 보좌하고 있던 터라 중령과 같이 사용하는 책상에 참고문헌을 가져다 놓고 하나씩 검토하면서 공부에 몰입했다. 퇴근 후에도 계속 남아 발표 준비에 정성을 쏟았다. 물론 그러한 공부는 존슨 중령이 부여한 업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고 난 다음에 했다. 이와 같은 완벽주의는 늘 내 인생을 개척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루는 존슨 중령이 다가와 말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지? 한 번 볼 수 있을까?" 나는 관련 자료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자료를 유심히 읽어보던 존슨 중령이 말했다. "넌 참 열심히도 공부하는구나. 미국에 유학 가고 싶지 않니?"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 번 천 번 가고 싶죠. 하지만 어떻게……." "인턴 자리는 내가 소개해줄 테니, 제대 문제는 민 중위가 알아서 해결해봐." "고맙습니다."
신이 났던 나는 결코 길지 않은 기간 안에 세미나 준비를 마쳤다. 물론, 발표는 성공적이었고 함께 모인 사람들로부터 한결같은 칭찬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송 과장의 교수법은 내 평생의 진로를 바꿀 만한 일을 벌이게 하였다. 존슨 중령은 미국에 있는 여러 병원에 서신을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콜로라도 주 덴버의 한 병원으로부터 인턴으로 오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꿈만 같았다. 유학이라니!
03. 외과의사의 길에 들어서다
실력, 영어, 체력의 한계에 도전1954년 7월 말, 내 나이 만 24세 8개월 때 드디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막상 인턴 생활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나는 나 자신이 미국 출신의 인턴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실력, 영어, 그리고 체력이었다. '어떻게 따라가지?' 어쩌겠는가? 나는 일이 끝나면 무조건 병원 도서관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하도 열심히 공부에 매달리다 보니 폐관 시간인 열 시가 되면, 사서가 도서관의 규칙마저 어겨가며 내가 『NEJM :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세계적인 권위의의학 저널)을 가지고 나가도록 허용해주었다. 나는 의학사전을 펼쳐놓고 『NEJM』에 실린CPC(Clinical-Pathological Conference, 임상-병리 집담회) 자료를 단어 하나하나 일일이 찾아가며 공부했다...이를 통해 내가 잘 모르는 혈액 검사라든가 엑스레이 촬영법 등을 의학용어와 함께 알아가면서 실제 임상에서 환자를 다루는 법에 대해 조금씩 터득해나갔다.
나는 교과서 위주의 공부보다 실제 임상경험 판례집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살아 있는 공부를 했다. 『NEJM』에 나오는 CPC 자료를 매주 한두 권씩 6개월 정도 공부하자, 내가 보기에도 눈에 띄게 실력이 향상되었다. 이 무렵, 미국인들은 실력으로 보자면 더 이상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 같은 외국인들은 이상하게도 늘 그들에게서 소외되었으므로, 나는 항상 나 자신과 싸우는 고독한 생활을 반복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오직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돌이켜 보면 정말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자원한 인턴 3년미국의 전공 제도상, 외과 특과를 하려면 일반외과를 1년 더 순환 근무해야만 했다. 보스턴의 터프 츠 대학을 소개받았다. 시카고를 경유하여 보스턴에 도착한 1954년, 당시 보스턴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지저분한 고도(古都) 같다는 것이었다. 시험을 칠 줄 알고 내심 긴장했었는데, 면접장에서 만난 교수들은 나와 잡담만 나누었다. 한 일반외과 교수는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라고 했더니, 그와는 30분 내내 음악에 관한 이야기만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마쳤다. 물론 다른 외과 교수들과도 교대로 인터뷰를 계속했다.
하루 종일 인터뷰를 하는데도 외과 교수들은 외과에 관한 질문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로서는 의아했는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네가 배우러 오는 것이지 가르치기 위해 오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과연 배울 마음이 있는지, 한 인간으로서의 교양은 갖췄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인터뷰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인터뷰는 훗날 내게도 후진들을 양성하는 데 소중한 기준이 되었다. 인턴이 여러 과를 도는 덴버와는 달리, 보스턴에서는 외과 계통에서만 붙박이로 일하는 인턴 생활이었다.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나는 고민 끝에 일단 터프츠 대학으로 갈 생각을 굳혔다.
터프츠 대학 의과대학병원(New England Medical Center, 공식명칭은 뉴잉글랜드 메디컬 센터)에서는 7월 1일부터 정상 근무를 했다. 확실히 보스턴 의사는 보수적이었다. 환자를 대할 때, 항상 와이셔츠를 입고 타이를 매야 했다. 머리를 감고 빗는 시간마저도 아까워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다니던 나에게도 이 규칙은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환자에 대한 피검사(CBC)와 소변검사(Urinalysis)는 물론, 환자가 수술할 부위의 털을 깎고 관장을 하는 것까지도 인턴의 몫이었다. 미국 남자들은 가슴에 털이 많아 개복수술을 하기 전에 면도를 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전동 면도기가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옛날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식도 같은 면도날로 백인들의 가슴 털을 밀었다. 그러다가 졸기도 하는 날에는 환자를 베기도 했다. 그뿐인가, 수술 직전에 장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지 않으면 레지던트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수술하다가 장에서 똥이 나오면 너한테 먹인다!"
인턴에게 레지던트의 명령은 법이다. 그러니 다음 날 아침까지 인턴은 환자에게 찰싹 달라붙어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지켜봐야 한다. 신환(新患)이 들어오면 환자의 병력을 자세히 듣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진찰을 해야 한다. 직장 검사를 포함해서 그 어떤 검사라도 하나가 빠지면 레지던트의 불벼락을 피할 수 없다. 수련 시절에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이러한 훈련은 훗날 남에게 일을 정확히 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필수 과정이었다. 손가락으로 하는 직장검사나 여자 환자의 내진을 할 경우에도, 정상적인 상태를 100번은 경험해봐야 정상이 아닌 이상(異常)을 인지할 수 있다며 훈련을 반복하게 했다. 결국 인턴은 모든 업무를 마친 새벽 1시 이후에도 환자의 소변검사와 피검사를 직접 해야 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새벽이었다. 그때부터 잠자리에 들어도 기상 시간은 여지없이 5시 30분이었다. 일어나면 바로 세수를 한 뒤 숙소에서 걸어 나오면서 나비넥타이를 매고 길을 건너 병원으로 들어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새벽 6시였다.
또한 회진하기에 앞서 치프 레지던트가 묻는 환자에 대해 인턴은 모르는 게 없는 박사가 되어야 했다. 질문이 무엇이든 명쾌하게 풀어서 그와 관련된 수치를 말할 수 있어야 했다. 만일 엉터리로 보고하거나 환자의 위액과 오줌, 담즙의 양이라도 틀릴라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쭐이 났다. 한 번의 폭풍 같은 질책이 연말에 레지던트로 올라가느냐 마느냐의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전쟁 중 조국의 혜택을 받고 온 유학생답게, 내 가족들에게 떳떳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기 위해, 모든 레지던트들의 질문에 완벽하게 답변하려고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더불어 환자를 위한 최선의 서비스에 정성을 쏟았다. 그것은 내게 생존이었다.
미 외과 전문의 자격 한국인 1호그토록 의학 공부에 온 열정을 바친 이상, 나는 미국 외과 전문의 자격시험을 꼭 정복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