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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이수광 지음 | 다산초당
제1부 감추어진 역사, 조선시대 양반들의 살인



조선 최대 권력 스캔들


선조 36년 8월 21일, 특진관(현 부총리)인 재상 유희서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기도 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유희서는 소분(掃墳,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조상의 무덤을 깨끗이 청소하고 제사지내는 것)을 하려고 휴가를 얻어 포천에 갔었다. 그런데 말을 타고 돌입한 화적 30여 명이 유희서를 칼로 찌르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상한 점은 화적들은 잡물(雜物)은 전혀 훔쳐가지 않고 말과 옷만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경기감영의 관찰사가 현장에 직접 출동하고, 형조에서도 살인사건을 관장하는 형조참의가 수행원들과 함께 포천으로 달려갔다. 포도대장 변양걸도 종사관과 포도부장을 현장에 파견했다.



사건현장에 다녀온 포도부장이 초검 시형도(屍形圖, 시체를 검사하기 위해 그린 그림)를 변양걸에게 제출했다. 시형도에 의하면 유희서는 왼쪽 가슴에 칼을 맞고 사망했다. 가슴에 난 자상(刺傷)으로 보아 칼을 잘 다루는 자의 소행이었다. 여러 해 수많은 살인사건을 접해온 변양걸이 보기에 이는 '도적이 저지른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변양걸이 나름대로 추측을 하고 있을 때 종사관이 아뢰었다. "영감, 이 사건은 우리가 손을 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종사관의 말에 의하면 유희서의 죽음은 그의 첩 애생(愛生)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애생은 미색이 뛰어나서 많은 사대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근래에 임해군과 간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임해군은 선조의 큰아들이었다. 선조는 슬하에 적자는 없고 모두 후궁을 통해 손을 보았다. 그중 임해군은 광해군과 더불어 공빈 김씨의 소생이었다. 임해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많은 고생을 했는데,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울폭증(鬱暴症)이 있었다. 그래서 선조가 남달리 애정을 쏟았으나 학문은 하지 않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숱한 비행을 저질러, 장자이면서도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변양걸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중죄를 지었다고 해도 임금의 아들을 신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포도청에서 본격적인 수사를 하지 못하고 사건을 미루기만 하자, 유희서의 아들 유일이 직접 범인 추적에 나섰다.



유일은 유희서의 첩 애생을 비밀리에 염탐하여 임해군과 간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임해군의 가노(家奴)들이 임해군의 사주를 받아 유희서를 살해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곧 유일은 임해군의 가노 김덕윤 일당을 경기도 광주 목사에게 고발했다. 광주 목사는 용의자들을 신문하여 유희서를 살해했다는 공초를 받아내고 이들을 포도청으로 이송했다. 변양걸은 살인범들이 포도청으로 끌려오자 결국 이들을 신문할 수밖에 없었다. 임해군의 가노들은 형추(刑推, 곤장을 때리면서 하는 신문)도 가하지 않았는데 임해군의 지시에 의해 유희서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낱낱이 자백했다.

조정과 장안에 임해군이 교사를 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자 임해군의 죄를 물으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선조는 며칠 동안 비답을 내리지 않다가 마침내 임해군을 조사하라는 영을 내렸다. 포도청에서는 당장 임해군을 잡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임해군은 끌려오지 않고, 대신 그의 가노들이 줄줄이 끌려와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건의 배후가 임해군이라고 자복했다. 그런데 임해군은 유일이 자신을 무고하고 있다고 반박하는 서찰을 포도청에 보냈다. 그 무렵, 포도청에 하옥되어 있던 죄인들 중 두 명이 살해되었다. 이는 도성 한양의 치안을 맡고 있는 포도청을 가볍게 볼 수 있는 자들의 소행이 분명했다. 사헌부가 포도청과 전옥서의 관리들을 처벌할 것을 임금께 주청하자 포도청의 관리들이 줄줄이 잡혀와 신문을 당하고 파직되었다. 수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변양걸의 파직은 미뤄졌다.



사건은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의금부에 끌려온 임해군의 가노들은 포도청에서 한 자백을 번복했다. 임해군 또한 선조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의 가노들이 포도청의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에 는 정황이 뚜렷한데도 자백을 하지 않으면 형장을 쳐서 신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 조항이 종종 악용되어 곤장의 수를 넘기기도 하고 난장을 때리기도 하여 신문 당하는 중에 더러 죽는 경우도 있었다. 곤장은 곤(棍)과 장(杖)으로 나뉘는데, 곤에는 곤의 이름과 길이, 넓이, 두께까지 새겨져 있으며 주로 버드나무로 만들었다. '치도곤을 친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치도곤은 가장 무서운 곤이었다. 장은 가시나무로 만드는데, 중형에 따라 두께가 3푼 5리부터 2푼 2리까지 되었다. 장형은 1차에 30대를 넘지 못하고 3일 이내에는 두 번 때리지 못하게 정해져 있었으나 역모와 같은 중죄에는 규정이 무시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선조가 포도청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리자, 포도대장 변양걸이 신문을 당하게 되고, 유희서의 아들 유일도 무고자로 붙잡혀 오게 되었다. 의금부에 끌려온 유일은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임해군을 모함했다는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다. 권력에 의해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선조는 유일에게 임해군을 모함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유희서의 노모 김씨는 아들이 죽은 것도 억울한 데 의금부에서 풀려난 임해군의 가노들이 집으로 몰려가 자신과 며느리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행패를 부리고, 손자까지 사형을 당하게 되자 직접 승정원으로 찾아가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 사헌부까지 임해군의 가노들을 다시 잡아들일 것을 선조에게 주청하자, 선조는 유일의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명했다. 이리하여 유일에게는 장(杖) 1백 대와 유(流)3천리, 변양걸에게는 장 90대와 도(徒) 2년 반이 선고되면서 유희서 살인사건은 마무리된 듯 보였다.



얼마 후, 선조는 가뭄에 대한 구언(求言)을 신하들에게 청했다. 구언이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임금이 신하의 바른 말을 구하는 것으로 어떤 직언도 처벌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영의정 이덕형은 구언을 기회로 삼아 유희서 살인사건 결말에 대한 부당함을 언급했다. 그는 변양걸에 대한 사면을 주청하고, 임해군의 방탕한 행동과 유희서 집안의 원통한 일이 나라에 가뭄을 불러들였다고 설토했다. 이덕형의 구언이 나오자 대신들은 자신들도 입을 다문 죄가 있다며 줄줄이 파직을 청했다. 선조는 부들부들 떨었으나 신하들이 무슨 말을 해도 탓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처럼 무능한 사람이 왕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대신들이 변양걸을 두둔한다'고 탄식했다.



조선왕조 최대의 권력형 스캔들이라 할 수 있는 유희서 살인사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이렇게 적고 있다. "옛적부터 충성스러운 말을 하고 직언을 하는 선비는 대부분 거슬림을 받았지만 오늘날처럼 심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임금이 언로를 막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장려함으로써 사론을 위축되게 하고 국세가 날로 깎이게 하였으니, 오늘날 비망기가 곧 나라를 망칠 분명한 증거라 할 것이다." 변양걸은 몇 년 후 다시 복귀되어 수원 유수 등을 지내게 된다. 임해군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으나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을 받게 된다. 임해군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역모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은 것이다.



집현전 학사 권채의 이중성

조선시대의 노비는 크게 관노(官奴)와 사노(私奴)로 구분된다. 관노는 관아에 소속되어 면천을 받아야 상민(常民)이 될 수 있었으며, 상민이 양민(良民)이 되려면 의과나 역과 같은 잡과 시험에 합격하거나 나라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면 신분이 상승했다. 한편 사노는 양반이나 토호들의 소유로써 사사로이 사고팔기도 했는데, 조선초기에는 말 한 마리 값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만일 사노가 주인을 때리면 강상죄(綱常罪, 삼강오륜을 어긴 죄)로 가장 무서운 형을 선고받았기에 종들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주인에게 저항하거나 고발하지 못했다. 여종들은 더욱 비참한 삶을 살았다. 여종들은 태어나서 7,8세가 되면 주인의 몸종이 되고 15, 6세가 되면 주인의 성적 노리개가 되어야 했다. 집현전 학사 권채의 여종 학대 사건은 이러한 사노(私奴)들의 비참한 실상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쉬이! 물렀거라! 형조판서 대감 행차시다!" 초헌( 軒,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탔던 수레)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형조판서 노한은 행인이 많은 운종가에서 눈을 떴다. 구종별배(驅從別陪, 벼슬아치들을 따르는 관노와 하인)들이 벽제( 除, 높은 관원이 길을 나설 때 잡인의 통행을 금지하던 일)하는 소리에 행인들이 분분히 비켜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벽제 소리에 놀라 황급히 길을 비키는 한 천민이 노한의 눈에 들어왔다. 천민의 지게 위에는 가마니에 둘둘 말린 이상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노한이 자세히 살펴보니 앙상하게 마른 다리가 가마니 밖으로 비어져 나온 것이 영락없는 사람의 형상이었다. "멈춰라! 저자가 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냐?" 노한은 법을 다루는 형조의 당상관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노한이 집사에게 명하여 확인해보니 가마니 속에는 뜻밖에도 뼈가 드러날 정도로 비쩍 마른 한 여인이 들어 있었다. "이 여인을 어디로 데리고 가는 것이냐?" 노한은 천민으로 보이는 노복에게 물었다. 노복은 삼엄한 행차에 기가 질려서인지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노한은 곧 노복을 형조로 압송했다. 신문을 해보니, 노복은 집현전 학사 권채의 늙은 종이었고, 여인은 권채의 여종이었다. 노복의 진술에 의하면, 권채는 일찍이 덕금이라는 이 여종을 첩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덕금이 병든 조모를 문안하고자 휴가를 청하자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덕금이 몰래 친정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 권채의 부인 정씨가 '덕금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주하였다'고 권채에게 말했다. 그러자 권채는 덕금의 머리를 자르고 매질을 하고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서 방에 가두었다.



폭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권채는 덕금에게 일체 먹을 것을 주지 말도록 명하였고, 권채의 부인 정씨는 덕금에게 오줌과 똥까지 먹게 했다. 덕금은 저항했지만 매에 못 이겨 구더기까지 있는 오물을 삼키는 등 수개월 동안 학대를 당해오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조사를 마친 노한은 탄식하며 이 사건을 세종에게 아뢰었다. 세종은 평소 조용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여겨온 권채가 그렇게 잔인한 사람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더욱이 권채는 어릴 때부터 문명이 높았으며, 장성해서는 시문을 잘하여 문장의 전형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종은 권채의 아내가 조종을 해 그렇게 된 것일 터이니 끝까지 조사하도록 명했다. 형조에서 즉시 권채 일가족을 잡아들였고, 권채는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권채는 의금부 당상관들을 호통 치는 것과 더불어 정씨가 덕금에게 가혹행위를 했을 때는 외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터지면 부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고 법망을 피해가는 오늘날 정치인들의 행태와 비슷하다. 의금부 관리들은 모든 행위를 부인 정씨가 행한 일로 세종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의금부 제조 신상(申商)은 세종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 "권채는 실정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형조를 비난하니, 이 사람은 다만 글을 배울 줄은 알아도 부끄러움은 알지 못 합니다" 지식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세종은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민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며 권채를 마땅히 형벌로서 처벌할 것이라 하였지만 권채의 관직만 파면시키도록 하였다. 권채의 재능을 아꼈던 것이다. 여종 덕금은 끝내 죽고 말았고, 권채는 얼마 후 복권되어 우승지를 지냈으나 4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제2부 은밀한 목소리, 조선시대 여성들의 살인



죽은 자를 말하게 하라


정조 8년(1784), 황해도 평산부에 사는 박소사라는 여인이 자살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평사부사 정경증은 검험관들을 이끌고 현장에 출동했다. 박소사의 시신은 이미 매장을 끝낸 뒤라 묘지를 파내 검험을 하기 어려웠다. 평산부사 정경증은 일단 《심리록(審理錄)》을 바탕으로 먼저 시친(屍親, 사망자의 가족이나 친척)을 불러 조사를 했다. 《심리록》은 조선시대 살인사건의 재판 결과를 상세하게 다룬 일종의 판례집이다. 《심리록》에는 초검, 복검, 삼검, 사검을 한 내용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 초검 때는 해당 관아의 관원이 율관(律官, 법률 담당 관리), 의생(醫生, 검시의), 포도청의 서리 등을 거느리고 사체를 안치한 현장에 가서 공초(供招)를 한다.



공초를 할 때는 먼저 시친(屍親, 시체의 가족이나 친척)에게 질문하고, 다음은 정범(正犯), 간인(看人, 목격자, 발견자, 신고자 등의 증인) 들에게 질문을 하는데 원한이나 치정 유무 그리고 살아있을 때의 흉터, 범행에 사용된 흉기의 모양과 습득 경위 등을 치밀하게 조사한다. 이러한 공초가 끝나면 검험을 하는데, 이때는 《무원록(無寃錄)》을 참고하게 된다. 무원록은 한마디로 조선시대의 법의학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만든 책인 만큼 검시할 때의 자세와 검시하는 요령, 그리고 사망원인을 사례별로 나누어 검험하는 방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평산부사가 심리록을 바탕으로 공초하자, 박소사의 시어머니 최아지와 남편 조광선은 박소사가 자살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조광선의 말에 의하면 박소사는 시집온 지 석 달쯤 되었는데, 아직 젊은 시어머니와 잘 화합하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최아지의 여종에게 물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한 이유가 무엇이냐?" 만약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형장을 때릴 것이라는 말에 여종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음과 같이 놀라운 사실을 말했다. 최아지는 평소 행실이 음전하지 않았으며, 조카 이차망이 와서 수작하는 것도 몇 번 본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정경증은 당장 이차망을 붙잡아오도록 하였다.



공초 현장에 붙들려온 이차망은 최아지와 수작을 한 일이 없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살인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체다. 시체를 봐야 사인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정경증은 검험을 강행하기로 했다. 그러자 유족들이 곡을 하고, 최아지는 '양반가의 며느리를 욕보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입에 거품을 물고 패악을 부렸다. 시신을 검험해보니 후골 위쪽 두 곳에서 칼자국이 발견되었다. 사망원인은 식도와 기도를 관통한 칼인데, 증인들의 말대로 박소사가 자살한 것이라면 처음에 목을 매었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다시 칼로 목을 찌른 것으로 보였다. 정경증은 박소사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했다. 살해를 당했다고 하기에는 몸에 저항한 자국이 전혀 없고, 손에 칼자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칼에 의해 타살을 당한 경우 피해자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얼떨결에 칼을 잡았다가 상처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이 없었던 것이다. 정경증은 초검결과를 황해도 감영에 보고했다.



황해도 관찰사는 곧 복검관을 평산에 파견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초검을 거쳐 반드시 복검을 해야 한다는 법 조항이 정해져 있었다. 복검관은 《무원록》에 의해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를 여러 차례 씻고 닦으면서 검험을 했다. 우선 물로 목을 축축하게 적신다음 파의 밑동을 짓찧어 살짝 데친 후 의심스러운 부위에 바르고 그 위에 초를 적신 종이를 덮고 한 동안 지난 후에 종이와 파를 벗겨내고 살폈다. 그러나 목을 맨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확한 검험을 위해 다시 종이로 시체를 덮고 술지게미를 바른 뒤에 초주를 뿌린 후 조사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칼에 찔린 상처를 살폈다. 후골 위 두 곳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식도와 기도의 상처만 길고 깊었다. 그러나 타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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