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다음 영웅을 기다려라
로버트 러플린 지음 | 한스미디어
양자학과 한국의 계약관행한국의 예측할 수 없는 계약 유동성은 물리학에서 소위 '양자의 비결정론'이라 불리는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한국에서 계약자는 예민한 핵심사항을 계약서에 기입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종종 정확하게 적지 않고 계약을 체결한다. 나중에 자신이 생각했던 계약사항들이 어긋난 것을 알았을 때는 처음 계약할 때보다 더 힘들게 다시 한번 협상을 해야 하는데, 그때도 계약자는 보완된 내용의 기입을 원치 않는다. 처음 이런 경우를 겪었을 때, 나는 그저 계약 내용 중 일부에 오해가 있었거니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내게 제시됐던 계약 내용들이 모두 애매했다. 그러나 계약자는 계약사항의 문제점을 미리 얘기해서 고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문제점을 언급하는 것조차 무례하게 받아들였다.
이와 비슷한 사항은 물리학에서도 일어난다. 과학자들은 원자와 같은 작은 물질들이 혼란스런 움직임을 보이면, 원자의 일부가 구조상의 장애를 일으킨 거라고 속단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원자의 움직임 자체가 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 이런 혼란의 근원은 사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다. 과학자들은 큰 물체의 움직임이 연속적으로 위치가 이동해서 이뤄지는 것처럼 작은 물체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이다. 작은 물체들은 불교의 원리와 비슷하다. 작은 물체의 상태는 한 번에 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있을 수 있는 한 묶음의 '그럴 수 있음'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적 접근방법과 일반 과학적 접근방법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계약관행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말하기 어렵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처한 환경에 달려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물리학에서 양자가 작은 물체의 운동을 관찰할 때만 쓰이듯이 한국식 계약관행 역시 규모가 작을 때만 쓰여야 하지 않을까?
가족의 가치나는 한국에서 가족의 가치라는 말을 좀처럼 듣지 못했다. 가족 간의 유대가 본래 깊어서 얘기를 꺼낼 필요조차 없어서인지, 아니면 가족 얘기가 금기항목이어서 함부로 얘기를 하지 못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한국인도 가족과 관련해 드러내놓고 말하는 게 있는데, 바로 경영자 집안의 이력이다. 자신과 연줄이 닿거나, 행여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이라도 있지 않나 살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경영자 집안은 자녀들을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보살피는 것은 물론, 가족 간의 충성심을 유발해 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약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편협성'에 있다. 혈연을 통해 경영하는 관습을 벗어 던지지 못한다면, 한국기업은 결코 진정한 다국적기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혈연이 법보다 위에 있어서, 이 양자간에 대립이 생기면 겉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법보다 혈연을 우선한다. 자녀가 경찰로 불려 가면 해당 경찰서에 연락하기 보다 아는 사람을 먼저 찾는다. 언론이 자신의 회사를 비난하면 해명보다는 기자들을 비싼 음식점이나 룸살롱에 불러서 은밀히 해결하려고 한다. 연구소가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면 융자보다는 돈 세탁을 한다. 마찰이 생기면 법정에서 해결하지 않고 정치적 힘에 기댄다. 나는 대한민국이 특별히 부당한 사회라고 여기지 않는다. 다만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가치 역시 절도 있게 쓰일 때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를 한국인들은 먼 길을 돌아가면서 힘들게 배워가고 있다고 느낄 뿐이다.
아인슈타인 티켓한국처럼 과학기술에 역점을 두는 국가에서 아인슈타인은 마치 망가져도 버릴 수 없는 동전처럼 수시로 등장한다. 최근 어느 대규모 전시회에서 과도하게 포장된 아인슈타인을 접했다. 그 전시회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불행히도 물리학의 해였던 터라 누군가가 나를 공식 참석자 명단에 넣은 다음 공짜 초청권을 보내주었다. 나는 본분을 지키고자 정해진 날에 행사장에 갔다. 예상대로 상대성 이론에 대한 수많은 포스터들과 중력 이론 지지자들을 찍은 사진 등이 있었고 전시회장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어린 학생들의 기나긴 줄을 보았다. 그 순간 20년 전 모스크바의 레닌 묘 입구에서 목격했던 구 소련 학생들이 떠올랐다. 다른 점이라곤 학생들이 보고자 했던 대상이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레닌이라는 것뿐이었다.
학자인 아인슈타인과 공포스런 통치자 레닌의 비교는 어불성설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두 전시회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놀라우리만큼 유사했다. 전시회장을 나올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소풍을 다녀왔다는 기분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확대된 이미지는 자연스럽기보다는 일종의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해 조작된 의도적 선전일 뿐이다. 그 목적은 어린이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신념을 심어주려는 것이지만, 이는 조작된 것이기에 아인슈타인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다분히 다르다. 현대 사회는 아인슈타인 너머에 있는 진정한 가치들, 즉 자연에 대한 존경, 논리에 대한 사랑, 투명성에 대한 책임, 상호간의 신뢰 그리고 권위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진정한 가치는 과학과 기술 너머에 존재하며 이는 세상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챔피언들의 아침식사한국사회를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 과학기술계 침체에 대한 공공연한 개탄이다. 그리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과학기술계를 도외시하는 풍토에서도 정책 입안자들은 과학기술계를 맹목적으로 칭송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반도체를 비롯한 한국과학기술의 성공을 문화적 우월성이나 교육제도의 소산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양질의 노동력을 저렴하게 사용했던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렴한 노동력에 기반한 기술의 발전은 이제 중국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다. 선진국의 선례를 보면 종래의 방식에 따른 과학기술계의 위기를 시장변화(market shift)라는 경제적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선진국은 이미 과학기술을 시장가치로 파악, 과학기술 역시 경제적 수요에 맞추어 변화하고 있다. 한국도 이미 지식사회, 기술집약 사회로 대변되는 탈산업 경제로 옮겨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 전환은 교육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급변하는 글로벌 시대에 직업의 안정성에 중점을 둔 종래의 교육패턴은 현재 및 미래의 과학기술인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제자들이 전공을 박차고 금융이나 사업 쪽으로 투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안전하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과학기술 관련 직업은 빛이 바랠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흐름에 발맞추어 가야 한다. 이에 교육행정에 몸담은 과학자로서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학부교육의 초점을 '능력있는 국제인' 양성에 두어야 한다. 이공계 전공과목 이외에 독립성, 도전정신, 외국어, 인간관계에 대한 과목을 보강해 단순한 기술전문직 양성의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둘째, 이공계 대학원 교육의 초점을 '첨단의 창조성'에 두는 것이다. 탈산업 시대의 진정한 동력은 창조성이 될 것이고, 이를 첨단에 연결할 때 비로소 대학원은 학부와 차별화 돼 한 차원 더 상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에서 챔피언이 되고 싶어하고, 경쟁에서 승리하고 싶어한다. 과학기술계 또한 예외가 아니다. 미국인의 아침식사를 고기와 감자가 차지하고 있을 때 콘플레이크 제조사들은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라는 광고 문구로 기존 식사를 밀어내고 시장을 선도했다. 이러한 창조성 위주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유효하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이공계 구하기에 초점을 두기보다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발전시켜 선진국 대열에 참여할 수 있는 시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제 2의 기회이따금씩 실패하는 것은 자신의 현재 능력을 넘어서려는 데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리고 그런 실패는 창조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예술적인 사람들 중에는 종종 학업성적이 낮은 사람들이 있다. 갈릴레이에서 빌게이츠에 이르기까지 많은 위인들이 대학에서는 낙제해 중퇴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제 2의 기회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튼튼한 사회가 되려면 제 2의 기회가 필요하다.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유와 규율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없다. 다만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는 시험성적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미국에서는 독립심과 자기실현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한다. 내가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해 조언을 할 자격은 없다. 다만 한국사회가 좌절한 학생들을 위한 제 2의 기회를 좀 더 다양하게 제도적으로 뒷받침을 한다면 많은 이로움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수년 전 베이징에서 중국 교육부 장관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엘리트 위주 정책이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기대에 못 미쳤다."면서, "이제는 전체 인구의 상위 20%를 제대로 교육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공산주의 국가들도 사상적 이유가 아니라 경제적 이유로 제 2의 기회에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시험성적에 좌절하여 어둡게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에게 나는 "어서 집에 돌아가서 푹 자고 일어나 다시 한번 도전해 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왜냐하면 누구나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니까.
새로운 결의 과학기술 교육의 개혁 필요성은 한국에서만 각별한 것은 아니다. 모든 선진국에서도 이 딜레마는 본질적으로 같다. 경제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는데, 과학기술 교육 종사자인 엔지니어와 교수들은 과거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그러다 보니 기술적 소양을 가지면서도 폭넓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더 필요해지고 있다. 따라서 연구대학의 개혁은 곧 대학을 시장에 반응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
이 문제는 학부차원에서 풀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누구보다 시장 수요의 변화를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공립대학들은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학생들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본연의 사명을 유지하면서, 사립대학처럼 학부모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대학원의 개혁은 더 어렵다. 연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시장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학원의 정확한 시장가치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대학원에서 행해지는 연구에 학부생들의 관심도와 진학 의사를 반영하는 안이 거론되고 있다. 만일 연구대학들이 시장을 제대로 발견해나가면 미래의 학생들은 유연하고 대담하게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안정적이었던 여태까지의 기술직의 삶과는 정반대이며, 이런 태도의 변화야말로 과학기술을 살려내는 열쇠다.
우리는 매우 자랑스러웠다나는 연구생활을 하면서 소련의 이론물리학자들을 여럿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모스크바, 파리, 뉴욕, 서울 등지에서 이들을 자주 만난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고 일상사를 화제로 삼아서 웃고 떠든다. 이들 중 한 명은 지금 시카고 대학의 저명한 수학교수다. 한번은 어려운 물리 문제를 오랫동안 토론하다 지쳤는데 화제가 이론물리학이 봉착한 난관 쪽으로 옮겨갔다. 냉전이 끝나자 어느 나라에서든 물리학자들은 연구예산의 삭감에 직면했고 정부가 기초과학에 무관심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갑자기 마음의 빗장을 여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가 체면을 벗어 던지고 자신들이 경제적 난민으로 조국을 떠나게 됐음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젊고 재능이 넘쳤다. 스탈린은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우리가 세계 최고가 될 거라고 선언했다. 우리들 중 국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에게는 높은 지위와 월급, 여행의 자유, 생각할 여가 등의 혜택이 주어졌다. 우리는 모스크바에 살면서 특권층만 이용하는 상점과 아파트에 드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빈곤으로 내몰렸다. 월 100달러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어서 이민을 가야 했다. 나는 이따금씩 고국에 돌아가지만 자주 가지는 않는다. 내가 사랑했던 나라가 나를 멀리 던져버렸다." 때때로 그가 한 말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그 교훈은 중요하면서도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경제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한다. 스탈린조차도.
국립대 법인화라는 폭풍우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샌프란시스코는 겨울이 되면 태평양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비가 내린다. 이것은 한국보다 더 추운 것만 빼고는 태풍과 비슷하다. 나는 이 폭풍우가 가져다주는 혼돈과 맹렬함을 즐기며, 한국에 있으면서도 이를 그리워한다. 대학법인화를 둘러싼 논쟁이라는 거대한 폭풍우가 일본, 미국, 한국을 엄습하고 있다. 한국에서 그것은 현재 폭풍우 직전처럼 거대한 타격과 경고의 순간에 직면해 있다. 교육부총리가 "경쟁력 있는 대학부터 법인화를 실시하겠으며, 서울대의 경우 법인화 후 등록금을 사립대 수준으로 높이면 재정상태가 좋아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커다란 사회적 반발이 있었다.
우리가 현행 국공립 대학 체제를 그대로 지속해 가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간단하게 말해서 지식경제라는 새로운 환경에서는, 수요자와 공급자간 관계의 취약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교육적 생산물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힘들기 때문에 교육기관들은 수강목록에 별 볼일 없는 과목의 비율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 현 시점에서 어떤 한국인들은 우수한 국공립 대학은 그대로 유지하고 수준미달의 국공립 대학만 법인화 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는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수한 대학이란 엘리트로 구성된 대학이며 이는 곧 대다수 국민의 자녀는 이런 대학에 다닐 수 없음을 뜻한다. 교육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국민들은 자신의 세금을 다른 사람의 자녀를 교육하는데 쓰도록 하자는 사람은 투표로 자리에서 쫓아내야만 한다. 바다 건너편의 건조한 나라에서는 이런 종류의 폭풍우를 가치 있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일출 너머에 이르려면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와 비슷하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들을 증오하며 영국이란 말만 들어도 흥분한다. 그러나 그들은 안정되면 냉정을 되찾고 영국이 하는 모든 것을 조용히 계속 모방한다. 한국인들은 동쪽 이웃나라가 별반 중요하지 않은 듯 말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한국이 벤치마킹하면서 경제적 모델로 삼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나는 지금 하와이에서 열리고 있는 재료물리학 관련 소규모 학술회의에 일본인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참석하고 있는 중이기에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 이 학술회의의 마지막 날 분위기는 겉으로는 매우 유쾌해 보였지만 실상은 매우 침울했다. 우리는 이번 연구가 위대한 발견을 찾아낼 거라고 장담했지만 각각의 정부들은 성과를 기다리는데 지쳐서 연구비를 다른 분야로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안전하고 확고한 직업 찾기에 열중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있다. 이 모임에 참가한 개개인들은 세계최고의 과학자들이고 과거에 모두 괄목할 만한 발견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연구물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는 불확실성에 맞서고 있다. 이런 사실이 우리를 동요시키지만 수치스럽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과학적 진보란 위험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일궈낼