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 -
물리학을 연구하다고등학교 졸업 시험 뒤, 나는 어려워서 절반 정도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내용이 나를 매혹시킨 한 권의 책을 손에 넣었다. 수학자 헤르만 바일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서술한 『공간·시간·물질』이라는 저서였다. 여기에 전개된 어려운 수학적 방법과 그 뒤에 깔려 있는 추상적인 사상체계와 대결에 몰두한 나에게 이 저서는 이미 수학을 전공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던 내 결심을 더욱 굳게 해 주었다. 그러던 중 뮌헨대학에서 중세 그리스어와 근대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던 아버지가 내게 수학교수 린데만과의 상담을 주선해 주었다. 린데만 교수는 나보고 최근에 무슨 책을 공부하였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바일의 저서 『공간·시간·물질』을 공부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교수는 "그렇다면 자네는 이미 수학을 끝낸 것이나 다름이 없네"라는 말로써 우리 대화를 끝내 버리고 말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수학공부는 이렇게 해서 끝장이 나고 말았다.
실의에 찬 나는 아버지와 상의한 결과 수리물리학을 시도해 볼 수 있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조머펠트(Arnold Sommerfeld) 교수를 방문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학교공부 틈틈이 해오던 내 수학공부와, 바일의 책 『공간·시간·물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학생은 너무나 야망이 크군요. 가장 어려운 것부터 시작하였다고 해서 더 쉬운 문제가 저절로 이해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학생은 전통적인 물리학의 영역에서부터 겸손하고 세심한 작업을 해 나가기 시작해야 할 겁니다. 학생도 더 작은 일을 세심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해 나가서 그 결과로 우리가 바라는 무엇인가 뜻있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 참다운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교수는 이제부터 내가 연구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지시를 주었고, 내가 나의 능력을 시험할 수 있도록 최근의 원자론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조그마한 문제 하나를 제시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 뒤 몇 년 동안 조머펠트 문하에 몸을 담게 되었다.
나는 그해 가을, 훌륭한 첼리스트인 발터라는 친구 집에서 자주 모였었는데, 발터의 어머니는 내게 왜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학생은 그 연주 솜씨로 보나 음악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투로 보나 자연과학이나 기술보다 예술에 더 소질이 있는 것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학생은 왜 자연과학을 공부하려고 결심하였는지 알고 싶군요." 나는 이렇게 변명을 했다. "물리학은 음악과 다르게, 이미 설정된 궤도의 추구는 저절로 공간과 시간의 구조라든가, 인과법칙의 타당성과 같은 철학적인 근본적 위치가 문제되는 그러한 곳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앞조차 뚜렷이 내다볼 수 없는 신천지가 열렸으며, 따라서 뚜렷한 대답을 얻기 위하여서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분야에서 내가 무엇인가 공동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매력 있는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자 발터는 "네가 말하고 또 믿고 있는 물리학에서 앞으로 개척해 나가려 하고 있는 그 신개척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기 바란다."라고 요청하였고 나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가장 흥미 있는 문제들은 원자론에 있다. 원자론에서 제기되고 있는 새로운 자연법칙에 관해서는 20년 전에 발표된 플랑크의 양자론에서 최초로 시사된 바 있다. 그리고 덴마크의 물리학자 보어(Niels Bohr)가 플랑크의 아이디어를 영국에서 러더포드가 발전시켰던 원자의 구조에 관한 표상과 결부시켰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원자세계에서 기이한 안정성에 대하여 빛을 던질 수 있었으나 조머펠트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이 영역을 명백하게 이해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멀다. 따라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이 영역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관련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신 개척지가 열려 있다고 본다."
현대물리학에서 '이해'라는 개념1922년의 초여름이었다. 닐스 보어의 첫 강의의 정경은 평생 내 머리에서 지울 수 없는 인상 깊은 것이었다. 강의실은 만원이었다. 북유럽 사람 특유의 몸매를 가진 이 덴마크의 물리학자는, 가볍게 머리를 기울인 채 약간 당황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단상에 나타났다. 강의의 내용은 새로운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미 조머펠트 교수에게서 보어의 이론을 배웠고, 따라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어의 입에서 직접 듣는 강의의 내용은 조머펠트 교수를 통해 듣는 것과는 다르게 들렸다.
각 강의마다 토론이 전개되었으며 제3의 강의가 끝난 뒤에 나는 비판적인 의견을 감히 털어 놓았다. 그는 자기 이론의 기초는 아직 완전히 해명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크라머스의 결과가 옳으며, 뒷날 이 건이 실체에 의해서 확인되리라는 것은 믿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일어서서 우리들이 나눈 뮌헨의 대화에서 제기되었고, 나 자신이 크라머스의 결과에 대하여 품었던 의문점을 갖고서 반론을 폈다. 보어는 내 반론이 자기 이론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바로 감지하는 것 같았고, 그 토론이 끝난 뒤 나에게로 와서 내가 제기한 문제들을 철저하게 규명하기 위해서 오후에 하인베르크산을 산책할 뜻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 산책은 그날 이후의 내 학문적 발전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아니 내 본격적인 학문적 성장이 이 산책과 더불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보어는 오전의 토론으로 되돌아가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원자물리학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개념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뉴턴의 물리학은 물질의 안정성 때문에 원자의 내부에서는 적용이 될 수 없으며, 기껏해야 경우에 따라 하나의 거점을 제공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하자면 먼 나라로 표류한 항해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활조건이 자기 고향의 그것과 전혀 다를 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에 표류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는 의사소통이 간절히 요구되지만 그 의사소통을 위한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이 이론을 다른 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의미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들 사이의 관련성을 제시하고 신중하게 손으로 더듬어 가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크라머스의 계산도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며, 내 설명이 불충분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 이상의 것을 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지난 며칠 동안 강의에서 설명하시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이유를 말씀하신 바로 그 원자의 상은 도대체 무엇을 뜻합니까?" "이 상은 확실히 경험에서부터 나온 것이며, 학생이 원한다면 추측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지만, 어쨌든 이론적 계산에서부터 얻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양자이론의 역설이나 물질의 안정성과 관련되어 있는 이해할 수 없는 특성들이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으로 차츰 더 예리한 빛에 의해 조사되기를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원자 안의 이와 같은 비직관적 현상들도 어떻게든지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이 형성되리라고 기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과 나눈 대화1924년 7월 이후 코펜하겐에서 사강사로 있던 나는 1925년 여름학기에 다시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선의 강도에 대한 공식을 세우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수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미로에 빠져들어 좀체 그 출구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로부터 나는 원자 안에서는 절대로 전자의 궤도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되며, 진동수와 선의 강도를 결정하는 양(즉 이른바 진폭)을 궤도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25년 말에 나는 아주 불쾌한 고초열병(枯草熱病)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도리 없이 2주일 동안의 휴가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고초열병을 완치하기 위하여 나는 헬골란트섬으로 여행을 하면서 바다공기를 마시기로 했다. 이 섬에서는 매일 고지로 산책을 하고 해변의 모래 언덕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 말고는 내 연구를 방해하는 외부의 유혹이 없었기 때문에, 괴팅엔에서보다 오히려 몇 배나 능률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겨우 며칠 만에 내 당면문제에 대한 간단한 수학적 정식화에 성공하였다.
그 다음 며칠의 노력으로, 관찰 가능한 양만이 어떤 구실을 맡아야 하는 물리학에서 무엇이 보어-조머펠트의 양자조건의 자리에 들어와야 하는가를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이 부가조건으로 이론의 중심점이 정식화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수학적 도식에서 에너지의 법칙이 성립되는지를 더욱 집중적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에너지의 표, 즉 요즘의 언어로 말하면 에너지 행렬(매트릭스)의 각각의 항을 오늘날의 척도로 보면 매우 복잡하고 번잡하지만 계산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모든 항에서 에너지의 법칙이 타당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그래서 나는 수학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는 완전한 양자역학이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원자현상의 표면 밑에 깊숙이 간직되어 있는 내적인 아름다움의 근거를 바라보는 그러한 느낌이었다.
그 후 1926년 봄, 나는 베를린 대학의 물리학 토론회에서 새로운 양자역학에 관하여 보고하도록 초청을 받았다. 토론회 멤버였던 아인슈타인은 토론회가 끝난 뒤 이 새로운 이론에 대하여 좀 더 상세히 토론하자면서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는 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 시도를 뒷받침하고 있는 철학적인 전제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관찰이 가능한 양만을 물리학의 이론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나는 선생님이 바로 이 생각을 선생님의 상대성이론의 기초로 삼으셨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아인슈타인이 대답하였다. "아마 나는 그런 철학을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한 것입니다. 관측이 가능한 양만을 도입한다는 당신의 주장은 당신이 정식화하려고 노력한 그 이론의 성격에 대한 하나의 추측인 것입니다. 당신의 이론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복사현상의 기술을 손상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정당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절대로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많은 중요한 문제들이 풀리지 않은 채 산적되어 있는데도 당신의 이론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아인슈타인의 이 물음에 대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도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자연이 갑자기 어느 한 사람 앞에 이때까지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상 사이의 단순성과 완결성을 펼쳐보여 주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두려움에 가까운 놀라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도 틀림없이 이와 같이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미 언급된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어떻게든지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수학적인 도식의 단순성은 그 결과를 대단히 정확하게 이론에 따라서 미리 계산할 수 있는 많은 실험을 틀림없이 고안해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그와 같은 실험이 이루어지고 거기서 미리 예언된 결과가 얻어진다면 사람들은 이 이론이 이 영역에서 자연을 올바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과학과 종교에 대한 첫 대화솔베이 회의에 참석하느라 브뤼셀 호텔에서 함께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밤, 이 회의에 참석한 몇몇 젊은이들이 홀에서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에게 종교와 자연과학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던 것 같다. "자연과학에서는 옳으냐 틀리느냐가 문제시되고 종교에서는 선이냐 악이냐, 또는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됩니다. 자연과학은 기술적으로 합목적적인 행동에 대한 기반이고 종교는 윤리의 기반이 됩니다. 이 두 영역은 서로 분리되어 이 세상의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을 잘 대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리는 나에게는 그렇게 잘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인간 공동체가 지식과 신앙의 이 같은 날카로운 분열 속에서 언제까지나 살아갈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볼프강이 자신의 견해를 말했고 이렇게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25세의 폴 디랙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면서 '나는 도대체 이 자리에서 왜 종교에 관해서 논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반론을 폈다. "만약 사람들이 정직하다면 종교에서는 그야말로 아무런 정당성도 없는 터무니없는 거짓 주장만을 외치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신'이라는 개념은 도대체가 인간의 환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서 아직도 종교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우리를 납득시킬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즉 민중을 달래려는 욕망이 배후에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너는 종교가 정치적으로 남용된다고 종교를 비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남용할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을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공동체 안에서 공통적인 언어를 찾는 가운데 역사 안에서 발전된 정신적인 형태는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그에 따라서 자기 생활을 이뤄왔기 때문에 커다란 설득력을 갖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네가 지금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쉽게 종교가 폐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자 폴 디랙이 대답했다. "나는 종교적인 신화는 근본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참된 것뿐이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그때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순전히 이성만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해관계의 공정한 균형을 위하여 노력하며 그 이상의 것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토론은 설왕설래하면서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는데, 평상시와는 달리 볼프강이 더 이상 이 토론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는 어떤 때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또 어느 때는 짓궂은 미소를 띠면서 이야기를 경청하였지만 말참견을 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에게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예, 예. 우리들의 친구 디랙은 하나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종교의 주제는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디랙은 바로 그 종교의 예언자입니다." 이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디랙도 함께 웃었다. 이로써 이날 저녁의 대화는 끝을 맺었다.
혁명과 대학생활1933년 여름학기 초에 내가 라이프치히 연구소에 돌아왔을 때 파괴는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내 세미나에 참석하던 유능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미 독일로부터 망명을 하였고 나머지의 상당수가 망명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나 자신도 독일에 남아 있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스스로 자문자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올바른 처신에 대하여 고통스럽게 번민을 거듭하던 이 시기에 나에게 크게 도움을 준, 내 강의를 듣고 있던 민족적 사회주의자인 어느 젊은이와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아 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피아노 연습을 마치고 막 연구소로 내려가다가 보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젊은 학생을 보았는데 그는 나를 보자, 약간 주저하면서 "
저 자신이 히틀러 유겐트의 지도자이기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