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
로테 퀸 지음 | 황금부엉이
언제나 시작은 쉽다: 입학 첫날멀리서 들려오는 내 학창시절의 메아리많은 사람들이 학창시절에 대해 뒤죽박죽의 기억을 갖고 있다. 어른이 된 후 자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그 옛날 자신을 세세하게 억눌렀던 사건들과 괴로웠던 기억들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또렷하게 다시 떠오른다. 어느 날 누군가 내 연필깎이를 훔쳐 간다. 돌려받으려고 하자 상대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는 비명을 지른다. 부당하게도 선생님은 죄가 없는 나를 혼낸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내 말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식탁으로 슬금슬금 다가간다. 엄마는 입을 꼭 다문 채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본다. 전날 저녁 학부모 상담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나에 대해 한 말이 엄마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오래된 두려움들이 갑자기 우울할 정도로 생생해진다. 이제 자신감 있는 어른이 되어 담임선생님에게 해명을 요구하러 학교에 간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섰을 때 복도의 냄새가 살짝 풍겨 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어깨를 움츠리고, 그것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 두려워 안절부절못하는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만다. 학부모인 우리는 물론 아무런 내색 없이 나이 든 여선생님의 눈에서 인자하고 선한 품성과 흔들리지 않는 정의감의 흔적을 찾고, 화장실 등의 시설을 찬찬히 둘러본다. 입학 첫날, 교실 벽에 붙어 있는 학생들의 멋진 그림, 많은 장난감과 귀여운 아이들, 친절한 여선생님에게로 자기 아이의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마음 밑바닥에서는 교사들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계층과 나이를 초월하여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준다. 누구나 괴팍하고 불공평하며 가학적인 교사들의 행태를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학교는 멋질 수 있다, 좋은 교사들만 있다면6년 전 맏아들 요하네스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내가 받았던 주입식 교육보다 훨씬 지적으로 보이는 새로운 학습법이, 아이들에게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지식욕을 자극하기를 기대했다. 공부를 강요하는 대신에 이해에 대한 즐거움을 일깨우는 것, 그게 내 바람이었다. 내가 이런 희망을 품은 데에는 아주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이 입학하기 전 몇 년 동안, 인간이 매우 강한 호기심과 학습능력을 타고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 가기 전에 아이들은 곧잘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있잖아, 엄마. 달이 완전히 메말랐고 돌투성이라면서 어떻게 빛이 나는 거야?"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뒤 학교를 가고 난 후, 지리 선생님이 우리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 행성들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이들은 경멸하듯 콧방귀를 뀌었다고 한다. "저 위에 있는 것들의 이름이 뭐든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왜 아이들이 이렇게 변할까?
릴리엔바이스 초등학교에서는 매년 한 번씩 우렁차면서도 점잖은 박수갈채와 함께 학생들의 공연이 시작된다. 각자 이국적인 새로 분장한 아이들이 다른 새들의 무리에 합류해, 지배적인 규정에 복종하고 자신의 개성을 버릴 각오를 하는 즉시 화려한 개체에서 평범한 집단의 일원으로 진급한다. 그 극락조들은 웅덩이에서 기어 나와 새들의 활기찬 활동을 관찰하는 늙은 두꺼비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이런 내용의 공연을 위해 적극적인 어머니들은 의상 준비에 많은 비용과 노력을 투자하면서 말한다. "제발 눈에 띄지 말고 수수하게 무리에 끼어 같이 날아다니고, 가끔씩만 살짝 빛을 내라. 하지만 절대 다른 새들이 질투할 정도로 빛을 내지는 마라." 연극에서처럼 획일화되고 있는 교육을 보며, 아이들을 학교와 공무원 신분의 교사들에게만 맡겨놓아서는 안 된다는 통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내가 조금만 더 용감하다면 모든 획일주의자들의 원형인 프로크루스테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의 이야기를 초등학교 연극에 맞게 각색하자고 제안할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온갖 감언이설로 꼬여 집으로 유인한 뒤 붙잡아 침대에 눕히고는,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딱 맞을 때까지 잡아 늘이고, 침대보다 길면 침대에 딱 맞게 몸을 잘라버린다. 전체 교육제도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아서 아이들은 그 안에서 사이비적인 교육 행위에 따라 획일화된다. 영특하고 활기 넘치는 아이가 통계적 평균치에서 벗어나면 특이한 아이로 간주되어 평균치와 같아질 때까지 교육적 조치의 세례를 받고, 발달 수준이 기준치에 미달인 아이들은 엄청난 보살핌을 받으며 상급학교로 보내질 때까지 계속 침대에 맞게 늘여지게 되는 것이다.
부모들이 교사에게 바라는 것은 많은 부모들이 지적이고 독창적이고 섬세한 자기의 자녀가 학교에 간 후 더 이상 이렇다 할 일을 해내지 못하고 불안에 시달리는 것을 경험한다. 곧잘 불만을 털어놓고 때때로 큰 소리로 분노를 표출하는, 열의 없고 불만투성이인 학생으로 변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아이들은 돌연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학교는 어땠니?"하고 물으면 "좋았어요."라는 규격화된 대답이다. 나머지 말은 매일 숙제 때문에 고생하고, 선생님이 꼭 따르라고 한 지시들이 담긴 수많은 통지문을 읽고 처리하느라 파묻혀 버린다. 이런 아이들을 보며 부모들은, 처음에 호기 있게 밝혔던 포부를 무엇하나 제대로 실현시켜주지 않는 사람들이 대표로 있는 기관에 자녀를 맡겨야 한다는 상상을 하면 겁이 덜컥 난다.
나는 납세자의 엄마로서 초등학교라는 기관에서 내 아이가 일기와 쓰기, 셈을 배우기를 기대한다. 교사가 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기대한다. 아이가 기초를 충분히 익혀, 6년간 학교를 다니고 나면 읽고 쓰는 능력을 100퍼센트 갖추고, 장래에 아이에게 무슨 일이 닥치든 지속될 문화기술(좁은 뜻으로는 읽기·쓰기·기초 연산능력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채집·수렵부터 문학·미술·음악을 거쳐 커뮤니케이션과 정보통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많은 기술과 활동을 일컫는다)의 기초도 세웠으면 한다.
부모들이 교사에게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일에 능숙하여 수업시간에 필수적인 기본 지식과 기능을 전달하는 것, 엄격하든 그다지 엄격하지 않든, 그것은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교사가 아이를 호의적으로 존중하며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어(文語) 취득과 기본 연산, 읽기 능력에서 아이의 발전과 퇴보를 교사의 개인적 호감, 그날의 컨디션, 기타 심적 상태를 배제하고 전문가다운 공정성을 바탕으로 평가했으면 한다. 또한 중요한 건 교사가 사적인 이유로 자주 결근하지 않는 것, 이런저런 고민으로 괴로운 나머지 아파서 몇 주 씩 침대에 누워 있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일을 잘 하는, 무엇보다도 즐겁게 하는 교사를 원한다. 그러라고 세금을 내고, 매일 아침 정각 여덟 시에 푹 자고 일어나 든든히 먹고 깨끗이 차려입고 필요한 학용품을 갖춘 아이를 학교 정문에 데려다 놓는다. 그러라고 교사는 국가에 채용되며 안정된 직장과 많은 특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교무실거꾸로 된 학교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학습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전혀 이해 받지 못한다. 어떤 아이는 지도가 필요하지만, 어떤 아이는 그저 경청하는 것이 최선의 학습법이다. 어떤 아이들은 새 단어를 배울 때마다 탁월한 암기력을 발휘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철자를 대충 건너뛸 때 더 쉽게 배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서 수줍은 성격의 아이는 조별로 공부해야 할 때 난감해 할 수밖에 없다. 수업시간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아이는 리탈린(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의 치료에 쓰이는 중추신경자극제)을 처방 받는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도 학교의 교사와 학생 간에는 명령과 규정만이 지배할 뿐, 신뢰할 만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적 책임감 같은 것은 (아마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교수 활동에 대한 기준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어 무엇을 성취해야 하고 어떻게 성취해야 하는지, 결국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이 모든 것이 교사의 사적인 문제이며 그의 판단에 맡겨진다. 학교라는 기관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아이들 개개인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선언하는 교사는 거의 없다.
진짜 학교 낙오자는?교무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교육 실패의 책임을 가정 교육 실패, 사회적 방임, 사춘기의 정체성 문제, 텔레비전 혹은 경기 불황탓으로 돌리는 주장들이 횡행해왔다. 아이들 모두 입학 첫날에는 희망이 넘치고 호기심이 가득해서 학교 생활을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학교 문제가 발생하면 교사는 학생을 욕하고 부모를 탓하거나 모든 것을 타락한 교육정책과 위협적인 자금 부족, 교육 행정당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바보 같은 명령들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제일 먼
저 자기 자신에게 이런 점을 물어보아야 한다.
물론 학생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일체의 나쁜 행실과 비참한 실패의 이유가 항상 교사에게만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교사는 그 이유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교사가 아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완고하게 거부한다. "대체 어떻게 이성적인 수업을 하란 말이야?" 교사들은 독선적인 포즈로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과잉행동 아동과 편식 아동, 행동장애 아동, 부잣집 망나니, 난독증 아동이 뒤범벅된 무리라고 판정한다. 타인의 잘못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유일하게 정말로 교육적인 가치가 있는 기본 태도를 교사 집단에서 찾아봤자 헛수고다.
교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문적이고 구속력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결과가 낳는 좋은 교사와 나쁜 교사의 편차는 점점 커진다. 그러니 훌륭한 교사를 만나려면 항상 상당한 행운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 가장 먼저, 그리고 직접적으로 시달리는 것은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나이에 예측불허의 권력을 자랑하는 변덕스런 교사들의 손에 맡겨진다. 수업에서는 교사가 선호하는 것들이 다뤄진다. 그들은 당일 컨디션과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 때로는 자제력을 상실하거나 아예 무관심한 표정을 짓는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물을 흐리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해고 불가능한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거나 해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왜 교사가 되었을까교사,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직업교사는 예로부터 보호받는 사회적 환경에서 살고 있고 거의 한 번도 그곳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야간 근무나 교대근무, 하루아침에 해고당하는 냉정한 직업의 현실에 무지하다. 그들의 직업적 유연성은 정신적 지평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수십 년 전에 절대 다른 문과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들어섰던 학교 정문에서 끝난다. 그는 그 안에서 반 아이들과 바깥세상의 삶에 등을 돌린 채 칠판에 붙어 일한다. 새장 안에서는 자기가 한 일로 평가받아야 하는 현실세계의 요구가 들어설 자리가 많지 않다. 별 큰 위험 없이 가족을 부양하고 위기에도 안전한 직업은 (거의) 학교 밖에 없다.
신문에 교사직이 보수가 좋은 일자리라는 기사가 실리기라도 하면 교사들은 큰 소리로 개탄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버릇없는 자식을 돌보는 이런 끔찍한 직업을 가질 사람이 자기들 말고는 없을 거라고 한탄한다. 교사들은 또 학교에서 하루를 버티기 위해서는 신체적, 정신적 부담을 견디는 능력이 평균 이상 되어야 한다는 말도 즐겨한다. "멍청한 아이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떠나고 싶다"는 여교사도 있었다. 왜 하필이면 아이들을 싫어하고 아이들에게 다가갈 마음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굳이 교사가 되는지 몹시 궁금할 따름이다. 어떤 직업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디에서나 그에 합당한 자격을 미리 갖춰야 한다. 만약 난독증(難讀症) 환자가 기자가 되고 싶어한다면 다급히 말려야 하지 않을까?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반복할 뿐교사들은 성취라는 걸 잘 모른다. 반대로 아이들은 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 성취욕에 불탄다. 무턱대고 뭔가를 배우려고 안달한다. 그럴려고 학교에 온 것 아닌가. 그러나 초등학교 교사들은 아이들의 능력을 철저히 과소평가하는 바람에 아이들이 처음 학교에 들어와서 보여주는 이런 강렬한 호기심과 열의를 보는 눈이 오래 전에 흐려졌다. 솜처럼 푹신한 새장 속에 갇힌 채 날마다 아이들에게 인생에 대해 뭔가 가르쳐줄 최고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낸다. 배울 계기는 넘칠 정도로 많이 있다. 뭔가를 배울 적당한 순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음악을 연주하고 뭔가를 만들고 요리를 하는 등의 모든 것이, 정말 모든 것이 호기심에 새로이 불을 붙여줄 수 있다. 그런 학습 계기들은 저절로 생기지만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만 알아 볼 수 있다.
시력 보완용으로 자신의 눈가리개를 나눠주는 교사로부터는 그런 계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 교사는 틀에 박힌 대로 가르친다. 무엇이 틀에 박힌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3주 후에나 되돌려주는 시험지가 그렇다. 제일 늦게 교실에 와서 제일 먼저 나가는 선생님들이 그렇다. 진짜 딱정벌레를 관찰하는 법 없이 딱정벌레에 대한 비디오로 때우는 생물 수업이 그렇다. 학부모들이 전화할까 봐 귀찮아서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는 교사들이 그렇다. 학부모회의 때 불참하는 교사들이 그렇다. 학부모 대표가 과목별 전문교사들을 최소한 한 번이라도 학부모회의에 나오도록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책 한 권은 너끈히 쓸 수 있을 정도다.
틀에 박힌 것은 훨씬 더 많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무지, 엄청나게 과도한 요구, 악명 높은 잘난 척, 배부른 나태, 제멋대로의 맹목…. 왜 국어 수업을 듣고 문학을 좋아하게 되는 사람이 그렇게 조금밖에 없는지, 왜 종교 수업을 듣고 교회에 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세계정치 수업을 듣고 올곧은 민주주의자가 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적은지 여전히 궁금해하는 사람은 그들의 편협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왜 이것이 변해야 하는가? 학교 안은 편안하고 알아서 봉급을 챙겨준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대규모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들 역시 학생들만큼이나 교사라는 직업을 별로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아이들의 성취욕을 북돋우고 바람직한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교사들의 연대감을 존중하면서 교육 현장의 다른 관계자들도 참여시키는 것이다.
무슨 권리로?: 교사라는 본보기무심코 한 말이 아이를 지배한다콩과 다진 고기를 넣고 야채를 곁들인 토마토소스 파스타는 우리 집에서 최고의 인기 메뉴로 네 아이 모두 좋아한다. 그런데 샤를로테가 "브뤼텐차르트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콩이랑 국수는 안 된대. 둘은 서로 안 맞는 음식이래."라고 말한다. 샤를로테는 선생님이 콩과 국수의 궁합이 안 맞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접시를 비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제 토마토소스 콩 파스타는 우리 가족을 예전처럼 긴밀히 결합시켜주지 못한다. 이건 다른 많은 사건들 가운데 아주 사소한 일례에 불과하지만, 교육적 실패의 다채로운 시나리오의 단편을 돋보기를 댄 것처럼 확대시켜준다.
교사가 무슨 권리로 개인적 취향을 마치 엄정한 법이라도 되는 듯이 알리는 것일까? 부드럽게 관심을 보이며 "오 콩을 곁들인 국수라, 난 생전 처음 들어봤어. 한번 먹어보고 싶구나"라고 말해주면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