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사기꾼
하인리히 창클 지음 | 시아출판사
'인위적' 실수와 천재의 영감
가장 오래된 표절 - 프톨레마이오스의 별자리 지도고대에서 가장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천문학자라면 아마 프톨레마이오스일 것이다. 142년에서 146년까지 4년 동안 그가 썼던 13권짜리 『수학대계Syntaxis Mathematica』, 오늘날『알마게스트Almagest』란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책 제7권에는 붙박이별(항성)들을 폭 넓게 담아낸 별자리지도(천문도)가 들어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별자리지도를 바탕으로 이른바 '지구 중심의 세계관(천동설)'을 펼쳤다. 20세기로 막 접어들었을 무렵 미국의 천문학자 C.H 페터스와 E.B 크노벨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별자리지도에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가능했던 관찰의 방법들이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도저히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심한 것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잘못의 원인을 찾다가 그 두 명의 미국 연구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아주 부끄러워할 만한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 위대한 프톨레마이오스가 자기의 별자리지도를 만들면서 니케아의 히파르코스의 계산법들을 사용했지만, 그 계산법이 누구의 것인지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기원전 150년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학자 히파르코스는 오늘날 과학적 천문학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다. 페터스와 크노벨은 그들이 밝힌 사실들을 1915년 『프톨레마이오스의 별자리지도, 알마게스트에 대한 수정』이란 제목의 책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히파르코스의 별자리를 아예 통째로 베꼈으며, 그저 계산상으로만 자기 시대의 수치로 바꾼 것뿐이라는 자신들의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이 사실은 데니스 로린스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표절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제시했다. 먼저 이집트 사람인 프톨레마이오스는 거의 알렉산드리아를 벗어난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 사람인 히파르코스는 천문학 관찰의 대부분을 로도스 섬에서 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도스 섬에서 위도로 5도 아래 있는 곳이다. 로린스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의 별자리지도에 있는 1,025개의 별들 가운데 알렉산드리아에서만 볼 수 있는 별은 단 한 개도 없었다. 한 마디로 프톨레마이오스는 늘 알렉산드리아에서 별을 관찰했으면서도 로도스에서 볼 수 있는 별들의 자료들만 찾아 모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처음부터 자기만의 천문학 자료를 모으는 수고는 하지 않은 채 히파르코스가 이룩한 결과들을 그대로 가져다가 약간의 계산만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문학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알마게스트』에서 보기로 들은 별들도 모두 로도스 섬의 위도와 관련된 것들뿐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시대의 위대한 학자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방대한 천문학 저술들말고도 그는 8권짜리 『지리학』도 썼는데, 이 책에는 고대 세계의 8,000여 곳에 대한 천문학적 위치설명이 들어 있다. 그밖에도 인식론에 대해 중요한 책을 썼고, 수학적 음악이론과 광학에 대한 책들도 썼다.
짜 맞춘 계산 - 뉴턴의 '조작인수'태어날 때부터 조산으로 1리터들이 병에 들어갈 만큼 몸이 작았던 아이작 뉴턴이 평생토록 주위사람들과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했던 것은 모르긴 해도 일찍부터 겪었던 건강과 가정의 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재혼하면서 어린 아이작을 할머니에게 맡겼다. 그는 극단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 과시욕이 컸고 자기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언제나 옳아야 했으며 그래서 다른 학자들과의 다툼이 끊일 날이 없었다. 바로 그런 성격 때문에 그가 수많은 자료조작에 더욱 쉽게 빠져들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역사가인 리처드 웨스트폴은 뉴턴이 자신의 측정값들을 다루면서 사용했던 수치들을 가리켜 '조작인수fudge factor'라고 했다. 뉴턴은 이 '인수'를 간단하면서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곤 했다.
이를테면 그가 이론으로 생각했던 값이 나올 때까지 계산에 넣어야 할 초기 값들을 계속해서 바꾸는 식이다. 그처럼 그리 성실하다고 할 수 없는 뉴턴의 계산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경우가 바로 소리의 빠르기 계산이었다. 그 당시 이미 알려져 있던 파동의 법칙을 바탕으로 뉴턴은 소리가 1초에 약 295미터 움직인다는 계산 결과를 내놓았다. 그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프랑스의 두 학자가 내놓은 값은 뉴턴의 값과 큰 차이를 보였는데, 그들의 값은 499m/s에서 182m/s였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뉴턴은 직접 측정할 수 있는 실험 장치를 준비했다. 실험결과 소리의 속도는 330m/s에서 280m/s라는 값이 나왔다. 그러자 뉴턴은 처음 그가 이야기했던 295m/s는 자신이 실험으로 측정한 값의 중간 값 정도에 해당하기 때문에 올바른 것이라 주장했다.
몇 해가 지난 뒤 다른 방법들로 이루어진 측정을 통해 그가 발표했던 값보다 눈에 띄게 높은 수치가 알려지자, 뉴턴은 실험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299m/s에서 338m/s의 값을 얻었다. 하지만 친구인 더럼은 348m/s의 값이 그럴 듯 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뉴턴은 자기가 발표한 값이 아무래도 너무 낮다고 생각되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는 자신이 공기밀도를 제대로 계산에 반영하지 않았다면서 공기밀도의 값을 임의로 1/850에서 1/870으로 높였다. 그리고 나서도 여전히 348m/s에 미치지 못하자 이번에는 공기 중의 습도가 소리 파동의 속도를 높이는 것으로 하여 정확히 348m/s에 다다랐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값은 실제보다 8m/s나 높은 것이었다.
한참 뒤에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라플라스는 그리 과학적이지 못한 그런 조작이 꼭 필요했던 게 아니었으며, 이론을 통한 뉴턴의 처음 계산이 옳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계산으로 얻어낸 295m/s와 실제 소리의 속도인 340m/s 사이의 차이는 공기밀도나 습도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그보다는 소리의 파동이 퍼져 나갈 때 열이 생기게 되는데, 그 열로 공기저항이 줄어들면서 그만큼 소리의 빠르기가 높아지는 것이다. 밤낮 길이가 같아지는 때(주야평분시)와 천문학의 관찰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들을 극복하려고 하였을 때도 뉴턴은 그의 '조작인수'를 썼다. 그의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증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리처드 웨스트폴은 1973년 『사이언스』에 실린 뉴턴의 조작을 다룬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뉴턴은 정확한 상관관계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은 다음, 상관관계의 산출 과정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생각한 그것만 나오도록 했다. 그의 조작인수를 쓰는 솜씨는 기막힐 정도로 교묘했다" 그의 다양한 조작들을 밝혀내기까지 무려 250년이나 걸렸던 것도 바로 그의 빼어난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뉴턴의 천재성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를 과학자의 모범이라고 보기는 아마도 어렵지 않나 싶다.
찬란함의 초라한 뒤끝 - 블론로의 N선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물어보나마나 독일의 과학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다. 1895년 그가 발견한 광선을 그는 'Ⅹ선'이라 이름 붙였지만 나중에 독일어권에서는 그를 기려서 이를 '뢴트겐선'이라 불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몸속에 있는 기관들과 조직들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이 광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새로 발견된 이 광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는 프랑스의 르네 블론로도 끼어있었다. 낭시대학교에 있는 그의 실험실에서 그는 뢴트겐선을 분극 시킬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가 광선을 만들어내는 장치로 쓴 것은 철로 만든 관 속의 고온 가열된 백금선 이었다.
전체를 철로 만든 덮개를 씌우고 작은 구멍 하나만 알루미늄으로 덮어 광선이 나올 수 있게 하여 그 광선으로 실험을 하려고 하였다. 어느 날 실험에서 그 광선을 옆에 있는 가스불꽃으로 유도하다가 블론로는 그 불꽃이 그 광선으로 갑자기 더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뢴트겐선의 이와 같은 효과는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블론로는 새로운 갈래의 광선을 발견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그는 다시 황화칼슘을 입힌 화면도 이 광선을 받으면 마찬가지로 더 환해진다는 걸 확인했다. 1903년 블론로는 이런 흥미로운 관찰에 대해 첫 학술논문을 발표하면서, 새로 발견한 그 광선에 'N'선 이란 이름을 붙였다.
뒤이은 여러 차례 실험에서 블론로는 여러 가지 물질들, 그 가운데 금속이 특히 끊임없이 N선을 방출한다는 사실과 나무의 경우 빛을 내는 물질로는 알맞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의 논문들은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그리고 이어서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과학자들 가운데 이 N선에 매달려 놀라운 관찰을 하였다는 이들이 많았다. 독일에도 N선이 화젯거리가 되었으며 심지어 황제까지 직접 보고 싶어하였다. 황제는 베를린 대학교 물리학 교수이며 전자기선에 관한 연구로 이름을 떨친 하인리히 루벤스에게 N선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루벤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N선을 만들 수 없었고, 황제는 매우 실망했다.
프랑스 바깥의 학자들도 마찬가지로 N선을 만드는데 문제가 있었던 터라 1904년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열린 물리학 학회에서는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우드를 낭시로 보내 N선을 만드는 정확한 과정을 확인하도록 했다. 우드는 이 일을 맡기에 적임자가 될 특별한 능력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성공한 실험물리학자이면서 동시에 아마추어 마술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 눈속임 재주에 통달해 있었고 결국 그 재주로 여러 가지 거짓 사기극들을 들추기도 했다. 우드는 낭시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어둡게 꾸며 놓은 블론로의 실험실로 이끌려갔다. 우윳빛의 불투명한 유리판 뒤에는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전기불꽃을 두어 유리판이 희미하게 빛나도록 했다.
블론로는 N선을 전기불꽃에 보내고 불투명한 유리판을 가리키며 더 환하게 빛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드는 그 밝기의 차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자 블론로는 우드의 눈이 아무래도 민감하지 않아 그런 것 같다며 N선의 효력으로 불꽃이 더 밝아진 걸 기록했다는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우드는 이 사진들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어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블론로는 N선이 사람 눈의 시력을 높이는 것을 재현했다. 그는 쇠줄을 눈 바로 위에 가져다대고는, 이제 철에서 N선이 나와 자기의 시력을 높였기 때문에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계를 보고 시간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우드는 그 줄을 만져 봐도 좋겠냐고 부탁해서 쇠줄을 받아든 다음, 어둠 속에서 몰래 나무 자로 바꿔치기했다. 하지만 블론로는 그 시계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무에는 N선이 나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블론로는 우드를 또 다른 실험실로 이끌고 갔다. 그곳에선 조수 한 명이 분광 사진기를 설치하고 있었다. 블론로는 알루미늄 프리즘을 써서 N선을 연속된 스펙트럼으로 나누어 화면 위에 보일 수 있게 하려 했다. 블론로는 밝기의 차이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고 했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우드는 아무런 차이도 알 수 없었다. 마술로 단련된 숙련된 손가락 움직임으로 우드는 아무도 모르게 프리즘을 치워버렸다. 그런데도 블론로는 한사코 밝기의 차이를 보이는 스펙트럼을 화면에서 알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모습을 직접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드는 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블론로가 거두었다는 성과를 무효로 만드는 보고서를 『네이처』에 보냈다. 블론로가 보았다는 현상은 불빛이 아주 희미할 때 드물지 않게 생기는 착시현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실을 덧붙임으로 그는 의도적인 조작 혐의에서 동료를 구하려는 아량을 베푼 것이었다. 기사를 읽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르벨은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인 동료의 주머니에 프리즘이 들어있는데 프랑스의 명망 있는 현자는 스펙트럼을 재고 있다니, 이 무슨 프랑스 과학의 몰락이란 말인가?" 하지만 블론로는 끝까지 N선의 존재를 믿었는데, 그는 결국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정신 착란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빛의 속성에 대한 잘못된 증명 - 에밀 루프의 꾸며낸 빛 파장설의 근거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고 뜻하지 않게 과학의 사기에 빌미를 줄 수 있다. 1926년 늦은 봄에 낸 어느 논문에서 복잡한 물리학 실험을 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야기 한 아인슈타인이 바로 그런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 논문에 실린 아인슈타인의 말에 따르면 그 복잡한 실험을 통해 빛이 파장의 종류인지 아니면 입자의 종류인지 그 속성을 밝힐 수 있으리란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실험가보다 이론가였던 까닭에 스스로 실험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만 실험물리학자들이 이 과제에 매달렸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 같은 바람은 아주 빨리 실현되었다.
논문 발표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에밀 루프란 이름의 물리학자가 이인슈타인이 말한 그 실험을 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루프는 전자선에 나오는 빛의 겹침 현상(간섭)을 입증하여 파장인 빛의 속성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이론으로 이야기한 것을 그처럼 빨리 확인해 준 것에 매우 기뻐했다. 그래서 그는 프로이센 학술원 회의에서 루프의 이 논문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처음에는 루프의 실험결과에 대해 의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노벨상을 받았던 뮌헨 대학교의 빌헬름만은 함께 일하던 발터 게를라흐와 에두아르트 뤼카르트에게 아인슈타인의 실험을 똑같이 해보라고 일을 맡겼다.
가엾은 두 사람은 무려 4년 동안이나 그 일에 매달리며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새로운 방법들과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기술 수단을 이용했지만 두 사람은 도무지 그 실험을 해 낼 수 없었다. 끝내 지쳐버린 두 연구자는 이 실험이 실제로 수행할 수 없는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당연하게 불거질 문제는 '그렇다면 루프의 결과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뮌헨 대학교 물리학자들의 대답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루프의 실험결과들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한 것이다. 루프는 그런 결론이 내려졌음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번의 실험과정에서 일어난 간섭현상을 촬영한 사진들을 공개했다.
뮌헨 대학교의 물리학자들은 그 공개된 사진에 놀라고 당황하여 다시 한 번 집중하여 자기들의 주장에 있을지 모를 잘못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아주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이 실험절차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작은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실험에 사용되는 거울의 방향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설명이 잘못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프는 그 '잘못된' 설명을 정확히 그대로 따랐고, 그것을 통해 파장의 성격을 증명하는, '올바른' 결론에 다다른 셈이 되었다. 1935년 게를라흐와 뤼카르트는 『물리학 연보』에 기사를 실어 루프의 파장실험과 사진 증거들은 조잡한 위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뒤이어 베를린의 물리학자들도 루프의 다른 논문들에서 뚜렷한 위조의 증거들을 찾았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 보고에는, 다른 무엇보다 『인공으로 만든 양자를 이용한 실험』과 『전자굴곡을 이용한 높은 전압 측정』이란 논문 두 편은 그 논문의 타당성을 증명할 만한 토대 자체가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