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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보는 한일사 1

전국역사교사모임 외 지음 | 사계절
1부 아주 오래된 이웃



걸어서 일본열도까지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걸어서 대한해협을 건넜다. 아니, 대한해협이 없었다. 빙하가 지구를 덮었을 때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없었다. 한반도와 일본은 넓은 대륙의 일부였다. 서해는 없었고 동해(일본해)는 거대한 호수였다. 물론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빙하가 녹으면 서해가 생기고 동해는 태평양으로 이어졌다. 지금과 조금 다른 모습이기는 했지만 한국은 반도로 바뀌었고 일본은 섬으로 변했다. 그리고 다시 날씨가 추워지면 두 나라는 육지로 이어졌다.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지금처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것은 지금부터 약 1만 4000여 년 전, 지구에 마지막 추위가 찾아왔다가 약 1만 년 전쯤부터 기후가 다시 따뜻해진 이후이다. 이때부터 한반도는 현재와 같은 꼴을 갖추고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성 기후를 보이게 되었다. 기후의 변화로 침엽수림은 점차 줄어들고 남쪽부터 낙엽활엽수림이 확대되었다. 추운 기후에 살던 동물들은 북쪽으로 사라지고, 사슴이나 멧돼지처럼 몸집이 작고 빠른 동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일본열도에도 한반도와 비슷한 변화가 찾아왔다.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너도밤나무나 졸참나무와 같은 온대 활엽수림이 확대되고 만(灣)과 내해(內海), 개펄 등이 나타났다. 자연환경이 바뀌자 생활 도구도, 살아가는 모습도 달라졌다. 사람들을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를 사용하였다. 우리는 이 시기를 신석기 시대라고 부른다.

고대 해상로를 보면 해류와 조류와 바람에 따라 그 방향과 목적지가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겨울에는 북서 계절풍을 받고 동해에서 남해 쪽으로 흐르는 북한 해류를 타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쉽게 갈 수 있다. 반대로 봄, 여름에 남동 계절풍을 타고 동한 해류를 이용하면 일본열도에서 한반도로 쉽게 갈 수 있다. 지금도 쓰시마 섬 바닷가에는 부산이나 경상남도 통영, 거제도에서 버려진 과자 봉지가 쌓인다고 한다. 신석기시대 사람들도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였다면 바다를 건너는 일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983년 한국의 젊은이 3명이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넌 적도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아주 오래 전, 돌로 도구를 만들어 쓰던 시절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살던 사람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두 지역 사람들이 남긴 유물들을 보면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꺼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분으로 만나는 한국과 일본

고대 한국과 일본에는 거대한 무덤들이 있었다. 무덤은 한반도 삼국과 왜의 정치적·문화적 교류를 보여준다. 1972년 일본 나라 현 다카이치 군에서 우연히 고분이 발견되었다. 다카마쓰 고분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무덤 내부 벽화의 내용이 알려지는 순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평양 부근 고구려에서 만든 수산리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귀부인과 다카마쓰 고분벽화의 여인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고구려와 왜국은 친밀한 사이였음을 무덤 안의 귀부인들은 말하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무령왕릉은 더 확실하게 백제와 왜국이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왕과 왕비의 시신을 넣은 관을 왜국이 만들어 보냈다. 무령왕의 시신은 죽은 뒤 2년 조금 넘게 임시 무덤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 기간에 왜에서 관을 만들어 보낸 것이다. 무령왕은 백제를 중흥시키고자 왜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 때문에 그가 죽자 왜에서 금송으로 만든 관을 보내 호의를 표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나온 구리거울을 보면 일본 동부 지방에 있는 군마 현 간논야마 고분에서 나온 구리거울과 그 크기와 무늬가 마치 쌍둥이 같다. 서부 지방의 시가 현 가부토야마 고분에서도 거의 비슷한 구리거울이 나왔다. 무덤은 보물 창고이다. 때로는 어떤 집에서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주고받은 문화 교류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상

4세기 무렵 한반도의 고대국가들은 새로운 통치 체제를 세워 강력한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을 집중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종교가 필요하였다. 서로 다른 부족의 종교는 여러 부족을 아우르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다. 사람들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다. 새로운 종교를 찾고 있던 지배층들은 주저 없이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교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고대국가의 집권 체제를 완성하는 이념으로 안성맞춤이었다. 4세기 후반에 불교가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해지면서 불상과 불경도 함께 전해졌다. 일본열도는 한반도를 통해 6세기 전반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일본열도에서도 불상이 만들어졌다.



고대 한일 두 나라가 긴밀하게 교류하였음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불상은 미륵 반가사유상이다. 미래에 부처가 되어 설법을 통하여 수많은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 미륵보살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조각한 것이 미륵 반가사유상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6세기에 접어들어 많은 미륵 반가사유상을 만들었다. 조각은 점점 세련되어 갔고, 세 꽃잎 관을 쓴 미륵 반가사유상에 이르러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미륵 반가사유상들은 대부분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올리고 오른손을 뺨에 댄 채 사색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윗몸은 맨몸이고, 허리 아래쪽에 옷을 조금 걸치고 있다. 대좌에 옷이 잔뜩 주름진 채로 정돈되어 있다.



백제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미륵 반가사유상과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나무로 만든 미륵 반가사유상을 보면 너무나 비슷하다. 닮은 점을 말로 표현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국의 한 미술사학자는 그 느낌을 이렇게 말하였다. '백제의 보살상은 사색에 빠졌으나 강한 생동감이 엿보인다. 얼굴 근육과 손가락, 발가락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하다. 반면에 일본 고류지 보살상에는 내적으로 깊은 사유의 고요함이 배어 있다. 얼굴도 몸매도 차분하다. 숭고하고 적막한 사색의 경지를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내고 있다.'



불상으로 보면 고대 일본과 한국, 특히 백제는 일본과 매우 가까웠던 것 같다. 당시 고구려, 신라, 백제는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경쟁 국면에 대처하고자 했다. 일보 야마토 정권도 고대국가 집권 체제를 세우는 데 불교를 필요로 했는데,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면서 두 나라는 더욱 친밀해졌다. 백제는 일본을 고구려나 신라보다 더욱 가깝게 느끼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이런 정세가 한국과 일본의 불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제관계로 보는 『일본서기』

『일본서기』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신화의 시대 2권과 진무 천황에서 지토 천황까지 41대 천황의 역사 28권을 한문으로 기록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일본서기』의 편찬은 681년 덴무 천황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는데 역대 천황의 계보와 각종 전설을 정리, 기록해서 720년에 완성했다. 특이한 것은 '일본'이라는 고유명사가 책이름에 처음으로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일본서기』는 백제·신라·고구려를 '서번(西蕃, 서족의 번국)'이라고 부르고 이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신국(新國)인 '일본'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는 당시의 국제 관계가 왜(=일본)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백제와 신라와 고구려 등 서번이 있었던 것처럼 의도적으로 기술한 것이다.『일본서기』는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이라는 한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왜서기(倭書記)'라 하지 않고 '일본서기(日本書紀)'라고 했을까. 누가 먼저 왜국을 일본이라고 불렀는가에 대한 의문의 요지는 이랬다. 예로부터 일본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해가 뜨는 곳의 나라' 라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보면 왜국은 동쪽에 있기 때문에 해가 뜨는 방향에 있지만, 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그런데도 어째서 '해가 뜨는 나라'라고 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들어보면 "수나라에 간 외교 사절이 왜국을 일본이라고 말했는데, 수의 황제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왜국이 해가 뜨는 쪽에 있기 때문에 일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까 처음에 일본 사절이 왜국을 일본이라고 칭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당의 측천무후가 그것을 인정해 준 것이다.



일본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701년 다이호 율령에서였다. 곧 공식 문서를 통해 '일본'이라는 용어가 외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법률에 규정되었던 것이다. 다이호 율령에서 보면 당과 신라에 대한 외교 문서에 "천하를 다스리는 일본 천황의 말씀(御字日本天皇소旨)"이라 쓰고, 국내의 중요한 문서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천황의 말씀(御字天皇소旨)"이라 쓰도록 규정했다. 702년 당에 보낸 사신들은 이 양식으로 외교문서를 만들어 제출했는데, 당의 측천무후는 이를 인정하고 받아주었다. 이전의 기록은 모두 왜·왜국·대외라고 썼다.



『일본서기』에 나타나있는 국제 의식을 살펴보자. 예를 들면 5세기에 왜국의 다섯 왕이 중국의 남조에 조공을 하여, 칭호의 수여를 요구한 바가 있다. 요구한 칭호는 '사지절도독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진한 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 왕(使持節都督倭 百濟·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 ·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으로, 백제나 신라보다 지위가 더 높았다. 이 시기 한반도에서 고구려가 남하 정책을 실시해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왜국의 지배자들은 중국 황제에게 조공하고, 그 권위를 빌려서 삼국보다 우위에 서려고 했다. 그러나 남조의 황제는 그런 왜의 요구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 후 100년 간 왜국은 중국에 조공을 보내지 않았으며 중국의 책봉 체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왜의 다섯 왕이 남조에 조공을 보낸 사실을 『일본서기』는 전혀 기술하지 않았다.

『일본서기』는 백제와 신라와 고구려에 대한 기술을 할 때 대국 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적극적으로 조작했으며, 삼국이 일본에 조공했다고 꾸며낸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기술했다. 한편 중국에 대한 기술에서는 왜국이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없애 가며 일본을 대국으로 묘사하려 했다.『일본서기』에는 이런 일본 고대 귀족의 국제 의식이 나타나 있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일본서기』의 기술에는 이와 같은 한계가 있지만, 우리는『일본서기』에 실린 신화나 전설을 통해 서 고대 귀족들의 사고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또 5세기 이후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대 국가 형성 과정을 연구할 수 있다.



『삼국사기』를 밝힌다

『삼국사기』는 한국의 고대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책이다. 서기 무렵부터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7세기 중반까지는 세 나라의 역사가, 7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전반까지는 통일신라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면 앞선 왕조에 대한 역사책을 만들었다. 고려도 왕조의 기틀을 다진 초기에 이런 관례를 본받아 세 나라의 역사책을 만들었다.



『삼국사기』서문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써있다. '지금 학자와 관리들은 유교 경전과 여러 중국학자의 글, 그리고 중국 역대 역사책에는 두루 통하여 상세히 말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전혀 그 처음과 끝을 모르니 심히 탄식할 일이다.' '우리나라의 고기(古記)는 문장이 거칠거나 서툴고 내용이 소략하여 군주의 잘잘못과 신하의 충성스러움과 사악함, 국가의 안정과 위급함, 인민의 어려움을 다스리는 일을 모두 나타내지 못하고 또 교훈을 주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새로 만든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중국 역사에 비해 우리 역사를 모른다는 것, 또 하나는 그때까지 역사책은 당시의 왕과 관리, 귀족들이 생각하기에 자신들이 바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교훈'으로 삼는 데 부족한 점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내용은 본기 28권, 연표 3권, 잡지 9권, 열전 10권 등 전체 5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기는 역대 왕과 관련된 사건을 다룬 것이고, 열전은 유명 인물에 관한 기술이다. 연표는 역대 왕들이 왕위에 있었던 기간을 연대순으로 만든 표이다. 잡지는 통치 제도와 사회운동 등에 관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열전에는 50여 명의 중요 인물이 등장한다. 충신과 효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아마 이는 효와 충을 강조하려는 편찬자의 유교적 가치관이 중요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김부식은 "있는 그대로 서술하되 짓거나 꾸며 쓰지는 않는다'는 유학적 역사관으로『삼국사기』를 편찬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김부식은 당시에 살던 사람이 직접 쓴 것과 전하는 이야기를 기록한 간접 자료 등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하였다. 금석문 자료도 활용하고, 중국측 자료도 많이 인용하였다. 이런 태도는 고고학적 증거물로 확인할 수 있다. 1971년에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었다. 여기서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기록한 지석이 발견되었다. 지석에는 백제 사마왕으로 불린 왕이 23년을 재위하다 계유년, 즉 526년에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삼국사기』의 무령왕 편에 기록된 내용과 똑같다. 즉, 『삼국사기』를 토대로 사마왕은 무령왕과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삼국사기』도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4세기 이전 초기 기록은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일부 왕은 수명이 100~130살이 되는 경우가 있다. 신라의 건국 연대도 기원전 57년 갑자년에서 시작하고 있다. 같은 사건인데 본기와 열전에서 각기 연대가 다르게 기록된 사례도 있다. 이처럼 초기 기록의 연대 부분에서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현재까지도 연대 기록이 혼란스러운 4세기 이전의 기록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주장과, 연대상의 문제는 있긴 하지만 내용은 사료 비판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또 김부식은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침략하자 당나라에서 선린 관계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신라는 이를 어겼다. 이는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망함이 마땅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중국과 대등함을 상징하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비판하고, 반대로 중국 연호를 사용한 것은 칭찬하고 있다. 또 '붕'이라 표현된 왕의 죽음을 그보다 격이 낮은 제후국 왕의 죽음을 표현하는 '훙'으로 고친 사례가 나오고 있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김부식이 사대주의적 사관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2부 동아시아 변동의 시대



무신들이 지배한 고려

고려사회에서 무신들이 실력을 기를 수 있는 학교는 없었다. 그것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국가제도도 없었다. 무신을 사회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신들은 사회적 차별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자신들의 위상을 높여갔다. 당시 북방 유목 민족들은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송이 약해진 틈을 타서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는 북진 정책을 내세우며 송과 친선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북방 민족들이 고려를 그냥 놓아두고 중국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처음 고려를 공격한 북방 민족은 거란이었다. 거란에 맞서 고려의 무신과 병사들은 열심히 싸웠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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