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신웅진 지음 | 명진출판
제1부 ― 인생은 꿈을 따라 흐른다



1 공부라는 놈을 믿고 마음을 줘라


1944년 6월 13일, 반기문은 아버지 반명환과 어머니 신현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충북 음성 행치마을은 그의 아버지의 고향마을로서 훗날 풍수 전문가들은 이곳의 지기(地氣)가 온유한 성격의 세계적인 인물을 배출하는 형상이라고 했다. 기문은 아버지를 따라 3세 때 청주로, 초등학생이었던 8세 때는 충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충주에서는 마침 친척 분이 교편을 잡고 있었고, 기문은 그에 따라 충주 교현 초등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기문은 공부를 잘했고 성격이 유순했기에 전학 생활에 곧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촌놈이라며 놀리던 학급 아이들도 진지한 태도로 공부를 즐기는 그의 모습에 곧 그를 놀리기보다는 오히려 '반 선생'이라며 따르기 시작했고, 선생님들도 이런 그를 귀여워했다.



기문은 다른 것에는 욕심 없이 얌전한 편이었는데, 공부에서만은 달랐다. 그는 종종 친구들과 계산 시합, 외우기 내기, 주산실력 내기 등을 걸곤 했다. 그러나 이는 경쟁심이나 승부욕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자신의 수준보다 더 잘하고 싶다는 그런 순수한 욕심이었다. 기문에게 공부는,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고, 친구들과 종종 벌이는 공부 내기는 하나의 게임이었다. 재미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겨울밤, 변소를 다녀오다 잠이 깨면 기문은 억지로 잠을 청하기보다는 책을 읽었다. 불 좀 끄라고 투덜대는 동생들을 다독여 머리 위로 이불을 덮어주면 동생들도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책을 읽곤 했다. 고요한 밤, 그렇게 책을 읽노라면 "그래, 이거구나!"하며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고, 집중력도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57년 3월, 기문은 충주 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중학생이 되어 새로 배우게 된 영어는 단숨에 기문을 사로잡았다. '그래, 이게 미국 사람들 말이구나. 이걸 배우면 미국 사람들과 말을 할 수 있겠네.' 꼬부랑 글자들이 영 구별이 가지 않아 처음엔 걱정이 되었지만 집에 돌아와 스무 번씩 쓰는 숙제를 끝내고 나니 덜 헷갈리면서 이내 내일 수업부터는 큰 지장 없겠다는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기문은 공부라면 언제나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었다. 노래 솜씨나 그림 솜씨는 가지고 태어나는 소질이라는 게 필요한데, 공부라는 것은 누구나 다 있는 머리에 조금 더 노력하면 잘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라는 것이 좋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우선은 평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단어든 본문이든 배운 것을 무조건 스무 번씩 쓰는 숙제는 기문에게 영어 문장을 통째로 외우게 함으로써 매우 효과적인 학습법이 되었고 한 번 재미를 붙인 기문의 영어 실력은 날로 발전해갔다.



기문은 1960년 충주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영어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영어로 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고 외우고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은 '영어에 미쳤어'라고 혀를 내둘렀다. 하루는 기문의 실력을 눈여겨본 영어선생님이 그를 불러, 교과서 내용을 가지고 영어 리스닝 교재를 만들어 보자며 녹음기를 내주셨다. 녹음기를 받아들고 고민 끝에, 기문은 충주 비료공장을 떠올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료공장이었던 그곳에는 당시 기술 전수를 위해 미국인 기술자들이 몇몇 와 있었다. 콩글리시가 아닌 정확한 발음으로 교과서를 녹음할 생각으로 기문은 녹음기를 들고 그들의 집을 찾아갔다. 용기를 내어 몇 차례 말을 붙여 본 끝에 한 미국인 부인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1차 녹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외국인과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에 기문은 놀랍고 가슴이 뿌듯했다. 앞으로의 영어공부 수준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에 가슴이 설레었다. 이후로도 기문은 그 미국인 부인의 도움을 받아 계속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먼 길에도 꼬박꼬박 찾아오고 한 마디라도 더 해 보려는 그의 성실함에 감명받은 부인이 그의 공부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이웃 부인들에게까지 그를 소개시켜 주었던 것이다. 또한 기문은 근처 성당에 미국인 신부가 부임하자 일요일이면 성당에 나가 그가 귀찮아할 정도로 쫓아다니며 말을 걸곤 했다. 친구들의 말대로 그는 '영어에 미쳤었다.' 앞으로 영어가 얼마나 중요한 성공 요소가 될는지는 짐작할 수도 없었던 때였지만, 단지 영어가 재미있었고 뭔가 자신을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해 줄 것 같다는 작은 기대가 있었다. 기문은 영어에는 탁월했지만 음악과 운동 등 예체능 과목은 젬병이었다. 노래도 못하고, 당시 유행이었던 통기타도, 축구도, 농구도 못했다. 기문에게 잘하는 것은 오로지 영어였고, 그러다 보니 승부근성이 붙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영어에 푹 빠져 있는 기문에게 더 큰 도약의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김성태 영어선생님이었다. 고2때 만난 김성태 선생님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울의 명문대 출신으로 열성이 넘치는 교사였다. 그는 기문을 알아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이러한 선생님의 인정과 격려는 자신의 객관적 실력을 몰라 답답해했던 기문에게 큰 힘이 되어 이후 기문은 공부의 방향을 잡고 매 시험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게 되었다. 또한 김성태 선생님은 우등생들을 모아 청소년적십자단에 가입시켰는데, 정지영, 허문영 등 이때 만난 우수한 친구들은 기문에게 좋은 자극과 도움이 되었으며 어른이 되어서까지 깊은 인연을 유지하였다.



그의 공부법에 남다른 점이 있다면, 공부에 온통 마음을 줘버렸다는 것이다. 출세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공부에 진심을 주었고 공부는 그의 진심을 배반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의 성적표가 항상 좋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2 꿈도 물을 줘야 자란다

김성태 선생님이 우등생들을 청소년적십자단에 가입시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국가에 봉사해야 할 엘리트들은 사회와 인류를 위한 봉사 마인드를 길러야 한다는 그의 교육철학 때문이었다. 기문 역시 이 활동으로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고, 이는 후에 그가 외교관으로 활동할 때 필요한 소양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기문을 불렀다. "기문아, 나는 네가 외교관이 되면 참 좋을 것 같구나. 넌 영어도 잘하고 사람들과 잘 다투지 않는 성품에다 매너도 참 좋은 아이거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진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진 않았어요. 외교관이라니……." 쑥스러웠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초등학교 시절 당시 3대 외무부 장관이었던 변영태 장관이 학교에 방문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비록 그날 장관은 외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외국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신기했고, 그 이후 기문은 종종 '나도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주변에 말해오곤 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국제적인 일을 한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1956년 10월 23일, 소련의 지배 하에 있던 헝가리에서 공산당 독재에 반대하는 국민 봉기가 일어나자 흐루시초프가 탱크를 앞세워 헝가리를 침공, 무려 2,500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당시 기문은 헝가리 혁명이나 유엔 등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남의 나라에 탱크를 몰고 들어와 국민들을 죽이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고, 이에 탄원서를 작성하여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후 2006년 그가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어 수락연설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자 헝가리 정부에서는 '헝가리 자유의 메달'을 그에게 수여하였다는 점이다. 한 초등학생의 작은 행동이 50년 뒤 훈장으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외교관의 꿈이 익어갈 무렵, 그에게 기회가 생겼다. 적십자사에서 청소년 미국 연수 프로그램인 비스타(VISTA, Visit of International Student to America) 대상자를 선발한다는 공문이 각 지방 교육청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김성태 선생님은 적극적으로 기문을 독려하였고, 이에 힘을 얻은 기문은 당시 입시를 앞두고 있던 고3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발 경쟁에 참여하여 쟁쟁하다는 서울 학생들과 영어실력을 겨루어 보기로 하였다. 당시 충주에서 미국에 가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정도로, 그때 미국에 간다는 것은 오늘날 우주여행을 한다는 것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더욱이 기문은 서울에조차 가 본 적이 없었다. 대회 준비를 하면서 짐짓 걱정이 되었지만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기로 했다. "그래,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으니 끝까지 가 보는 거야. 결과가 안 좋더라도 서울 아이들이 얼마나 센지 이 참에 한번 알아보는 거지 뭐. 아참! 그러고 보니 못해도 서울 구경이네."



날짜가 지났는데도 합격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애를 태우던 교장선생님은 서울로 직접 찾아갔다. 기문이 큰 점수 차로 1등을 했는데도 담당 기관에서 연줄을 앞세운 다른 학생을 선발하려고 하는 것을 알게되자 선생님은 민원을 제기했고, 이런저런 노력 끝에 결국 기문은 다른 남학생 한 명, 여학생 두 명과 함께 비스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기문이 선발되었다는, 소식은 충주고는 물론 충주 전체의 경사였다. '충청도 촌놈이 공부 잘해 미국 간다'는 것에 온 충주가 들썩였다. 충주고 인근 충주여고에서는 기문이 미국인들에게 전달할 선물로 학생들이 직접 복주머니를 만들었다. 청소년적십자단 활동을 같이 했던 충주여고의 유순택이 대표로 이를 그에게 전달했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에 평소 그녀를 마음에 두었던 기문의 얼굴은 달아올랐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라는 말을 하고 싶었건만 입밖에 나온 건 '고맙다'라는 말뿐이었다. 학교에서는 미국에서 촌스럽게 보이면 안 된다며 기문에게 머리를 기를 수 있는 특혜를 주었고, 부모님께서는 어려운 형편에 용돈까지 마련해 쥐어 주시며 출국하는 날 생업을 접고 김포공항에 함께 나가 환송해 주셨다.



1962년 고3 여름방학 때 떠난 비스타 프로그램은 한 달간 진행되었다. 청소년적십자단 활동은 물론 예술제, 봉사, 연수 등의 일정으로 43개국 117명의 대표 학생들이 참여했다. 미국, 독일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칠레나 유고슬라비아 등 작은 나라 학생들도 있었다. 홈스테이를 하며 기문은 미국인들의 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한편 그들에게 우리나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려 주려고 애썼다. 가장 뜻깊었던 경험은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던 일이었다. 백악관 견학 후 등장한 케네디 대통령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그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2~3분간의 연설을 마치고 기문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외교관입니다." 기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무언가 선명한 것이 그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래, 내 꿈은 외교관이야.' 그는 다시 속으로 되뇌었다. 19세 반기문에게 꿈의 설계도가 제대로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미국에 다녀온 이후 잠시 멍한 기분이었지만 기문은 곧 입시 준비에 돌입했다. 의사가 되었으면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외교관이 되겠다는 기문의 뜻을 인정해 주셨고, 1963년 기문은 서울대 외교학과에 무난히 합격했다.



시골 학교를 다녔던 반기문이 김성태 선생님과 같은 열의 있는 영어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또 열아홉에 미국에 가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거기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꿈은 씨앗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반기문은 자신의 꿈에 물을 줄, 이 모든 사람을 만나 꿈의 줄기와 잎을 생생히 키워나갈 수 있었다. 꿈도 물을 줘야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3 결핍이 없이는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배울 수 없다

기문의 집안은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형편이 좋았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었을 때, 집안 형편이 기울기 시작했다. 기문이 중3때, 충주에서 한 동네 살던 김씨가 찾아와 1년을 얹혀 살더니, 서울에 좋은 사업이 있다며 기문의 아버지를 꼬드겨 돈을 타낸 후 종적을 감춘 것이다. 이제 빚진 돈을 갚기 위해 어머니까지도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이런 마당에 장남인 기문은 앉아서 공부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기문은 집이 가난해졌다고 해서 특별히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동생들과 함께 집안 청소나 장작패기 등 허드렛일을 했고, 틈틈이 짬을 내어 돼지를 길렀다. 돼지 기르기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지만 돼지의 똥은 좋은 비료가 되기 때문에 이웃집에 날라다 주고 대신 옥수수 등 먹을거리를 얻어 와 살림에 보탤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기문이 미국 연수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했을 때 동네 사람들은 많이 놀랐다. 기문의 부모님이나 기문이나 자랑이라고는 통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기에 그 이야기를 듣고 "누구? 그 돼지 똥 지고 다니는 반 씨네 장남?"이라고 되묻기까지 했다.

기문은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부를 해야 동생들도 보고 따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집안일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학급 반장으로서 학교의 잡일도 많았다. 이에 기문은 자투리 시간을 활용했다. 그러면서 10여 분의 자투리 시간 활용이 굉장한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경험했다.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한다는 것은 시간 관리를 잘한다는 차원을 넘어, 매순간 어떤 일이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어떤 모습이며 어떤 태도인가를 끊임없이 보여주며 사는 사람.' 이것이 그의 식구들이나 지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동생들도 영향을 받아, 모두들 은행지점장, 교사, 약사 등 자신의 꿈을 성취하였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보통 대학 신입생 때는 공부는 뒷전이건만 기문은 여전히 학구열에 불타 좋아하는 공부를 실컷 하였다. 또한 그렇게 사귀고 싶어 하던 유순택이 중앙대학교 도서관학과에 입학하였고, 이에 그녀와의 첫사랑도 시작되었다. 기문을 보면서 '참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해오던 순택은 그의 진실한 태도에 마음을 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입주과외를 시작하였는데, 잘 가르치고 성실하고 사람 좋다는 평을 들으며 금세 최고로 인기 좋은 선생님이 되었다.



그가 아이들을 잘 가르쳤던 것은 그의 특별한 비법 덕분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완벽한 필기 능력이었다. 그는 머리가 좋았지만 머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언제나 꼼꼼하게 필기하면서 배운 것을 정리했다. 꼼꼼히 받아 적는 데에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는데, 이러한 자질은 외교관이 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외교 현장에서는 사소한 표현 하나에 국익이 좌우되고 말 한마디에 어이없는 협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외교관은 모든 단어의 표현을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 MP3 녹음기가 흔한 지금도 국제협상에서는 받아쓰기가 기본이며 외교관 스스로 이를 소화해야 한다. 외교관이 된 후 이러한 반기문의 능력은 그대로 발휘되어 그가 들어간 회의의 기록은 그대로 외교부 보고서로 올라갔다. 민감한 사안의 경우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옮기는 능력을 발휘하는 그의 실력은 외교부에서도 역대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훌륭한 외교관이 되려면 필기력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렇듯 작아 보이는 모든 것에 충실할 때 성공은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학 2학년을 마친 후 반기문은 군대에 갔고, 거기서도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장군의 영어 개인교사로 차출되어 복무를 하였다. 제대를 하고 나니 외무고시 제도가 시작되었다. 1968년 복학해 3~4학년을 다니며 본격적으로 준비, 1970년 졸업과 동시에 단 11명만을 뽑는 치열한 시험이었던 외무고시 3기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