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시작
볼프람 아일렌베르거 지음 | 들녘
철학이 놀이라고?철학이 놀이라고? 좋은 질문이다. 그렇다. 이건 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놀이의 목표는 삶이다. 예를 들면 가족사진을 한 장 골라 들고 관찰함으로써 이 놀이를 시작할 수 있다. 철학은 사진 속의 우리 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가 뭔지 생각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진 오른쪽에 있는 우리 아버지는 토토 로토를, 누나는 농구를, 매형은 테니스를 좋아한다. 그리고 어린 조카 게랄드는 장난감 자동차로 하는 교통체증 놀이를 가장 좋아한다. 우리 엄마는 카드로 점치는 것을, 이모와 이모부는 체스를 좋아한다. 저 뒤편에 있는 베른트 삼촌은 도대체 좋아하는 게 하나라도 있는지 알 수 없다. 삼촌은 언제나 그런 질문을 한다. "놀이라…, 그게 엄밀하게 말해서 무슨 뜻이지? 어떤 게 놀이고, 어떤 게 아니니? 그 개념의 경계를 한번 말해보렴."
우리 식구는 이런 질문에, "아니오, 삼촌, 대답을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면 삼촌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네가 놀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른다는 말이구나."라며 파고든다. 여러분 친척 중에도 이런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그럴 테지, 이런 이상한 사람들은 어느 집안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그럼 이런 경우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예를 들면, 이런 방법이 있다. 이 골치 아픈 친척과 함께 가족사진을 한 장 들여다보면서 사진 속에 있는 사람마다 각각 놀이를 하나씩 연결하고, 이 친척에게 방금 말한 놀이를 묘사해 보라고 한다. 아니면 몇 가지 놀이를 함께 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놀이가 끝나면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지금 한 것, 그리고 이 비슷한 것들을 '놀이'라고 하지요."
나도 삼촌에게 이 방법을 써 봤지만 삼촌은 바로 반박했다. 자신이 찾는 것은 '놀이'의 정의이며, 특히 모든 놀이를 놀이로 만드는 일치된 하나의 공통점이라고 했다. 이런 공통점이 없으면 뭐가 놀이고 뭐가 놀이가 아닌지 이성적이고도 확실하게 정할 수 없으므로, 이 공통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게 삼촌의 주장이었다. 고백하건대, 난 공통점을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뭔지조차도 도무지 모른다. '놀이'는 매일 사용하는 지극히 평범한 단어 아닌가. 나도, 여러분도, 내 조카 게랄드도, 삼촌도, 이 단어 때문에 특별히 어려움을 겪진 않는다. 겪을 이유가 뭔가? 놀이를 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놀이는 간단하게 말해 우리의 한 부분이다. 뭐랄까. 그냥 삶의 한 형태인 것이다. 말을 하는 행위가 삶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란 정말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특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명령하기, 보고하기, 설명하기, 추측하기, 가설 증명하기, 거짓말 하기, 연극하기, 수수께끼 풀기, 농담하기, 확증하기, 번역하기, 운율 맞추기, 기도하기, 모욕하기, 저주하기 등. "이런 언어적 행위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지?" 우리 삼촌은 이런 질문을 하실지도 모른다. 대답하기 어렵다. 이것들은 삼촌 말씀대로 모두 언어적 행위들이다. 그러면 이 행위들을 언어적 행위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아마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건 정말 특별한 언어적 행위를 해야, 즉 철학하기를 통해서만 설명이 되는 철학적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게 여러분이 처음에 나에게 했던 질문이 아니던가? 여러분의 질문은 "철학하기가 무슨 뜻이지? 철학을 하는 사람은 대체 뭘 하는 거지? 그리고 왜 하는 거지?"라는 것이었다.
철학자는 자기 스스로가 제기하는 질문, 그런데 그 질문을 그 자신 말고 누가 다루어야 할지 그도 다른 사람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질문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놀이의 본질에 관한 문제, "어떤 것은 놀이고 어떤 것이 놀이가 아닌가?"도 이런 질문에 속한다. 삼촌의 가정은 어쩌면 잘못된 전제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가족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다가, 가족 구성원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특성은 없지만 이들이 다른 방식, 즉 '서로 연결되고 교차하는 유사성의 복잡한 그물, 크고 작은 유사성을 통해' 가족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일치하는 공통점이 아니라, 단시 유사성의 그물이 존재했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관찰 결과를 이른바 모든 놀이에 내재하는 공통점이라는 문제에 적용했고, 해결을 보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많은 문제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란 도대체 뭐지?"라고 묻는 모든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해결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베른트 삼촌은 놀이의 본질이 뭐냐고 캐묻지만- 원래 놀이에는 본질이라는 게 없다. 세상의 모든 놀이를 살펴보아도 놀이의 본질 같은 건 없다. 다만 비슷한 놀이는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이라고 불렀다. 비트겐슈타인 이전의 전통 철학에서는 베른트 삼촌처럼 "……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엄숙하고 진지하게 정의와 본질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질문이라고 말하며, 유사성을 본질과 착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망치와 망치질뭐부터 시작해야 하지? 침대 틀, 받침대, 책장, 베개, 매트리스……. 천장에는 등도 달려있지 않고 액자는 포장된 채로 구석에 놓여 있으며, 그 옆에는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니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모르는 나무판들이 쌓여 있다. 설상가상이라고, 바로 몇 분전에 그녀가 "당신도 뭔가 좀 해봐!"라며 망치를 손에 쥐어줬는데, '당신도'라는 말에 실린 억양은 거의 겁이 날 정도였다. 이사는 여러분이 원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여러분은 짐을 정리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고 손에는 망치가 들려 있다. 이 망치는 마치 세상 첫날부터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온 계주 경기의 봉처럼,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인간 세계 전체를 가리키며 여러분에 명령한다. "자, 이제 네 차례야!"
필요한 물건을 잔뜩 사서 돌아온 그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게 벌써 눈에 보이는듯 하다. "자기, 망치의 본질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게 아닌 건 확실하지?" 이제 정말 일을 하자, 망치질을 해야 한다! 우선 액자부터, 아니지, 액자 거는 일은 마지막에 할 일이다. 그럼 침대부터 좋아, 이렇게 아름다운 횡목들…. 횡목 하나에 못 네 개, 앞에 두 개, 뒤에 두 개씩, 자, 이제 시작이다. 내 영혼의 구원자, 내 손의 불꽃, 오로지 망치질만이 망치의 특별한 매력을 알게 한다! 이제 여러분은 망치를 두드릴 때마다 여러분과 공구의 관계가 얼마나 강해지는지, 망치질을 하면서 자신이 망치와 얼마나 가까워지는지 느낀다.
그렇다.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본 이 망치가 천천히 사라질 정도로 가까워진다. 망치질을 하면서 망치가 여러분의 의식에서 사라지고, 망치와 함께 사라지는 여러분 자신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집에는 여러분도 없고 망치도 없다. 망치라고 불리는 객체도 없고, 망치를 망치로 인식하는 주체도 없는 것이다. 이금 이순간은 오로지 평화로운, 물이 흐르는 듯한, 망아(忘我)의 경지에 빠진 망치질 밖에 없다. 망치와 여러분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로 동화된 망치질! 하기야 여러분이 빈둥거린 이유는 어떤 특정한 역설 때문이다. 망치의 본질이 차분하게 계속되는 망치질에서 드러난다면, 결국 망치의 본질은 사용됨으로써 사라지는 것에 있다. 이는 망치의 세계뿐 아니라 받침대와 횡목, 망치로 조립해야 하는 침대, 의자, 그릇과 수저와 행주, 집 전체에도 적용된다.
여러분이 이것들을 망치로, 받침대와 침대와 의자로, 집으로 인식하는 한 여러분은 이 사물의 원래 목적,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여러분은 망치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이 세상의 본질은 그것이 사라짐으로써 나타나는 거야. 우리는 세상이 없을 때 세상에 가장 가깝고, 세상과 친근한 거지.' 하지만 망치는 여기, 바로 여러분의 손에 쥐어져 있다. 앞에서 말한게 옳다면, 이 사실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여러분은 지금 이 망치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제 여러분은 망치에게 내린 진단을 다른 것에도 적용하고, 일반화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르면, 어떤 사물을 바로 그 사물로 인식하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한 잘못된 접근 방식에서 나온다. 어떤 사물을 지금 그 사물로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숙고하고 있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의식적인' 삶과 생각, 여러분의 '의식적인' 자아는, 어떤 사물에 대해 이런 온갖 생각을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의식적인 존재 전체는 한순간에 지속적인 장애 상태가 된다.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아서 생겼으며 몰두하고 있지 않다는 장애, 즉 여러분은 '세상 속에' 진정으로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인식이 나올 수 있다. 즉, 여러분이 살고 활동하는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심각한 장애가 없다면, 그리고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수행하면서 큰 문제가 없다면 철학도 없다. 철학이란 바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사유, 그것도 일단 실체와 멀고 되도록 일반화된 사유이기 때문이다.
■ 2,500년 철학의 역사를 통해 인간은 항상 주변 세계와 거리를 둔 채 세계를 대상으로 삼고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20세기 실존 철학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세계를 대상화시키기 전에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하며 세계에 관여하고 있는 존재다. 예전 같으면 망치를 한참 동안 관찰하고 숙고한 뒤에 망치질을 시작하는 사람을 솜씨 있는 목수라고 보았다. 하지만 마르틴 하이데거는 숙련된 목수라면 망치의 용도를 이미 알고 있으며 목수는 망치와 한 몸이 된다고 말한다.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무아지경에 빠져 연주하는 것처럼 망치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망치질에 전념할 때 인간은 망치로 실존한다. 인간은 스스로 내적 근거를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늘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세계를 정의하고 규정하는 것이지 세계가 인간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이라는 말 대신 '거기 있음'이라는 뜻의 다자인(Dasein)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썼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말하고 해석하고 묘사하고 반성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적으로 결정적이며 모든 일의 시작이 되는 것은 행위, 즉 구체적인 행동이다." 이건 칼 마르크스가 그의 저서 어딘가에서 한 말이다. 어떤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발코니에 서서 혁명을 외치는 일이 전혀 없어도 세상은 바뀐다. 적시적소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세 마디 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렷하게 말하는 이 세 마디면 세상은 충분히 바뀌고도 남는다. 이제 여섯 시간 뒤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신랑은 신부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한 평생 사랑하겠습니까?"라는 물음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세 마디가 내 입술을 떠나면, 이 말은 행위가 된다. 이 말을 함으로서 나는 결혼을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는 말 뒤에 무엇이 있는지, 이 약속이 정말 진실한지 아니면 그저 형식적인 문구를 발음하는 것에 불과한지의 여부가 법적인 행위로서의 결혼에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이때부터 시작되는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무척이나 큰 의미를 갖는다. 내가 진심으로 약속해야 할 것들이 결혼 문구를 통해 명확하게 전달된다. 특히 난 내 아내를 사랑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말로 문구가 시작되고 끝을 맺으니까. 난 그녀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리라고 약속한다. 그러니까 나는 미래의 내 아내를 평생 사랑할 거라고 약속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약속할 수 없다.
누구도 그런 약속은 할 수 없다. 사랑은 상당히 복잡하고 지극히 변덕스러운 감정이다. 결혼을 생각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더욱이 평생 동안 계속되는 사랑을 약속하는 행위는 진실이 아니다. 사랑, 특히 오랫동안 유지되는 사랑은 의지를 통한 통제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섯 시간쯤 뒤에는, 문자 그대로 평생 동안 지속되는 사랑이라는 이 약속을 친구와 친지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오늘이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철학적으로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막 니체의 한 문장이 생각났다. "인간은 약속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다."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는 대답이 하나의 행위를 완성하는 언어 행위라는 확인으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의도한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이런 행위를 원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따라서 이렇듯 공식적으로 발표한 내 의도에 대해 앞으로도 책임을 질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끝나다니, 이건 정말 전형적으로 철학적이다. 그렇다면 내가 "예"라고 대답하는 모든 사람, 나와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과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결혼을 한 건가? 이건 조금 지나친 생각이겠지? 하지만 내가 허구한 날 거의 아무런 생각 없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그리고 이로 인해 미래에 대한 구속력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섯 시간 반 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정말 애들 장난만큼 쉬운 일이고, 결혼식장을 한 번 도는 산책 정도의 일에 불과하다. 내가 뭘 원하는지 이렇게 확실하게 알았던 적도 드물다.
■ 약속이라는 인간의 행위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철학적 문제를 담고 있다. 약속이란 우선 특정한 실행 조건들 아래 놓인 언어적 행위다. 또한 약속은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해 자유의지를 확립하는 일이며, 사람들 사이에 특정한 구속력을 만들어내는 도덕적 행위다. 더구나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결혼식을 앞둔 남자의 복잡한 심리 상태에서 보듯이 약속의 구속력은 외부에서 강제된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더 복잡해진다. 결혼은 부정적인 면에서만 보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행위이며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다. 아무런 약속도 하지 못하는 도덕적 존재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이 점에서 볼 때 약속을 하는 능력은 결코 하찮은 게 아니다. 사실 우리에게 알려진 존재 가운데 서로 약속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뿐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유일한 존재는 아니지만.
자백하는 게 낫겠지?여러분은 단 한 가지 개념, 단 하나의 문장이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경우를 아시는지? 늘 찾아 헤매던 그 통찰력이 명확해지는 그런 경험?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여러분이 드나드는 역에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건 다 지나간 일이다. 책 한 권이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던 단 한 가지 생각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 책은 아마도 누군가 읽다가 플랫폼 벤치에 잊어버리고 놓아 둔 것 같았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쓰여 있었다. "대응만 하는 사람은 남에게 조종당한다. 대응만 하는 사람은 희생물이 된다. 대응만 하는 사람은 주문은 받았으되 찾아가지는 않은 물건처럼 느끼게 된다! 대응이란 패배를 의미한다!" 난 이 원칙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거울 앞에서 반복한다. 그 뒤부터는 내가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다.
결정적인 문제는 단지 사람들이 스스로 대응적으로 행동하는지, 주도적으로 행동하는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마음에 반드시 새겨야 할 점은, 성공을 보장해주는 행동이 최종적인 결과에 앞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앞서서. 만약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