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캇 펙 박사의 평화 만들기
M. 스캇 펙 지음 | 열음사
1부 기초
공동체와의 조우
오늘날 진정한 공동체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집을 지어 주던 서부개척 시대의 '행복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 상실에 대해 슬퍼하고 있다. 1630년, 메사추세츠 베이 식민지 최초의 총독이었던 존 위드롬은 새로운 땅에 발을 내딛을 당시 동료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했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격려를 했다. "우리는 함께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자신의 일로 여기며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며, 함께 노력하고 고생하면서 하나의 몸을 형성하는 구성원으로서 커뮤니티를 가장 소중히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로부터 200년 후, 프랑스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신생 미합중국을 여행한 후, 미국인의 특성을 저술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합중국의 시민이 그들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낼 수 있었던 '내면의 관습'과 관습 이상의 무언가에 대해 저술했다. 그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특성 중 하나는 미국인의 개인주의였다. 그는 개인주의가 다른 특성들과 지속적으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불가피하게도 미국 사회의 분열과 사회적 고립을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경고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최근, 매우 존경받는 사회학자인 로버트 벨라와 그의 동료들은 매우 획기적인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내면의 관습>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이 책에서 저자들은 우리의 개인주의가 더 이상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토크빌의 무서운 예언이 현실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고립과 분열이 오늘날 미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고립과 분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나는 다섯 살 되던 해부터 스물넷의 나이에 집을 떠날 때까지 뉴욕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그 아파트 건물이라는 사회가 보여 준 미묘한 지리적 고립과 분열은 우리 가족에게 정서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부모님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인 선량한 미국인이었고, 분명히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문제는 진정 내가 될 자유가 나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비록 충분히 평화롭고 안정적이긴 했지만 내가 걱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우울해하거나, 때로 누군가에게 의존할 만큼, 나 자신을 완벽하게 표현할 만큼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나는 10대 중반에 고혈압을 앓았다. 정말 '초긴장' 상태였다.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불안하고 우울했다. 나이 서른에 정신분석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한 감정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심리 치료를 통해서 나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의존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혈압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완전히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쉰 살이 된 지금도 나는 남에게 도움을 청할 때 어떻게 하면 약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남에게 의존하고 도움 받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있을지를 배우는 중이다.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를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나는 늘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마음을 열고 무슨 얘기든지 털어놓을 수 있고,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녀나 여인 혹은 배우자가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꿈꾸었다. 이런 꿈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일은, 내가 정직과 솔직함으로 가득 찬 사회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우연히(혹은 누군가의 은총으로) 다양한 종류의 진정한 공동체를 접하게 되면서 그러한 사회가 존재한다는 - 혹은 한때 존재했거나 언젠가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 사실을 차츰 믿어갔다.
1972년에 이르러서야 나는 내가 그간 체험했던 것들이 공동체였음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그것들을 공동체라 부르지 않았지만 내가 다녔던 동부의 전형적인 사립 기숙학교 필립스 엑스터시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전학했던 뉴욕 변두리의 프렌즈 세미너리나 내가 국군통합병원에서 3년 예정으로 정신과 수련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나의 진정한 스승 맥 배질리의 인도 하에 석 달에 걸쳐 숙식을 함께하며 수련했던 마라톤 그룹에서, 그리고 오키나와에서 10만 명이 넘는 군 관계자와 군 가족을 위한 정신과 의료 활동을 전담하고 있던 시절 외래 진료에 배치된 젊은 사병들을 심리치료사로 활용하기 위해 1년간 훈련했던 테크 그룹과, 워싱턴 D.C.에 근무하기 위해 군에 남아 2년을 보내면서 NTL(Natuonal Training Laboratories)과 군 간의 협조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린디라는 성숙하고 경험이 풍부한 정신과 의사의 책임 하에 12일간 60명의 수련생이 참여했던 '감수성 훈련 그룹' 간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음을 알았다. 나는 이 네 그룹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이 변함없이 서로 사랑하는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체험을 했다. 다시는 그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나 나는 그러한 경험을 다시 할 수 있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주 다른 사람들 간에 사랑하는 그런 집단이 재현될 수 있음을 알고 나서부터 나는 인간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 그리고 철저한 개인주의가 빚는 오류
나는 외롭다. 어느 정도 나의 외로움, 그리고 당신의 외로움은 불가피하다. 당신처럼 나도 독립된 개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당신도 특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손가락에 있는 지문처럼 독립된 정체성은 우리를 특별한 개인으로 만들어 주며 인간을 구별시킨다. 대부분 기독교인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설계하셨다고 믿는다. 신학자들은 하느님께서 다양성을 사랑하신다는 거의 보편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심리학자들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인간 발달의 목표로 본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자유'에의 부름 -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참된 자신이 되는 자유 - 이라고 한다. 정신과 의사인 칼 융은 이러한 인간 발달의 목표를 '개성화'라고 불렀다. 인간 발달의 과정은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개성화에 실패한다는 것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각기 독특해야 하고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다스리라는 부름을 받았다. 개성화 과정에서 자신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판단력과 자율성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우리는 온전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가능한 한 주어진 천성과 재능을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성장시키는 데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한 단면일 뿐이다. 우리가 온전하라는 부름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결코 온전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완벽할 수 없다. 우리는 다스리라는 부름을 받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져서 자만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실패에 이를 수도 있다. 우리는 독특한 개개인으로 창조되었으나,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나 옆에 누군가가 필요해서뿐만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위해서 서로 절실하게 필요한 사회적 동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공동체가 성숙할 수 있는 역설적인 씨앗이다.
나의 아내 릴리와 나는 결혼 생활을 두 사람이 엮어 가는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 수십 년을 함께 노력한 끝에, 한때 악덕으로 보았던 것을 미덕으로, 저주로 보았던 것을 축복으로, 약점으로 보았던 것을 점차 재능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릴리는 흐름을 타는 재능을 가졌고, 나는 조직화하는 재능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매우 다른 스타일을 각자의 재능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되자, 우리는 적당한 수준에서 서로의 재능을 자신의 것으로 통합해 갔다. 결과적으로 아내와 나는 점차 좀 더 전인적인 개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각자 개인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상호 의존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결혼도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온전하라는 부름을 받았고, 동시에 우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라는 부름도 받았다. 다스리라는 부름도 받았으며, 우리의 약점을 인식하라는 부름도 받았다. '개성화'와 '상호 의존성'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부름을 받은 것이다. '철저한 개인주의'라는 윤리는 단지 인간성의 반만을 통합하며 다른 한 면을 완전히 부인한다. 우리의 약점과 실패를 숨기라고 부추긴다. 타인의 눈만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도 초인으로 보이라고 우리를 몰아간다. 자신의 삶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매일 우리를 밀어붙이며, 끝내는 무자비하게 고립시킴으로써 진정한 공동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에게는 '온건한 개인주의'라는 새로운 윤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온건한 개인주의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약점, 부족함, 불완전함, 부적절함, 죄, 전체성과 자족성의 결핍을 자유롭게 나눠 참된 자신이 되는 개인주의다. 그것은 "나도 괜찮지 않고 당신도 괜찮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로 대변되는 개인주의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라는 견고한 장벽을 누구든 들어올 수 있도록 부드럽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를 스며 나오게 하고 타인의 자아를 스며들게 한다. 그것은 상호 의존성을 지적 표어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인정하는 개인주의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개인주의다.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
만일 우리가 '공동체'라는 단어를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집단에 한정해 사용해야 한다. 즉, 서로 정직하게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운 개인들, 태연자약한 가면의 이면을 뚫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인들, 그리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기'와 '서로 반기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약속한 개인이 모인 집단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흔치 않은 집단은 어떤 형태일까? 그러한 집단은 어떻게 가능할까? 진정한 공동체란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진정한 공동체란 무엇인가'를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공동체란 각 개인이 모여 이룬 집단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과연 무엇이 더 있을까? 그러한 의문을 풀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추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비로운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말로는 결코 완전히 표현해 낼 수 없는 영역이며 언어 자체가 불완전해지는 영역이다. 돌멩이가 보석이 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한 집단도 그러한 방식을 통해 공동체가 된다. 보석처럼 수많은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 면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한 면은 나머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상호 작용을 통해 서로 창조함으로써 존재한다. 다음은 진정한 공동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을 하나씩 따로 떼어 이름지어 설명한 것이다:
1. 포용성, 헌신 그리고 합의
공동체의 가장 큰 적은 배타성이다. 그것은 파벌이며 실제로는 공동체에 대항하는 방어적인 요새이다. 포용성은 절대적인 규범은 아니지만, 오래 지속되는 공동체들은 어느 정도까지 포용할 것인가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 모든 인간의 차이점을 포용하며, 모두 '온화하게' 개성이 인정되고 격려받는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기꺼이 공존하려는 헌신이 핵심이다. 우리의 개인주의는 헌신으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 한 친구는 공동체란 '개인적 차이를 초월하는 방법을 배우는 집단'이라고 정확하게 정의했다. 아마도 이 초월에 이르는 문을 여는 데 가장 필요한 열쇠는 차이점을 즐기는 일일 것이다. 개성을 격려하는 공동체는 결코 전체주의적일 수 없다. 민주주의마저도 그 과정에서 소수의 열망을 배제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민주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가? 단 한 단어 '전원 합의'를 통해 가능하다. 그것은 배심원 공동체와 비슷하다. 그 과정 자체는 모험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본질적으로 거의 신비롭고 마술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움직인다.
2. 사실주의
공동체의 두 번째 특징은 사실에 입각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내와 나는 서로 다른 최선의 방법을 제시하고, 그 방법들을 서로 조정하여 결정을 내린다. 공동체에서는 다른 관점을 가진 참가자를 포용하고 그러한 관점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에 전체 상황을 인식할 수 있다. 어둠과 빛, 신성함과 속됨, 슬픔과 기쁨, 영광과 엉망진창을 통합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어느 것도 제외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준거들로 인해 공동체는 현실에 점점 더 가깝게 접근한다. 공동체의 사실주의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면이 있는데, 그것은 겸손함이다. 한 집단은 공동체가 되어 가면서 점점 더 겸손해지며,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집단으로서도 겸손해지고 따라서 더 현실적이 된다.
3. 심사숙고
공동체가 겸손하지만 현실에 적합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심사숙고하기 때문이다. 심사숙고란 반성을 하고 자신을 확실히 알아 가는 행위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겸손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고전 작품 <미지의 구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본질적으로 온화함이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참되게 알고 느끼는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참되게 알고 느끼는 사람은 누구든지 실제로 온화하다." 공동체 형성 과정 또한 시작부터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그리고 구성원은 각각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함에 따라 집단에 대해서도 점차 깊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가? 우리는 건강한 집단인가? 우리는 공동체 정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심사숙고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집단은 아예 공동체가 되지 못하거나 금세 해체되어 버린다.
4. 안전한 곳
공동체의 또 하나의 특성은 치유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건강과 전체성과 신성함을 향한 자연적인 열망과 추진력(에너지)을 기본으로 가진다. 그러나 대부분 이 추진력은 두려움의 사슬에 얽매이고 방어와 저항에 의해 힘을 잃는다. 그러나 한 인간이 진정 안전한 곳, 방어와 저항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곳에 존재하게 되면 이러한 추진력은 해방된다.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느낄 때 자신을 치유하고 변화하려는 자연스런 경향이 드러난다. 역설적으로, 집단 구성원이 치유하고 개심하려는 노력을 멈춰야만 집단은 치유하고 변화한다. 진정 아무도 치유하려 하거나, 변화시키려 하거나, 고치려 하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공동체는 안전한 곳이다. 대신 구성원들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당신은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다. 즉, 당신은 방어와 가면을 버리고 당신의 전인적이고 거룩한 자아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워진다.
5. 개인의 무장 해제를 위한 실험실
공동체는 우리의 상처와 약점을 동료에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또 다른 사람들의 상처에 영향을 받고 같이 상처받는 능력을 요구한다. 우리의 상처에는 아픔이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아픔을 나눌 때 생기는 사랑이다. 공동체에서 안전한 장소를 제공받는 기회를 접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습관적인 방어와 피해 의식, 불신과 두려움과 분노와 편견의 장애물을 버릴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무장 해제하는 실험을 한다. 그들은 평화 조성의 규칙을 발견하고 미덕을 배운다. 그것은 너무도 강력한 개인적 경험이어서 지구 차원의 평화를 추구하는 추진력이 될 수 있다.
6. 은혜롭게 싸울 수 있는 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