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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들의 외교사

김봉중 지음 | 푸른역사
1장 '건국의 아버지들'과 외교 원칙



워싱턴의 원칙

1796년 3월 초,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89~1797)은 두 번의 임기를 끝으로 대통령직을 마감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어려운 과제들이 안팎으로 산적해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연방파와 공화파 간의 싸움이 계속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럽 열강이 신생 미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와 같은 미국의 미래를 우려하고, 고별사를 통해 후대를 위한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우선 국내적으로는 당파간의 이해와 협조를 당부하고, 외교적으로는 고립주의(isolati-onism)를 천명했다. 여기서 '고립'은 정치적인 것을 의미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중립주의를 천명했다. 초창기 아메리카는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었고 미국의 경제는 유럽 국가들과의 교역을 통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중립주의 외교정책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1801~1809)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제퍼슨은 독립선언문의 저자이면서 워싱턴을 보좌한 측근이었다. 그에게 미국이 얻은 자유는 모든 것의 우선이었고 전부였다. 제퍼슨은 미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아직 군주제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제퍼슨이 생각하기에 경제적인 번영 없이는 미국이 유럽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퍼슨은 경제 재건을 위한 방법으로 미국 내에 거대 농업 공화국을 건설하겠다는 이상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했다.



그런데 제퍼슨의 이상을 이룰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나폴레옹이 미국에 루이지애나를 판 것이다. 순식간에 미국은 당시 국토의 두 배나 되는 영토를 획득했다. 그런데 이런 행운과 더불어 미국을 위협하는 문제가 생겼다.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느라 지친 영국의 많은 병사들이 미국으로 탈주해 온 것이다. 문제는 영국이 탈주한 병사들을 잡아들이는 와중에 미국 상인들까지 잡아들였다는 점이다. 더욱이 그 수는 1천명을 넘었다. 게다가 지중해 연안에서는 해적들이 미국 상인들을 괴롭혔고, 북아프리카 해안에서는 회교도 무장 선박이 미국 상선을 괴롭혔다. 이런 상황에 영국 함대가 발포한 포탄에 의해 미군 3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내 여론은 영국의 범법 행위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고 영국에 선전포고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제퍼슨은 전쟁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그 사건을 영국 정부가 의도하지 않은 단순한 사고로 보고, 영국 해군이 미국 영해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데만 주력했다. 그러자 상인들을 비롯한 국민들의 불만이 제퍼슨에게로 향했고, 영국과의 대결 양상은 장기화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 경제는 불황에 허덕이게 되었고, 연방파와 공화파의 당파 싸움은 거세졌으며, 북부와 남부로 갈려진 지역감정은 더욱 첨예해졌다. 제퍼슨은 영국과의 전쟁과 그에 따른 국내 분열을 뒤로 하고 8년 임기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1812년 6월 18일, 영국과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미국의 정규군은 고작 7천 명이었다. 그것도 캐나다 국경과 서부 내륙 지방에 흩어져 있어서 유사시 병력을 집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4년간의 전쟁에서 미국은 살아남았다. 미국의 승리라기보다는 영국이 전쟁의욕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재정이 바닥났고 병사들도 지쳐 있었다. 양국은 1814년 12월 24일 평화 협정에 조인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믿었다. 정신적 전리품을 얻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질서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으로부터 미국의 독립과 자존심을 지킨 것은 미국인들에게 완전한 독립 쟁취를 의미했다.



2장 먼로 독트린과 대륙으로의 팽창



먼로 독트린

미국의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제임스 먼로(1817~1825) 역시,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깨고 싶지 않았다. 즉 미국의 이익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 미국이 깊게 관여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런데 1823년 8월 16일, 영국이 동맹을 요청해왔다. 그것은 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에 관해서 미국과 함께 공동선언을 발표하자는 것이었다. 먼로행정부는 그해 늦가을 내내 이 문제로 고민을 했다. 워싱턴과 제퍼슨이 확고하게 세운 고립주의 전통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최대 강국인 영국과 손을 잡고 미국의 이익을 챙겨야 하는가를 놓고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이때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 국무장관 애덤스였다.



애덤스는 1819년에 스페인을 설득하여 플로리다를 양도받기도 할 정도로 외교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애덤스는 영국이 공동 방위를 명분으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팽창을 막으려 한다고 판단했다. 애덤스를 신임한 먼로 대통령은 그해 12월 2일에 발표할 연례교서를 통해 자신의 외교정책을 표명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어떤 부분의 확장이라도 이는 미국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즉 유럽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경고하는 내용과 더불어, 미국 외교의 원칙이었던 고립·중립주의를 재확인하는 내용이었다. 총 13페이지의 이 연례교서에서 외교에 대한 내용은 고작 2페이지였으나, 이 외교정책은 훗날 '먼로 독트린'으로 명명되어 향후 미국 외교의 기본으로 길이 기억되었다.



미국의 팽창

1812년 전쟁이후 영국의 간섭에서 벗어난 안정감이 서부 진출을 가속화시켰다. 당시 멕시코 관할이었던 텍사스는 순식간에 개척해야 할 매력적인 서부로 떠올랐고 야심 찬 미국인들이 텍사스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텍사스에 정착한 대다수 미국인은 면화 재배로 많은 이익을 보았다. 사실상 이들은 텍사스의 상권을 장악했고, 1831년에는 무력을 동원해 멕시코 세관과 요새들을 파괴했다. 결국 1836년 3월에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멕시코가 참패함으로써 텍사스는 독립국이 되었다. 물론 그 지역이 바로 미국의 영토가 되지는 않았다. 텍사스가 미국 연방에 합병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10년이 걸렸다.

오리건의 경우도 근본적으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18년부터 미국은 영국과 공동으로 오리건 영토를 관리했다. 오리건 영토는 광활한 황무지에 불과했지만,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선택의 땅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많은 세월이 필요치 않았다. 1836년 뉴욕의 젊은 의사 마커스 휘트먼과 나샤 프렌티스가 오리건 선교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결혼했다. 선교가 목적이었던 그 결혼 이후 인디언 선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태평양 건너 중국 선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까지 오리건행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러한 행렬에 장사꾼들까지 합류하면서 중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기착지 오리건은 더욱 성황을 이뤘다. 미국 국민들은 영국과 전쟁을 해서라도 오리건 영토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팽창주의는 당시 대통령 선거의 주요 변수로 등장했다.



1845년 제임스 포크(1845~1849)가 미국의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텍사스와 오리건 분쟁을 해결하고, 캘리포니아까지 미국의 영토로 만들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의 영향권이라고 생각한 이들 지역에 영국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포크는 이러한 국민 정서를 충분히 이용했고, 국민들은 포크를 미국을 지켜낼 지도자로 여기게 되었다. 포크가 취임하면서 시작된 멕시코와의 전쟁은 일방적인 미국의 승리로 끝이 났고, 멕시코는 북쪽 영토의 반을 미국에 양도했다. 이리하여 미국은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가장 큰 땅덩어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콜로라도가 미국 영토가 된 것이다.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팽창정책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알래스카 매입이었다. 링컨 대통령 집권 시기에 국무장관이었던 슈어드(William H. Seward)는 향후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할 지역이 태평양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태평양을 놓고 서구 열강과 경쟁하기 전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먼저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한 유리한 고지는 알래스카였다. 슈어드는 자신의 생각을 의회에 제안했다. 그러나 의원들은 아무쓸모도 없는 얼음덩어리를 매입하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신문에서도 '슈어드의 아이스박스'라고 비아냥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내에서 알래스카 매입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러시아는 7만 3천달러를 들여 의회 인사들을 로비했다. 결국 1867년 3월, 향후 미국의 서방정책의 전진기지가 될 알래스카가 미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미국이 지불한 금액은 고작 720만 달러였다.



3장 기지개를 편 제국



1898년 전쟁

1898년은 미국 외교사의 '분수령'이 되는 해이다. 이해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미국 외교가 뚜렷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전의 미국 역사가 아메리카 대륙 내의 팽창사라면 이후는 대륙 밖으로의 팽창사였다. 외적 팽창의 시작은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오랜 식민 통치에 반발한 쿠바인들이 독립의 정당성을 미국에 계속 호소하던 와중에 쿠바에 새로 부임한 스페인 총독의 폭정이 미국 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곧 미국 국민들과 사회단체들은 스페인에 압력을 취해야 한다고 아우성이었다. 1898년, 대통령에 취임한 윌리엄 매킨리(1897~1901)는 철저한 먼로주의 신봉자였으나, 국민여론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전쟁이 선포되었고, 스페인의 악명 높은 식민통치로부터 이웃 쿠바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에 지원하게 만들었다. 사실 전쟁은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승패가 결정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급속한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미국 경제는 초강대국의 반열에 들어섰고, 자본은 곧 군사력이 되었다. 특히 철강, 석탄, 석유 등 기반 산업에서 미국의 성장은 놀라웠고 그것은 곧 군사력의 증강으로 이어졌다. 결국 스페인은 전쟁에서 패했고, 카리브 해역과 태평양의 식민지를 상실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을 얻었다. 또한 전쟁 중에 하와이도 미국 영토가 되었다.



루스벨트의 '큰 정책'

1901년 9월, 매킨리가 암살되고, 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국내외적으로 어수선했다. 남북전쟁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산업화는 미국 경제와 국가 경쟁력을 한껏 높였지만 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도시화, 계급 간의 갈등, 이민 등 새로운 사회 문제가 갈수록 커지기만 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당 체제는 변함이 없었고, 여기다가 사회문제를 등에 업고 인민당이 도전해왔다. 각 정당은 몇 사람의 힘 있는 정치가, 즉 보스에 의해서 움직였고, 소수의 산업자본가들이 정치권 위에 군림했다. 이러한 시기에 42세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루스벨트 외교의 기본원칙은 국가의 이익추구였다. 그의 외교 원칙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곳은 중남미지역이었다. 1902년,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카스트로는 그동안 유럽 국가들에게서 차용한 1,250만 달러를 상환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이에 발끈한 독일과 영국, 이탈리아 연합국이 함대를 파견하여 부채 상환을 촉구했다. 루스벨트는 카리브 해로 미 함대를 급파하여 중남미에 대한 유럽의 개입을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표명했다. 유럽 국가들은 이미 강국이 된 미국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곧 철수했고, 베네수엘라 문제는 헤이그 국제 재판소에 제소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04년, 베네수엘라와 유사한 사태가 도미니카에서도 발생하자 루스벨트는 이곳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어 정식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선출로 국민의 지지를 확인하게 된 루스벨트는 더욱 강력한 외교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눈길을 아시아로 돌렸다. 동아시아와 태평양이 향후 미국의 국운과 국익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러시아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펼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일본과 러시아 중 어느 한 나라가 독점적인 영향력을 차지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은 일본에 우세하게 전개되었다. 러시아의 몰락은 미국이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곧 루스벨트는 중재에 나섰다.



일본은 전쟁 물자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중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협상조건으로 러시아에 전쟁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루스벨트는 다시 중재에 나서야 했다. 루스벨트의 중재에 의해 일본은 전쟁배상금 요구를 철회했고, 그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지배권과 러시아 영향권에 있는 중국 항구와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차지했으며, 사할린의 반쪽을 이양 받았다. 한국 입장에서는 이 조약(포츠머스 조약)이 통한의 사건이 되었으나,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을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4장 흔들리는 이상주의



1912년,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된 윌슨(Woodrow Wilson)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정치 제도의 성공은 성숙한 자본주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대기업이 독점이나 기업 합병 등으로 자유 경쟁을 방해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이러한 독점 기업을 타도함으로써 건실한 기업들이 자유로운 경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외적으로도 그는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들의 동맹체제가 일종의 트러스트라고 보았다. 그래서 작고 힘없는 나라와 민족위에 군림하여 독점적인 횡포를 부리는 식민주의는 철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신자유' 원칙이 국제 질서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큰 나라의 횡포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윌슨주의 외교의 근간이었다.



윌슨 외교의 첫 시험 무대는 중국이었다. 1911년 말과 1912년 초반에 중국은 청왕조를 몰아내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윌슨은 중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유럽 제국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미국이 선의의 개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1913년 3월 18일 미국은 '6개국 컨소시엄'에서 탈퇴했다. 이 컨소시엄은 1911년에 결성된 것으로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이 중국의 철도건설비로 1억 2,5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윌슨은 중국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중국 내정간섭으로 이어지며 중국의 진정한 독립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윌슨은 컨소시엄에서 탈퇴하고 그 다음해 중국의 새 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윌슨의 이상주의 외교가 중남미에서는 현실과 맞닿았다. 1910년부터 1917년까지 멕시코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멕시코는 미국 남부경계선에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많은 기업체들이 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경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13년 윌슨은 멕시코 개입을 시도했다.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군사행동의 정당성을 설명한 그는, 의회가 결의할 시간도 갖기 전에 멕시코의 가장 중요한 항구인 베라쿠르즈를 점령할 것을 미 해군에 명령했다. 미군은 이틀 만에 베라쿠르즈를 점령했고 이 과정에서 126명의 멕시코인과 19명의 미군이 사망했다. 그런데 미국이 지원한 카란사가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미국의 개입에 반대했다.



윌슨은 카란사를 대신할 다른 지도자를 찾았다. 그 선택이 판초 비야였다. 비야는 한때 카란사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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