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의 유쾌한 반란
하인리히 찬클 지음 | 아침이슬
제1부 우연히 발견한 운명 : 고고학, 인류학진시황릉 : 우물 파다 발견한 지하군대1974년, 시안에서 약 40km 떨어진 여산 기슭에서 농부 몇 사람이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몇 개의 토기조각이 발견되었지만, 농부들은 처음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더 파내려가다 보니 사람 크기의 진흙 인형이 나왔고, 농부들은 그 사실을 곧바로 관청에 알렸는데, 그 유명한 진시황(BC 259~210) 병마용갱은 이렇게 발견되어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곳은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데, 6~8m 깊이에서 6,000개가 넘는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네 마리 진흙 말이 끄는 전차 35대가 발견되었고, 진흙으로 만들어진 이 인형 군대는 1만㎡ 이상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방형의 전투 대형으로 배열된 병사들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으며, 210명의 궁병으로 이루어진 전위대는 군대의 동쪽 끝에 서 있었다. 아울러 주력부대는 동으로 된 창과 도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러고 나서 2년 뒤에는 약 1,400개의 도기 인형이 묻혀 있는, 첫 번째보다는 조금 작은 두 번째 갱을 발굴되었으며, 곧이어 세 번째 갱도 발견되었는데, 특히 놀라운 점은 인형들의 얼굴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인형들 모두가 실제 진시황 군대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본떠 똑같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병사 인형들의 얼굴 모양에서 다양한 민족이 진시황의 군대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아울러 병사 인형들의 복장과 발견된 거의 1만 점에 이르는 무기들은, 당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던 군사조직과 전쟁기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거대한 규모의 병마용은 진시황 -진시황은 집권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잘 정비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고, 도량형을 규격화했으며, 화폐와 문자를 통일했다. 또 중국 북방에서 거대한 토목공사에 착수해 총연장 5,000Km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죽은 뒤,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이 진흙 군대가 진시황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황제가 죽은 후에 그를 사악한 유령들로부터 지키고, 또한 그가 생전에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졌는지 후세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거대한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일부일 뿐이다. 최근 30년 동안 5만 점의 귀중한 예술품이 소장된 총 600군데의 폐허가 발견되었고, 또 최근 고고학자들은 우연히 목재구조물로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던 또 다른 거대한 무덤을 발견했는데, 그 곳에서는 질서정연하게 놓여진 80점의 석기갑옷과 30점의 석기투구가 발견되었다. 참고로 흉부갑옷은, 약 600편의 석회석 조각이 납작한 청동줄로 엮여진 형태인데 무게가 30kg에 달하였다. 아울러 아주 최근에 발굴된 무덤에는 점토로 된 곡예사 인형이 들어 있었는데, 이 곡예사 인형들은 다채로운 색깔로 칠해져 있어서, 2,000년도 더 전에 어떻게 염료가 제조되었는지 연구하려는 학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로제타석 : 프랑스 장교가 발견한 '말하는 돌'고대 이집트 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상형문자가 해독됨으로써 가능해졌는데, 오랫동안 파라오 시대의 많은 묘를 장식하고 있는 그림처럼 생긴 수많은 문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노력해 왔지만 해독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1799년 프랑스의 한 군인에 의해 아주 우연히 상형문자의 엄청난 수수께끼를 풀 열쇠가 발견되었는데, 이 행운의 발견자는 피에르-프랑수아 사비에르 부샤르(Pierre-Francois Xavier Bouchard)로 이집트에 상륙한 나폴레옹 군대의 장교였다.
부샤르의 군대는 알렉산드리아 동쪽 약 50km 지점에 있는 로제타라는 도시 근방의 생주앙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다. 어느 날 부샤르에게 요새 확장을 위해 중대를 이끌고 옛 성벽 하나를 철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부샤르는 작업 중에 세 단락의 기이한 비문이 새겨진 돌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높이가 1m가 넘었고 너비는 약 80cm 가량이었으며, 무게는 700kg이 넘었다.
돌의 윗부분에는 상형문자가, 가운데는 고대 이집트의 민중문자가, 아래쪽에는 그리스 문자가 씌어 있었다. 다행히도 고대 이집트 민중문자와 그리스 문자로 된 내용들은 꽤 잘 보존되어 있었다. 반면 상형문자로 기록된 내용은 상당 부분이 손실되어 있었다. 부샤르는 자신이 중요한 발견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돌을 즉시 카이로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이 비문을 복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비문 복사본은 프랑스로 보내져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패함으로써 로제타석은 영국의 전리품이 되었다. 영국인들은 즉시 이 돌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옮겼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 때문에 로제타석을 보려면 지금도 카이로가 아니라 런던을 방문해야 한다.
그리스어 부분을 해독한 결과 비문은 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왕의 재위기간(BC 203~181)에 멤피스에서 열렸던 이집트 신관 총회의 포고문임이 밝혀졌다. 이 포고문에는 이집트 사원들에 허락된 특별한 권한과 재위 중인 파라오에게 표하는 존경과 찬양이 나열되어 있었다. 또 비문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서로 다른 세 언어 -상형문자, 고대 이집트의 민중문자, 그리스 문자- 로 된 비문들이 모두 같은 내용임이 밝혀졌는데, 마지막 문장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포고문은 단단한 돌로 된 비석에 성스러운 문자, 민중문자, 그리스 문자로 씌어져야만 한다.
'성스러운 문자'란 의심할 여지없이 상형문자를 의미하고, '민중문자'는 당시 일반 사람들이 쓰던 문자를 말하는데, 비석에 적힌 이 글은 상형문자 해독에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상형문자나 민중문자를 그리스 문자와 비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형문자의 수수께끼가 명백히 밝혀지기까지는 20여 년이 더 흘러야 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며 이집트 연구자인 장-프랑스아 샹폴리옹(Jean-Francois Champollion, 1790~1832)이 상형문자 해독에 성공한 것은 위대한 학문적 업적이었는데, 샹폴리옹이 결정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로제타석을 연구하면서부터다. 샹폴리옹은 오늘날 이집트학의 대부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가 이집트의 비문이나 기록들을 통해 서양 중세 초기 사람들보다 옛 이집트인들의 일상에 대해 더 정통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만족할 줄 모르는 학구적 열망과 천재성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로제타석이 우연히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샹폴리옹도 상형문자라는 매력적인 세계의 전모를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알프스의 외치 : 이상기후 덕분에 세상에 되돌아온 석기시대인1991년 알프스 산맥의 외츠 계곡에서 아주 잘 보존된 석기시대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오스트리아에서는 이 석기시대인을 외치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으로 부른다. 이 놀라운 발견에는 우연한 상황과 기이한 사건이 어우러져 있다. 우연은 9월 18일 등산가 헬무트 지몬과 에리카 지몬 부부가 계획한 당일치기 알프스 여행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지밀라운 봉에 오를 계획이었는데, 일반 등산로 대신 얼음평야 쪽으로 등반을 나섰고, 널따란 빙하와 맞닥뜨려 길을 우회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등반 계획에 차질이 생겨 오후 3시 반경에야 정상에 도달했다. 따라서 그날 바로 하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몬 부부는 지밀라운 산장을 찾아 그곳에서 밤을 보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몬 부부는 다음 날 곧바로 계곡으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날씨가 굉장히 좋았던 탓에 두 사람은 즉흥적으로 피나일 봉까지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지밀라운 산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평범한 산행길을 놔두고 하우슬랍요흐를 넘어갔는데, 갑자기 빙하가 녹은 물로 채워진 분지가 나타났고, 그들은 물을 피해 왼쪽으로 돌아가다가 사람의 시체가 얼음에서 불쑥 솟아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지몬 부부는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경찰에 잘 설명할 수 있도록 발견 장소를 정확히 기억해두었고, 신중을 기하기 위해 사진을 몇 장 찍으려고 했으나, 불행히도 필름이 한 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후일 그들은 이 사진이 '올해의 사진'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몬 부부는 지밀라운 산장으로 되돌아와 산장 주인에게 자신들이 끔찍한 모습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알렸고, 산장 주인은 경찰에 이를 알리겠다고 약속했으며, 이들은 계곡으로 내려왔다.
지몬 부부가 5,000년 이상 된 외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예외적인 우연들이 겹쳐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이상기후로 인해 알프스 지역의 빙하가 녹을 만큼 따뜻한 날씨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외치가 얼음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빙하가 녹은 덕분이었고,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지몬 부부가 외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훗날 드러난 바에 따르면, 외치를 발견해서 안전하게 보존하는 데 허용된 시간은 단 6일밖에 없었다고 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발견된 시신을 조난당한 여행자의 시체로 여겨, 인스부르크이 법의학연구소로 이송했는데, 그것이 원시인류의 시신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전문가들 사이에는 빙하에 묻힌 시신은 500년 이상 보존되지 못한다는 의견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빙하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시신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치가 5,000년 이상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가 죽기 바로 직전 우연히 바위틈으로 빠지는 바람에, 빙하로 인한 손상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매우 어려웠던 외치 구조 때에도 예기치 않은 혼란들이 벌어졌다. 우선 발견 장소가 오스트리아 영토인지 이탈리아 영토인지 불분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산장 주인은 양쪽 경찰서에 모두 신고를 했는데, 이탈리아인들이 처음에 시신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아, 오스트리아 지방 경찰서에서 시신 처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시신을 맡은 법의학 분과는 시신에 고고학적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고, 우연이었지만 외치를 맡은 법의학자 한 명이 인스부르크 원시·선사시대연구소 소장인 콘라트 슈핀들러(Konrad Spindler)교수를 알고 있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슈핀들러는 그 시신을 보고 나서 그것이 엄청난 발견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래서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발견 장소로 달려가 전문적인 연구에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 뒤 외치의 발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가 분명해지자 이탈리아인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들이 뒤늦게 발견 장소를 찾아가본 뒤, 시신의 위치가 이탈리아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만약 이 사실이 처음부터 분명히 알려졌더라면, 슈핀들러 교수는 시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고, 외치는 발굴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며칠 후 폭설이 내려 외치가 발견된 장소는 완벽하게 눈으로 덮여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 오랫동안의 외교적 줄다리기 끝에,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는 마침내 합의 -우선 오스트리아가 시신의 인류학적 연구를 담당하고, 후에 시신을 이탈리아에 건네주기로 한 것- 에 이르렀고, 두 나라는 외치의 학술명도 공동으로 확정지었는데, '하우슬랍요흐의 호모 티롤렌시스(Homo tirolensis vom Hauslabjoch)'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호모 티롤렌시스 연구에 몰두했고, 수많은 흥미로운 조사결과 -석기시대인들은 원시적인 수렵가나 채집가들이 아니라, 수많은 도구와 일상용품을 사용했고, 품이 많이 들어간 옷을 입었다는 사실이 밝혀짐- 가 수집되었다. 아울러 최근 외치의 몸에 화살촉이 박혀 있는 것이 발견됨으로써, 그가 탈진해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외치의 삶과 죽음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는 슈핀들러의 저서 『얼음 속의 사나이, Der Mann im Eis』에 흥미롭고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제2부 세계를 바꾼 우연들 : 생물학, 의학, 약학인간 염색체 수 : 생명공학의 기초를 배양한 저농도 용액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에는, 인간의 염색체 수가 20개에서 40개 사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1912년 벨기에의 생물학자 폰 비나바르터가 집중적인 연구 끝에 남자는 염색체가 47개이고, 여자는 48개 이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약 10년 뒤 미국의 의사 T.S.페인터가 1921년의 임시보고서에서 염색체가 46개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2년 뒤 연구가 끝났을 때는 염색체 수를 48개로 수정해서 보고했고, 이후 30년간 과학계는 이 보고에 만족했다. 왜냐하면 이를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 -우리와 가장 가까운 생물학적 친척인 영장류에서 발견된 염색체 수도 48개였음- 이었다.
하지만 1952년 미국의 유명한 중국계 세포생물학자 타오치우 수(Tao-Chiuh Hsu)가 다시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인간의 세포를 유리그릇 안에서 배양하고 증식시킬 수 있었다. 수는 이렇게 배양된 조직에서 미성숙 세포의 염색체를 연구하여, 각 염색체를 서로 분리했고, 결국 48개로 이루어진 인간의 세포핵 염색체를 짜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수는 논문의 부록에서, 연구 도중 우연히 용액의 희석을 잘못한 덕분에 염색체를 분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배양된 세포를 삼투압이 같은 소금용액에 씻었어야 하는데, 실수로 염분이 너무 적은 용액이 만들어졌다. 이 용액으로 처리된 세포들은 주변과의 삼투압 차이 때문에 심하게 부풀어 올랐고, 용액이 세포로 마구 밀려들어가자 보통은 서로 밀착되어 있던 염색체들이 팽창하면서 분리되었던 것이다. 수는 처음에는 완전히 변한 세포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그 실수가 새로운 실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즉 염색체들이 하나하나 떼어진 탓에 분석하기가 훨씬 쉬워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저압효과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수는 1953년 조직배양을 통해 배양된 세포의 염색체를 확장시키는 방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한편 수는 염색체 연구의 발전에 획기적인 토대를 마련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원래 목적인 인체세포핵 염색체의 정확한 조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연구방법이 더 발전된 뒤인 1956년 스웨덴의 과학자 엘버트 레반과 그의 동료인 인도네시아계 미국인 조힌 티조가 인간에게는 46개의 염색체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이 같은 방법으로 염색체 수에 관한 수수께끼를 푸는 일은 상당히 원시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표본 제작방법과 착색방법이 매우 개선되어, 띠 모양의 무늬착색을 근거로 각각의 염색체를 식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구조상의 변화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의 괄목할 만한 방법론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발견된 저농도 세포처리법은 염색체 분석의 토대를 세운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암 진단법 : 모든 발견의 시작은 호기심그리스 의사 게오르게 니쿨라스 파파니콜라우(1883~1962)는 암 진단과 관련해 선구적인 성과를 일궈낸 인물인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위대한 발견은 스스로가 말했듯이 '대부분은 우연' 덕분이었다. 그는 동료인 찰스 스토커드와 함께 모르모트의 성주기(발정주기 및 월경주기의 총칭)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성주기 동안에 모르모트의 질점막세포가 심하게 변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파니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