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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외교의 승부사

박순교 지음 | 푸른역사
딸 고타소가 남긴 한(恨)



무왕(재위 600~641)의 뒤를 이어 백제의 왕위에 오른 젊은 의자왕은 늙고 병든 선덕여왕이 다스리는 신라에 대해 공격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서기 642년 의자왕은 친히 보기(步騎)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했다. 백제군의 우악한 창검에 밀려 대야성의 도독 김품석 일가는 금수마냥 끌려나왔고, 백제의 장수가 휘두른 칼날에 선혈을 뿌리며 목숨을 잃었다. 서라벌은 대야성에서 말을 달리면 겨우 반나절 안에 당도할 거리에 있었다. 무장의 본분을 망각하고 갑옷을 입지 않은 채 죽음을 당한 품석의 일이 중신들의 귀에 낱낱이 전해졌다. 조정의 여론은 물 끓듯 비등했고 비난의 여론이 품석의 장인 김춘추에게 날아들었다.



김춘추는 문희가 딸을 낳았을 때 '옛날에 불에 기울고 무너질 뻔한 아이'라는 뜻에서 딸의 이름을 고타소(古陀炤)라 이름 지었다. 김유신의 우악한 손길에 끌려 섶 불 위에 얹혀졌던 문희를 구해내어 얻은 딸이었기 때문이다. 진골의 성장(城將) 품석에게 출가한 고타소는 품석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서라벌로 전해진 고타소의 주검은 머리가 없었다. 김춘추는 해묵은 격정이 치밀어 가슴이 떨려왔다. 민심은 흉흉하여 위로의 말 한마디 전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멍한 눈으로 하루 종일 서 있다가 피눈물을 떨구며 복수를 다짐하는 게 김춘추의 일과가 되었다.





진흥왕의 한수경략



신라와 백제의 틈이 벌어지고 처참한 살육을 주고받게 된 것은 한수(漢水, 한강)를 둘러싼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한수는 중국과 무역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고 한반도의 중심에 있어 종횡을 아우르는 내륙의 교점이었다. 한수는 국가를 움직이는 동력원이자 반도의 상권을 좌우하는 인자였으니 한수의 차지 여부는 국부의 향방을 가름하는 것과 같았다. 고대국가로의 완성이 가장 먼저였던 백제가 구축한 고대 상업 세력권의 중추 기지가 한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제가 누린 영광의 나날은 길지 않았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재위 391~412)과 장수왕(재위 413~491)이 한수를 차지하면서 동북아 최대의 강국으로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576)대에 들어서면서야 웅비의 전기를 맞이했다. 초기 신라의 왕들은 상징적 지배자의 권위를 갖춘 것에 불과했다. 박혁거세와 남해차차웅은 각기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처럼 제사장의 권위에 의지한 통치 형태에 머물렀다. 떡까지 물면서 즉위한 유리니사금(尼師今) 역시 치아의 숫자를 헤아려 적임자를 가릴 만큼 가진 권위는 하잘것 없었다. 신라의 결정적 전기는 반도의 역학관계에서였다.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연결된 왜와 가야의 거점을 공략하자 신라의 선조 내물왕이 낙동강 변을 차지하면서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하였다. 마립이란 머리, 간이란 수장이란 뜻이니 마립간은 이제 다른 간(干, 족장)들을 아우르며 권력을 행사하는 핵심지배자가 된 것이다.

내물왕이 중앙집권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놓긴 했으나 신라는 여전히 고구려와 백제의 위세에 눌려 힘을 펴지 못했다. 신라의 남과 동은 망망대해가 가로막고 있었고 북서에는 소백산맥이 버티고 있었다. 중국과 관계를 트려 해도 육로는 고구려가, 해로는 백제가 가로막아 숨통을 죄여왔다. 신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통팔달의 거대한 관문이 절실했다. 진흥왕이 한수를 차지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생존을 위한 절박한 이유에서였다. 진흥왕은 우선 내치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 군주가 주의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도록 하였고, 화랑도를 통해 인재를 길러 국가의 기틀을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력을 대외 정복에 집중시켰다.



진흥왕은 영토를 넓히면서 백성들을 변경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행했는데, 이는 점령지의 반란을 막는 동시에 신라의 인구를 넓히는 정책이기도 했다. 내치의 안정을 이룬 진흥왕은 신라의 숙원, 북쪽의 한수로 눈길을 돌렸다. 진흥왕 재위 12년(서기 551), 고구려는 권력다툼으로 내부가 무너지고 있었다. 장수왕의 손자 문자명왕(재위491~517)이 권력을 놓고 벌어진 칼부림에 목숨을 잃고, 뒤를 이은 안원왕(재위 531~545)마저 병석에서 자객의 손에 피살되었다. 이러한 정국의 혼란 끝에 즉위한 양원왕의 나이는 여덟에 불과했다. 진흥왕은 내란에 휩싸여 신음하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백제의 성왕과 밀약을 맺었다. 그것은 신라가 한수 상류의 10군을, 백제는 한수 하류의 6군을 차지하자는 약속이었다.



나제 연합군이 북진을 성공시키니 신라는 한수 상류를, 백제는 한수 하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신라는 기존영토보다 더 큰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이 생각하기에 중국과의 교류를 트기 위해서는 한수 하류가 필요했다. 진흥왕은 백제를 침공하여 황무(黃武)에서 거서(巨黍)에 이르는 벌판을 차지했다. 백제의 성왕은 진흥왕의 배신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화친을 가장하며 여식을 바쳤다. 그리고 1년 후,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관산성을 함락하고, 한편으로는 별동대에 명하여 몰래 서라벌을 치고자 했다. 그러나 섣달의 눈이 사방에 한길이나 쌓여 성왕은 구천을 지나기도 전에 신라군에 사로잡혀 목숨을 잃었다. 잘린 성왕의 머리가 서라벌 왕궁의 계단에 묻히니 진흥왕에게 출가한 백제 공주는 목숨을 끊었고, 이 일은 두고두고 백제의 공격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고야 말았다.



김춘추 집안의 내력



서기 566년, 진흥왕은 서른넷 되던 해에 원자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태자는 스무 살이 갓 넘자 슬하에 세 아들을 남겨둔 채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자식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는지 그토록 건장했던 진흥왕은 마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료가 부복(俯伏)한 가운데 진흥왕비 사도부인이 시급히 후사문제를 매듭질 것을 신료들에게 촉구했다. 사도부인에게는 죽은 동륜태자 외에 사륜이라는 왕자가 하나 더 있었다. 신하들은 선왕의 지차(之次) 사륜과 죽은 태자의 혈육 가운데 누구를 왕으로 옹립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죽은 태자의 맏이 백정이 왕위를 이어야 할 것이지만 백정은 아직 어려 외침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라를 통치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진흥왕의 동생 사륜이 왕으로 추대되었으니 그가 곧 진지왕으로 즉위했다(576년).



그러나 진지왕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진지왕의 등극에 불만을 가졌던 만호부인(동륜태자비)이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꾀했기 때문이다. 진지왕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서라벌에 뛰어난 미색을 갖춘 한 여인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녀의 이름은 선홍빛 복숭아꽃을 닮았다 하여 도화(桃花)라 하였다. 어느 날 밤 왕이 도화를 불러 자신의 정인(情人)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으나, 도화가 남편을 두고 다른 사내를 섬길 수 없음을 단언했다. 4년 후, 도화의 남편이 죽자 왕이 도화를 찾아 이레 동안 사랑을 나누었으니 그 사이에 아들이 잉태되었다. 그러나 곧 반정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즉위 후 4년 만의 일이었다.



579년 8월, 반정세력이 동륜의 아들 백정을 왕위에 옹립하니 그가 곧 진평왕이다. 진평왕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화가 진지왕의 아이를 낳고 '비형'이라 이름 지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진평왕은 핏덩이 비형을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진평왕은 장차 화근이 될 지도 모를 비형을 곁에 두고 감시하는 한편, 비형을 이용하여 '국인(國人)'이 가진 힘을 분산시키려는 궤계(詭計)를 생각하고 있었다. 국인이란 집권자와의 밀착을 통해 정치권력의 핵심에 흡수되고자 노력했던 세력을 말한다. 진평왕이 비록 '국인'에 의해 왕위에 올랐을지언정 왕위 옹립을 내세워 세력을 떨치는 '국인'은 항용 왕권을 위협하는 요인이었다. 진평왕은 국인을 견제할 최적의 인물로 '국인'에 의해 아비를 잃은 비형을 생각했다.



어느 날 비형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비형은 후일을 위해 자신의 무리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이 소식은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얼마 후 진평왕이 비형을 불러 자신의 둘째 딸 천명과의 결혼을 명했다. 왕의 허락 없이 군사력을 모으는 것은 역모에 해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생사를 쥐고 있는 진평왕 앞에서 비형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진평왕에겐 대를 이을 아들이 없고 슬하에 덕만, 천명, 선화 세 딸을 두고 있었다. 이중 둘째 천명은 첩실의 소생이라 적통의 공주가 아닌 옹주였다. 혈통이 일생을 가름하는 사회에서 옹주의 남편이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진평왕은 비형을 끌어안되 왕위계승의 가능성을 없앨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천명과 결혼한 비형, 김용춘은 곧 사내아이를 얻었다. 그러나 아들을 외조부인 진평왕에게 보이지도, 작명을 부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춘추'라 지었다. 이는 춘(春)과 추(秋)의 계절을 엮어 시작과 결실을 함께 하길 바라는 염원으로, 김용춘은 장차 춘추가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용춘은 외국의 사행이나 학생이 서라벌을 드나들 때면 그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여 어린 춘추에게 어학과 풍습과 민족의 동이(同異)를 체득하게 했다. 서라벌을 찾은 외국의 인재들은 한 나라의 문화와 외교를 결정하는 인자였다. 훗날 발휘하게 되는 춘추의 능란한 외교술은 이러한 환경 속에 자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김유신 가(家)와의 인연



김유신의 아비 김서현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김구해의 손자였다. 금관가야가 망하고 사민정책에 따라 서라벌로 이주한 김서현은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의 딸 만명을 길바닥에서 꾀여 덜컥 임신시켜버렸다. 멸망한 가야의 왕자가 신라 왕실의 고귀한 처녀를 겁탈한 것이니 신라 왕실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이를 묵과할리 없었다. 김무력(김서현의 아비)이 며칠씩 석고대죄를 함으로써 아들의 목숨을 구했으나 신라는 골품의 벽이 두터운 사회였다. 멸망한 가야의 왕자 김서현 역시 이런 금제의 틀에 규제되는 것이 마땅했다. 따라서 위험을 무릅쓰고 얻은 왕실과의 통혼은 김서현에게 생존을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서현은 곧 벼슬이 올랐으며, 백제와의 거듭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군사적으로 큰 활약을 보였다. 이러한 아비의 후광에 힘입어 김유신은 화랑도에 입문할 수 있었다.



진평왕은 왕위에 오른 지 42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자, 큰딸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이제까지 공주가 위업을 이은 예는 없었기에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터였다. 진평왕은 평소 신임해온 알천 등을 불러 고명대신으로 봉하고 왜에 사신을 보내 추고여황(推古女皇)의 집권과정을 살피는가 하면, 당 고조에게도 덕만이 즉위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당 고조는 비단을 화사품으로 보내면서 따로 모란 그림 병풍과 씨앗을 덕만에게 보냈다. 덕만은 당 고조의 의중을 파악하고 모란의 주위에 벌과 나비가 없으므로 향기가 없을 것이라 하여 서라벌 귀족들을 단번에 심복시킬 수 있었다. 이때 덕만의 나이 마흔을 넘긴 즈음이었다.



진평왕의 비호아래 대리청정을 하게 된 덕만은 진평왕이 김용춘을 내세워 '국인'의 견제 세력으로 삼은 것처럼, 조카 김춘추를 그러한 세력으로 두고자 가까이 했다. 김유신은 이처럼 덕만의 신임을 받고 있는 김춘추를 여동생의 배필로 삼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김춘추는 이미 정실을 맞이한 상태여서 자칫하면 성사는커녕 서라벌 귀족들의 따가운 질시를 받을 위험이 컸다. 오랫동안 방편을 찾던 김유신은 계책을 세웠다. 얼마 후 김유신은 축국(공을 가지고 하는 민속놀이)을 하던 중에 일부러 김춘추에게 상처를 입히고 옷을 찢어 놓았다.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고 옷을 꿰맨다는 명분으로 김춘추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이때 두 사람을 맞은 사람은 둘째 여동생 문희였다.



김춘추의 옷을 꿰매는 문희의 몸에서는 가야 왕실의 예의범절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문희에게 마음이 쏠린 김춘추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김유신의 집을 찾았다. 김유신은 항상 수련을 핑계 삼아 자리를 비웠으며 두 사람의 애정 행각에 대해 짐짓 모른 체 할 뿐이었다. 문희의 배가 점점 불러올수록 김춘추에게는 명분이, 김유신에게는 사단이 필요했다. 김유신은 자신의 집에서 동생 문희를 불태우는 소동을 일으켰다. 처녀가 임신을 하여 가문에 먹칠을 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덕만은 김유신의 집에서 일어나는 분신 소동이 자신의 남산 행차와 시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김춘추가 소동의 요인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덕만은 재빨리 김춘추를 보내 문희를 구해내도록 하였다. 그런 덕만의 세심한 행동은 뒷날의 용장이 될 김유신의 마음을 얻게 했다.



서기 632년 음력 정월, 54년 동안 집권했던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고, 덕만이 왕위를 이었다.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왕위에 오른 덕만은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다. 병약한 덕만은 남편 음(飮)갈문왕마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집권을 지지한 국인들을 가까이 둘 수밖에 없었다. 선덕여왕의 16년 치세 동안 뚜렷한 제도적 개혁이 없던 데서 짐작되듯 난마처럼 뒤얽힌 국인들의 세력다툼 속에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덕만은 그저 병마의 고통과 외로움을 불심으로 달래는 처지가 되었다. 덕만이 선덕이라는 불교식 이름을 달고 불법을 적극 옹호하고 나서자 생시의 무병과 사후의 복덕을 기원하는 불사가 꼬리를 물었다. 민생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국적 불사를 거듭하고 당에서 돌아온 법사들을 발탁하니 나라의 인재들은 오직 불교에만 매달렸다.





고구려 행(行)



서기 641년 음력 3월, 42년 동안 백제를 다스렸던 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평왕의 삼녀인 선화공주가 무왕과 혼인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무왕은 성왕의 숙원을 설욕하기위해 장인의 나라를 자주 침공했고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당나라가 일어난 후에는 친당책을 써 당고조로부터 대방군왕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니 무비(武備)를 갖춘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왕이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자는 왕권 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숙청을 가했다. 그리고 왕실세력의 결집과 불만 요소의 발산을 위해 신라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의 서쪽 40여 성을 빼앗고 고구려와 더불어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는 한편 낙동강 방어선의 교두보인 대야성을 치게 했다.



대야가 함락됨으로써 낙동강 곡창지대의 일부분이 백제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로 인해 김춘추는 사랑하던 딸 고타소를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집안이 다져온 합천이라는 정치·경제적 기반도 함께 잃었다. 더욱이 서라벌의 민심은 더없이 흉흉했다. 사위 품석의 떳떳하지 못한 죽음이 몰고 온 여론의 비판은 김춘추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그야말로 삼중의 시련과 고통이 되었다. 이즈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자신의 반대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다는 간자의 첩보가 꼬리를 물었다. 연개소문은 왕의 아우 대양(大陽)의 아들인 장(藏)을 보장왕(寶藏王)으로 세우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를 맡았으니 대략 당의 병부상서에 중서령(中書令)을 겸한 것과 같았다.



김춘추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의 연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고구려 방문은 후에 당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무릇 외교란 주고받는 것인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신라에게 당이 고구려와 백제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선뜻 도움을 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사실 이제까지 당은 삼국과 등거리 외교를 고수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춘추의 고구려 방문은 신라가 당과 고구려를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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